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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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소태후는 전한 무제의 후궁으로, 소제의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깨끗함을 숭상했으며,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유불릉(소제)을 낳았다. 무제는 외척의 발호를 우려하여 유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후 그녀를 죽였다. 소제가 즉위한 후 태후로 추존되었으며, 능묘는 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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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태후 | |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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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조 (趙, Zhao) |
씨 | 미상 |
휘 | 첩여 (婕妤, Jié yú) |
시호 | 효소황후 (孝昭皇后, Xiàozhāo Huánghòu) |
생몰년 | 기원전 113년 ~ 기원전 88년 |
출생지 | 중국 허베이성 한단시 |
사망지 | 중국 산시성 윈청시 푸저우현 |
묻힌 곳 | 윈양 (雲陽, Yúnyáng) |
가족 관계 | |
부모 | 미상 |
배우자 | 한 무제 |
자녀 | 한 소제 |
주요 경력 | |
봉호 | 첩여 (婕妤, Jié yú) |
추존 | 황후 (皇后, Huánghòu)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한 무제, 한 소제, 곽광 |
2. 생애
무제는 여태자와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창읍애왕 등 다른 자녀를 계승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곽거인과 아들 유불릉에 대한 총애는 무제가 태자 유거와 위황후 위자부를 폐하고 유불릉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추측을 낳았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난으로 태자 유거 및 그 일족이 주멸된 후, 황태자는 공석이었다.[1]
기원전 87년, 무제는 유불릉을 새로운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여태후 일족과 같은 외척의 전횡을 막기 위해, 생모인 구익부인은 무제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어느 날, 구익부인이 무제에게 죄를 얻어 유사에 넘겨졌는데, 이때 뒤돌아 무제를 보자 무제는 "빨리 가라. 너는 이제 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익부인은 사망했다. 이후 무제는 곽광, 김일제, 상관걸 등을 보좌로 지명했다.[1]
소제가 즉위하자, 구익부인은 황태후로 추증되고 여릉으로 개장되었지만, 친족이 관직을 얻지는 못했다.
2. 1. 출생과 입궁
젊어서부터 깨끗함을 좋아했으며, 소녀 시절 6년 동안 병으로 앓아 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1] 무제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고 총애를 받아 임신 14개월 만에 아들 전한 소제를 낳았다. 전설에는 24개월 만에 출산했다고도 전한다.[1]무제는 늙어서 자식을 얻은데다가 구익부인의 뱃속에서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나온 아들이라 각별히 산후조리를 보살폈다. 아들의 출생을 기념하여 특별 조회를 연 한무제는 예전의 요 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또는 24개월간 회임하였다가 낳았다는 고사를 말하며 학사들에게 명하여 구익부인의 산방(産房)에 "요모문(堯母門)"이라는 글을 짓게 했다.[1]
곽거인의 본관은 하간군으로, 조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죄를 저지른 후 거세당하여 장안(현재 시안)에서 작은 환관으로 복무했다.[1]
곽거인의 주먹은 항상 꽉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한 무제가 하간에서 사냥을 할 때 조씨가 그의 앞에 소환되었다. 황제가 그녀의 손을 만지자, 그녀의 주먹이 기적적으로 펴지면서 그 안에 옥고리가 나타났다. 무제는 기뻐하며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 관전(Quan, 권) 부인과 鉤弋夫人|구익부인중국어으로 불렀다. 첩여의 후궁 직위를 받아서 조첩여로도 알려졌다.[1]
조첩여는 장안 외곽의 황궁인 감천궁 안에 있는 곽의궁에서 살았다. 신화 속의 요 임금과 같은 14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기원전 94년에 아들 유불릉을 낳았다고 한다. 무제는 아들이 현명한 황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궁궐의 문 이름을 "요의 어머니의 문"이라고 지었다.[1]
무제의 하간국 행행 시, 망기자(운기로 길흉을 점치는 자)가 현지에 기녀가 있다고 고하자, 무제는 사람을 시켜 찾게 하였고, 조씨 성을 가진 소녀가 발견되었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손을 주먹으로 쥐고 펴지 않았다. 그러나 무제는 그녀의 손을 펴게 했고, 곡옥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제는 기뻐하며 조씨를 부인으로 맞아 총애했다.
구익부인은 임신 14개월 만에 유불릉(후의 소제)을 낳았다. 전설에 따르면 요 임금의 어머니도 임신 14개월 만에 요를 낳았다고 하며, 이에 무제는 궁궐 문에 "요모문"이라고 이름 붙였다.
2. 2. 총애와 소제 출산
젊어서부터 깨끗함을 좋아했던 조씨는 소녀 시절 6년 동안 병으로 앓아 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다.[1] 무제의 눈에 띄어 입궁한 그는 무제의 총애를 받아 14개월 만에 아들 소제를 낳았다. 전설에는 24개월 만에 출산했다고도 전해진다.[1]아들을 출산하면서 무제는 조첩여를 더욱 총애하였다. 무제는 늙어서 얻은 아들인데다가, 구익부인의 뱃속에서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나온 아들이라 각별히 산후조리를 보살폈다. 아들의 출생을 기념하여 특별 조회를 연 한무제는 예전의 요 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또는 24개월간 회임하였다가 낳았다는 고사를 말하며 학사들에게 명하여 구익부인의 산방(産房)에 "요모문(堯母門)"이라는 글을 짓게 했다.
무제가 하간국을 행행할 때, 망기자(운기로 길흉을 점치는 자)가 현지에 기녀가 있다고 하자, 무제는 사람을 시켜 찾게 하였다. 이때 조씨 성을 가진 소녀가 발견되었는데, 소녀는 어릴 때부터 손을 주먹으로 쥐고 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가 그녀의 손을 펴게 했고, 곡옥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제는 기뻐하며 조씨를 부인으로 맞아 총애했다.[1]
구익부인은 임신 14개월 만에 유불릉(후의 소제)을 낳았다. 요의 어머니도 임신 14개월 만에 요를 낳았다고 하며, 이에 무제는 궁궐 문에 "요모문"이라고 이름 붙였다.[1]
유불릉은 무제의 막내아들로서 총애를 받았다.
2. 3. 무고의 난과 죽음
기원전 91년 무고의 난으로 유거와 그 일족이 주멸된 후, 황태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1] 기원전 87년, 무제는 유불릉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여태후와 같은 외척의 전횡을 막기 위해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였다.[1]어느 날, 구익부인이 무제에게 죄를 얻어 유사에 넘겨졌다. 구익부인이 뒤돌아 무제를 보자, 무제는 "빨리 가라. 너는 이제 살 수 없다"라고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익부인은 사망했다.[1] 한서에는 그녀가 "불안"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죽음을 명받았다"고 명시되어 있다.[1]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데 동의한다.[2]
무제는 신하들에게 어린 황제와 젊은 어머니는 혼란을 야기하며, 여태후처럼 태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오해받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1] 무제는 구익부인이 자결한 뒤 복권시켰고, 아들 소제가 황위에 오른 뒤에는 태후로 추증했다.
3. 사후
기원전 87년 무제가 죽고 어린 아들 유불릉이 황제가 되었다.[2] 여태후와 같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한 무제는 구익부인을 죽게 하였는데, 소제는 즉위 후 어머니에게 황태후의 시호를 추증했다.[1]
3. 1. 추존과 능묘
무제는 조첩여가 자결한 뒤에 복권시켜 주었다. 아들 소제가 황위에 오른 뒤에는 태후로 추증하였고, 아들의 시호를 따 효소태후(孝昭太后)로 불렸다.[2] 소제는 효소태후에게 황태후를 추증하고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구익 부인(Lady Gouyi)의 능묘인 운릉(雲陵)을 건설하도록 했다. 또한 운릉현(雲陵縣)을 설치하고 3,000호의 주민을 이주시켜 능을 관리하게 했다.[1]운릉은 현재 섬서성 순화현에 있으며, 2013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지정 7-0667)로 지정되었다. 2016년 7월에는 능이 도굴당했으며, 2017년 11월 산시성 경찰은 91명의 묘 도굴 및 밀수 용의자를 체포하고 1,100점 이상의 유물을 회수했다.[3][4] 소제가 제위에 오르자, 망모에게 황태후를 추증하고 여릉으로 개장했지만, 구익부인의 친족이 관위를 얻는 일은 없었다.
3. 2. 전설
무제의 후궁 구익부인과 관련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구익부인은 젊어서부터 깨끗함을 좋아했으며, 소녀 시절 6년 동안 병으로 앓아 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다.[5] 무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 구익부인은 그의 총애를 받아 임신 14개월 만에 아들 소제를 낳았다. 전설에는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무제는 늙어서 얻은 아들이라 산후조리를 각별히 보살폈다. 또한 아들의 출생을 기념하여 특별 조회를 열고,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혹은 24개월)만에 요임금을 낳았다는 고사를 언급하며 학사들에게 구익부인의 산방(産房)에 "요모문(堯母門)"이라는 글을 짓게 했다.[5]
구익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시신은 죽어서도 차갑게 변하지 않았고 향기를 내뿜었으며, 나중에 관을 열었을 때는 비단 신발 한 짝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구익부인은 도교의 선인으로 숭배받게 되었다.[5] 《운양기》에 따르면, 무제가 구익부인의 영혼과 소통하기 위해 감천궁에 연설대를 세웠는데, 파랑새가 종종 연설대에 앉아 있다가 기원전 73년 선제 즉위 후 사라졌다고 한다.[1]
무제가 하간국을 행행했을 때, 망기자(운기로 길흉을 점치는 자)가 현지에 기녀가 있다고 고했다. 무제가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조씨 성을 가진 소녀가 나타났다. 소녀는 어릴 때부터 손을 펴지 못했는데, 무제가 손을 펴게 하자 곡옥을 쥐고 있었다. 무제는 기뻐하며 조씨를 부인으로 맞아 총애했다.[5]
구익부인은 임신 14개월 만에 유불릉(훗날 소제)을 낳았는데, 요의 어머니도 임신 14개월 만에 요를 낳았다는 전설에 따라 무제는 궁궐 문에 "요모문"이라고 이름 붙였다.[5]
참조
[1]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Antiquity Through Sui, 1600 B.C.E. - 618 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3-26
[2]
서적
History of Qin and Han
https://books.google[...]
Shanghai People's Publishing House
2003-01-01
[3]
뉴스
91 suspected tomb raiders, relics smugglers caught by Chinese police
http://news.xinhuane[...]
Xinhua
2017-11-17
[4]
뉴스
陕西警方破获"钩弋夫人"墓被盗系列大案 1100余涉案文物"上交国家"
http://china.chinada[...]
China Daily
2017-11-18
[5]
서적
Chinese Alchemy: Taoism, the Power of Gold, and the Quest for Immortality
https://books.google[...]
Weiser Books
2016-06-01
[6]
웹사이트
蔵彄
https://kotobank.jp/[...]
世界大百科事典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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