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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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해장성은 고려 시대 대몽항쟁기에 제주도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곽이다. 126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 의사를 밝힌 후, 강화도 대신 제주도로 천도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어 축조가 시작되었다. 1270년 삼별초가 진도에서 봉기하여 제주도를 장악하면서 환해장성은 삼별초에 의해 중수되어 방어 기지로 활용되었다. 이후 왜구 침입과 이양선 출몰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보수되었으며, 현재 제주도에는 10여 개소의 환해장성 흔적이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환해장성은 규슈의 원구방루, 강화도성 외성과 함께 동아시아 해양성을 대표하는 해안 성곽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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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해장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이름 | 환해장성 |
| 로마자 표기 | Hwanhaejangseong |
| 한자 표기 | 環海長城 |
|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전역 |
| 상세 정보 | |
| 종류 | 기념물 |
| 지정 번호 | 49 |
| 지정일 | 1998년 1월 7일 |
| 길이 | 5,120m |
| 시대 | 고려 시대 |
2. 축조의 주체와 배경
1260년 고려가 원에 항복 의사를 밝힌 이후, 제주도는 강화도를 대체할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1268년 삼별초 봉기 직전, 원의 압박이 거세지자 제주도 천도 문제가 다시 부상했다.[2] 1270년 삼별초 봉기 이후, 고려 조정은 삼별초가 제주도를 장악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여림을 보내 장성을 쌓게 했다.[2] 그러나 같은 해 11월,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 부대가 제주도를 장악하면서 환해장성은 삼별초의 손에 넘어가, 제주 방어 기지로 활용되었다.[3]
2. 1. 고려 조정의 제주도 인식
원종 1년(1260년) 고려가 원에 항복 의사를 밝힌 이후부터 제주도의 전략적 효용성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임시 수도는 강화도였는데, 제주도로 천도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강화도에서의 항쟁을 포기해야 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원종 9년(1268년) 삼별초 봉기 직전, 개경으로 돌아가라는 원의 독촉이 거세지면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천도하는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2]2. 2. 삼별초와의 경쟁
1270년 6월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가 봉기하여 진도로 들어가, 8월부터 본격적으로 진도를 거점으로 육지부 공략을 개시하며 대몽항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를 놓고 고려 조정과 진도의 삼별초 정권 모두에게 제주도 선점은 최대 현안이었다. 고려 조정은 진도의 삼별초 정권이 남해의 섬과 그 일대의 주군을 아우르고 남해 바다 한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육지에서 공략하기 쉽지 않은 제주도까지 장악해 남해 일대의 대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개경 정부는 먼저 시랑 고여림을 제주로 보내 1천 군사로 제주 바닷가를 지키도록 하면서 둘레 3백여 리에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2]2. 3. 삼별초의 제주도 장악
1270년 11월 이문경이 이끄는 삼별초 부대가 제주로 진입해 고려 관군을 격파하고 제주도를 장악했다. 이후 고려 조정이 쌓고 있던 제주 해안가의 장성, 이른바 환해장성 역시 삼별초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삼별초에 의해 중수되어 제주 방어를 위한 기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3. 삼별초 이후의 환해장성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아 환해장성은 계속 보수·정비되었다. 18~19세기에는 이양선이 제주특별자치도 근해에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대비도 이루어졌다.[1]
3. 1. 고려 말~조선 시대의 보수 및 정비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 침입이 심해, 환해장성은 중요한 방어 시설로 계속 보수·정비되었다. 18~19세기에는 영국 군함 등 이양선이 제주특별자치도 근해에 나타나, 이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은 10개소(제주시 화북·삼양·애월·북촌·행원·한동, 서귀포시의 온평·신산)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보호되고 있다.[1]3. 2. 이양선 출몰에 대한 대비
18~19세기에는 영국 군함 등 이양선이 제주특별자치도 근해에 나타남에 따라 이에 대비하여 환해장성을 지속적으로 정비하였다.[1]4. 현존하는 환해장성
환해장성의 흔적은 제주시 애월·곤을·별도·삼양·북촌·동복·행원·한동, 서귀포시 온평·신산 등 10여 곳에 남아 있다.[4]
4. 1.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 지정 현황
환해장성은 왜구 침입이 심했던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보수·정비되었다. 18~19세기에는 영국 군함 등 이양선이 제주특별자치도 근해에 나타남에 따라 이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은 10개소(제주시 화북·삼양·애월·북촌·행원·한동, 서귀포시 온평·신산)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보호되고 있다.[1]4. 2. 추가 발견된 흔적
2016년 김보한이 제주도 해안 답사를 통해 조천, 김녕, 월정, 하도 등지에서도 환해장성의 옛 흔적을 확인하였다.[4]5. 원구방루와의 유사성
대몽항쟁 시기 고려의 강화도성 외성과 환해장성은 몽골의 일본 원정 당시 규슈 해안에 축조된 원구방루와 여러 유사점을 보인다. 이들은 모두 바다와 접한 해안가에 축조되었고, 적의 해안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용 해안 성곽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한국의 김보한은 강화도성 외성과 함께 환해장성을 몽골의 대륙적 특성과 제주도 및 규슈의 해양적 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동아시아 해양성의 대표적인 해안 성곽으로 평가하였다.[5]
5. 1. 해안 방어 시설로서의 공통점
강화도성 외성과 환해장성은 규슈 해안에 축조된 원구방루와 함께 모두 바다와 접한 해안가에 축조되었으며, 그 축조 목적에 있어서 모두 적의 해안 상륙을 저지시키기 위해 쌓은 방어용 해안 성곽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5] 김보한은 강화도성 외성과 함께 환해장성을 몽골의 대륙적 특성과 제주도 및 규슈의 해양적 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동아시아의 해양성을 대표하는 해안 성곽이라고 평가하였다.[5]5. 2. 동아시아 해양성의 대표 사례
김보한은 강화도성 외성과 환해장성을 몽골의 대륙적 특성과 제주도, 규슈의 해양적 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동아시아 해양성의 대표적인 해안 성곽으로 평가했다.[5]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38 전라도 제주목 고적조 및 이원진 《탐라지》 고적조, 김석익 《탐라기년》권제1 탐라조
[3]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탐라지》, 《탐라기년》 등의 문헌에는 제주 연안에 남아 있던 고장성(古長城)이라 불리는 둘레 3백여리 규모의 성곽을 언급하면서도 모두 축조 연도는 누락하고 있는데, 고장성의 축조와 관련해서는 고여림의 이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고여림은 원종 11년 11월 중순에 영암부사 [[김수 (고려)|김수]]와 함께 삼별초의 제주 상륙을 저지하다가 전사하였다(《고려사절요》 권제18 원종 11년(1270년) 11월조;《동사강목》권제11하 원종 11년)는 기록을 참고할 때 삼별초가 봉기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제주까지 점령하는 3개월 동안에 장성이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고여림의 고려 관군을 격파한 뒤 항파두리를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원종 14년(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제주 삼별초가 진압될 때까지 삼별초가 환해장성의 증·개축 공사를 이어 진행했을 것으로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김보한 「몽골의 고려 · 일본 침공과 해안성곽의 성격에 대한 고찰」《한일관계사연구》제58집, 2017년, 161쪽).
[4]
간행물
몽골의 고려 · 일본 침공과 해안성곽의 성격에 대한 고찰
2017
[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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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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