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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마사시게 (1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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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마사시게는 1545년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 무장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활동했으나, 미카와 잇코잇키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와 적대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가문을 섬기며 무명을 떨쳤으며, 도쿠가와 가문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1616년에 후나토 번의 번주가 되었다. 161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후손은 다나카 번의 번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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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마사시게 (1545년)
기본 정보
혼다 마사시게의 초상
혼다 마사시게의 초상
씨족본다 씨
이름혼다 마사시게
이명쓰쇼: 삼야, 삼야자에몬, 야마타니자에몬
계명쇼주인 도키
묘소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 센뉴지 산내의 센뉴지 내 호온인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분 14년 (1545년)
사망겐나 3년 7월 3일 (1617년8월 4일)
관직
막부에도 막부
주군마쓰다이라 이에야스 → 다키가와 가즈마스 → 마에다 도시이에 → 가모 우지사토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봉록시모사후나토 번 번주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본다 도시마사
형제마사노부, 마사시게
배우자정실: 몬나 씨
자녀마사우지, 딸 (고이데 요시치카 정실), 딸 (나가사카 시게요시 실), 딸 (나루세 마사나리 계실), 마사카네, 딸 (다케무라 만카 실), 양자: 마사쓰라
기타
특이 사항『한칸푸』에는 마사시게가 세키가하라에서 우키타가의 선진으로 싸웠다는 것은 오류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시에 우키타가에 섬겨 싸운 것은 조카 마사시게이며, 『한칸푸』 편찬 시에는 이미 양자의 경력이 혼동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후나토 번 번주 (혼다 산야사에몬가)
임기 시작1616년
임기 종료1617년
후임번에서 영으로 격하

2. 생애

혼다 마사시게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무장이다. 1545년 혼다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미카와 잇코잇키 때는 형 혼다 마사노부와 함께 잇키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와 맞섰으나, 잇키 진압 후 사면되어 다시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었다.

이에야스 휘하에서 아네가와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특히 창술에 뛰어나 "창의 산야(槍の三弥)"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한때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다키가와 가즈마스, 마에다 토시이에, 가모 우지사토 등 여러 다이묘를 섬기기도 했다. 이후 게이초 원년(1596년)에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부름을 받아 복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한 공으로 게이초 7년(1602년) 오미국에 1,000석, 겐나 2년(1616년)에는 시모사국 소마군 지역에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후나토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후 은거하여 겐나 3년(1617년) 7월 3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신 시대

1545년에 혼다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섬겼다. 하지만 에이로쿠 6년(1563년)에 미카와 잇코잇키가 발생하자, 형인 혼다 마사노부와 함께 잇키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와 적대했다. 『반한보』에 따르면, 마사시게는 하리자키(현재의 오카자키시 하리자키 정)의 쇼만지에 들어가 농성하며 공격해 온 오쿠보 일족과 싸웠다. 특히 오쿠보 타다요와 서로 총을 겨누고 쏘는 격전 끝에 마사시게는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고 한다. 다음 해인 에이로쿠 7년(1564년), 잇키가 진압되자 사면되어 다시 이에야스를 섬겼다.

이에야스에게 복귀한 후에는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11월 15일, 도토미국가케가와성을 공격할 때는 '가케가와의 서쪽 숙소'에서 선봉을 맡아 이마가와 측 무사를 베는 공을 세웠다. 겐키 원년(1570년) 6월 28일에 벌어진 아네가와 전투에서도 선봉이 되어 수급을 올렸다.

겐키 3년(1572년) 9월, 다케다 신겐이 도토미국으로 침공해 오자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히토코토자카 전투에서는 후군을 명령받은 혼다 마사카쓰의 지휘 아래 싸웠고, 같은 해 12월 22일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무공을 세웠다. 후타마타성 전투에서는 가이의 무사인 신무라 아무개를 베었다. 덴쇼 3년(1575년) 5월 21일의 나가시노 전투에도 참가하여 수급을 올리는 공을 세웠다.

2. 2.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여러 가문에仕える

이후,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여러 가문을 섬겼다. 마사시게는 무예로 이름이 높았고("창의 산야(槍の三弥)"라고 불렸다고 한다), 여러 가문에서도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덴쇼 6년(1578년) 7월 26일, 하리마의 칸요시성 공격 당시에는 오다 노부타다가 이끄는 군대에 속한 다키가와 가즈마스 휘하의 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将, 보병대장)로 참전했다.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속하게 되었고, 덴쇼 12년(1584년) 9월 13일에는 마에다 가문의 아시가루 다이쇼로서 스에모리성에서 사사 나리마사와 싸웠다. 덴쇼 15년(1587년) 4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부젠의 간세키성을 공격했을 때에는 가모 우지사토 군대의 군 봉행(軍奉行, 군무 담당관)으로 참여했다.

한편, 장남인 혼다 마사우지는 덴쇼 16년(1588년)부터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으나,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했다.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마사우지는 도쿠가와 가문을 떠나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섬기려 했고, 히데쓰구의 가신인 하다 마사치카(羽田正親, 나가토노카미)와 모의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해 8월 24일 하다 마사치카가 순사하자, 마사우지는 하다 마사치카의 시신을 수습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2. 3. 도쿠가와 가문 복귀와 후나토 번주

게이초 원년(1596년), 후시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아 다시 그를 섬기게 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군대의 검사(軍監) 역할을 맡았다. 이 공적으로 게이초 7년(1602년), 이에야스로부터 오미국 사카타군 내에서 1,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마사시게의 무략을 높이 산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슨푸에 머무름)의 명으로 에도로 파견되어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보좌하게 되었다. 『반한보』(藩翰譜)에는 "오고쇼(이에야스)의 명으로 쇼군 가문(히데타다)을 따르며 군대의 계략을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두 차례의 오사카 전투(겨울 전투, 여름 전투) 모두 선봉으로 참전했다.

겐나 2년(1616년) 7월, 시모사국 소마군 지역에서 1만 석을 받아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막부 초에는 "다이묘"와 다른 쇼군 직신(하타모토)의 격식 경계가 반드시 명확하지 않았고, 1만 석 이상을 다이묘로 하는 기준이 성립된 것은 간에이 10년대(1633년~)라는 설이 있다. 마사시게의 거소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후나토촌(현재 지바현 가시와시 후나토 부근)에 진야(陣屋, 다이묘의 저택 겸 행정 시설)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를 통해 후나토번이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의 "후나토번" 항목에서는 혼다 마사나가 이후를 다루고 있으며, 마사시게의 시대를 기록하지 않는다[2]. 또한 군명에서 마사시게를 "시모사 소마 번주"로 하는 사전도 있다..

마사시게는 곧 은거하였고, 이듬해인 겐나 3년(1617년) 7월 3일에 사망했다. 향년 73세였다. 교토 센뉴지의 탑두사원인 호온인(報恩院)에 묻혔다.

3. 후나토 번 폐번과 혼다 가문

장남 혼다 마사시게는 자결했고 차남 혼다 마사요리도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외손인 혼다 마사쓰라(나가사카 시게키치의 장남)가 양자로 입적하여 겐나 2년(1616년)에 가독을 이었다. 마사쓰라에게 인정된 영지는 8,000석이었고, 기존 영지 중 2,000석은 막부에 회수되었다.

영지가 줄어든 이유에 대해 『간세이 중수 제가보』를 바탕으로 편찬된 『반한보』는 두 가지 설을 제시한다. 하나는 마사시게 본인이 많은 영지를 자식에게 모두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마사시게의 유언은 없었지만, 혼다 마사즈미가 마사시게의 뜻이 그렇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마사쓰라가 8,000석만 잇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로 인해 후나토 번은 폐지된 것으로 간주된다. 혼다 가문은 다이묘에서 하타모토로 격하되었으나, 마사쓰라의 손자인 혼다 마사나가 대에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시 다이묘(후나토 번주) 지위를 회복했다. 이후 혼다 가문은 스루가 국 다나카 번 (4만 석)의 번주로서 에도 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다.

4. 인물됨과 일화

마사시게는 무용이 뛰어나 槍の三弥|야리노 산야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여러 가문을 섬기면서도 그의 무명(武名) 덕분에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저술한 『번한보』에는 마사시게에 대해 "천성이 속이 좁은 사람이지만, 또한 지극히 정직한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한다.


  • 어느 추운 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들을 불렀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 곁에 있던 형 혼다 마사노부가 이에야스로부터 받은 두루미 국물을 마시자, 이에야스는 "보통 국물이라면 식었을 텐데, 이 국물은 아직 따뜻하다. 큰 새는 노인에게 이롭다는 말이 사실이구나"라고 말했다. 마사노부가 이에 답하려 할 때, 마사시게가 불쑥 나서며 "저 마사시게와 같은 작은 새를 국으로 만들었다면 지금쯤 얼어붙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에야스는 기가 막혀하며 마사노부에게 "동생의 마음은 아직 고쳐지지 않은 듯하다. 저런 마음으로는 어떻게 다이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마사시게의 직설적이고 다소 불만 섞인 성격을 보여준다.

  • 오사카 전투 후, 사카베 히로카쓰와 구제 히로노리에게 자신보다 먼저 은상이 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마사시게는 불만을 품고 칼을 차고 성으로 향했다. 성문을 나서던 사카베와 구제를 다리 위에서 마주치자, 마사시게는 "그대들은 어떤 공을 세워 영지를 받았는가? 말해보라, 듣겠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상황을 파악한 구제는 말없이 자신의 큰 귓불을 보여주었다(당시에는 큰 귓불을 가진 사람이 복이 많다고 여겨졌다). 마사시게는 "그대들은 귓불이 크게 태어났을 뿐, 무공으로는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함께 돌아갔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공명심과 다소 충동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 『번한보』에 따르면, 어느 날 마사시게(三弥左衛門|산야자에몬일본어)는 이에야스의 노여움을 사 山家|산가일본어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후 이에야스가 노여움을 풀고 소환 서신을 보낼 때 장난삼아 山弥|산야일본어라고 적었는데, 이 때문에 마사시게 스스로도 山弥左衛門|산야자에몬일본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5. 계보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일본어』에 따르면, 혼다 마사시게의 부모, 처, 자녀는 다음과 같다. 『간세이보』에는 친자식으로 2남 4녀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모두 없다.


  • 부: 혼다 토시마사本多俊正일본어
  • 모: 불상 (알 수 없음)
  • 처: 몬나 사콘노에몬門奈左近右衛門일본어의 딸


자녀 (양자 포함)
관계이름비고
장남혼다 마사우지本多正氏일본어통칭 헤이시로平四郎일본어. 분로쿠 4년(1595년)에 자해하였다.
장녀(이름 미상)나가사카 시게키치長坂重吉일본어의 처
차녀(이름 미상)나루세 마사나리成瀬正成일본어 (오와리번 가로)의 처
삼녀(이름 미상)코이데 요시치카小出吉親일본어의 처
차남혼다 마사카네本多正包일본어통칭 센스케仙助일본어. 게이초 11년(1606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했으나, 게이초 13년(1608년) 6월 2일에 1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양자혼다 마사츠라本多正貫일본어나가사카 시게키치의 장남. 어머니는 마사시게의 딸(장녀)이다. 겐나 2년(1616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사녀(이름 미상)타케무라 마카竹村正香일본어의 처


참조

[1] 웹사이트 江戸時代、石高一万石以上を大名、一万石未満を旗本と身分分けしていたが、この基準が「一万石」である理由はなにか? https://crd.ndl.go.j[...] 2023-02-08
[2] 웹사이트 舟戸藩(近世) http://jlogos.com/do[...]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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