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이 단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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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제이 단다이는 1293년 가마쿠라 막부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고 규슈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다. 호조 사다토키가 호조 가네토키와 나고에 도키이에를 파견하여 설치했으며, 이후 가나자와 사네마사가 단독으로 진제이 단다이를 맡았다. 규슈 지역의 소송 재판 및 대외 교섭 권한을 가졌으며, 고려 및 원나라와의 외교에도 관여했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겐코의 난으로 인해 호조 히데토키가 자결하면서 멸망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는 각각 규슈 단다이와 사이고쿠스지분다이를 설치하여 규슈 지역을 통치했다. 진제이 단다이의 위치는 후쿠오카시 니시구 아타고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하카타 시내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역대 진제이 단다이로는 호조 가네토키, 호조 사네마사, 호조 마사아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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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이 단다이 | |
---|---|
진제이 단다이 | |
존속 기간 | 가마쿠라 시대 후기 ~ 무로마치 시대 전기 |
설치 연도 | 1274년 (분에이의 역) |
폐지 연도 | 1333년 (겐코의 난) |
주요 역할 | 규슈의 통치 서국 무사의 통제 조정과의 교섭 몽골 제국의 재침략에 대한 방비 |
위치 | 하카타 (현재의 후쿠오카시) |
역대 진제이 단다이 | |
초대 | 호조 히로토키 |
마지막 | 호조 히데토키 |
관련 인물 | |
호조 씨 | 진제이 단다이를 독점 |
2. 진제이 단다이의 역사
1293년 호조 사다토키가 호조 가네토키와 나고에 도키이에를 파견하면서 진제이 단다이가 설치되었다. 1296년 호조 사네마사가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된 이후 1인 체제로 바뀌었고, 1299년에는 효조슈와 히키쓰케슈가 설치되어 민사 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갖게 되었다. 진제이 단다이가 고케닌에게 발급한 문서는 진제이 어교서, 진제이 하지장 등으로 불렸다.[5]
진제이 단다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규슈 지배를 위한 관부였으며, 고려나 원 등 외국과의 교섭에 관한 권한도 위임받았다. 1300년 가마쿠라 막부는 진제이 단다이 가나자와 사네마사에게 고려 및 원나라 사신단의 접대 장소 및 문답 방법을 지시하기도 했다.[6]
1333년 겐코의 난이 일어나면서 규슈 지역 무사단에게도 막부 타도 요청이 전해졌다.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시마즈 사다히사 등이 진제이 단다이를 공격했고, 1333년 5월 25일 진제이 단다이 호조 히데토키가 자결하면서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는 규슈 통치를 위해 진제이 단다이를 본떠 규슈 단다이를 설치했다. 에도 막부도 규슈 지역의 번(藩)들을 감시하고 현지의 천령(쇼군 직할령) 통치를 위해 사이고쿠스지분다이(西国筋郡代)를 설치하였다. 대관소(代官所)는 분고국 히타에 있었으며, 그 분다이(郡代)를 「규슈 단다이」라고도 불렀다.
2. 1. 설치 배경
13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일본을 지배하던 당시, 일본은 분에이(文永) 8년(1271년)과 고안(弘安) 4년(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공을 겪었다.[2] 에이닌(永仁) 원년(1293년), 가마쿠라 막부 9대 싯켄(執権)인 호조 사다토키(北条貞時)는 호조 가네토키(北条兼時) ・ 나고에 도키이에(名越時家)를 파견하여 진제이 단다이를 설치하였고, 기존의 진제이 부교(鎮西奉行)나 진제이 단기죠(鎮西談議所)는 폐지되었다.[3]쇼오 4년(1291년)에는 네 명의 봉행인 재판에 편파적인 점이 있다는 소송이 제기되었고, 막부는 조사를 실시하여 2년 후인 에이닌 원년(1293년)에 로쿠하라 단다이에서 호조 가네토키와 묘고에 토키이에를 파견하여 그 재판권을 분양했다.[3] 이렇게 설치된 진제이 단다이는 규슈의 소송 처리와 이국 방어를 담당했다.[3]
《사가시사》에 따르면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아마노 토카게가 진제이 봉행이 된 후, 나카하라 치카요시나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했으며, 이 중 다자이노 쇼니가 된 무토 스케요리는 아들 (쇼니) 스케노에게 다자이노 쇼니와 진제이 봉행을 계승시켜 이후 이러한 직을 세습했다.[4] 그러나 진제이 단다이가 설치되어 히젠 국 수호와 함께 호조 씨가 계승하게 되었고, 진제이 단다이와 쇼니 씨의 대립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 이어졌다고 한다.[4]
에이닌 4년(1296년), 가나자와 사네마사(金澤実政, 호조 사네마사)가 새로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된 이래로 진제이 단다이는 1인 체제로 바뀌었고, 쇼안(正安) 원년(1299년) 효조슈(評定衆) ・ 히키쓰케슈(引付衆)가 설치되어 민사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갖게 된다.[3] 진제이 단다이가 고케닌(御家人)에게 발급한 문서는 그 형식에서 진제이 어교서(鎮西御教書) ・ 진제이 하지장(鎮西下知状) 등으로 불렸다.[5]
진제이 단다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규슈 지배를 위한 관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며 또한 고려나 원(元) 등 외국과의 교섭에 관한 권한까지 위임받기도 하였는데, 《속군서유종》에 수록된 《신편추가》 및 《신어식목》에는 쇼안 2년(1300년) 가마쿠라 막부가 진제이 단다이 가나자와 사네마사에게 국서를 지참한 고려 및 원의 사신단이 일본에 왔을 때의 접대 장소 및 문답 방법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6]
2. 2. 운영 및 권한
진제이 단다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규슈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 1293년 호조 사다토키가 호조 가네토키와 나고에 도키이에를 파견하면서 설치되었으며, 이전까지 있었던 진제이 부교와 진제이 단기죠는 폐지되었다.[5]1296년 호조 사네마사가 진제이 단다이로 임명된 이후 1인 체제로 바뀌었고, 1299년에는 효조슈와 히키쓰케슈가 설치되어 민사 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갖게 되었다. 진제이 단다이가 고케닌에게 발급한 문서는 진제이 어교서, 진제이 하지장 등으로 불렸다.[5]
진제이 단다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규슈 지배를 위한 관부 역할을 수행했으며, 고려나 원 등 외국과의 교섭에 관한 권한도 위임받았다. 1300년 가마쿠라 막부는 진제이 단다이 가나자와 사네마사에게 고려 및 원나라 사신단의 접대 장소 및 문답 방법을 지시하기도 했다.[6]
1333년 겐코의 난이 일어나면서 규슈 지역 무사단에게도 막부 타도 요청이 전해졌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시마즈 사다히사 등이 진제이 단다이를 공격했고, 1333년 5월 25일 진제이 단다이 호조 히데토키가 자결하면서 멸망했다.
2. 3. 쇼니 씨와의 관계
쇼니씨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아마노 도카게가 진제이 봉행이 된 후, 나카하라 지카요시, 무토 스케요리가 취임했으며, 이 중 다자이노쇼니가 된 무토 스케요리는 아들 쇼니 스케노에게 다자이노쇼니와 진제이 봉행을 계승시켜 이후 이러한 직을 세습했다.[4] 그러나 진제이 단다이가 설치되어 히젠 국 수호와 함께 호조 씨가 계승하게 되었고, 진제이 단다이와 쇼니 씨의 대립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 이어졌다.[4]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겐코의 난이 일어나자 규슈의 여러 무사단에도 막부 타도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는 윤지(綸旨)가 전달되었다. 3월에 기쿠치 다케토키가 논쟁 끝에 단독으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쇼니씨나 오토모 씨 등 다른 무사단의 동조를 얻지 못해 기쿠치 부자 등 200기는 괴멸되었다. 그러나 유형(流刑)되어 있던 도사국을 탈출한 다카요시 친왕이 지쿠젠국으로 넘어오면서 막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동조하는 무장들의 기수가 되었고, 5월 7일에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규슈에까지 전해졌다. 그때까지도 막부를 따르고 있던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남규슈의 시마즈 사다히사가 진제이 단다이를 공격했고, 5월 25일에 진제이 단다이인 호조 히데토키가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 등 그 일족 240명(340명이라고도)과 함께 자결함에 따라 진제이 단다이도 멸망하였다.
2. 4. 멸망
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겐코의 난(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이 일어났다. 규슈 지역 무사들에게도 막부 타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윤지(綸旨)가 전달되었다. 3월에 기쿠치 다케토키가 단독으로 거병했으나, 쇼니씨나 오토모 씨 등의 동조를 얻지 못하고 기쿠치 부자 등 200기(騎)는 괴멸되었다.도사국으로 유형되었던 다카요시 친왕(고다이고 천황의 제1황자)가 지쿠젠국으로 탈출하여 막부에 반대하는 무장들의 기수가 되었고, 5월 7일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규슈에 전해졌다. 그때까지 막부를 따르던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남규슈의 시마즈 사다히사가 진제이 단다이를 공격했고, 5월 25일에 진제이 단다이인 호조 히데토키가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 등 일족 240명(340명이라고도 함)과 함께 자결함에 따라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하였다.[5] 이미 사흘 전인 22일에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인 가마쿠라는 닛타 요시사다 등의 공격으로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를 위시한 호조 씨 일문이 자결하여 막부가 무너진 뒤였다.
2. 5. 이후
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일으킨 겐코의 난(가마쿠라 막부 타도 운동)이 발생했다. 규슈 지역 무사들에게도 막부 타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는 윤지(綸旨)가 전달되었다. 그 해 3월, 기쿠치 다케토키가 단독으로 거병했으나, 쇼니씨나 오토모 씨 등 다른 무사단의 동조를 얻지 못하고 200여 기(騎)와 함께 괴멸되었다.도사국으로 유형되었던 다카요시 친왕(고다이고 천황의 제1황자)이 지쿠젠국으로 탈출하여 막부에 반대하는 무장들의 기수가 되었고, 5월 7일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규슈에 전해졌다. 이에 쇼니 사다쓰네, 오토모 사다무네, 남규슈의 시마즈 사다히사 등이 진제이 단다이를 공격했고, 5월 25일 진제이 단다이 호조 히데토키는 하카타에서 가나자와 다네토키 등 일족 240명(340명이라고도 함)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진제이 단다이는 멸망했다. 이보다 사흘 전인 5월 22일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본거지인 가마쿠라가 닛타 요시사다 등의 공격을 받아 도쿠소 호조 다카토키를 비롯한 호조 씨 일문이 자결하여 막부가 이미 멸망한 뒤였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는 규슈 통치를 위해 진제이 단다이를 본떠 규슈 단다이를 설치했다. 훗날 에도 막부도 규슈 지역의 번(藩)들을 감시하고 현지의 천령(쇼군 직할령)을 통치하기 위해 사이고쿠스지분다이(西国筋郡代)를 설치하였다. 다만 대관소(代官所)는 분고국 히타에 있었으며, 그 분다이(郡代)를 「규슈 단다이」라고도 불렀다.
3. 진제이 단다이의 위치
진제이 단다이의 중심 관사였던 단다이칸(探題館)은 단다이 성(探題城), 메이노하마 성(姪浜城) 또는 와시오 성(鷲尾城)이라고도 불렸다. 그 위치는 지쿠젠 국 사와라 군(早良郡)의 아타고 산(愛宕山)으로 오늘날의 일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니시구 아타고(愛宕)에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중세 도시의 유적인 하카타 유적군(博多遺跡群)에서 후쿠오카 시 하카타구 기온 정(祇園町)을 중심으로 호조 집안의 문장이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었다. 또한 14세기 전반에 매몰된 도랑 위에서 110구 정도의 화장된 인골이 발굴되고, 일부는 칼에 맞은 상처도 보이고 있는 것에서 실제로는 하카타 정 안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7]
4. 역대 진제이 단다이
취임 기간 | 이름 |
---|---|
1293년 ~ 1295년 | 호조 가네토키 · 나고에 도키이에 |
1296년 ~ 1301년 | 호조 사네마사 |
1301년 ~ 1315년 | 호조 마사아키 |
1315년 ~ 1316년 | 호조 다네토키 (대리) |
1317년 ~ 1321년 | 호조 유키토키 |
1321년 ~ 1333년 | 호조 히데토키 |
지쿠젠국 속풍토기에서는 호조 가네토키를 초대 단다이로 하고 있지만, 1인 체제가 시작된 호조 사네마사를 초대 단다이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참조
[1]
서적
博多郷土史事典
葦書房
1987-11-05
[2]
웹사이트
第五節 鎮西談議所と宇都宮通房の活動
http://miyako-museum[...]
2024-09-22
[3]
웹사이트
第六節 鎮西探題と北条一門の進出
http://miyako-museum[...]
2024-09-22
[4]
웹사이트
一 鎌倉時代
https://www.city.sag[...]
2024-09-22
[5]
문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진제이 단다이가 발급했던 하지장(『歴史民俗用語辞典』).
[6]
서적
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7]
논문
考古学から見た博多の展開
海鳥社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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