호조 히데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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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히데토키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되어 규슈 지역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결한 인물이다. 1321년 진제이 단다이에 부임하여 규슈 지역의 반(反)막부 세력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교토에서 로쿠하라 단다이가 함락되자 세력이 약화되어, 1333년 하카타에서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그는 와카에 능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역사적 자료로 가치가 있는 서장(書状)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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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3년 사망 - 호조 다카토키
호조 다카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제14대 싯켄으로,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난과 막부 전복 시도를 겪었으며, 정치적 무능과 미흡한 대처로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 영향을 주었고 가마쿠라 공방전에서 자결하였다. - 1333년 사망 - 브와디스와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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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다카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제14대 싯켄으로,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난과 막부 전복 시도를 겪었으며, 정치적 무능과 미흡한 대처로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 영향을 주었고 가마쿠라 공방전에서 자결하였다. - 호조씨 -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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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야마 천황은 13세기 후반 재위한 일본의 제88대 천황으로,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국방에 힘쓰고 젠 불교 전파에 기여했으며, 원평제도 개혁을 시도하고 다이카쿠지 황통의 번영을 추구한 인물이다.
호조 히데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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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호조 씨(아카하시류) |
이름 | 호조 히데토키 / 아카하시 히데토키 |
이명 | 아카하시 히데토키, 무사시노슈리노죠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출생 | 미상 |
사망 | 쇼쿄 2년/겐코 3년 5월 25일 (1333년 7월 7일) |
관위 | 종5위하 슈리노죠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진제이 탐제이 |
주군 | 모리쿠니 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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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 |
아버지 | 호조 히사토키 |
형제자매 | 모리토키 무네토키 다네토키 히데토키 도키호 도코 (아시카가 다카우지 정실) 도인 기미모리 실 다네코 (오기마치 기미카게 실) 호조 사다노리 (모로토키의 자) 실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양자: 기쿠 다카마사 |
2. 생애
호조 히데토키는 와카(和歌)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쇼카와카슈』(松花和歌集), 『쇼쿠게겐바와카슈』(続現葉和歌集), 『린에이와카슈』(臨永和歌集) 등에 그의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3] 그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규슈 니조파(九州二条派) 와카계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3] 히데토키가 진제이 단다이 재임 중에 발급한 약 100여 통의 서장(書状) 등은 오늘날까지 남아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3]
요시카와 에이지는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규슈에서 10년 넘게 단다이 직을 맡았던 히데토키의 능력과 인망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훗날 (조정의 적으로 몰려 쫓기게 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세력을 회복할 때 (히데토키의 여동생인 아카하시 도코를 정실로 맞이했던) 다카우지가 히데토키의 의제(義弟)였다는 점이 규슈 지역 호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2. 1. 진제이 단다이 부임
겐코(元亨) 원년(1321년) 12월 25일, 아소 유키토키의 뒤를 이어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로 임명되어 하카타로 부임하였다.[3]동쪽에서부터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이 규슈까지 번지자, 히데토키는 이 움직임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쇼쿄 2년/겐코(元弘) 3년(1333년) 3월 13일, 고다이고 천황의 윤지(綸旨)를 받들고 공격해 온 기쿠치 다케토키를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등과 함께 반격해 다케토키를 패사시켰다. 나아가 히데토키의 양자이자 히젠 슈고(守護)였던 기쿠 다카마사[4]에게 기쿠치 씨, 아소 씨를 비롯한 반(反)막부 잔당 세력 추토를, 3월 26일에는 마쓰우라 씨에게 오스미 ・ 노베(野辺) ・ 시부야(渋谷) 등의 반막부 세력 공격을 맡게 하였다.[3] 그러나 이 때문에 하카타의 방비는 허술해졌고, 4월 7일에 아키의 미이케 씨 등을 소집하여 하카타 방어를 맡겼다.[3]
5월 7일, 교토에서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규슈에 전해졌다. 그때까지 호조 씨를 따르던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나아가 사쓰마의 시마즈 사다히사 등도 배반하여 공격해 왔다.[3] 히데토키는 목숨을 걸고 막아 싸웠으나, 5월 25일에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를 비롯한 일족 240명(340명이라고도 함)과 함께 자결하였다.[3]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 일문이 가마쿠라 도쇼지(東勝寺)에서 자결한[5] 사흘 뒤의 일이었다.
2. 2.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 진압
겐코(元亨) 원년(1321년) 12월 25일, 아소 스이시의 뒤를 이어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되어 하카타로 부임하였다.[3]동쪽에서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이 규슈까지 번지자, 히데토키는 이러한 움직임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쇼쿄 2년/겐코(元弘) 3년(1333년) 3월 13일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윤지를 받들고 공격해 오는 기쿠치 다케토키를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등과 함께 반격해 다케토키를 패사시켰다. 나아가 히데토키의 양자로 히젠 슈고를 맡고 있던 기쿠 다카마사[4]에게 기쿠치 씨, 아소 씨를 비롯한 반(反)막부 잔당 세력 추토를, 3월 26일에는 마쓰라 씨에게 오스미, 노베, 시부야 등의 반막부 세력 공격을 맡게 하였다.[3] 그러나 이로 인해 하카타의 방비는 허술해졌고, 4월 7일에 아키의 미이케 씨 등을 소집하여 하카타 방어를 맡기게 되었다.[3]
5월 7일에 교토에서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규슈에까지 전해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호조 씨를 따르던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나아가 사쓰마의 시마즈 사다히사 등도 이반하여 공격해 왔다.[3] 히데토키는 목숨을 걸고 막아 싸웠으나, 5월 25일에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를 비롯한 일족 240명(340명이라고도)과 함께 자결하였다.[3]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 등을 비롯한 호조 일문이 가마쿠라 도쇼지(東勝寺)에서 자결한[5] 사흘 뒤의 일이었다.
2. 3. 최후
겐코(元亨) 원년(1321년)에 히데토키는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되어 규슈 지역의 가마쿠라 막부 타도 움직임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1333년 3월, 고다이고 천황의 명을 받은 기쿠치 다케토키를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등과 함께 격퇴하고, 양자인 기쿠 다카마사에게 반막부 세력을 추토하게 했다.[3] 그러나 이로 인해 하카타의 방비가 허술해졌다.1333년 5월 7일,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시마즈 사다히사 등이 막부에 등을 돌리고 공격해왔다.[3] 히데토키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1333년 5월 25일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를 비롯한 일족 240명(혹은 340명)과 함께 자결했다.[3] 이는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 일문이 가마쿠라 도쇼지(東勝寺)에서 자결한[5] 사흘 뒤였다.
3. 인물상
호조 히데토키는 와카(和歌)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쇼카와카슈(松花和歌集), 쇼쿠게겐바와카슈(続現葉和歌集), 린에이와카슈(臨永和歌集) 등에 그의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 규슈 니조파(二条派) 와카계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3] 히데토키가 단다이(探題) 재임 시절 발급한 100여 통의 서장(書状)은 오늘날 중요한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3]
요시카와 에이지는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규슈에서 10년 넘게 단다이직을 맡았던 히데토키의 능력과 인망은 뛰어났다. 훗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세력을 회복할 때, 히데토키의 의제(義弟)였다는 점이 규슈 호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三省堂
[2]
서적
鎌倉・室町人名事典
新人物往来社
[3]
서적
鎌倉・室町人名事典
新人物往来社
[4]
문서
[5]
서적
金沢貞顕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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