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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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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야전원수까지 진급했다. 그는 1875년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육군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는 국방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독소 전쟁 등 주요 전투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나, 덩케르크 철수, 키예프 전투 지연 등의 문제로 히틀러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45년 연합군에 체포되어 전범으로 기소될 뻔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고 석방되었고, 195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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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기본 정보
1940년의 룬트슈테트
룬트슈테트 (1940년)
출생 이름카를 루돌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출생일1875년 12월 12일
출생지아셔슬레벤, 작센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53년 2월 24일
사망지하노버, 니더작센주, 서독
매장지슈퇴케너 묘지
별칭마지막 프로이센 군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명
서명
소속
충성독일 제국 (1892–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
나치 독일 (1933–1945)
군종독일 제국 육군
국방군
프로이센 육군
복무 기간1892–1945년
최종 계급원수
지휘
지휘 부대남부 집단군
A 집단군
OB 서부
주요 참전
전투/전쟁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제1차 마른 전투 (1914)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브주라 전투 (1939)
서부 전선
벨기에 전투
프랑스 공방전
스당 전투 (1940)
덩케르크 철수 (1940)
디에프 기습
노르망디 전투 (1944)
지크프리트 선 공방전 (1944)
마켓 가든 작전 (1944)
퀸 작전 (1944)
벌지 전투 (1944–1945)
서부 연합군의 독일 침공 (1945)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1941)
우만 전투 (1941)
제1차 키예프 전투 (1941)
아조프 해 전투 (1941)
제1차 로스토프 전투 (1941)
훈장
훈장백엽검 기사 철십자장
가족
배우자루이제 "빌라" 아가테 마리 폰 괴츠 (1902년 1월 22일 결혼)
자녀1명
친척게오르크 하인리치 (사촌)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사촌)
루돌프 그라프 폰 슈메토우 (조카)
기타 정보
재판뉘른베르크 재판 증인
영국 군사 법정
전쟁 범죄자

2. 어린 시절

1875년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아셰르슬레벤에서 기병 장교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101][102][103] 폰 룬트슈테트 가문은 12세기 초 할버슈타트 주교를 섬기는 궁정 장관이었다고 한다.[102] 이후 가문의 일원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으로 이주하여 융커가 되었다.[102] 다른 융커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군인을 배출한 명문 군인 가문이었다.[104]

폰 룬드슈테트는 할레 북쪽 작센-안할트주 프로이센 작센의 아셰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복무한 기병 장교 게르트 아놀드 콘라트 폰 룬드슈테트의 장남이었다. 폰 룬드슈테트 가문은 오래된 용커 가문으로, "우라델"(구 귀족)로 분류되었지만, 작위는 없었고 부유하지도 않았다.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이후 거의 모든 폰 룬드슈테트 남성들은 프로이센 육군에서 복무했다. 룬드슈테트의 어머니 아델하이트 피셔는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 혈통이었다.[1] 그는 네 명의 형제 중 장남이었고, 모든 형제들은 육군 장교가 되었다. 폰 룬드슈테트의 교육은 프로이센 군인 가족들에게 정해진 길을 따랐다. 코블렌츠 근처 다이스의 사관학교, 그리고 베를린 리히터펠데의 육군사관학교였다.

기병 연대에 입대할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2] 1892년 3월 폰 룬드슈테트는 사관후보생(Portepee Fähnrich|포르테페 페흔리히de)으로 제83보병연대에 입대했다. 이 연대는 헤세-카셀의 카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고 1945년까지 이곳에 집을 유지했다. 그는 한노버의 군사학교(Kriegsschule|크릭스슐레de)에서 추가 훈련을 받은 후, 1893년 6월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상관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1896년에는 연대 부관이 되었고, 1903년에는 베를린의 명문 전쟁사관학교(Kriegsakademie|크릭스아카데미de)에 3년간의 참모 장교 훈련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과정이 끝날 무렵 룬트슈테트는 "뛰어나게 유능한 장교... 참모본부에 매우 적합한 인물"로 묘사되었다.[3] 그는 1902년 1월 루이제 "빌라" 폰 괴츠와 결혼했고, 그들의 외아들 한스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는 1903년 1월에 태어났다.

3. 제1차 세계 대전

룬트슈테트는 1914년 벨기에 침공 당시 제22사단 참모장을 역임했으나, 사단이 초기 진격 중 예비대로 남아 있었기에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1914년 12월 폐질환을 앓던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앤트워프 군정에 배속되었다.[103][105][106] 1915년 4월 건강을 회복한 그는 막스 폰 갈비츠 장군의 부대가 활동하던 동부 전선에서 제86보병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다시 행정직에 임명되어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독일 점령지역인 폴란드 군정에 배속되었다. 그는 1916년 11월까지 이 직책에 머물렀다가 제25예비군단 참모장으로 승진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군과 많은 전투를 경험했다. 1917년 10월 그는 폴란드 북부의 제53군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 10월 혁명으로 러시아군이 붕괴되고 동부 전선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1918년 8월 룬드슈테트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알자스의 제15군단에서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장군 휘하 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11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보트머는 그를 "매우 훌륭한 참모장이자 친절한 동료"라고 묘사했다. 그는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푸르 르 메리트에도 추천되었지만 받지는 못했다. 그는 소령 계급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마쳤지만 참모 장교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4.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룬드슈테트의 군단은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의 여파로 와해되었지만, 대부분의 장교들이 제대된 반면, 그는 붕괴된 군대의 지휘를 맡은 빌헬름 그뢰너 장군의 요청으로 군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참모본부에 복귀했지만,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참모본부는 폐지되었다.[4] 10월, 룬드슈테트는 슈투트가르트에 주둔한 제5군관구(독일어: Wehrkreis)의 참모에 배속되어 발터 폰 베르크만 장군 휘하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3월에 일어난 카프 폭동 당시 그는 그곳에 있었다. 베르크만과 룬드슈테트는 대부분의 군 지휘부와 마찬가지로 쿠데타 시도를 지지하지 않았다. 룬드슈테트는 나중에 카프 폭동을 "실패였고, 매우 어리석은 실패였다"고 묘사했다.[4] 룬드슈테트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군주제 지지자였다.[5] 이것은 장교가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정부의 성격에 관계없이 당시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 내내 이 견해를 굳게 지켰다. 그는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우리 장군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우리끼리 정치적 논의를 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룬드슈테트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허용받은 10만 명의 소규모 군대(독일어: 라이히스베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1920년 5월, 그는 바이마르에 주둔한 제3기병사단의 참모장이 되어, 기병대 지휘관이 되고자 했던 그의 초기 야망을 달성했다. 1920년 중령(독일어: Oberstleutnant)으로 진급했고, 1923년에는 슈테틴에 주둔한 Wehrkreis II로 전속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1926년, 그는 서독 전역을 관할하고 카셀에 주둔한 집단사령부(독일어: Gruppenkommando) 2의 참모장이 되었고, 소장(독일어: Generalmajor)으로 진급했다. 1928년 룬드슈테트는 참모직을 떠나 브레슬라우에 주둔한 제2기병사단 사령관이 되었다. 독일과 폴란드의 긴장된 관계와 당시 폴란드가 독일보다 훨씬 큰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최전선 배치로 여겨졌다.

1932년 1월, 폰 룬드슈테트는 베를린에 주둔한 Wehrkreis III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제3보병사단 사령관도 맡았다. 이로써 그는 57세의 나이에 독일군 최고위 계급에 올랐고, 중장(독일어: Generalleutnant)으로 진급했다. 또한 이는 그를 대공황과 그에 따른 히틀러의 나치당 부상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치 세계와 불가피하게 밀접하게 접촉하게 만들었다. 국방장관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은 나치를 정부에 끌어들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수상인 프란츠 폰 파펜은 독일 최대 주인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치를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룬드슈테트는 이러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2년 7월 파펜은 긴급 권한을 이용하여 프로이센 정부를 해산시켰다. 베를린에서는 계엄령이 잠시 선포되었고 룬드슈테트는 계엄령 전권 대표가 되었다. 그는 파펜에게 항의했고 며칠 후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10월 룬드슈테트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동독 전역을 관할하는 Gruppenkommando 1 사령관이 되었다.

5. 나치당 정권

룬트슈테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고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군에 남아있었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총리가 프로이센사회민주당 정권을 전복했을 때, 룬트슈테트는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역의 집행권을 위임받았다.[114][115] 그는 프로이센 주 정부 청사를 무혈 제압하고, 카를 제퍼링크 등 프로이센 정부 각료에게 해임을 통보했다.[115]

나치당 정권 하에서도 1938년까지 베를린에 주둔하는 제1집단 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하며 육군의 중추 인물로 남아 있었다.[116] 그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공감했던 것은 아니지만, 군비 확장 노선에는 공감했고, 1934년 장검의 밤에서의 돌격대(SA) 간부 숙청도 기뻐했다.[117] 다만, 이 사건에서 전 총리 쿠르트 폰 슈라이히어가 숙청된 것에 대해서는 반발했고, 사건 후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와 엘빈 폰 비츠레벤 등과 함께 에른스트 룀에게 사건의 모든 책임을 떠넘겨 슈라이히어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모의했다.[118]

1934년, 왼쪽부터 룬트슈테트, 프리치, 블롬베르크


군의 기계화에 대해서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육군 내에서 싫어졌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전술 이론에도 이해를 보이며 기갑사단 창설을 후원했다.[104] 다만 그는 전차가 전장의 주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매우 유능한 하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117]

1938년 3월에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이 무렵 블롬베르크·프리치 해임 사건이 발생했다. 억울한 누명으로 동성애자 의혹을 받아 육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난 프리치에 대한 처우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항의했다.[119] 친위대의 음모라고 확신한 프리치로부터 결투장을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룬트슈테트는 그 결투장을 수 주일 동안 가지고 다녔지만 힘러에게 전달할 마음이 들지 않아, 프리치를 설득하여 결투장을 철회하게 했다.[120]

1938년 9월에는 제2군 사령관에 취임했다.[105] 수데텐 위기 시에는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연명으로 히틀러에게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외교는 삼가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119] 10월의 수데텐 지방 병합 때에는 군 집단 사령관에 임명되어 수데텐 진주를 지휘했다.[103]

그러나 그 직후인 1938년 10월 31일에 예편 명령을 받았다.[121] 예편에 앞서 그가 대령 시절 연대장을 역임했던 제18보병연대에서 명예연대장 직함을 받았다.[105][122] 그는 이에 매우 감사했고, 원수가 된 후에도 대령(연대장) 제복에 원수 계급장을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122]

룬트슈테트가 명예 연대장의 상의에 달았던 깃장(소좌급)과 어깨 장식(원수 계급장)

6.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룬트슈테트는 다시 소환되어 남부 집단군을 지휘, 폴란드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군을 서쪽으로 돌려 만슈타인의 프랑스 침공을 지원했으며, 이 전투 기간 동안 7개 전차사단과 3개 기계화 보병사단, 그리고 35개 일반 보병사단을 지휘하였다.[116]

1940년 5월 14일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사단이 뫼즈강을 도하하여 연합군 전선에 구멍을 뚫었다. 룬트슈테트는 보병 지원이 없는 상태로 기갑사단의 생존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보병이 당도할 때까지 진격을 일시 중단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수년간 논쟁거리가 되었다. 룬트슈테트는 이 명령이 히틀러의 결정이었으며, 또한 히틀러는 남아있는 영국군에게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영국이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의 본심이 무엇이었는가의 문제는 이제 확인할 수 없고, 그가 망설임 끝에 마지못해 내린 결정일지도 모르는 일인데다가, 일단 히틀러가 룬트슈테트에게 일임한 이상 이 일의 최종 명령은 룬트슈테트가 내린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126]

1940년 7월 19일 룬트슈테트는 야전원수로 승진하여 바다사자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전이 취소된 이후에는 룬트슈테트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주둔군 지휘와 해안방어의 임무가 주어졌다.[130][131]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룬트슈테트는 남부 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진격로의 지형, 장갑 부대 부족, 강력한 소련군 주력 부대와의 대치 등으로 인해 북부 집단군이나 중앙 집단군에 비해 진격이 더뎠다.[133][134][135]

7월, 키예프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중앙 집단군 소속 구데리안 장갑 집단의 지원을 받아 9월에 키예프를 함락했다.[136][137]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5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소련군 남서부 전선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대장도 전사했다. 이 전투는 소련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모스크바 공격을 2개월 가까이 지연시켰다.[138]

1941년 러시아. 명예 연대장 복장의 룬트슈테트, 무솔리니, 히틀러.


겨울이 되면서 로스토프 전투에서 히틀러의 후퇴 금지 명령을 어기고 로스토프에서 전술적으로 후퇴했다. 이 때문에 12월, 히틀러는 룬트슈테트를 남부 집단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후임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라이프슈탄달테 사단장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자신의 판단 실수를 인정하고 룬트슈테트의 조기 복귀를 약속했다.[139]

1942년 3월, 히틀러는 룬트슈테트를 다시 불러 서부전선의 지휘관(OB West)으로 임명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냈지만, 디에프 기습 상륙을 통해 연합군의 상륙 위협이 현실화되었다.[139]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영군이 알제리에 상륙하자 1942년 11월 11일 비시 프랑스를 점령했다. 1943년에는 서부 최고 사령부는 비교적 평온했고, 룬드슈테트는 업무 중간에 영어 추리 소설이나 모험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140]

에르빈 롬멜과 함께, 1943년 12월


미영군의 프랑스 상륙 위험이 커지면서, 룬드슈테트는 부하인 B군 집단 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와 함께 연합군 상륙 저지 작전을 협의했다.[140] 프랑스 연안에 대서양의 벽을 건설했지만,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을 예상한 반면 룬드슈테트는 칼레 상륙을 예상했다.[140] 룬드슈테트는 연합군 상륙 후 기갑 부대로 야전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생각하여 요새 건설을 쓸모없다고 여겼지만, 롬멜은 해안에서의 격멸을 주장하며 요새 건설에 찬성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노르망디를 중시하는 방침을 지지했다.[141]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독일군 주력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효과적인 반격을 할 수 없었다.[142] 1944년 초부터의 공습으로 북프랑스의 수송 기관은 파괴되었고, 제공권도 연합군에게 빼앗겼다.[143] 연안 진지는 미영군에 의해 하루 만에 돌파되었고, 룬트슈테트의 반격 작전도 연합군의 공습으로 실패했다. 룬드슈테트는 6월 30일 히틀러에게 조기 강화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히틀러는 7월 2일 룬드슈테트를 서부 최고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142]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중앙), 에르빈 롬멜(왼쪽), 알프레드 게스와 보도 지멜만(오른쪽), 1943년 12월


같은 달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룬드슈테트는 국방군 원로로서 "명예 법정"의 일원이 되어 암살 계획 가담자의 불명예 제대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가담자들은 군사재판이 아닌 롤란트 프라이슬러 장관의 인민 법정에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144]

귄터 폰 클루게 원수의 자살 이후, 발터 모델이 서부 최고 사령관과 B군 집단 사령관을 겸임했지만, "두 사령관직을 맡는 것은 어렵다"고 히틀러에게 호소하여, 9월에 룬드슈테트가 서부 최고 사령관으로 복귀했다.[142][145] 룬드슈테트는 지크프리트 선을 강화하고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했다.[145] 10월 17일 롬멜의 국장에는 총통 대리로 참석하여 조사를 낭독했다. 룬드슈테트는 전후 롬멜의 죽음에 얽힌 사정을 당시에는 몰랐다고 주장한다.[146]

히틀러의 대규모 공세 계획에 대해, 룬드슈테트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B군 집단 발터 모델 원수와 함께 "라인 방어 작전"을 세워 지휘했다.[147] 1944년 12월 16일부터 아르덴 공세가 시작되었다. 북쪽 공세군에서는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선두에 섰지만 스타브로에서 멈췄고, 미군에 의해 고립되었다.[148] 남쪽 공세군은 바스토뉴에서 미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미군은 버텼고, 12월 26일 조지 패튼 장군의 제3군이 독일군 공수 부대의 공격을 격퇴하며 바스토뉴에 도착하여 공략은 불가능해졌다.[149] 룬드슈테트는 12월 24일 아르덴 공세의 실패를 확신하고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149] 1945년 1월 3일, 바스토뉴의 미군을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150] 이후 독일군은 방어하며 후퇴했고, 2월 7일 독일 영토로 침공을 받았다.[150] 3월, 레마겐 철교가 미군에게 점령당한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147]

6. 1. 폴란드 침공

1939년 5월, 폴란드 침공을 계획했던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현역으로 복귀했다.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대폴란드 전쟁에는 남부 집단군 사령관으로 참가했다.[116] 남부 집단군에는 제8군, 제10군, 제14군의 3개 군이 속했고, 제8군과 제10군은 슐레지엔 지방에서, 제14군은 슬로바키아에서 폴란드 영토로 침공했다.[123] 남부 집단군에는 4개의 기갑사단이 배속되었고, 그들은 모두 바르샤바로 향하는 최단 거리에 있는 제10군에 속했다.[123]

제10군이 바르샤바를 향해 급속 진격했다. 9월 9일에 제8군이 폴란드군으로부터 반격을 받았지만, 룬트슈테트와 그의 참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중장의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이를 물리쳤다.[124] 폴란드 전쟁에서의 전공으로 9월 30일에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125] 폴란드 전쟁 후에는 폴란드 점령군을 통괄하는 동방 총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106][116][125]

6. 2. 프랑스 침공

1940년 11월 독일군 점령하 파리.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학예원으로부터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룬트슈테트 원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룬트슈테트는 다시 소환되어 남부 집단군을 지휘, 폴란드 침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군을 서쪽으로 돌려 만슈타인의 프랑스 침공을 지원했으며, 이 전투 기간 동안 7개 전차사단과 3개 기계화 보병사단, 그리고 35개 일반 보병사단을 지휘하였다.[116]

1940년 5월 14일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사단이 뫼즈강을 도하하여 연합군 전선에 구멍을 뚫었다. 룬트슈테트는 보병 지원이 없는 상태로 기갑사단의 생존은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보병이 당도할 때까지 진격을 일시 중단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수년간 논쟁거리가 되었다. 룬트슈테트는 이 명령이 히틀러의 결정이었으며, 또한 히틀러는 남아있는 영국군에게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영국이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의 본심이 무엇이었는가의 문제는 이제 확인할 수 없고, 그가 망설임 끝에 마지못해 내린 결정일지도 모르는 일인데다가, 일단 히틀러가 룬트슈테트에게 일임한 이상 이 일의 최종 명령은 룬트슈테트가 내린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프란츠 할더의 분노를 이해하기도 쉬운일만은 아니다.[126]

1940년 7월 19일 룬트슈테트는 야전원수로 승진하여 바다사자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전이 취소된 이후에는 룬트슈테트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주둔군 지휘와 해안방어의 임무가 주어졌다.[130][131]

1939년 10월 15일, 대 프랑스 전쟁을 준비하며 룬트슈테트는 A군 집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116] 이어 망슈타인이 룬트슈테트 휘하에서 참모장을 맡아 대 프랑스 작전을 기획하게 되었다.[126] A군 집단은 마지노선에 대한 정면 공격을 피하고 아르덴 삼림 지대를 돌파하여 플랑드르에 배치된 영불 연합군을 프랑스 본토로부터 고립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A군 집단에는 3개 군 집단 중 가장 많은 병력이 집결되었고, 독일군 10개 기갑사단 중 7개 기갑사단까지 A군 집단에 배치되었다.[127]

1940년 5월 대 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A군 집단은 하인츠 구데리안 중장의 제19기갑군단을 중심으로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프랑스 영토로 쇄도하여 쾌속 진격을 계속했다. 작전 중 구데리안은 간섭이 많은 직속 상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대장(기갑집단 사령관)과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룬트슈테트가 능숙하게 중재하여 구데리안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128] 그 결과 구데리안의 기갑군단은 영불 해협에 도달하여 작전대로 플랑드르의 연합군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라스 전투에서 영국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신중해진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의 모든 기갑 부대에 대한 덩케르크 진격 중지 명령에 동의하여, 결과적으로 플랑드르 연합군에게 "덩케르크 철수"를 허용해 버렸다.[129]

이후 남프랑스 공세에서 A군 집단은 구데리안의 기갑집단을 주력으로 쾌속 진격을 계속했고, 프랑스는 6월 22일에 항복했다.

6. 3. 독소 전쟁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룬트슈테트는 남부 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진격로의 지형, 장갑 부대 부족, 강력한 소련군 주력 부대와의 대치 등으로 인해 북부 집단군이나 중앙 집단군에 비해 진격이 더뎠다.[133][134][135]

7월, 키예프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중앙 집단군 소속 구데리안 장갑 집단의 지원을 받아 9월에 키예프를 함락했다.[136][137]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52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소련군 남서부 전선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대장도 전사했다. 이 전투는 소련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모스크바 공격을 2개월 가까이 지연시켰다.[138]

겨울이 되면서 로스토프 전투에서 히틀러의 후퇴 금지 명령을 어기고 로스토프에서 전술적으로 후퇴했다. 이 때문에 12월, 히틀러는 룬트슈테트를 남부 집단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후임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라이프슈탄달테 사단장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자신의 판단 실수를 인정하고 룬트슈테트의 조기 복귀를 약속했다.[139]

6. 4. 서부 전선

1942년 3월, 히틀러는 룬트슈테트를 다시 불러 서부전선의 지휘관(OB West)으로 임명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냈지만, 디에프 기습 상륙을 통해 연합군의 상륙 위협이 현실화되었다.[139]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영군이 알제리에 상륙하자 1942년 11월 11일 비시 프랑스를 점령했다. 1943년에는 서부 최고 사령부는 비교적 평온했고, 룬트슈테트는 업무 중간에 영어 추리 소설이나 모험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140]

미영군의 프랑스 상륙 위험이 커지면서, 룬트슈테트는 부하인 B군 집단 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와 함께 연합군 상륙 저지 작전을 협의했다.[140] 프랑스 연안에 대서양의 벽을 건설했지만,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을 예상한 반면 룬트슈테트는 칼레 상륙을 예상했다.[140] 룬트슈테트는 연합군 상륙 후 기갑 부대로 야전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생각하여 요새 건설을 쓸모없다고 여겼지만, 롬멜은 해안에서의 격멸을 주장하며 요새 건설에 찬성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노르망디를 중시하는 방침을 지지했다.[141]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독일군 주력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효과적인 반격을 할 수 없었다.[142] 1944년 초부터의 공습으로 북프랑스의 수송 기관은 파괴되었고, 제공권도 연합군에게 빼앗겼다.[143] 연안 진지는 미영군에 의해 하루 만에 돌파되었고, 룬트슈테트의 반격 작전도 연합군의 공습으로 실패했다. 룬트슈테트는 6월 30일 히틀러에게 조기 강화를 요청했지만, 카이텔의 전언에 "항복하라, 바보야!"라고 답하며 거절당했다. 히틀러는 7월 2일 룬트슈테트를 서부 최고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142]

같은 달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룬트슈테트는 국방군 원로로서 "명예 법정"의 일원이 되어 암살 계획 가담자의 불명예 제대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가담자들은 군사재판이 아닌 롤란트 프라이슬러 장관의 인민 법정에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144]

귄터 폰 클루게 원수의 자살 이후, 발터 모델이 서부 최고 사령관과 B군 집단 사령관을 겸임했지만, "두 사령관직을 맡는 것은 어렵다"고 히틀러에게 호소하여, 9월에 룬트슈테트가 서부 최고 사령관으로 복귀했다.[142][145] 룬트슈테트는 지크프리트 선을 강화하고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했다.[145] 10월 17일 롬멜의 국장에는 총통 대리로 참석하여 조사를 낭독했다.[146] 룬트슈테트는 전후 롬멜의 죽음에 얽힌 사정을 당시에는 몰랐다고 주장한다.[146]

히틀러의 대규모 공세 계획에 대해, 룬트슈테트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B군 집단 발터 모델 원수와 함께 "라인 방어 작전"을 세워 지휘했다.[147] 1944년 12월 16일부터 아르덴 공세(벌지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쪽 공세군에서는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선두에 섰지만 스타브로에서 멈췄고, 미군에 의해 고립되었다.[148] 남쪽 공세군은 바스토뉴에서 미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미군은 버텼고, 12월 26일 조지 패튼 장군의 제3군이 독일군 공수 부대의 공격을 격퇴하며 바스토뉴에 도착하여 공략은 불가능해졌다.[149] 룬트슈테트는 12월 24일 아르덴 공세의 실패를 확신하고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149] 1945년 1월 3일, 바스토뉴의 미군을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150] 이후 독일군은 방어하며 후퇴했고, 2월 7일 독일 영토로 침공을 받았다.[150] 3월, 레마겐 철교가 미군에게 점령당한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147]

7. 전쟁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룬트슈테트(1946년)


1945년 5월 1일, 룬트슈테트는 바이에른주 바트 퇴르츠(de)에서 아들 한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소위와 함께 미국 육군 제36보병사단에 포로로 잡혔다.[105][151] 이후 영국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으며, 1942년 6월 21일 포로로 잡은 영국군 코만도 부대원을 스파이로 게슈타포에 넘긴 것이 불법 명령으로 판정되어 영국 군사 법정에 전범으로 기소되었다.[152]

그러나 룬트슈테트는 고령으로 인해 재판을 견디기 어려웠고, 조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1949년 5월 5일, 심장병을 이유로 재판 전에 석방되었으며,[106] 1953년 2월 24일 하노버에서 사망했다.[152]

룬트슈테트가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남방군 집단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이 문제는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다.[152]

8. 가족

룬트슈테트는 1902년 1월 22일 루이즈 빌라 폰 고츠와 결혼하여 1903년에 외아들 한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를 얻었다.[3] 한스는 룬트슈테트가 석방되던 1948년에 사망하였다. 룬트슈테트의 아들 한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중위는 아버지의 건강을 감시하고 카셀의 빌라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령부에 부관으로 파견되었다.[55]

룬트슈테트의 부인 빌라는 1952년 10월 4일에 사망했고,[95] 룬트슈테트는 1953년 2월 24일 하노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하여 슈테켄 시립 묘지에 묻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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