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누마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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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라누마 내각은 1939년 1월 5일부터 1939년 8월 30일까지 238일 동안 재임했다. 주요 외교 현안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이었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로 인해 "유럽의 정세는 복잡괴기"하다는 담화를 발표하며 총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군과 소련군 간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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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누마 내각 | |
---|---|
기본 정보 | |
내각 번호 | 제35대 |
관할 | 일본 |
국기 | [[파일:Flag of Japan.svg|일본 국기]] |
국가 원수 | 쇼와 천황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정부 수반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출범일 | 1939년 1월 5일 |
해산일 | 1939년 8월 30일 |
이전 내각 | 제1차 고노에 내각 |
다음 내각 | 아베 노부유키 내각 |
![]() | |
정치 | |
정치 체제 | 다수 (연립) |
의회 회기 | 제74회 제국의회 |
구성 | |
총 구성원 수 | 알 수 없음 |
이전 구성원 수 | 알 수 없음 |
정당 | 알 수 없음 |
역사 | |
성립 | 1939년 1월 5일 |
해산 | 1939년 8월 30일 |
2. 재직 기간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재직, 재직 일수는 238일이다.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갑작스럽게 사임하면서,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후임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히라누마는 사이온지 긴모치가 관념 우익적 언행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사 구라헤이 내대신의 상주와 대명 강하를 통해 총리대신에 오르게 되었다.
3. 내각의 구성
당시 입헌 민정당과 입헌 정우회는 각각 대신 1명만을 배출하여, 정당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관료와 군부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3. 1. 국무대신
담당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비고 |
---|---|---|---|---|---|
내각총리대신 | 히라누마 기이치로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추밀원 고문관, 흥아원 총재 겸임. |
외무대신 | 아리타 하치로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내무대신 | 기도 고이치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대장대신 | 이시와타 소타로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육군대신 | 이타가키 세이시로 | 군 (육군)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대만 사무국 총재 겸임 |
해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 | 군 (해군)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사법대신 | 시오노 스에히코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체신대신 겸임 |
문부대신 | 아라키 사다오 | 군 (육군)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농림대신 | 사쿠라우치 유키오 | 입헌민정당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상공대신 | 핫타 요시아키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척무대신 겸임 |
체신대신 | 시오노 스에히코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4월 7일 | 사법대신 겸임, 1939년 4월 7일 해임[3] |
타나베 하루미치 | 무소속 | 1939년 4월 7일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4월 7일 임명[3] | |
철도대신 | 마에다 요네조 | 입헌정우회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식민대신 | 핫타 요시아키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4월 7일 | 상공대신 겸임, 1939년 4월 7일 해임[3] |
고이소 구니아키 | 군 (육군) | 1939년 4월 7일 | 1939년 8월 30일 | 1939년 4월 7일 임명[3] | |
후생대신 | 히로세 히사타다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
무임소대신 | 고노에 후미마로 | 무소속 | 1939년 1월 5일 | 1939년 8월 30일 |
[1] 1939년(쇼와 14년) 1월 5일 임명[2]。 재임 기간은 238일.[3]
3. 2. 내각서기관장・법제국장관
직명 | 대 | 성명 | 출신 등 | 특명 사항 등 | 비고 | |
---|---|---|---|---|---|---|
내각서기관장 | 40 | 타나베 하루미치 | -- | 체신성 | 1939년 4월 7일 면[4] | |
41 | 오타 코조 | -- | 민간[5] | 1939년 4월 7일 임[4] | ||
법제국 장관 | 38 | 쿠로사키 테이조 | -- | 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 ||
3. 3. 정무차관
히라누마 내각의 정무차관은 1939년 1월 19일에 임명되었다.[6]직명 | 성명 | 출신 등 |
---|---|---|
외무 정무차관 | 시미즈 류자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내무 정무차관 | 한나 겐와 | 중의원/입헌민정당/예비역 해군 소장(해대 갑종 9기) |
대장 정무차관 | 마츠무라 코조 | 중의원/입헌정우회 |
육군 정무차관 | 니시무라 시게오 | 중의원/입헌정우회 |
해군 정무차관 | 마츠다 타케치요 | 중의원/입헌민정당 |
사법 정무차관 | 쿠라모토 요이치 | 중의원/입헌정우회 |
문부 정무차관 | 코야나기 마키에 | 중의원/입헌민정당 |
농림 정무차관 | 마츠무라 겐조 | 중의원/입헌민정당 |
상공 정무차관 | 이마이 켄코 | 중의원/입헌정우회 |
체신 정무차관 | 히라카와 마츠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철도 정무차관 | 쿠도 토시오 | 중의원/입헌정우회 |
척무 정무차관 | 테라다 이치마사 | 중의원/입헌정우회 |
후생 정무차관 | 츠자키 나오타케 | 중의원/입헌정우회 |
3. 4. 참여관
1939년 1월 19일에 임명되었다[6].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외무 참여관 | 하시모토 다이키치 | 중의원/입헌정우회 | |
내무 참여관 | 나카이 가즈오 | 중의원/입헌정우회 | |
대장성 참여관 | 야노 쇼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육군 참여관 | 나카이가와 히로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해군 참여관 | 나카하라 킨지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사법성 참여관 | 하마노 테쓰타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문부성 참여관 | 노나카 데쓰야 | 중의원/국민동맹 | |
농림성 참여관 | 하야시 조지 | 중의원/입헌정우회 | |
상공성 참여관 | 사와다 토시요시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체신성 참여관 | 우에다 코키치 | 중의원/입헌정우회 | |
철도성 참여관 | 아오키 료칸 | 중의원/입헌민정당 | |
척무성 참여관 | 에토 겐쿠로 | 중의원/일본혁신당/예비역 육군 소장(육사 11기) | |
후생성 참여관 | 아야베 겐타로 | 중의원/입헌정우회 |
4. 내각의 주요 정책 및 활동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뒤를 이은 히라누마 내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고 국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외교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결국 내각은 오래가지 못했다.[7]
히라누마 내각의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삼국 동맹''' 추진: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은 고노에 정권부터 추진되어 온 주요 외교 현안이었으나, 히라누마 내각은 외교적,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내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시즘에 의한 사회주의에 반대했던 히라누마 수상은 이 문제로 육군과 대립했다.
- '''노몬한 사건''' 발생: 1939년 5월, 일본군과 소련군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보았지만, 소련이 피해를 숨긴 채로 일관하여 국경선을 둘러싼 전후 교섭에서는 대체로 소련의 주장이 통과되었다.[7]
4. 1. 외교 정책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뒤를 이은 히라누마 내각의 주요 외교 정책은 다음과 같다.- '''삼국 동맹''' : 독일, 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은 고노에 정권부터 추진되어 온 주요 외교 현안이었다. 그러나 히라누마 총리는 파시즘에 의한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육군과 대립했다.[7]
- * 1939년 1월 19일 5상 회의의 타협안:
:*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무력 원조는 영국, 프랑스에 대해 소련과 같은 정도로 할지는 상황에 따른다.
:*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참전 의무를 지는 것을 확약.
:* 아리타 하치로 외무상은 취소 또는 교섭 중단을 주장했지만,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 대신의 반대로 좌절.[7]
- * 1939년 6월 5일, 타협안 제시:
:* 독일·이탈리아와 영국·프랑스 간의 전쟁의 경우,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하고, 영국·프랑스 측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일본은 현재 및 가까운 장래에 유효한 무력 원조는 할 수 없다.
:* 이탈리아는 동의했지만, 독일은 반대.[7]
- *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 1939년 8월, 이타가키 육군은 무조건적인 동맹 체결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히라누마 수상, 아리타 외상 등과 대립했다.
:* 오시마, 시라토리 양 대사도 계속해서 사임을 시사하는 등 정권 붕괴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7]
- '''노몬한 사건''' : 1939년 5월, 일본군과 소련군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보았지만, 소련이 피해를 숨긴 채로 일관하여 국경선을 둘러싼 전후 교섭에서는 대체로 소련의 주장이 통과되었다.[7]
결국 1939년 8월 22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친독 반소" 외교 노선은 근본적으로 뒤집혔다. 히라누마 내각은 "유럽의 정세는 복잡괴기"하다는 말을 남기고 8월 28일 총사직했다.[7][8]
5. 내각의 종말
1939년 8월 22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친독 반소"를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히라누마 내각의 외교 정책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7][8] 히라누마 총리는 "유럽의 정세는 복잡괴기"하다는 말을 남기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1939년 8월 28일,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후임으로는 아베 노부유키 육군 대장이 선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iranuma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9-01-05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9-04-07
[4]
간행물
『官報』第367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9-04-08
[5]
문서
[6]
간행물
『官報』第3611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39-01-20
[7]
논문
ファシズム外交の論理と国際認識:日本外交の国際認識 その史的展開
https://cir.nii.ac.j[...]
[8]
뉴스
平沼内閣けさ総辞職外交新発足の必要痛感(辞表奉呈後首相声明)
https://klib.ndl.go.[...]
大阪朝日新聞
193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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