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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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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쇼 정변은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군부와 번벌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가쓰라 다로 내각의 성립과 헌정 옹호 운동, 그리고 가쓰라 내각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이는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불신임 투표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군국주의 강화와 식민지 지배 정책 심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에도 무단 통치 강화와 3·1 운동 탄압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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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정변
개요
명칭다이쇼 정변 (大正政変)
발생 시기다이쇼 시대 초기
주요 원인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심화된 정치적 갈등
가쓰라 다로 내각의 실정
국민의 정치 참여 요구 증대
주요 결과가쓰라 다로 내각 총사퇴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 출범
입헌정우회의 세력 확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개막
배경
시대적 배경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와 정치적 변화
정치적 배경번벌 정치의 폐해 심화
관료 중심 정치에 대한 비판 고조
정당 정치의 성장과 발전
사회적 배경도시화와 산업화의 진전
새로운 지식 계층의 등장
언론의 자유 확대와 여론 형성
전개 과정
제3차 가쓰라 내각 출범가쓰라 다로의 총리 재임명과 내각 구성
헌정 옹호 운동오자키 유키오이누카이 쓰요시를 중심으로 한 헌정 옹호 운동 전개
국민의 정치 참여 요구 확산
언론의 비판적 보도 증가
가쓰라 내각 총사퇴여론 악화와 정치적 압력으로 인한 가쓰라 내각 총사퇴
야마모토 내각 출범야마모토 곤베에의 해군 출신 내각 구성
주요 인물
가쓰라 다로당시 총리, 정변의 주요 원인 제공자
오자키 유키오헌정 옹호 운동의 중심 인물, 정치가
이누카이 쓰요시헌정 옹호 운동의 중심 인물, 정치가
야마모토 곤베에가쓰라 내각 사퇴 후 총리, 해군 제독
결과 및 영향
정치적 영향번벌 정치의 약화와 정당 정치의 강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개막
국민의 정치 참여 확대
사회적 영향사회 운동의 활성화
언론의 영향력 증대
정치적 자유와 권리 신장
역사적 의의일본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참고 문헌
관련 서적일본 정치사 관련 서적
다이쇼 시대 관련 서적
가쓰라 다로 관련 서적

2. 게이엔 시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은 유신을 주도한 번벌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번벌은 중의원을 장악한 민당과 거리를 두는 초연주의를 표방했지만, 제국의회의 협조 없이는 법안과 예산 성립이 어려워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01년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각각 군벌과 민당의 리더가 되면서 양측 간 타협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된 정권 운영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총리직에 올랐고, 이 시대를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게이엔 시대라 불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입헌정우회가 권력을 독점한 상황에서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는 정권 내부에서 이익 유도 등을 둘러싸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번벌의 정점에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당 정치를 본능적으로 혐오했고, 정우회의 당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던 하라 다카시는 당세 확장을 위해 지방으로의 이익 유도에 적극적이었기에 두 사람의 갈등은 심각했다. 1911년 8월 제2차 가쓰라 내각이 수립될 당시, 하라는 가쓰라의 정계 은퇴를 획책했고, 정우회에 비교적 우호적인 가쓰라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야마가타도 가쓰라를 대신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다음 세대들을 육성하며 가쓰라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했다.[2]

가쓰라는 입헌정우회에 의해 장악된 중의원에 견제 세력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2. 1. 가쓰라 다로의 정치 개혁 시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번벌중의원을 장악한 민당과 거리를 두는 초연주의를 표방했지만, 제국의회의 협조 없이는 법안과 예산 성립이 어려워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2]

1901년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각각 군벌과 민당의 리더가 되면서 양측 간 타협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된 정권 운영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를 게이엔 시대라 부른다.[2]

그러나 게이엔 시대의 안정성은 입헌정우회가 권력을 독점한 상황에서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내부에서는 이익 유도 등을 둘러싸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당 정치를 혐오했고, 하라 다카시는 지방으로의 이익 유도에 적극적이었기에 갈등이 심각했다. 1911년 제2차 가쓰라 내각 수립 당시 하라는 가쓰라의 정계 은퇴를 획책했고, 야마가타도 가쓰라를 대신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을 육성하며 가쓰라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다.[2]

가쓰라는 중의원에 견제 세력을 만들 필요성을 느껴, 1912년 7월 6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영국양당제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메이지 천황의 중태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천황은 가쓰라가 귀국하기 전인 29일에 서거했다.[2]

천황 서거 후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내대신 겸 시종장으로 추천하여 사실상 정계 은퇴를 강요했다. 가쓰라는 8월 13일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야마가타는 가쓰라에게 원수 칭호를 내려 다이쇼 천황을 설득, 가쓰라를 후비역으로 편입시켜 정치 결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11월 28일 가쓰라는 후비역에 편입되었지만 정계 은퇴 생각은 없었다.[2]

3. 사이온지 내각의 붕괴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은 러일 전쟁 이후 재정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사단 증설을 요구했지만,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는 긴축 재정 방침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3] 1912년 8월경부터 육군성과 내각(정우회) 사이에서 2개 사단 증설을 둘러싼 대립이 깊어졌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증설을 요구했고, 육군 내 강경파는 사이온지 내각을 타도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중심으로 하는 육군 내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여론의 반발을 우려하여 증설 강행에 신중했으며, 가쓰라 다로의 정계 은퇴로 정우회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2개 사단 증설이 불가능하다면 군비 충실, 부분적 증군, 1년 연기 등으로 타협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우에하라 육군대신은 육군 내부의 압력과 증설 반대 여론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지만, 11월 29일 육군 내부의 타협적인 움직임에 따라 증설 철회를 표명했다. 그러나 정계 복귀를 모색하는 가쓰라 및 사쓰마벌의 복권을 꾀하는 다카라베 다케시 해군 차관 등은 증설 문제가 꼬여 번벌과 정우회의 연계가 무너지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증설을 관철하도록 우에하라 육군대신을 부추겼다.

11월 30일 각의에서 우에하라 육군대신은 다음 해부터 증설을 강경하게 요구했지만, 증설 계획은 채택되지 않았다. 12월 2일, 우에하라 육군대신은 유악상소권을 이용하여 단독으로 다이쇼 천황에게 직접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놀란 야마가타는 가쓰라 내대신을 통해 내각과 육군과의 화합을 요구하는 칙어 반포를 제안하고, 스스로 칙어 초안을 기초했지만, 이 초안은 가쓰라에 의해 무산되었다(12월 1일). 가쓰라는 시종장 자격으로 사이온지 총리와 면회했지만, 이때 증설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구두로 요구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후임 육군대신에 대해 가쓰라는 인선이 어렵다는 군 내부 정세를 전했다.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에 의해 육군에서 후임 육군대신의 추천이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내각이 성립되지 않게 된다.

12월 3일, 사이온지 총리는 우에하라 육군대신의 사표를 잠시 보류하도록 요청한 후에 야마가타와 면회한다. 사이온지의 목적은 후임 육군대신에 관한 것이었지만, 칙어가 가쓰라에 의해 무산된 것을 알지 못한 야마가타는 증설 문제에서 접근하여 서로의 타협을 도모하도록 제안했다. 사이온지는 야마가타가 증설 문제에서 원래 타협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야마가타는 처음부터 내각 타도를 계획했다고 해석, 이대로는 일단 물러나 후임 번벌 수뇌진과 대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다. 12월 5일,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총사직했다.

4. 가쓰라 내각의 성립과 호헌 운동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차기 총리를 정하기 위해 원로회의를 소집했지만 난항을 겪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총리직 복귀를 거절했고,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세대 교체를 요구받아 부결되었으며, 히라타 도스케는 정권 운영의 어려움을 이유로 사양했다. 가쓰라 다로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추천했지만, 야마가타가 이를 막았다.

후계 총리 인선이 난항을 겪자, 사이온지 내각을 무너뜨린 번벌과 육군, 특히 야마가타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1912년 12월 13일, 도쿄의 신문기자와 변호사들이 헌정진작회를 조직하여 2개 사단 증설 반대를 결의했고, 다음 날에는 사교클럽 고준샤가 시국간담회를 열어 헌정옹호회를 창립했다. 12월 19일 가부키자에서 정우회, 입헌국민당의 대의원들과 신문기자, 실업가, 학생 등 3,000여 명이 모여 헌정 옹호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제1차 호헌 운동으로 불리게 된다.

야마가타는 결국 가쓰라를 천거했고, 1912년 12월 17일 가쓰라는 대명을 받았다. 그러나 내대신이 조각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자, 가쓰라는 "보국의 중임을 맡기고자 한다"는 천황의 조칙을 받는 것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가쓰라는 사단 증설을 동결하고 국방회의를 만들어 심의하기로 했지만, 해군 내부의 반발로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신을 유임시키기 위해 또다시 천황의 조칙을 이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2년 12월 21일, 가쓰라는 세 번째 내각을 발족시켰다.[1]

입헌정우회입헌국민당 등 야당 정당들은 가쓰라의 행동을 입헌 정치에 대한 헌신 부족으로 간주하고, 언론인 및 사업가와 연합하여 ''헌정 옹호 운동''을 결성했다. 가쓰라는 의회를 세 차례 정지시키고, 자신의 정당인 ''입헌동지회''를 결성하여 대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시위가 확산되어 1913년 2월 10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켜 의사당을 위협하고, 경찰서를 방화하고, 친정부 신문 사무실을 파괴했다.[2]

가쓰라에 대한 의회의 지지가 줄어들면서, 그는 일본 최초로 불신임 투표에서 패했다. 결국 가쓰라는 1913년 2월 20일에 사임했으며,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그를 대신했다.[2]

가쓰라의 정계 복귀는 가쓰라-사이온지 체제의 부활과 반(反)벌벌-정우회의 연계에 의한 정권 운영을 지속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가쓰라는 양대 정당제 구상에 따라 자신의 정치 세력 결성을 꾀하며, 비(非) 야마가타 계열 각료들로 내각을 채웠다. 또한 정우회와의 연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우회는 가쓰라가 이끄는 반벌벌 세력과의 제휴를 단념하고, 헌정 옹호 운동에 힘을 실으며, 입헌국민당(이누카이 쓰요시 당수)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1912년 12월 27일, 야당국회의원과 신문 기자, 학자들이 모여 호헌 운동의 지방 확대를 결정했다. 이후 1913년 1월까지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러일 전쟁 이후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던 상공업자와 도시 민중들이 다수 참여했다.

제3차 가쓰라 내각은 행재정 정리 추진, "국방 회의"에 의한 군비 확장액 관리, 군무 대신 '''문관제''' 도입을 내걸었다. 가쓰라는 자신의 신당 구상이 밝혀지면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1913년 1월 20일, 가쓰라는 신문 기자들에게 신당 입헌동지회 결성 구상을 공표하고, 다음 날 의회 개회 시 정우회가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자 15일간의 정회를 명했다.

의회 정회 중 호헌 운동은 더욱 과열되었다. 1월 24일, 도쿄 신토미좌에서 헌정 옹호 제2회 대회가 열렸고, 회장 안팎으로 2만 3천여 명의 군중이 몰렸다.

의회가 재개된 2월 5일, 정우회, 국민당 등의 야당은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오자키 유키오 의원은 "그들은 항상 입을 열면 충애를 외치며 … 옥좌를 흉벽으로 삼고, 조칙을 탄환으로 삼아 정적을 쓰러뜨리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유명한 탄핵 연설을 했다. 이 연설 후 의회는 다시 5일간 정회되었고, 의회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4. 1. 천황의 정치적 이용 논란

가쓰라 다로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황의 조칙을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쓰라는 내각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예를 들어, 가쓰라는 전임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무너지게 된 계기였던 육군의 사단 증설 요구를 동결하고 해군의 증함 문제도 함께 동결했다. 이에 해군 내부에서 반발이 일자, 가쓰라는 천황으로부터 조칙을 받아내어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신을 유임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가쓰라는 자신의 신당 구상이 지지받지 못하자 메이지 천황의 료안 중(복상 기간)임을 이유로 정쟁을 중지하도록 조칙을 이끌어내려 했다. 이는 영국의 조지 5세 즉위 시 정쟁 중지를 명한 사례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가쓰라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쓰라가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 한 것은, 천황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겨졌다.

5. 정우회와 국민당의 제휴

가쓰라 다로게이엔 시대가 붕괴된 후, 입헌정우회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이는 양당제를 통한 의회제 민주주의를 일본 제국에 도입하려는 가쓰라의 구상이었다.[1]

야마가타 아리토모번벌 세력은 가쓰라가 정우회와 협력하여 정국을 운영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가쓰라는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제3차 내각을 구성하면서 야마가타 계열 각료를 배제하고, 정우회와 거리를 두었다.

이에 정우회는 입헌국민당과 제휴를 강화하며 헌정 옹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2년 12월 27일, 정우회와 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신문기자, 학자 등과 함께 호헌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1913년 1월부터 호헌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러일 전쟁 이후 증세에 시달리던 상공업자와 도시 민중들이 적극 참여했다.[1]

가쓰라는 1913년 1월 20일, 신당 입헌동지회 결성 구상을 발표하고, 다음 날 의회가 개회하자 정우회가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에 맞서 15일간 정회를 명했다. 그러나 이는 호헌 운동을 더욱 과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

5. 1. 오자키 유키오의 가쓰라 탄핵 연설

1913년 2월 5일, 입헌국민당오자키 유키오 의원은 일본 제국 의회에서 가쓰라 다로 내각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오자키는 가쓰라 내각이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옥좌를 흉벽으로 삼고 조칙으로 탄환을 대신해 정적을 쓰러뜨리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문장은 가쓰라 내각의 행태를 비판하는 핵심적인 표현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

오자키의 연설은 다이쇼 정변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헌정 옹호 운동을 더욱 과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 가쓰라 내각의 붕괴

가쓰라 내각은 예상과 달리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메이지 천황의 복상 기간을 이유로 다이쇼 천황에게 정쟁 중지를 요청하는 조칙을 제안했다. 이는 1910년 영국조지 5세가 즉위 후 정쟁 중지를 명한 것을 참고한 것이었다. 국무회의에서 조칙 발포가 결정되자, 가쓰라는 사이온지를 만나 조칙에 대한 정우회의 태도를 물었고, 사이온지는 조칙 발포를 묵인했다. 정우회는 하라마쓰다 마사히사의 찬성으로 조칙을 받들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료고쿠 국기관에서는 2만여 명이 모인 헌정옹호대회가 열렸다.

10일, 수만 명의 군중이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야마모토총리대신 관저를 찾아 가쓰라를 비판했다. 해군은 가쓰라가 천황을 방패 삼는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어린 황제를 품고 정권을 제멋대로 운영한다"라고 비판했고, 가쓰라는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야마모토는 사이온지를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정우회 대의원들에게 가쓰라와의 대화를 전해 반 가쓰라 기세를 높였다. 뒤늦게 도착한 사이온지는 사태를 막지 못하고 정우회는 가쓰라 내각 타도를 결정했다.

가쓰라 내각은 조칙에도 불구하고 정우회가 도각을 결정하자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고려했다. 그러나 오오카 이쿠조 중의원 의장은 가쓰라에게 의회 해산이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충고했다. 전국적인 소란은 경찰력만으로 진압하기 어려워 계엄령과 군 투입이 필요할 것이고, 이는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 입헌동지회의 기반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결국 가쓰라는 내각 총사직을 결의하고 의회에 정회를 명했다. 그러나 정회 소식이 먼저 알려지면서 군중은 가쓰라가 시간끌기를 한다고 판단, 일부가 폭도로 변해 파출소와 친정부 언론사인 국민신문사를 습격했다. 입헌동지회 소속 대의원들의 저택도 습격당해 치안 유지를 위해 군이 출동했다.

11일, 가쓰라는 세 번째 내각을 꾸린 지 53일 만에 총사직했다. 후임 총리를 결정하기 위한 원로회의에서 야마가타는 사이온지에게 재집권을 요청했지만, 사이온지는 조칙 관철 실패를 이유로 거절하고 야마모토를 추천했다. 원로회의는 이를 받아들여 야마모토에게 대명이 내려졌다. 제1차 야마모토 내각정우회의 각료 참여로 정우회 내각을 야마모토가 이끄는 형태가 되었고, 20일에 정식 발족했다.

가쓰라 내각이 무너졌음에도 소요는 계속되었다. 가쓰라의 정회 명령은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는 오사카, 고베, 히로시마, 교토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정우회 본부와 하라의 저택도 습격받았다.[1]

7. 영향

다이쇼 정변은 일본 정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쓰라 다로는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여 일본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포기한 뒤, 정계 복귀를 위해 입헌동지회 조직을 추진했지만 1913년 10월 10일 병으로 서거했다. 가쓰라 사후 두 달 뒤인 12월 23일 입헌동지회가 정식으로 창당되었으며, 이후 반(反) 입헌정우회 세력과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입헌민정당으로 발전하여 가쓰라가 꿈꿨던 양당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정우회는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을 지지함으로써 여당으로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반발하여 중정회를 창당하기도 했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정우회는 하라 다카시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1918년에는 하라에게 조각의 대명(총리 임명)이 내려졌다. 하라는 3년 만에 암살되지만, 이후에도 정우회는 일본 정치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으며 1940년 대정익찬회에 합류할 때까지 오랫동안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유지했다.

7. 1. 한국에 미친 영향

메이지 헌법은 육군 또는 해군 대신의 임명을 보류할 수 있도록 하여, 군부가 민간 정부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일본 군국주의 발흥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1]

다이쇼 정변 시기 일본 민중은 헌정 옹호 운동 이후 반(反) 벌족 감정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제2혁명의 혼란을 틈타 혁명파 옹호를 명목으로 한 대중 출병론에 동조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쓰오 다카토미는 이를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 표현했다.[4]

지멘스 사건으로 제1차 야마모토 내각이 붕괴된 후, 오쿠마 시게노부산둥반도에서 독일 세력 구축과 중국 이권 확보를 명분으로 육군 2개 사단 증설을 추진했고, 이는 의회를 통과했다. 더 나아가 대중 21개조 요구를 통해 중국의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했다.

참조

[1] 서적 大久保 1964
[2] 서적 元老ー近代日本の真の指導者たち 中公新書 2016
[3] 서적 詳説日本史改訂版 山川出版社 2002
[4] 서적 松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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