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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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전놀이는 봄철에 꽃을 보며 음식을 만들어 먹고 즐기는 한국의 전통 놀이이다. 신라 시대부터 유래되었으며, 여성들이 주도하여 친목을 다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을 중심으로, 냇가에서 손발을 씻고 화전을 부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귀부인들이 며느리들과 함께 모여 화려한 음식을 준비하고 진달래꽃을 이용하여 놀이를 즐겼다. 영남 지방에서는 마을 여성들이 모여 화전계를 조직하여 놀이를 준비하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씨의 종가 재대 부인이 죽어서 청연 웃골에 장사지내고 그곳을 재매골이라 하였으며 매년 봄철이면 김씨 문중 남녀가 이 골짜기 남쪽에 있는 시냇가에서 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이때는 마침 배꽃이 만발하고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는 시기였다. 화전놀이는 한 집안, 특히 부녀자들이 모여서 하던 것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있던 풍습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오랜 유래를 가진 화전놀이는 아름다운 우리 산천과 좋은 기후, 그리고 자연을 즐기는 우리 민족의 고상한 습성에서 나온 놀이였다.[6]
화전놀이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풍습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김씨 문중 남녀가 봄철에 골짜기에서 놀이판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으며,[6]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의 기록에는 도성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춤추는 것을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로 여겼고, 귀족 가문의 부인들도 진달래꽃이 필 때 며느리들을 모아 '전화음(煎花飮)'이라 불리는 모임을 가졌다는 내용이 나온다.[8]
화전놀이의 주요 전승 집단은 양반 여성들이었다. 남성들과 민촌 여성들도 화전놀이를 즐겼지만,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부정기적인 봄맞이 풍류의 일환으로 참여 범위가 가까운 지인들로 제한되어, 정기적으로 개최된 여성들의 집단적인 놀이와는 구별되었다. 남녀가 함께 참여하는 화수회 성격의 화전놀이도 있었으나, 이는 '문중 모임'의 성격을 지녀 여성들만의 '친목과 유희'를 목적으로 하는 여성들의 화전놀이와는 거리가 있었다.[2]
봄철 세시풍속인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는 봄과 관련한 놀이와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3]
화전놀이는 여성과 남성이 즐기는 방법이 달랐다.
2. 유래
3. 발전 과정
3. 1. 신라 시대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씨의 종가 재대 부인이 죽어서 청연 웃골에 장사지내고 그곳을 재매골이라 하였으며 매년 봄철이면 김씨 문중 남녀가 이 골짜기 남쪽에 있는 시냇가엣 놀이판을 차리게 되니, 때는 마침 배화가 만발하고 송아꽃이 누렇게 달린다”고 하였다. 화전놀이는 한 집안 일가친척 중에서도 특히 부녀자들이 모여서 하던 것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있었던 유풍이 아닌가 한다.[6] 오랜 유래를 가진 화전놀이는 우리 산천이 아름답고 기후 또한 좋으며 우리 인민들이 자연과 친하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고상한 습성에서 나온 놀이였던 것이다.[6]
『교남지(嶠南誌)』 권4, 경주 산천조에는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그 이름은 신라의 궁인(宮人)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한편 같은 책 고적 조에서는 재매곡(財買谷)을 소개하여,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청연(靑淵)의 위에 있는 골짜기[上谷]에 묻었으므로 이 이름을 붙였는데, 매년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골짜기의 입구에 초막을 하나 얽었는데 그런 까닭으로 송화방(松花房)이라고 하였다.”고 했다. 물과 산이 있고 수많은 꽃이 만발한 데다 놀이를 위한 초막까지 따로 얽었으니, 꽃과 송화로 지짐을 지져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7]
3. 2. 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 4월 22일 기록에 따르면, 금령(禁令)이 간략하여 무속신앙(巫風)이 성행하였고, 도성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8] 매번 술자리를 열 때 음악을 연주하고 해가 저물어야 헤어졌으며, 남녀가 노래하고 춤추며 떠드는 것을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 하였다.[8] 귀족 가문의 부인들도 이를 본받아 장막을 설치하고 며느리들을 모아 사치스럽게 음식을 준비하였는데, 진달래꽃이 필 때 더욱 자주 모여 이를 '전화음(煎花飮)'이라 불렀다고 한다.[8]
4. 전승 집단
5. 시기
6. 놀이 방법
구분 내용 여성 여성들은 냇물에 손발을 씻고 화전을 부치며 음식을 장만했다.[5] 이들은 음주가무를 즐기고 시댁 식구 흉보기 등 자유로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윷놀이, 꽃싸움, 연극 등 다양한 놀이도 즐겼다.[5] 남성 남성들은 탁족이라 하여 산수 좋은 곳에서 찬물에 발을 씻고 화전을 부치며 음식을 먹고 놀았다.[4] 여흥으로 시와 노래를 짓기도 했다.[4]
6. 1. 여성
화전놀이는 여성들이 평소 숨겨두었던 다양한 재주를 마음껏 드러내는 경연장이었다. 여자들은 냇물에 손발을 씻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화전을 부치고 각자 분담한 음식을 장만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갈하고, 볼품 있고, 맛도 있어서 남들에게 칭찬을 받도록 신경 썼으며, 자신들의 의복과 음식 솜씨를 뽐내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5]
푸짐한 먹거리가 마련되면 본격적인 놀이판이 벌어졌다. 놀이판은 한결같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음주가무를 즐기고 시댁 식구 흉보기 등 거리낌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주가무와 자유로운 이야기 외에도 윷놀이, 꽃싸움, 연극, 엉덩글씨, 봉사놀음, 꼽사춤과 병신춤, 모의혼례와 같은 다채로운 놀이도 즐겼다.[5]
6. 2. 남성
남성들은 탁족이라 하여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찬물에 발을 씻어 새로운 기분을 불러일으키며 즐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화전을 부치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고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흥으로 시도 짓고 노래도 불러 유쾌한 하루를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다.[4]
7. 의의
화전놀이는 여성들에게 일 년에 단 한 번 주어지는 공식적인 집단 나들이였다는 점에서, 평소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이 봄을 맞아 또래들과 함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화전놀이는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산이나 들로 나가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고 놀면서 앞으로 다가올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서로 위로하는 공동체 잔치로서의 의미도 지닌다.[9]
화전놀이는 담소를 나누고 즐거워하며 서로 간의 우의를 다지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아랫사람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보여주는 사교의 장이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9]
식사 후 이어지는 유흥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면, 참석한 여성들은 박수를 치며 공감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함께 아파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서로 간의 유대감을 확인했다. 비슷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은 고달픈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화전놀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10]
8. 지역 사례
영남 지방에서는 음력 3월 무렵 진달래꽃이 만발할 때 화전놀이가 시작되었다. 마을이나 문중의 여성들이 통문을 돌리거나 하여 놀이 계획을 세우고, 시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준비했다. 참여 인원은 대략 30~60명 정도였으며,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참여했지만, 주로 집안이나 마을에서 인정받는 중년 여성들이 주도했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하여 함께 가지 않았다.
놀이에 필요한 경비는 화전계(花煎契)가 있으면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없으면 각자 돈을 모았다. 놀이 날이 정해지면 여성들은 음식을 만들고, 조리 도구와 함께 현장에서 화전가를 지을 수 있도록 종이, 붓, 먹을 챙겼다. 풍물을 가져가 반주를 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평소보다 용모에 신경 써 단장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놀이 장소는 주로 마을에서 10리 안팎의 거리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도착하면 먼저 음식을 준비하고, 진달래꽃잎을 따 화전(花煎)을 만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화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그것을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 이것이 곧 옛날 오병(熬餠)의 한구(寒具)이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혹 참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혹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이것을 아울러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11]
8. 1. 영남 지방
영남 지방에서는 음력 3월 무렵 진달래꽃이 만발할 때 화전놀이가 시작되었다. 마을이나 문중의 여성들이 통문을 돌리거나 하여 놀이 계획을 세우고, 시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준비를 시작했다. 참여 인원은 대략 30~60명 정도였으며, 젊은이부터 노인까지 참여했지만, 주로 집안이나 마을에서 인정받는 중년 여성들이 주도했다.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배려하여 함께 가지 않았다.놀이에 필요한 경비는 화전계(花煎契)가 있으면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없으면 각자 돈을 모았다. 놀이 날이 정해지면 여성들은 음식을 만들고, 조리 도구와 함께 현장에서 화전가를 지을 수 있도록 종이, 붓, 먹을 챙겼다. 풍물을 가져가 반주를 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평소보다 용모에 신경 써 단장하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놀이 장소는 주로 마을에서 10리 안팎의 거리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도착하면 먼저 음식을 준비하고, 진달래꽃잎을 따 화전(花煎)을 만들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화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을 하여 둥근 떡을 만들고 그것을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 이것이 곧 옛날 오병(熬餠)의 한구(寒具)이다. 또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을 화면(花麵)이라고 한다. 혹 참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또 녹두로 국수를 만들어 혹 붉은색으로 물을 들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 한다. 이것을 아울러 시절음식으로 제사에 쓴다."[11]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cultureco[...]
[2]
논문
화전놀이의 축제적 성격과 여성들의 유대의식
2011
[3]
웹사이트
http://www.cultureco[...]
[4]
서적
북한 학자가 쓴 조선의 민족놀이
서울 푸른숲
1999
[5]
서적
북한 학자가 쓴 조선의 민족놀이
서울 푸른숲
1999
[6]
서적
북한 학자가 쓴 조선의 민족놀이
서울 푸른숲
1999
[7]
웹사이트
http://folkency.nfm.[...]
[8]
웹사이트
http://folkency.nfm.[...]
[9]
웹사이트
http://www.cultureco[...]
[10]
논문
화전놀이의 축제적 성격과 여성들의 유대의식
2011
[11]
웹사이트
http://folkency.n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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