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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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구방루는 1274년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원나라의 재침공에 대비하여 축조한 석축 방어 시설이다. 하카타 연안에 건설되었으며, 적의 상륙을 막기 위해 고케닌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토목 공사를 진행했다. 고안의 역(1281년)까지 일부만 완성되었으나, 몽골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원구방루는 높이 약 2m, 총 길이 약 20km에 이르며, 1913년 "원구방루"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후쿠오카시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한국의 환해장성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연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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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방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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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원구방루 |
원어 이름 | |
위치 | 후쿠오카시 니시구에서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
유형 | 방어선 |
공개 여부 | 예 (공공 시설 없음) |
상태 | 유적 |
지정 문화재 | 국가 사적 |
건설 정보 | |
건설 시기 | 1276년-1332년 |
건설 주체 | 가마쿠라 막부 |
사용 정보 | |
전투 | 몽골의 일본 침략 |
재료 |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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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획과 실행
분에이 11년(1274년) 여몽연합군의 제1차 일본 원정을 겪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본격적인 이국경호(異国警護)에 착수했다. 겐지(建治) 원년(1275년) 3월, 막부는 고려를 공격하는 이국정벌(異国征伐)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원의 재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석축 방어시설인 이시쓰이지(石築地), 즉 원구방루(元寇防塁)의 축조를 시작했다.[20]
현존하는 원구방루의 높이와 폭은 평균적으로 2m이다.[4] 총 길이는 서쪽의 후쿠오카시 니시구 이마쓰(今津)에서 동쪽의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가시이(香椎)까지 약 20k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내부는 작은 돌로 채워져 있으며, 육지 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바다 방향으로는 수직에 가깝게 설계되었다.[4] 축조를 담당했던 구니(国)에 따라 구조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4] 또한, 방루 위에는 방패와 깃발을 설치하고, 바다 쪽에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말뚝을 박아 방어력을 높였다고 전해진다.
1913년(다이쇼 2년) 6월 12일부터 6월 29일까지 福岡每日新聞|후쿠오카 니치니치 신문일본어에 게재된 기사에서 中山平次郎|나카야마 헤이지로일본어가 처음으로 '원구방루(元寇防塁|겐코 보루이일본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0] 이는 몽골 침입 방어 시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카야마가 독자적으로 붙인 명칭이지만 이후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이 용어를 통해 원구방루가 기존의 돌로 쌓은 방어 시설과는 다른, 높은 고도와 돌로 덮인 사구 형태의 독특한 설계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조는 침입 시도를 효과적으로 막는 데 기여했다.[11]
현존하는 원구방루의 높이와 폭은 평균적으로 약 2m이다. 총 길이는 서쪽의 후쿠오카시 니시구 이마쓰(今津)에서 동쪽의 히가시구 가시이(香椎)까지 약 20km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는 작은 돌을 채우고 육지 쪽으로는 경사면을 두었으나, 바다 쪽으로는 수직에 가깝게 설계되었다. 축조를 담당한 구니(国)에 따라 구조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막부의 이국정벌 계획은 규슈 · 산인도 · 산요도 · 난카이도 등지에서 선장과 선원을 차출하여 겐지 2년(1276년) 3월에 하카타에 집결시킨 뒤 고려로 반격에 나선다는 구상이었으나, 명령에 참여한 고케닌의 수가 적어 실제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대신 막부는 고케닌들을 하카타 연안에 동원하여 원구방루를 쌓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했다.[20] 이는 제1차 침공 당시 여몽연합군에게 반나절 만에 미즈키(水城)까지 밀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적의 상륙 자체를 막아 선제적으로 방어하려는 목적이었다.[21]
원구방루 축조는 1276년 3월에 시작되었으며[4], 각 구니(国)마다 담당 구역이 정해졌다. 오스미국(大隅国)의 부역 문서에 따르면, 무가 소유지(武家領)나 본소일원지(本所一円地) 구분 없이 논(田) 1 반(反)당 3.3cm(1 촌)의 길이만큼 축조 의무가 부과되었다. 초기에는 전투 준비가 된 병사는 세금이 면제되었으나 곧 중단되었고, 규슈 각 지방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세금은 처음에는 성벽 건설 자재(돌)와 인력, 무기(성벽 1 척, 약 약 3.03m당 방패 1개, 깃발 1개, 화살 20개) 형태로 부과되었으나, 나중에는 금전으로 납부하게 되었는데, 보통 논 1 정(町)당 114 문(文)이었다.[7][4] 대부분의 성벽 완공 목표 시점은 1276년 8월이었지만, 전략적 중요도에 따라 달랐으며[4], 고안(弘安) 4년(1281년) 여몽연합군의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 때까지는 일부만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미완성 상태였음에도 원구방루는 방어에 효과를 발휘했다. 5월 3일 고려 합포를 출발한 동로군 4만 명은 하카타 만 연안의 방루에 막혀 상륙을 포기하고 인근 시가 섬(志賀島)에 선단을 정박해야 했다. 이후 6월 18일 중국 강남에서 출발한 강남군 10만 명과 히라도섬에서 합류하여 상륙 계획을 논의했으나, 윤7월 1일에 불어닥친 태풍(신풍)으로 함대가 큰 피해를 입고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6]
고안의 역 이후에도 원의 재침공 위협에 대비하여 이국경호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방어 임무(이국경고번역, 異国警固番役)에 동원된 고케닌과 사무라이들에게는 원구방루의 추가 공사나 파손된 부분의 수리 임무가 부과되었다. 공사는 규슈 여러 지방에서 진행되었으며[5],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기 1년 전인 겐코(元弘) 2년(1332년)까지 지속되었다.[5] 이들 지방은 무로마치 시대 초기까지 성벽을 유지·보수했으나, 14세기 후반에는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점차 붕괴되었다.[5]
에도 시대에는 성벽의 돌 대부분이 후쿠오카 성 건설 자재로 사용되었다. 남아있는 원구방루 유적은 1931년 3월 30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7][8] 또한, 나가사키현의 히라도 타비라정에서 마쓰우라 호시카정에 이르는 40km~50km 해안선을 따라서도 유사한 방어 시설 유적이 남아 있다.
3. 구조
4. 명칭
5. 발굴 조사 및 현황
1958년, 방어시설 근처 이마즈(今津)에서는 성벽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와 함께 200구에 달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13]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주요 발굴 내용은 다음과 같다.[12]연도 위치 비고 1968 메이노하마역 근처 이키노마쓰바라(生の松原) 사암과 화강암 사용 확인. 1969 시모야마토역 근처 이마즈(今津) 현무암과 화강암 사용, 위치에 따라 다름. 1970 세이난가쿠인 대학 중심부 근처 니시진(西新) 점토와 모래가 층층이 쌓임. 1978 메이노하마(姪浜) 돌로 채움; 점토 없음. 너비 4m. 1993 하코자키궁 근처 철도 건설 중 소량의 돌 발견.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은 발견되지 않음. 1996 후쿠오카 돔 근처 모모치(百道) 아파트 건설 중 산발적으로 돌이 발견되어 조사됨. 1998 메이노하마역 근처 이키노마쓰바라(生の松原) 후면은 모래와 점토층이 번갈아 쌓임. 1998 니시진(西新) 세이난가쿠인 대학 건물 내부에서 돌과 모래로 된 울타리가 확인됨.[14] 2000 하코자키궁 근처 철도 건설로 인해 성벽의 더 많은 부분이 발견되어 조사됨.
규슈의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가 그리게 한 『몽고습래회사』에는 건축 당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에도 시대에는 방루의 돌 대부분이 후쿠오카 성 건설 자재로 사용되어 상당 부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5] 방루는 고안의 역 이후 수십 년간 유지·보수되었으나 이후 관리되지 않고 모래에 묻혔다.
한편, 나가사키현 히라도시와 다비라정에서 마쓰우라시 호시카정(星鹿町)에 이르는 약 40km~50km의 해안선에도 유사한 방어 시설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원구(元寇)와 관련된 유적이나 지명, 전설 등이 다수 남아있다.
5. 1. 주요 발굴 지역
나가타레 니시구 이키노마쓰바라 1초메 이키노마쓰바라 지역 시가지 동쪽 해안부 나가타레 해변공원 안에 있다. 석축 구조물은 소나무 숲 속 흙에 묻혀 있으며, 표면이 아주 조금 노출된 곳이 있다. 현재 나가타레 해변공원 구역을 포함하는 나가타레야마 산기슭에서 이키야마 산기슭에 걸친 약 2km의 방루는 부젠국이 축조를 담당했다. 고안의 역 이후 겐겐 2년(1303년)에 부젠국 쓰이키군 요시토미무라의 나리토미 씨가 이 지역 방루 수리를 완료했다는 보고를 담은 고문서가 남아있다.
*지쿠히선 이마주쿠역에서 동쪽으로 약 700m, 이마주쿠 메이하마선 버스 나가타레 해변공원 앞 버스 정류장 부근.이키노마쓰바라 니시구 이키노마쓰바라 5초메 메이노하마와 이마주쿠 사이에 위치한 이키노마쓰바라 해안에 있다. 당시의 석축 구조물은 묻혀 있지만, 원래 높이와 같은 석축 구조물이 복원되어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은 고안의 역 당시 격전지였으며, 『몽고습래회사』에는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이곳에서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가타레 해안에서 고타케 해안에 걸친 약 2km의 방루는 히고국이 축조를 담당했다. 1968년(쇼와 43년)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지쿠히선 시모야마토역에서 북쪽으로 약 800m, 이마주쿠 메이하마선 버스 이키노마쓰바라 버스 정류장에서 북동쪽 약 500m.무카이하마 니시구 고타케 3초메 57 고타케 공원 서쪽 소나무 숲 안에 있다. 석축 구조물은 남아있지 않고 설명판만 설치되어 있다. 1921년(다이쇼 10년) 내무성 검사관이 시찰하여 석축 구조물을 확인했다고 하며, 사적으로도 지정되었으나 1955년(쇼와 30년) 태풍으로 인한 침식으로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철·지쿠히선 메이노하마역에서 쇼와 버스 마리노아시티행 탑승 후 고타케 공원 하차.와키 니시구 고타케 1초메 34 마리노아시티 후쿠오카 남쪽 주택가 안에 있다. 석축 구조물은 없고, 잔디밭 위에 비석과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1979년(쇼와 54년) 발굴 조사를 통해 기초 부분만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묻었다. 히젠국이 축조를 담당했다.
*지하철·지쿠히선 메이노하마역에서 쇼와 버스 마리노아시티행 탑승 후 마리노아시티 하차, 남쪽으로 약 400m 이동.모모치 사와라구 모모치 1초메 10 후지사키 지역 주택가 안에 있다. 약 20m에 걸쳐 석축 구조물의 표면이 노출된 상태로 보존 및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분에이의 역 때 원나라 군대가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20년(다이쇼 9년)과 1969년(쇼와 44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축조를 담당한 국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하철 후지사키역·니시테쓰 버스 후지사키 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이동.니시진 사와라구 니시진 7초메 니시진 지역 시가지 서쪽 외곽, 메이지도리 방루 교차로 북쪽에 위치한다. 모모치와 마찬가지로 분에이의 역 때 원나라 군대가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축조를 담당한 국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니시진 7초메 쪽은 세이난가쿠인 대학 체육관 남쪽 녹지에 있다. 해자를 설치하고 석축 구조물의 윗부분을 노출시켜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모모치 지역과 같이 1920년(다이쇼 9년)과 1969년(쇼와 44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니시진 6초메 쪽은 세이난가쿠인 대학 캠퍼스 1호관 내에 있으며, 1호관 신축 시 발견된 방루 일부를 옮겨와 2001년(헤이세이 13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이 발굴에서는 석축 구조물 후방(남쪽) 약 1m 지점에서 기존에 발견된 적 없는 토루(土塁)도 발견되어, 발굴 장소의 방루가 석축과 토루의 2중 구조였음이 밝혀졌다.[17]
*지하철 니시진역에서 서쪽으로 약 400m, 니시테쓰 버스 방루 앞 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이동 (니시진 6초메 쪽은 세이난가쿠인 대학 사무국 개방 일시 및 시간에만 관람 가능).사와라구 니시진 6초메 2-92 지교 주오구 지교 2초메 12-19 주오구 북서쪽 끝 주택가 한쪽에 있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설명판만 설치되어 있다.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고 정비도 되어 있지 않다.
*지하철 도진마치역에서 서쪽으로 약 400m, 니시테쓰 버스 지교 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이동.하카타 하카타구 나라야마치 1-38 하카타 초등학교 건물 지하의 석축 유구 전시실에 있다. 1998년(헤이세이 10년) 하카타 초등학교 건설에 따른 발굴 조사 시 발견되었다. 돌을 쌓은 방식이나 규모 등이 이마즈나 니시진의 방루와 비슷하고, 가마쿠라 시대 당시 해안 사구였던 곳에 위치하여 방루로 추정되지만, 단정할 수 없어 석축 유구라고 부른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
*지하철 고후쿠마치역 북서쪽 약 400m, 니시테쓰 버스 구라모토 버스 정류장 부근 (연말연시를 제외한 토·일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관람 가능).지조마쓰바라 히가시구 하코마쓰 4초메 1 하코자키 지역 가고시마 본선 선로를 따라 2곳에 위치한다. 두 곳 모두 관람할 수 있는 석축 구조물은 없다.
하코마쓰 4초메 쪽은 지조마쓰바라 공원 내에 있으며, 비석과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1920년(다이쇼 9년) 다케야 미즈키(武谷水城)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석재의 존재를 발표했다. 1993년(헤이세이 5년) 시굴 조사에서는 방루 건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출토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 발굴 조사에서는 사람 머리 크기의 자연석이 직선으로 배열된 것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원구방루로 추정된다.
하코자키 6초메 쪽은 규슈 대학 하코자키 캠퍼스 부지 한쪽에 있다. 이전부터 주지의 매장문화재포장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6년(헤이세이 28년) 규슈 대학 캠퍼스 이전 공사에 따른 발굴 조사를 통해 석축 구조 유구가 발견되었다.[18]
두 곳 모두 사쓰마국이 축조를 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하철·니시테쓰 가이즈카선 가이즈카역에서 남쪽으로 약 500m 이동.히가시구 하코자키 6초메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