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번 (히타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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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번(히타치국)은 일본 에도 시대에 히타치국에 존재했던 번이다. 사쿠마 가쓰유키가 초대 번주로 1610년에 1만 석 규모로 시작되었으나, 오사카 전투 이후 나가누마 번으로 이봉되어 폐지되었다. 이후 홋타 마사히데가 1682년에 1만 3천 석으로 재설립하였으나, 1688년 마사히데의 사망 후 홋타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며 다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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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번 (히타치국) | |
---|---|
개요 | |
전신 | 호조 가문 영지 |
존속 기간 | 1615년 ~ 1871년 |
등급 | 후다이 다이묘 |
번주 가문 | 미즈노 가문 |
석고 | 1만 석 |
거성 | 기타조 성 |
현재 위치 | 이바라키현 쓰쿠바미라이시 기타조 |
역사 | |
폐번치현 | 1871년 |
역대 번주 | |
미즈노 가문 | 초대: 미즈노 시게모토 2대: 미즈노 모토치카 3대: 미즈노 시게타카 4대: 미즈노 가쓰타카 5대: 미즈노 가쓰요시 6대: 미즈노 모토노부 7대: 미즈노 모토토모 8대: 미즈노 모토히로 9대: 미즈노 모토나리 10대: 미즈노 모토요시 11대: 미즈노 모토타다 |
지리 | |
위치 | 히타치국 쓰쿠바군 (현재의 이바라키현 쓰쿠바미라이시 일부) |
2. 번의 역사
히타치 호조 번은 에도 시대 동안 두 차례 세워졌다 폐지된 번이다.
첫 번째는 사쿠마 가쓰유키에 의해 세워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가모 우지사토의 요리키(寄騎|요리키일본어)였던 가쓰유키는 게이초 12년(1607년)까지 여러 차례 영지를 추가로 받아 총 1만 석의 다이묘가 되면서 히타치 호조 번을 창설했다. 그러나 그는 영지에 거주하지 않고 에도 성에 상주하는 정부定府|죠후일본어 다이묘였다.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8천 석을 더 받아 시나노국 나가누마 번으로 옮겨가면서 히타치 호조 번은 일단 폐지되었다.
두 번째는 홋타 마사히데에 의해 재건되었다. 시모우사 국 사쿠라번주 홋타 마사모리의 넷째 아들인 마사히데는 아버지 사후 유령 5천 석을 분할받고, 이후 관직을 거치며 영지를 추가 받아 덴나 2년(1682년) 총 1만 3천 석의 다이묘가 되어 히타치 호조 번을 다시 세웠다. 마사히데는 소자반 등 막부의 요직을 역임했으나, 겐로쿠 원년(1688년) 사망 후 가독 상속 문제로 인해 번은 다시 개역되어 폐지되었다. 마사히데의 영지 1만 3천 석 중 8천 석은 막부에 몰수되었고, 차남 堀田正矩|홋타 마사노리일본어와 삼남 堀田正章|홋타 마사아키일본어에게 각각 3천 석과 2천 석이 분할 상속되어 하타모토로서 가문을 이었다. 몰수된 영지는 겐로쿠 11년(1698년) 쓰치우라번의 영지가 되었다.
2. 1. 사쿠마 가문 통치 시기 (1610년 ~ 161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가모 우지사토의 요리키(寄騎|요리키일본어)가 되었던 사쿠마 가쓰유키는 우지사토가 사망한 후 시나노국 나가누마 성(長沼城|나가누마조일본어) 주변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오미국 야마지(山路|야마지일본어) 주변의 3천 석 영지를 추가로 받았고, 게이초 12년(1607년) 에도 성 안으로 이전할 때 히타치국 호조 주변 영지 3천 석을 더 받았다. 이로써 영지 규모가 총 1만 석이 되어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고, 히타치 호조 번을 세워 초대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사쿠마 가쓰유키는 자신의 영지에 거주하지 않고 에도 성에 상주하는 정부(定府, 定府|죠후일본어) 다이묘였다.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가쓰유키는 8천 석을 추가로 받아 시나노국 나가누마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히타치 호조 번은 폐지되었다.2. 2. 홋타 가문 통치 시기 (1682년 ~ 1688년)
시모우사 국 사쿠라번주였던 홋타 마사모리의 넷째 아들 홋타 마사히데는 아버지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따라 순사한 뒤, 아버지의 유령(遺領) 중 5천 석을 나누어 받았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섬기며 御小姓組番頭|오코쇼구미 반토일본어, 쇼인반토書院番頭|쇼인 반토일본어, 오반토大番頭|오반토일본어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3천 석을 추가로 받았다. 덴나 원년(1681년)에는 와카도시요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덴나 2년(1682년)에 다시 5천 석을 추가 받아 총 1만 3천 석의 다이묘가 되면서, 이전에 폐지되었던 히타치 호조번을 다시 일으켰다.마사히데는 이후 소자반 등 막부의 중요 직책을 역임했으나, 겐로쿠 원년(1688년)에 사망했다. 마사히데에게는 장남 마사치카, 차남 堀田正矩|홋타 마사노리일본어, 삼남 堀田正章|홋타 마사아키일본어가 있었다. 그러나 마사히데가 생전에 막부에 제출한 가독 상속 계획에는 마사노리와 마사아키에 대한 언급만 있었고, 정작 장남이자 적자인 마사치카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마사치카는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상속 신고 미비를 이유로 개역(改易) 처분을 받아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로써 히타치 호조번은 다시 폐지되었다.
옛 영지 1만 3천 석 중 8천 석은 막부의 직접 통치령인 공의 어령(公儀御料|고료일본어)으로 흡수되었다. 다만 차남 마사노리는 3천 석, 삼남 마사아키는 2천 석의 유령(遺領) 상속을 인정받아 각각 하타모토로서 가문의 명맥을 잇는 것이 허락되었다. 한편,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 마사치카는 일족인 무쓰국 후쿠시마번주 홋타 마사나카에게 맡겨졌다. 막부에 몰수되었던 옛 호조번 영지는 겐로쿠 11년(1698년) 쓰치우라번의 영지가 되었다.
2. 3. 폐번 이후
홋타 마사히데는 소자반 등 막부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나, 겐로쿠 원년(1688년)에 사망하였다.마사히데에게는 적자 마사치카, 차남 堀田正矩|홋타 마사노리일본어, 삼남 堀田正章|홋타 마사아키일본어가 있었다. 그러나 마사히데가 생전에 막부에 제출한 가독 상속원에 차남 마사노리와 삼남 마사아키에 대해서는 기록하였지만, 적자인 마사치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사치카는 세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신고 서류 미비를 이유로 개역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히타치 호조 번은 다시 폐지되었다.
구 호조 번의 영지 1만 3천 석 중 8천 석은 막부에 몰수되어 공의 어령이 되었다. 차남 마사노리는 3천 석, 삼남 마사아키는 2천 석의 유령 상속을 인정받아 각각 하타모토로서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한편, 상속에서 배제된 마사치카는 일족인 무쓰국 후쿠시마번주 홋타 마사나카에게 맡겨지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공의 어령이 된 구 호조 번의 영지는 겐로쿠 11년(1698년) 쓰치우라번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3. 역대 번주
'''사쿠마 가문'''
# 사쿠마 가쓰유키(佐久間勝之|사쿠마 가쓰유키일본어) 재위 1610년 ~ 1615년
'''폐번''' 1615년 ~ 1682년
'''홋타 가문'''
# 홋타 마사히데(堀田正英|홋타 마사히데일본어) 재위 1682년 ~1688년
3. 1. 사쿠마 가문
사쿠마 가쓰유키( 佐久間勝之|사쿠마 가쓰유키일본어 )는 게이초 15년(1610년) 영지가 추가되어 호조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의 관위는 종5위하 다이젠노스케였으며, 재위 기간은 1610년부터 1615년까지였다. 겐나 원년(1615년) 다른 영지로 전봉(轉封)되면서 호조번은 폐번되었다.3. 2. 홋타 가문
홋타 마사히데(堀田正英|홋타 마사히데일본어) : 재위 1682년 ~ 1688년. 1만 3천 석의 세습 다이묘였다. 관위는 종5위하(従五位下), 관직은 쓰시마노카미(対馬守)였으며, 덴나 2년(1682년) 2월 29일에 번주로 취임하여 겐로쿠 원년(1688년) 7월 3일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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