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입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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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성 입암산성은 전라남도 장성군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으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을 막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1256년 몽골의 침입 시 송군비가 몽골군을 격퇴하고, 임진왜란 때 윤진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등 국난 극복의 역사를 보여준다. 입암산성은 약 15km에 달하는 긴 성벽을 갖추었으며, 현재는 약 3.2km가 남아있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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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입암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성 입암산성 |
한자 표기 | 長城 笠岩山城 |
![]() |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384 |
지정일 | 1993년 11월 10일 |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20-2 외 57필지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 | 국유, 공유, 사유 |
면적 | 1,196,920m2 |
문화재청 ID | 13,03840000,36 |
2. 역사
장성 입암산성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정읍의 경계를 이루는 노령산맥에 위치한 중요한 방어 시설이었다. 높이 626m의 입암산 계곡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약 3.2km 정도가 남아 있다.
입암산성에 대한 기록은 여러 옛 문헌에 남아있지만, 정확히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1256년(고종 43년)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시대 이전부터 산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 1. 고려 시대
1256년 몽골의 제6차 침공 때 송군비가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북 지방 전체를 점령한 몽골군은 차라대를 주장으로 하여 전남 지방 전체를 공략하려 했으나, 입암산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1]2. 2. 조선 시대
조선 태종 9년(1409)에 크게 고쳐 쌓았고, 훗날 이귀와 이귀형이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현재 남문과 북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은 수직에 가까우며 물을 막아 충분한 양의 물을 준비해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한, 조선 후기 방어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1]임진왜란 때도 일본군을 맞아 싸웠던 곳으로 당시 별장 윤진이 전사했다.[1]
3. 구조
장성 입암산성은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라북도 정읍시의 경계를 이루는 노령산맥의 입암산(해발 626m)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이다. 전라남도(광주권)를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1]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1256년(고종 43)에 송군비장군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 있어,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조선시대에는 1409년(태종 9년)에 성을 고쳐 쌓았고, 이후 이귀와 이귀형이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성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려 적의 접근을 어렵게 했으며, 성 안에는 충분한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저수 시설을 갖추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 후기 방어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1]
원래 성벽의 총 길이는 15km, 높이는 3m에 달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3.2km 정도이다.[1]
3. 1. 시설물
과거에는 별장본관, 군기고, 공남루, 장경사, 흥경사, 인경사, 옥정사 등 다양한 시설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소실되고 윤진 순의비만 남아있다.[1] 남문과 북문은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4. 현재 모습
입암산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높이는 3미터이다.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그대로 남아있다. 본래 별장본관, 군기고, 공남루, 장경사, 흥경사, 인경사, 옥정사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윤진 순의비만 남아있다.[1]
5. 의의와 평가
입암산성은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성으로, 전라남도(광주권)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외세의 침략을 막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했다.[1]
특히 1256년 몽골 제국의 제6차 침공 당시 송군비가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1] 임진왜란 때도 윤진 별장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등 국난 극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이는 민족의 자주성과 항쟁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벽은 수직에 가까우며 물을 막아 충분한 양의 물을 준비해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조선 후기 대표적인 방어 시설로 평가받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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