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타 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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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타 하치로는 1884년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한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외무성에서 근무하며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관여했으며, 삼국 동맹에는 반대했다. 히로타 고키,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전후에는 일본사회당에 참여하여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잔치 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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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하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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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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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리타 하치로 |
원어 이름 | 有田 八郎 |
로마자 표기 | Arita Hachirō |
출생일 | 1884년 9월 21일 |
출생지 | 니가타현 사도시 |
사망일 | 1965년 3월 4일 |
사망지 | 도쿄도 |
정당 | 일본사회당 (1955-1965) |
학력 | 도쿄대학 법과대학 독법학과 |
배우자 | 야스 아제가미 테루이 |
친족 | 야마모토 테이지로(형) |
경력 |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관직 | |
직책 | 외무대신 |
첫 번째 임기 시작 | 1936년 3월 |
첫 번째 임기 종료 | 1937년 2월 |
첫 번째 총리 | 히로타 고키 |
두 번째 임기 시작 | 1938년 10월 29일 |
두 번째 임기 종료 | 1939년 8월 30일 |
두 번째 총리 | 후미마로 고노에 기이치로 히라누마 |
세 번째 임기 시작 | 1940년 1월 16일 |
세 번째 임기 종료 | 1940년 7월 22일 |
세 번째 총리 | 미쓰마사 요나이 |
이전 외무대신 | 히로타 고키 가즈시게 우가키 기치사부로 노무라 |
다음 외무대신 | 센주로 하야시 노부유키 아베 요스케 마쓰오카 |
귀족원 의원 임기 시작 | 1938년 2월 10일 |
귀족원 의원 임기 종료 | 1946년 2월 16일 |
중의원 의원 임기 시작 | 1953년 4월 13일 |
중의원 의원 임기 종료 | 1955년 2월 27일 |
선거구 | 구 니가타 1구 |
당선 횟수 | 1회 |
2. 생애
아리타 하치로는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중학교,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09년(메이지 42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독법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갔다.[7][8] 이후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며 외교관, 외무대신,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쇼와 13년)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다.[5][9]
1946년(쇼와 21년) 공직추방되었다가[14] 해제 후 1953년(쇼와 28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고향인 니가타 1구에서 혁신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소소파 클럽'에 소속되었다.[5]
1955년(쇼와 30년) 도쿄도지사 선거와 1959년(쇼와 34년) 도지사 선거에 일본사회당 추천으로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5]
1961년(쇼와 36년) 자신의 재혼과 이혼을 과장되게 썼다며 소설 『잔치 후』를 쓴 미시마 유키오 등을 상대로 프라이버시 침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 중이던 1965년(쇼와 40년) 3월 4일 사망했다. 향년 80세. 사망일을 기하여 은배 한 벌을 받았다.[15] 소송은 사후 화해로 마무리되었다.
2. 1. 외교관 시절

아리타 하치로는 1909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7][8] 1919년 베르사유 조약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초기에는 봉천과 호놀룰루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1930년에는 오스트리아 주재 일본 대사로 부임했다. 1932년 잠시 외무차관으로 귀국했으나, 1933년 벨기에 대사로 유럽에 돌아갔다.[1]
외무성에서 아시아국장, 오스트리아 공사, 외무차관, 벨기에 대사, 중화민국 대사 등을 역임했다.[7] 1939년 7월부터 8월까지 주일 영국대사 로버트 크레이기와의 사이에 아리타-크레이기 회담을 열어 텐진 사건에서의 영불 조계 봉쇄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영국 측의 타협으로 영국은 중국에서 일본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적 합의(아리타-크레이기 협정)가 성립되었다.
1940년 7월 3일, 아리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외교방침을 호소했으나, 육군 측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있다고 반발했다. 아리타는 하타 슌로쿠 육군대신을 방문하여 유감의 뜻을 전했고[12], 외무성과 육군 사이에 문제 해결이 모색되었으나, 7월 16일에 하타 육군대신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요나이 내각은 총사퇴했다.[13]
2. 2. 외무대신 시절
아리타 하치로는 1936년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처음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7] 1938년 제1차 고노에 개조내각에서 우가키 가즈나리가 사임한 후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의 동의를 얻어 외무대신에 취임하였다. 이후 1939년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 1940년 요나이 미츠마사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7]아리타는 삼국동맹에 반대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지만, 일본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러 차례 타협을 해야 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코노에 후미마로와 함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협력했는데, 아리타는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반면 코노에는 범아시아 통합을 강조했다.[1]
193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주일 영국대사 로버트 크레이기와의 사이에 아리타-크레이기 회담을 열고 텐진 사건에서의 영불 조계 봉쇄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영국은 중국에서 일본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적 합의(아리타-크레이기 협정)를 이끌어냈다.
1940년 7월 3일, 아리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외교방침을 발표했으나, 육군 측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표현이 있다고 반발했다. 아리타는 하타 슌로쿠 육군대신을 방문하여 유감의 뜻을 전했지만,[12] 7월 16일 하타 육군대신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요나이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13]
2. 3. 전후 정치 활동
일본의 항복 이후, 아리타 하치로는 연합군에 의해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14] 이후 복귀하여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며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아리타는 시로카네다이(白金台)의 고급 요정 주인 아제가미 테루이(姉ヶ崎テルイ)와 결혼했다.[2]1955년과 1959년, 아리타는 일본 사회당 후보로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낙선했다. 1959년 선거 당시, 그의 아내는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요정을 담보로 제공했다. 낙선 후, 부부는 빚에 시달렸고, 테루이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와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등 보수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요정 재개업 자금을 모으려 했다. 이로 인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 같은 해 이혼했다.[2]
1961년, 아리타는 자신의 재혼과 이혼 과정을 과장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소설 『잔치 후』를 쓴 미시마 유키오와 출판사를 상대로 "프라이버시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잔치 후』재판 참조). 그러나 재판 중이던 1965년 3월 4일 사망했으며, 향년 80세였다.[15] 소송은 아리타 사후 화해로 마무리되었다.
2. 4. 만찬 후 사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만찬 후』는 아리타 하치로와 테루이 주조의 관계, 그리고 1959년 선거 상황을 모델로 했다. 1960년 출판 이후, 아리타는 미시마를 상대로 개인정보보호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도쿄 지방법원은 1964년 9월 아리타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는데, 이는 일본 법원에서 공인의 사생활 보호권이 인정된 최초의 사례였다.[2][3]2. 5. 사망
有田 八郎|아리타 하치로일본어는 1965년 3월 4일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사망일을 기하여 은배 한 벌을 받았다.[15] 그는 자신의 재혼과 이혼(후술) 사정을 과장되게 썼다며 불안감을 느껴, 자신을 모델로 한 소설 『잔치 후』를 집필한 미시마 유키오와 당시 단행본 출판사를 "프라이버시 침해"에 해당한다고 고소하였으나(『잔치 후』재판 참조), 재판 중 사망하여 소송은 사후에 화해하였다.[15]3. 정책 및 사상
아리타 하치로는 전쟁 전 "서구 협조파"에 대비되는 "아시아파" 외교관으로 알려졌다. 1936년 히로타 고키 내각 당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방공 협정을 여러 차례 제안했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때는 "동아 신질서 건설"을 추진했다.[5] 일·독 방공 협정은 체결했지만,[5]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는 끝까지 반대했다.[7]
전후에는 혁신 진영에 속해 일본의 재군비에 반대했다.
3. 1. 외교 정책
아리타 하치로는 삼국동맹에 반대했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 정계에서 군부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여러 차례 타협을 강요받았다.[1]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코노에 후미마로와 함께 선전 목적으로 모호한 목표를 의도적으로 제시한 대동아공영권을 창출하기 위해 협력했다. 아리타는 마쓰오카 요스케의 요청으로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반면, 코노에는 범아시아 통합을 강조했다.[1]전쟁 전, 아리타는 “서구 협조파”에 대한 “아시아파”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6년(쇼와 11년) 히로타 고키 내각 시대에 장제스의 국민정부와의 방공 협정을 여러 차례 제안했고, 코노에 후미마로 내각 시대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추진했다.[5] 그는 일·독 방공 협정을 체결했지만,[5]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는 끝까지 반대했다.[7]
추방 해제 후에는 혁신 진영에 속해 일본의 재군비에 반대했다.
3. 2. 전후 사상
일본의 항복 이후, 아리타 하치로는 연합군에 의해 공직에서 숙청되었다.[2] 숙청이 해제되자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53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미망인이었던 아리타는 시로카네다이(白金台)의 고급 요정 주인 아제가미 테루이(姉ヶ崎テルイ)와 결혼했다.[2]아리타는 1955년과 1959년에 일본 사회당 후보로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낙선했다. 1959년 선거 당시 그의 아내는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요정을 폐업하고 담보로 제공했다. 낙선 후 부부는 빚에 시달렸다. 테루이는 요시다 시게루와 사토 에이사쿠와 같은 보수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요정을 다시 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같은 해 이혼했다.[2]
전쟁 전에는 “서구 협조파”에 대한 “아시아파”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1936년(쇼와 11년) 고다 내각 시대에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방공 협정을 여러 차례 제안했고, 고노에 내각 시대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추진했다.[5] 일·독 방공 협정을 체결했지만[5]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는 끝까지 반대했다.[7]
추방 해제 후에는 혁신 진영에 속해 일본의 재군비에 반대했다.
4. 가족 및 친족
아리타 하치로는 사토 요시주로의 양녀였던 야스(安子)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31] 야스는 1887년(메이지 20년) 8월에 태어나[6]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1953년(쇼와 28년), 아리타는 도쿄 시로카네다이에 있는 요정 반냐엔의 경영자 아제가미 테루이(畔上輝井, 1906년 – 1989년)와 재혼했다.[16] 1959년(쇼와 34년) 아리타가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아제가미는 요정을 닫고 그를 지원했다. 고토 케이타에게 요정을 담보로 선거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기시 노부스케 수상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낙선 후,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된 아리타는 시이나마치의 자택과 토지를 매각해야 했다. 한편, 아제가미가 요시다 시게루에게 요정 재개를 위한 자금 지원을 부탁하면서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17] 결국 1955년(쇼와 30년) 이혼했다.
4. 1. 야마모토 가문
- 아버지: 야마모토 케이 - 한의사
- 형: 테이지로[7]
- *: 1870년 (메이지 3년)생 - 1937년 (쇼와 12년) 12월 사망
- *: 헌법정우회 소속 정당 정치가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 및 이누카이 내각에서 농림대신을 역임했다.
4. 2. 아리타 가문
니가타현 사도군 마노무라(현 사도시 마노)의 야마모토가에서 태어나 아리타가의 양자가 되었다. 양부 아리타 신페이(有田真平)는 니가타니치니치신문에 기고한 글로 인해 불경죄로 고발되어 니가타 감옥에서 27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하치로의 아버지는 신페이를 동정하여 하치로를 아리타가에 양자로 들였다.[30]아리타 하치로는 두 번 결혼하였다. 전처는 야스(安子)(아야코)로,[31] 사토 요시주로의 양녀였다.[31] 1887년(메이지 20년) 8월에 태어나[6]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후처는 반냐엔 경영자 아제가미 테루이(畔上輝井)로, 1953년에 결혼했다가 1955년에 이혼했다.
아리타 하치로와 전처 야스와의 사이에는 5남 2녀가 있었다.
자녀 | 이름 | 출생년도 | 기타 |
---|---|---|---|
장남 | 아리타 타츠로(有田辰郎)[31] | 1904년(메이지 37년)[31] | 분가[31] |
장녀 | 미치(道)[31] | 1906년(메이지 39년) 3월[31] | 사토 요시이치로에게 시집감[31] |
차녀 | 만리코(万里子)[31] | 1912년(다이쇼 원년)[31] | 야마무로 무네후미 장남 무네타다에게 시집감[31] |
사남 | 아리타 코키치(有田浩吉)[31] | 1915년(다이쇼 4년)[31] | 의사, 1979년 사망. 배우자는 남작타마마츠 코슈(타마마츠 마사유키의 사남)의 딸 묘코[31] |
오남 | 아리타 케이스케(有田圭輔)[31][33] | 1917년(다이쇼 6년) | 외무심무차관, 국제협력사업단 총재 역임, 2005년 사망 |
5. 수상 경력
연도 | 훈장 및 수상 내역 |
---|---|
1920년 | 훈사등 욱일소수장[21] |
1925년 | 정오위[18] |
1926년 | 욱일중수장[22] |
1933년 | 정사위[19] |
1936년 | 훈일등 수보장[23], 벨기에 왕국 레오폴드 훈장 그랑크로아, 룩셈부르크 대공국 오크 크라운 훈장 그랑크로아[25] |
1937년 | 나치 독일 독일 독수리 대십자 훈장[26] |
1940년 | 정삼위[20],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24], 헝가리 왕국 메리트 온그로아즈 훈장 프르미에르[27] |
1943년 | 왕징웨이 정권 특급 동광훈장[28] |
6.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36년 | 제69회 제국의회에서의 아리타 외무대신 연설 (쇼와 11년 5월 6일) | 외무성 | |
1937년 | 제70회 제국의회에서의 아리타 외무대신 연설 (쇼와 12년 1월 21일) | 외무성 | |
1937년 | The address of Mr. Hachiro Arita,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at the 70th Session of the Imperial Diet, January 21, 1937|아리타 하치로 외무대신의 제70회 제국의회 연설, 1937년 1월 21일영어 | Ministry of Foreign Affairs영어 | |
1945년 7월 | 상주 | [출판사 불명] | |
1948년 10월 | 사람 눈의 티끌을 보다 외교 문제 회고록 | 대일본웅변회고단샤 | |
1952년 4월 | 내가 보는 재군비 | 아사히 신문사 | |
1952년 12월 | 내가 보는 재군비 (신장판) | 아사히 신문사 | |
1954년 2월 |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의 재군비 | 헌법옹호국민연합 | |
1957년 11월 | 종전 건백서 | 대학서방 | 이시미 에이키치(石見栄吉) 편집 |
1958년 3월 | 앞으로의 도쿄 도정 개혁에 대한 나의 견해 | 일본사회당 출판부 | |
1959년 12월 | 바보 8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한 외교관의 회상 | 광화당 | |
2002년 12월 | 일본 외교사 인물총서 제16권 | 유마니 서방 | 요시무라 미치오(吉村道男) 감수, 「사람 눈의 티끌을 보다」, 「바보 8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복각 수록 |
2022년 2월 | 바보 8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한 외교관의 회상 | 중앙공론신사 | 중공문고, 타케우치 히로시 해설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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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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両顧問が辞表、対中国中央機関問題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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専任外相に有田八郎、拓務大臣は八田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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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相が陸相に遺憾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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畑陸相が辞任、米内内閣総辞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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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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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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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電事件
https://www.afl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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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新おんな系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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