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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번 (데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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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보타번은 센고쿠 시대 이후 데와국 아키타 지역을 다스린 번으로, 1602년 사타케 씨가 히타치국에서 이봉되어 20만 석 규모로 시작되었다. 농업 위기와 재정난 속에서도 문화 및 교육 사업을 추진했으며,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했으나, 존황양이파의 영향으로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아키타 전쟁을 치렀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아키타현에 흡수되었으며, 사타케 씨는 후작 작위를 받았다. 구보타 번은 여러 지번을 거느렸으며, 누에, 옻나무, 목재 등을 전매품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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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번 (데와국)
개요
이름쿠보타 번 (1602–1871)
아키타 번 (1871)
원어 이름久保田藩 (쿠보타 한)
秋田藩 (아키타 한)
구분
국가일본
존속 기간1602년 ~ 1871년
시대에도 시대
수도구보타 성
위치39°43′24.53″N 140°7′23.67″E
현재 국가일본
현재 행정 구역아키타현
역사
이전데와국
이후아키타현
정치
정부 형태다이묘
다이묘국주 다이묘

2. 번의 역사

데와국 아키타 지역은 센고쿠 시대에는 아키타 사네스에가 다스렸다.[1][2][3][4][5]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2년에 사타케 씨는 히타치국 54만 석에서 데와국 구보타 번 20만 석(실제 고쿠다카는 약 4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1][2][3] 영지 감소로 인해 사타케 씨는 많은 가신을 해고하고 남은 가신의 봉급을 삭감해야 했다.[4][5]

번은 농업 위기와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 농민 봉기와 오이에 소도 분쟁인 이 발생했다. 특히 호레키 4년(1753년)에는 은찰 사법을 제정했지만, 은찰은 폭락했고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다음 해의 대흉작은 이에 박차를 가해, 호레키 7년, 번내에서 은찰 추진파와 반대파의 내분이 일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추진파를 사형에 처하는 등 해결되었다. (아키타 소동)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도 역대 번주들은 문화 및 교육 사업에 힘썼다. 3대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는 번의 역사를 편찬하는 '아키타 사관(秋田史館일본어)'을 설립했다. 8대 사타케 요시아쓰는 뛰어난 예술가로, 네덜란드 양식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원근법 묘사를 포함한 유럽 회화 기술에 대한 세 편의 논문을 제작했다.[8] 그는 또한 네덜란드 학문(란가쿠) 학자 히라가 겐나이의 제자였으며, 겐나이를 아키타로 초청하여 번의 구리 광산 관리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8] 예술이 탄생하여 잠시 번성한 것은 요시아츠의 시대였다.[8] 9대 사타케 요시마사는 번교 명덕관을 설립했다.

사타케 요시아츠 (사타케 쇼잔)이 그린 그림, 구보타 8대 번주


구보타 9대 번주 사타케 요시마사


구보타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번당 하나의 성" 규칙의 예외로, 구보타 성 외에도 요코테, 오다테 등 여러 성과 요새화된 영지를 보유했다.[9] 이들은 각각 선임 가신에게 주어져 작은 성읍으로 운영되었다.

메이지 유신 즈음, 구보타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하였다.[11] 그러나 번 내에서는 히라타 아쓰타네의 사상을 따르는 존황양이파가 형성되어 있었고, 요시카와 다다유키·다다야스 부자가 히라타 국학의 사숙인 라이후기주쿠를 창설, 타다야스는 『개화책론』에서 존황 사상을 설파했다. 1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가 이를 받아들여 센다이번의 사자를 참수하고 동맹을 파기하였다.[14][15][16][17] 그리고 사자들의 머리가 아키타 성읍에 교수대에 매달렸다.[18]

이후 구보타 번은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오우에쓰 열번동맹군과 전투를 벌였다.(아키타 전쟁) 고군분투했지만,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사가번 군대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22][23]

1868년 윤4월 21일(1868년6월 11일) 발포의 정체서에 있어서 부번현 삼치제가 시행되어, 사타케 씨의 지방 정권의 정식 명칭으로서 "구보타 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지방의 옛날부터의 호칭은 "아키타"이며, "구보타"는 300년래의 칭호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한 작은 마을의 속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1871년 1월 9일(1871년2월 27일)에 정부에 번명 변경의 원서를 제출, 같은 해 1월 13일(3월 3일)에 아키타 번으로 개칭했다.[31]

이후 1869년 초, 사타케 요시타카는 공식적으로 번의 등록부를 황실 정부에 넘겼고(판적봉환), 구보타의 황실 지사(한 치지)로 임명되었다.[24] 1869년 중반, 황실 정부는 보신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00 고쿠의 영지를 증여했다.[25] 1871년 7월 14일(8월 29일) 폐번치현으로 아키타 번은 아키타현이 되었다.[26] 사타케 요시타카는 도쿄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후 화족 작위인 고작 (후작)을 받았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데와국 아키타 지역은 센고쿠 시대에는 아키타 사네스에가 다스렸다.[1][2][3][4][5] 아키타·센보쿠 지방은, 전국 시대에는 아키타 씨, 토자와 씨, 롯쿠고 씨, 오노데라 씨 등이 다스렸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의 게이초 7년(1602년)에 오노데라 씨는 개역, 나머지는 대부분이 히타치국으로 전봉되면서, 대신 사타케 씨가 입봉함에 따라 근세 다이묘 지배가 시작되었다.

2. 2. 사타케 씨의 입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2년에 사타케 씨는 히타치국 54만 석에서 데와국 구보타 번 20만 석(실제 고쿠다카는 약 4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1][2][3] 영지 감소로 인해 사타케 씨는 많은 가신을 해고하고 남은 가신의 봉급을 삭감해야 했다.[4][5]

번은 농업 위기와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여러 차례 농민 봉기와 오이에 소도 분쟁인 사타케 소동이 발생했다.

구보타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번당 하나의 성" 규칙의 예외로, 구보타 성 외에도 요코테, 오다테 등 여러 성과 요새화된 영지를 보유했다.[9] 이들은 각각 선임 가신에게 주어져 작은 성읍으로 운영되었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사타케 씨는 처음 오우에츠 열반 동맹에 가담했으나,[11] 센다이 번과의 갈등과 존황양이파의 영향으로 동맹을 탈퇴하고 황군을 지원했다.[14][15][16][17][18][19][20] 이후 모리오카 번, 이치노세키 번 등 동맹군의 공격을 받았으나,[22] 사가 번 병력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했다.(아키타 전쟁) 1869년 초, 사타케 요시타카는 번의 등록부를 황실 정부에 넘기고 구보타 번 지사로 임명되었다.[24] 1871년 폐번치현으로 구보타 번은 아키타 현에 흡수되었고,[26] 사타케 요시타카는 도쿄로 이주하여 후작 작위를 받았다.

2. 3. 재정난과 문화 발전

사타케 씨는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센고쿠 시대 말기까지 히타치국을 다스렸던 강력한 무사 씨족이었다.[1][2]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에 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세력을 꺾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후 영지가 대폭 삭감되는 처벌을 받았다.[3] 히타치국에서 일본 북부의 척박한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수입이 감소(205,000 고쿠)하여 이전의 약 540,000 고쿠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많은 가신을 해고하고 남은 가신에 대한 봉급도 삭감해야 했다.[4][5]

번은 농업 위기로 인해 역사상 여러 차례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재정 문제로 오이에 소도 분쟁인 으로 시달렸다. 초기 번정은 산에서 얻는 수입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광산으로는 아이나이 은산·아니 동산 등이 가동되었지만, 17세기에는 생산량이 급감하여 동산만 가동하게 되었다. 임업에서는 군함·성용 목재로 아키타 삼나무가 유명했고, 가로(家老) 시부에 나이젠의 "나라의 보물은 산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나 무분별한 벌채로 인해 임업도 일시적으로 쇠퇴하여 임정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구보타번에게 또 다른 재원은 쌀이었으며, 여러 차례 검지를 실행하고 연공률을 정한 "흑인 어정서"를 각 마을에 배포했다. 덴메이 3년의 대기근으로 황폐해진 경지를 재생하기 위해 황폐지라면 직할지, 가신 지행지를 불문하고 경작을 인정했다. 더 나아가 번정을 통해 신전 개발에 주력하여, 가신단이 개발한 신전은 모두 가신단의 지행지로 함으로써 개발에 대한 의욕을 높였다. 번 재정이 압박되면서 3분의 1이 신로 면고가 되는 주진개 제도로 개정되었지만, 그 노력의 결과, 교호 14년(1729년)에는 실제 수확량이 38만 석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행지의 거의 7할이 가신단의 지방 지행지였고, 또한 농촌에 투기한 부농·상인과 빈농 간의 격차가 벌어졌다.

식산 흥업에도 힘썼고, 노시로 춘경칠, 가와쓰라 칠기 등의 특산품 육성과 동시에 삼나무·옻·담배·유채를 비롯한 환금 작물도 장려했다. 그러나, 동시에 농민들이 벼농사를 소홀히 할 것을 우려하여, 농민들의 매매에 중세를 부과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이 상인으로 변하는 것을 막았지만, 상업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양잠 산업에 번주도로 손을 대어, 3,000냥의 차입금을 남기고 철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수가 있었던 구보타번이지만, 실제 이상으로 많은 가신단과 그들이 차지하는 지행지로 인해 재정은 항상 압박받고 있었다. 교호 6년(1721년)에는 가로 이마미야 다이가쿠가 조직의 간략화와 가신으로부터의 지행 차용, 밭농사의 장려 등을 실시했으며, 일부 성공한 부분도 있었지만, 재정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호레키 4년(1753년)에는 은찰 사법을 제정했지만, 은찰은 폭락했고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다음 해의 대흉작은 이에 박차를 가해, 호레키 7년, 번내에서 은찰 추진파와 반대파의 내분이 일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추진파를 사형에 처하는 등 해결되었다. (아키타 소동)

구보타번에서는 4년에 한 번 꼴로 흉작을 겪어 기근이 발생했다. 그 때마다 번 재정은 타격을 입었고, 황폐한 토지를 만들어냈다. 특히 덴포 4년(1833년)의 대흉작은 "사년의 케카치"라고 불리며, 번의 인구 중 4분의 1이 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진 전쟁에서는 주변의 오우 열번을 적으로 삼으면서 영지의 2/3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이 전화를 입었고, 게다가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열번 동맹군에게 공격받은 주변 제번의 번주·번사 및 서국으로부터의 원군 비용을 모두 구보타번이 부담했기 때문에, 군사비 면에서도 번 재정을 압박했다. 전쟁 후에 정부로부터 주어진 상전은 전비·전재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소액에 불과했고, 차입금을 감당하지 못한 구보타번은 가고야마 제련소에서의 화폐 주조로 버티려고 했지만, 하코다테 전쟁이 종결된 메이지 2년 5월(1869년 6월)에 정부는 각 번의 독자적인 번찰 발행·화폐 주조를 금지했다. 구보타번은 금지 이후에도 밀주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정부에서 문제 삼았고 (번의 내분에서 밀고가 있었다고 전해짐), 메이지 4년 말에 전 징세관 사토 도키노스케·오야마 시게지 에몬 등 11명의 대량 처벌이 이루어졌다. (아키타 위조 지폐 사건)[42] 이 외에도 야사카마루 외채 사건이나 하츠오카 게이지 사건 등이 있었고, 정부로부터 엄한 시선을 받게 된 구보타번은, 폐번치현 직전에 옛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가 "무진의 공은 거의 거품과 같아졌다"고 한탄하는 사태에 빠졌다[43]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도 역대 번주들은 문화 및 교육 사업에 힘썼다. 3대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는 번의 역사를 편찬하는 '아키타 사관(秋田史館일본어)'을 설립했다. 8대 사타케 요시아쓰는 뛰어난 예술가로, 네덜란드 양식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원근법 묘사를 포함한 유럽 회화 기술에 대한 세 편의 논문을 제작했다.[8] 그는 또한 네덜란드 학문(란가쿠) 학자 히라가 겐나이의 제자였으며, 겐나이를 아키타로 초청하여 번의 구리 광산 관리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8] 예술이 탄생하여 잠시 번성한 것은 요시아츠의 시대였다.[8] 9대 사타케 요시마사는 번교 명덕관을 설립했다.

2. 4. 메이지 유신과 아키타 번

메이지 유신 즈음, 구보타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여하였다.[11] 그러나 번 내에서는 히라타 아쓰타네의 사상을 따르는 존황양이파가 형성되어 있었고, 요시카와 다다유키·다다야스 부자가 히라타 국학의 사숙인 라이후기주쿠를 창설, 타다야스는 『개화책론』에서 존황 사상을 설파했다. 1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가 이를 받아들여 센다이번의 사자를 참수하고 동맹을 파기하였다.[14][15][16][17] 그리고 사자들의 머리가 아키타 성읍에 교수대에 매달렸다.[18]

이후 구보타 번은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오우에쓰 열번동맹군과 전투를 벌였다.(아키타 전쟁) 고군분투했지만, 메이지 정부가 파견한 사가번 군대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22][23]

1868년 윤4월 21일(1868년6월 11일) 발포의 정체서에 있어서 부번현 삼치제가 시행되어, 사타케 씨의 지방 정권의 정식 명칭으로서 "구보타 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지방의 옛날부터의 호칭은 "아키타"이며, "구보타"는 300년래의 칭호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한 작은 마을의 속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1871년 1월 9일(1871년2월 27일)에 정부에 번명 변경의 원서를 제출, 같은 해 1월 13일(3월 3일)에 아키타 번으로 개칭했다.[31]

이후 1869년 초, 사타케 요시타카는 공식적으로 번의 등록부를 황실 정부에 넘겼고(판적봉환), 구보타의 황실 지사(한 치지)로 임명되었다.[24] 1869년 중반, 황실 정부는 보신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00 고쿠의 영지를 증여했다.[25] 1871년 7월 14일(8월 29일) 폐번치현으로 아키타 번은 아키타현이 되었다.[26] 사타케 요시타카는 도쿄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후 화족 작위인 고작 (후작)을 받았다.

3. 역대 번주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일본어)가 1602년 초대 번주가 된 이래,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堯일본어)가 1871년까지 구보타번을 통치했다. 번주들은 대대로 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를 관직명으로 사용했고, 그 외에 사코에추조(中将), 슈리노다이후(修理大夫), 사코에쇼쇼(少将), 다이젠노카미(大膳大夫), 지주(侍従),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등의 관직을 겸임했다. 1871년까지 12명의 구보타번 다이묘가 있었으며, 그들의 재임 기간, 관위, 조정 관위, 석고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고쿠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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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가문(사타케 씨) (도자마(외樣大名)) 1602-1871
1佐竹義宣/사타케 요시노부일본어1602-1633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추조(中将)종4위 상(従四位上))205,000
2佐竹義隆/사타케 요시타카일본어1633-1672슈리노다이후(修理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3佐竹義処/사타케 요시즈미일본어1672-1703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4佐竹義格/사타케 요시타다일본어1703-1715다이젠노카미(大膳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5佐竹義峯/사타케 요시미네일본어1715-1749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6佐竹義真/사타케 요시마사일본어1749-1753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7佐竹義明/사타케 요시하루일본어1753-1758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8佐竹義敦/사타케 요시아쓰일본어1758-1785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9佐竹義和/사타케 요시마사일본어1785-1815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0佐竹義厚/사타케 요시히로일본어1815-1846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1佐竹義睦/사타케 요시치카일본어1846-1857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2佐竹義堯/사타케 요시타카일본어1857-1871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추조(中将)종4위 상(従四位上)205,000->225,000



역대 번주들의 가계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본가와 분가, 양자 관계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1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는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3. 1. 구보타 번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일본어)가 1602년 초대 번주가 된 이래,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堯일본어)가 1871년까지 구보타번을 통치했다. 번주들은 대대로 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를 관직명으로 사용했고, 그 외에 사코에추조(中将), 슈리노다이후(修理大夫), 사코에쇼쇼(少将), 다이젠노카미(大膳大夫), 지주(侍従), 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 등의 관직을 겸임했다. 1871년까지 12명의 구보타번 다이묘가 있었으며, 그들의 재임 기간, 관위, 조정 관위, 석고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고쿠다카
* 사타케 가문(사타케 씨) (도자마(외樣大名)) 1602-1871
1佐竹義宣/사타케 요시노부일본어1602-1633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추조(中将)종4위 상(従四位上))205,000
2佐竹義隆/사타케 요시타카일본어1633-1672슈리노다이후(修理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3佐竹義処/사타케 요시즈미일본어1672-1703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4佐竹義格/사타케 요시타다일본어1703-1715다이젠노카미(大膳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5佐竹義峯/사타케 요시미네일본어1715-1749우쿄노다이부(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6佐竹義真/사타케 요시마사일본어1749-1753사효에노카미(左兵衛督)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7佐竹義明/사타케 요시하루일본어1753-1758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8佐竹義敦/사타케 요시아쓰일본어1758-1785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9佐竹義和/사타케 요시마사일본어1785-1815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0佐竹義厚/사타케 요시히로일본어1815-1846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쇼쇼(少将)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1佐竹義睦/사타케 요시치카일본어1846-1857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지주(侍従)종4위 하(従四位下)205,000
12佐竹義堯/사타케 요시타카일본어1857-1871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사코에추조(中将)종4위 상(従四位上)205,000->225,000



역대 번주들의 가계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본가와 분가, 양자 관계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1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는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3. 2. 이와사키 번

'''이와사키 번'''(岩崎藩)은 1701년, 구보타 번의 2대 다이묘인 사타케 요시타카의 넷째 아들인 요시나가에게 새롭게 개간한 논에서 2만 곡의 쌀 수입을 할당하면서 시작되었다.[30] 요시나가는 현재의 유자와시진야를 건설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까지 그곳을 통치했다.[30] 이 번은 영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모번의 일반 수입에서 수입을 할당받았다는 점에서 특이했다.[30] 이와사키 번의 다이묘는 산킨코타이 제도에 참여했으며, 에도에 있는 구보타 번의 세 번째 저택인 도리고에를 사용했다.[30]

사타케 씨족 (도자마)[30]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계급고쿠다카
1사타케 요시나가1701년 ~ 1718년이키노카미 (壱岐守); 효부쇼유 (兵部少輔)종5위하 (従五位下)20,000
2사타케 요시미치1718년 ~ 1763년이키노카미 (壱岐守); 이즈미노카미 (和泉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3사타케 요시타다1763년 ~ 1780년이키노카미 (壱岐守); 이즈미노카미 (和泉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4사타케 요시모토1780년 ~ 1793년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5사타케 요시치카1793년 ~ 1821년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6사타케 요시즈미1821년 ~ 1849년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7사타케 요시타카1849년 ~ 1857년사콘에추조 (中将)종4위하 (従四位下)20,000
8사타케 요시쓰마1857년 ~ 1869년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9사타케 요시사토1869년 ~ 1871년--20,000



이와사키 번은 구보타 번의 지번(支藩)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구보타 신덴 번'''(久保田新田藩) 또는 '''아키타 신덴 번'''(秋田新田藩)이라고 불렸다. 1701년 구보타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가 동생 요시나가에게 신덴 2만 석을 창미(蔵米)로 분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요시나가의 관위를 계승한 사타케 이키노카미(佐竹壱岐守) 가문이 다스렸다.

특정 영지를 갖지 않고 구보타 번이 창미를 지급하는 완전한 지번이었으며, 본번과의 연계가 강했다. 번주는 에도에 상주하는 정부다이묘(定府大名)였으며, 아사쿠사 도리코에에 상옥(上屋敷)을 짓고 거주했기 때문에 도리코에 님(鳥越様)이라고 불렸다. 공가중 어치주역(公家衆御馳走役)이나 슨푸 가반(駿府加番)을 맡았을 때에는 구보타 번으로부터 원조를 받았지만, 구보타 번의 재정 악화에 따라 창미 지급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었다.

왕정복고로 인해 에도 정부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8대 번주 사타케 요시쓰마도 귀국하여 1868년 3월, 가와베 군 츠바키다이(河辺郡椿台, 현재의 아키타시 유와 츠바키가와)에 독자적인 츠바키다이 진야(椿台陣屋)를 짓게 되었다. 이 때문에 번사들은 "츠바키다이 번"을 자칭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보신 전쟁의 일환인 아키타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진야를 건설할 틈도 없이, 구보타 번과 함께 오우 진무대(奥羽鎮撫隊, 신정부군) 편에 서서 쇼나이 군과 교전했으며, 츠바키다이는 격전지가 되었다(츠바키다이 전투). 1869년 6월, 다시 오가치 군 이와사키(雄勝郡岩崎, 현재의 유자와시 이와사키)로 이전하여 "이와사키 번"으로 개칭하고, 주변의 토지를 구보타 번으로부터 할양받아, 처음으로 소령을 갖게 되었다. 1871년 4월에 이와사키 번 진야(岩崎藩陣屋)를 지었지만, 같은 해 7월의 폐번치현으로 인해, 불과 3개월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에도 번저(江戸藩邸)는 아사쿠사 도리코에의 상옥 외에, 이케노하타에 중옥, 고이시카와 오츠카에 하옥이 있었다.

3. 3. 구보타 신덴 번

사타케 요시쿠니는 1701년부터 1720년까지 시키부노쇼 (式部少輔)의 관위를 가지고 종5위하에 있었으며, 10,000섬을 통치했다. 사타케 요시카타는 1720년부터 1732년까지 부젠노카미 (豊前守)의 관위를 가지고 종5위하에 있었으며, 10,000섬을 통치했다.

구보타 신덴 번은 구보타 번의 지번으로, 1701년 구보타 번 3대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가 그의 조카인 사타케 요시쿠니에게 신덴 1만 석을 분여하면서 시작되었다. 1732년, 사타케 요시즈미의 아들 요시미네가 사타케 요시카타를 양자로 들이면서 구보타 신덴 번은 구보타 번에 흡수되어 폐번되었다. 에도 번 저택은 상저택이 후카가와 타카하시, 하저택은 후카가와 모토키바에 있었다.

4. 지번

4. 1. 이와사키 번

'''이와사키 번'''(이와사키한/岩崎藩일본어)은 일본 에도 시대의 번 중 하나로, 구보타번의 지번이다.[30] 처음에는 '''구보타 신덴 번'''(久保田新田藩일본어), '''아키타 신덴 번'''(秋田新田藩일본어)으로 불렸다.

겐로쿠 14년(1701년), 구보타 번의 3대 번주 사타케 요시즈미가 동생 사타케 요시나가에게 새 개간지 2만 석을 나누어 주면서 아키타 신덴 번이 성립되었다.[30] 이와사키 번은 영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모번의 일반 수입에서 수입을 할당받았다는 점에서 특이했다.[30] 다이묘는 산킨코타이 제도에 참여했으며, 에도에 있는 구보타 번의 세 번째 저택인 도리코에를 사용했다.[30]

이와사키 번의 가문은 요시나가의 관위를 따와 '''이키노카미 가'''(壱岐守家)로 불렸다.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계급고쿠다카
1사타케 요시노부1701-1718이키노카미 (壱岐守); 효부쇼유 (兵部少輔)종5위하 (従五位下)20,000
2사타케 요시미치1718-1763이키노카미 (壱岐守); 이즈미노카미 (和泉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3사타케 요시타다1763-1780이키노카미 (壱岐守); 이즈미노카미 (和泉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4사타케 요시모토1780-1793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5사타케 요시치카1793-1821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6사타케 요시즈미1821-1849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7사타케 요시타카1849-1857사콘에추조 (中将)종4위하 (従四位下)20,000
8사타케 요시마쓰1857-1869이키노카미 (壱岐守)종5위하 (従五位下)20,000
9사타케 요시사토1869-1871-없음--없음-20,000



게이오 4년(1868년)에 가와베 군 쓰바키다이에 독자적으로 진야를 지었고, 판적봉환 이후에는 이와사키 진야를 건설하여 근거지를 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와사키 번이라 불리게 되었다. 폐번치현 때 폐지되었다.

4. 2. 구보타 신덴 번

1701년, 구보타 번의 2대 다이묘인 사타케 요시타카의 손자인 사타케 요시쿠네를 위해 구보타 신덴 번이 설립되었다. 구보타 번의 3대 다이묘인 사타케 요시즈미는 요시쿠니에게 10,000을 할당했고, 요시쿠니는 1720년 은퇴할 때까지 구보타 번의 부속 번으로 통치했다. 그의 뒤를 이어 사타케 요시카타가 1732년 5월까지 통치했다. 요시카타는 구보타 번의 5대 다이묘인 사타케 요시미네에게 입양되어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구보타 신덴 번은 구보타 번으로 흡수되었다.

사타케 씨(tozama) 1602-1871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석고
1사타케 요시쿠니1701년 ~ 1720년시키부노쇼 (式部少輔)종5위하10,000곡
2사타케 요시카타1720년 ~ 1732년부젠노카미 (豊前守)종5위하10,000곡



겐로쿠 14년(1701년), 구보타 번 3대 번주 시키부쇼유 요시토가 조카인 호젠노카미 요시카타에게 신덴 1만 석을 분여하면서 구보타 신덴 번이 시작되었다. 교호 17년(1732년), 요시토의 아들 호젠노카미 요시카타가 종가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구보타 신덴번은 폐번되었다. 에도 번 저택은 상저택이 후카가와 타카하시, 하저택은 후카가와 모토키바에 있었다.

4. 3. 가메다 번

겐와 8년(1622년)에 야마가타 번주 모가미 씨가 개역되고, 다음 겐와 9년(1623년)에 옛 모가미 영지 중 가메다로 이와키 씨가 시나노 나카무라 번에서 2만 석으로 전봉되면서 가메다 번이 성립되었다. 초대 번주 이와키 요시타카는 구보타 번 초대 번주인 사타케 요시노부의 조카이며, 후에 적자가 없었던 요시노부의 양자가 되어 사타케 요시타카로 개명하고 구보타 번을 이었다.

그러나 영지 경영이 안정된 후에도 구보타 번은 여러 번 번정에 간섭하여 독립한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가메다 번은 지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오모노 강 수운을 둘러싼 대립도 발생하여 양 번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5. 영지 및 석고

세키가하라 전투 2년 후인 1602년 6월 27일, 사타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구니가에 명령을 받았다.[33] 아키타 6군의 석고가 20만 석으로 결정된 것은 1664년 4월 30일로, 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의 치세 후반이 되어서였다.[34]

한 체제의 대부분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구보타번은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몇 개의 단절된 영토로 구성되었다.[27][28]



간분 4년(1664년)에 석고(石高)가 확정되기까지의 변천을 기록한다. 이후 오랫동안 변동이 없었지만, 막말에는 에조치 일부가 주어졌고, 또한 보신 전쟁 후에 지번인 이와사키번에 오가치군의 일부를 할양했다.

5. 1. 아키타 6군

세키가하라 전투 2년 후인 1602년 6월 27일, 사타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구니가에 명령을 받고 요리키 다이묘였던 아시나 요시히로, 이와키 사다타카, 다가야 노리에, 소마 요시타네와 함께 간토・미나미무쓰의 영지를 모두 몰수당했다.[33] 같은 해 9월 12일, 다시 판물이 내려져 전봉지가 데와국 내 '''아키타・센보쿠''' 양소로 밝혀졌다.[33] 이 "아키타・센보쿠"는 아키타 6군으로, 아키타군, 히야마군(후의 야마모토군), 도요시마군(후의 가와베군), 야마모토군(후의 센보쿠군), 헤이카군, 오가치군을 가리킨다.

아키타 6군은 한 체제의 대부분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몇 개의 단절된 영토로 구성되었다.[27][28] 아키타 6군의 석고가 20만 석으로 결정된 것은 1664년 4월 30일로, 2대 번주 사타케 요시타카의 치세 후반이 되어서였다.[34]

5. 2. 추가 영지

1605년 11월 27일(게이초 10년 10월 17일), 구보타 번은 막부로부터 시모쓰케국 가와치군의 7개 촌(야쿠시지 촌, 마치다 촌, 다나카 촌, 니라카와 촌, 히가시네 촌, 이소베 촌, 기누이타 촌)과 기누이타 촌의 지촌인 하나다 촌, 쓰가군의 3개 촌(가야하시 촌, 이이다 촌, 야마다 촌)을 추가로 받았다. 이 지역은 현재의 도치기현 시모노시・오야마시에 걸쳐 있으며, 총칭으로 야쿠시지라고 불렸다. 수확량은 최초 검지에서 5,414석, 후에 신전 400석을 더하여 간분 4년(1664년)에는 5,818석이었다. 아키타 6군과 합하여 약 20만 5,800석이 되었다.

요시노부는 참근교대 시에 오슈 가도의 옆길에 있는 야쿠시지에 자주 들러 매 사냥을 즐기거나, 시오바라 온천에서 운반해 온 온천수로 탕치를 했다.

야마가타 번의 번주 모가미 요시토시가 개역된 직후인 1622년 11월 14일(겐와 8년 10월 12일), 옛 모가미 영토의 일부였던 유리군의 百三段(모모사다)을 구보타 번 영토의 일부와 교환했다.[39] 유리군 북단에 있는 백삼단 신야촌, 백삼단 하마다촌, 백삼단 이시다자카촌의 3개 촌은 구보타 성에 매우 근접해 있어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노부가 막부에 건의하여 교환이 이루어졌다.[40] 1647년(쇼호 4년)의 「데와국 일국 그림 지도」에 따르면, 3개 촌을 합쳐 688석이었다.[40]

百三段 3개 촌은 이후 유리군에서 가와베군으로 옮겨졌지만, 맞바꾼 구보타 번 영토가 어디였는지는 명확한 사료가 없어 밝혀지지 않았다.[40] 키미가노촌, 나가사와촌, 게네촌, 오사와 향 중 키우리자와촌이 후에 가메다 번 영토가 된 것으로 미루어, 이들 촌이 원래 구보타 번 영토였으며 가와베군(토요시마군) 등에서 유리군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41]

6. 재정

초기 번정은 산에서 얻는 수입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광산으로는 아이나이 은산·아니 동산 등이 가동되었지만, 17세기에는 생산량이 급감하여 동산만 가동하게 되었다. 임업에서는 군함·성용 목재로 아키타 삼나무가 유명했고, 가로(家老) 시부에 나이젠의 "나라의 보물은 산이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구보타번에게 또 다른 재원은 쌀이었으며, 여러 차례 검지를 실행하고 연공률을 정한 "흑인 어정서"를 각 마을에 배포했다. 덴메이 3년의 대기근으로 황폐해진 경지를 재생하기 위해 황폐지라면 직할지, 가신 지행지를 불문하고 경작을 인정했다. 더 나아가 번정을 통해 신전 개발에 주력하여, 가신단이 개발한 신전은 모두 가신단의 지행지로 함으로써 개발에 대한 의욕을 높였다.

6. 1. 재정 개혁 노력

초기 구보타 번은 아이나이 은산, 아니 동산 등의 광산과 아키타 삼나무를 이용한 임업을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42] 그러나 17세기에는 광산 생산량이 급감하고, 무분별한 벌채로 임업도 쇠퇴하여 임정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42]

구보타 번은 쌀을 또 다른 재원으로 삼아 신전 개발에 주력했다. 가신단이 개발한 신전은 모두 가신단의 지행지로 하여 개발 의욕을 높였다.[42] 교호 14년(1729년)에는 실제 수확량이 38만 석을 넘어섰지만, 가신단의 지방 지행지가 많았고, 농촌 내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다.[42]

노시로 춘경칠, 가와쓰라 칠기 등 특산품을 육성하고 삼나무, 옻, 담배, 유채 등 환금 작물도 장려했다.[42] 그러나 농민들이 벼농사를 소홀히 할 것을 우려하여 농민들의 매매에 중세를 부과해 상업 발전을 저해했다.[42]

구보타 번은 많은 가신단과 그들이 차지하는 지행지로 인해 재정이 항상 압박받았다.[42] 교호 6년(1721년)에는 조직 간략화, 지행 차용, 밭농사 장려 등을 실시했으나 재정난을 해결하지 못했다.[42] 호레키 4년(1753년)에는 은찰 사법을 제정했으나 은찰 폭락과 물가 상승을 초래했고, 다음 해 대흉작과 겹쳐 호레키 7년에는 번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아키타 소동)[42]

구보타 번은 4년에 한 번 꼴로 흉작과 기근을 겪었다.[42] 특히 덴포 4년(1833년)의 대흉작은 "사년의 케카치"라고 불리며 번 인구의 4분의 1이 아사했다.[42]

무진 전쟁으로 영지의 2/3가 전화 피해를 입었고, 신정부군 지원 비용 부담으로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42] 전쟁 후 정부로부터 받은 상전은 부족했고, 가고야마 제련소에서 화폐 주조로 버텼으나, 메이지 2년(1869년) 정부가 번의 화폐 주조를 금지했다.[42] 이후 밀주 문제, 아키타 위조 지폐 사건,[42] 야사카마루 외채 사건, 하츠오카 게이지 사건 등으로 정부의 엄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43]

6. 2. 재정난의 지속

구보타 번은 잦은 흉작과 기근, 막대한 군사비 지출 등으로 인해 재정난이 지속되었다. 번에서는 4년에 한 번 꼴로 흉작을 겪어 기근이 발생했다.[42] 그 때마다 번 재정은 타격을 입었고, 황폐한 토지를 만들어냈다.[42] 특히 덴포 4년(1833년)의 대흉작은 "사년의 케카치"라고 불리며, 번의 인구 중 4분의 1이 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무진 전쟁에서는 주변의 오우 열번을 적으로 삼으면서 영지의 2/3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이 전화를 입었고, 게다가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열번 동맹군에게 공격받은 주변 제번의 번주·번사 및 서국으로부터의 원군 비용을 모두 구보타 번이 부담했기 때문에, 군사비 면에서도 번 재정을 압박했다.[42] 전쟁 후에 정부로부터 주어진 상전은 전비·전재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소액에 불과했고, 차입금을 감당하지 못한 구보타 번은 가고야마 제련소에서의 화폐 주조로 버티려고 했지만, 하코다테 전쟁이 종결된 메이지 2년 5월(1869년 6월)에 정부는 각 번의 독자적인 번찰 발행·화폐 주조를 금지했다.[42] 구보타 번은 금지 이후에도 밀주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정부에서 문제 삼았고 (번의 내분에서 밀고가 있었다고 전해짐), 메이지 4년 말에 전 징세관 사토 도키노스케·오야마 시게지 에몬 등 11명의 대량 처벌이 이루어졌다. (아키타 위조 지폐 사건)[42]

7. 전매품

누에, 옻나무, 목재구보타 번의 전매품이었다.[44]

8. 성지

구보타번(데와국)의 입봉 초기에 쓰치자키 미나토성에 들어가 초대 요시노부의 아버지 요시시게를 로쿠고성(아키타현 미사토정 로쿠고)에 배치하는 등, 요코테, 오다테, 노시로, 쥬니소 및 가쿠노도 등의 요지에 각각 사타케 일족이나 유력 가신을 배치했다. 이것은 반 사타케 일규가 각지에서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 후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키타군 호도노에 신성을 축성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이 땅은 북동쪽과 동쪽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아사히카와를 파서 서쪽 외곽 해자를 만들었다. 우슈 가이도를 서쪽에 배치한 것으로부터 사신상응의 땅에 가까운 것으로 했다. 혼마루를 포함한 성역은 현재의 센슈 지구가 이에 해당한다.

구보타 조카마치는 도마치라고 불리는 상인 마을이 현재의 오마치, 아사히키타 및 아사히미나미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마을 및 아시가루 마을은 성 아래 주변의 나카도리, 미나미도리, 나라야마, 호도노, 테가타, 가와구치에 배치되어 그 범위는 상인 마을보다 넓다. 구보타 조카마치가 사무라이의 마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1885년(메이지 18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아키타 마을(구보타 마을에서 개칭)의 총 인구 30,254명 중 사족은 13,444명(44.4%)이었고, 아키타현 전체 총 인구 642,930명 중 사족은 34,947명(5.4%)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히 사족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5]。이는 일반 사족이 생활에 곤궁해져 조카마치에서 이산하기 시작한 시기의 조사이므로, 폐번치현 시점에서의 사족 인구비는 더욱 높아 반반 정도였다고 생각된다[45]

그 후, 막부로부터 일국일성령이 발령되어 많은 성이 철거되지만, 구보타번은 구보타성의 본성 외에 요코테와 오다테의 2개의 성의 존속을 허가받는다. 이들은 구보타번의 지방 통제의 일환에 기여했다. 이 성이나 관에 배치된 중신은 '''소아즈카리'''(所預)라고 불렸으며, 그들도 각자의 가신단을 거느렸기 때문에, 성지는 소조카마치로서 번성했다.

또한, 사타케 일족에는 본가의 외에 유력한 4 가문이 있어, 히타치 시대의 거점 위치에 유래하여 각각 동가, 서가, 남가, 북가라고 불린다. 서가(코바 씨, 후에 사타케 성을 허가받음)는 오다테, 남가는 유자와, 북가는 가쿠노에 배치되었으며, 동가는 4가의 필두로서 구보타 조카마치에 상주했다. 이와 같이 구보타번에서는 근세에 들어서도 지방 지행제가 강하게 행해졌으며, 번정 중기 이후에는 번주의 권한 강화의 움직임에 대해 내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사타케 4 가문에게 번주의 상속권은 없었지만, 지번의 양자를 거쳐 번주를 상속한 사례가 있다. 4가문의 자손으로는, 도요 제작소 전 사장 사타케 요시토시가 동가 제18대 당주, 아키타현 지사 사타케 노리히사가 북가 21대 당주이다.

8. 1. 구보타 성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키타군 호도노에 새로운 성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이 곳은 북동쪽과 동쪽이 산으로 막혀 있고, 아사히카와를 파서 서쪽 외곽 해자를 만들었다.[45] 우슈 가이도를 서쪽에 배치하여 사신상응의 땅에 가깝게 하였다. 혼마루를 포함한 성 구역은 현재의 센슈 지구에 해당한다.[45]

구보타 조카마치는 도마치라고 불리는 상인 마을이 현재의 오마치, 아사히키타 및 아사히미나미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마을 및 아시가루 마을은 성 아래 주변의 나카도리, 미나미도리, 나라야마, 호도노, 테가타, 가와구치에 배치되어 그 범위는 상인 마을보다 넓었다. 1885년(메이지 18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아키타 마을(구보타 마을에서 개칭)의 총 인구 30,254명 중 사족은 13,444명(44.4%)이었고, 아키타현 전체 총 인구 642,930명 중 사족은 34,947명(5.4%)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사족이 집중되어 있었다.[45] 폐번치현 시점에서의 사족 인구비는 더욱 높아 반반 정도였다고 추정된다.[45]

막부로부터 일국일성령이 발령되어 많은 성이 철거되었지만, 구보타번은 구보타의 본성 외에 요코테와 오다테의 2개 성의 존속을 허가받았다. 이들은 구보타번의 지방 통제의 일환에 기여했다. 이 성이나 관에 배치된 중신은 '''소아즈카리'''(所預)라고 불렸으며, 그들도 각자의 가신단을 거느렸기 때문에, 성지는 소조카마치로서 번성했다.

구보타 성은 게이초 9년(1604년)에 축성되었으며, 현재 아키타현아키타시 센슈 공원에 위치한다.

8. 2. 일국일성령과 예외

일국일성령에도 불구하고 구보타 번에 여러 성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막부로부터 일국일성령이 발령되어 많은 성이 철거되지만, 구보타 번은 구보타의 본성 외에 요코테성과 오다테성 2개의 성의 존속을 허가받았다.[45] 이들은 구보타 번의 지방 통제의 일환에 기여했다. 이 성이나 관에 배치된 중신은 '''소아즈카리'''(所預)라고 불렸으며, 그들도 각자의 가신단을 거느렸기 때문에, 성지는 소조카마치로서 번성했다.

또한, 사타케 일족에는 본가 외에 유력한 4 가문(동가, 서가, 남가, 북가)이 있었다. 서가는 오다테, 남가는 유자와, 북가는 가쿠노에 배치되었으며, 동가는 구보타 조카마치에 상주했다. 이와 같이 구보타 번에서는 근세에도 지방 지행제가 강하게 행해졌으며, 번정 중기 이후 번주의 권한 강화 움직임에 대해 내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8. 3. 소아즈카리

구보타 번은 일국일성령에도 불구하고 요코테와 오다테 두 성의 존속을 허가받았다.[45] 이 성들은 구보타 번의 지방 통제에 기여했으며, 이 성이나 관에 배치된 중신은 소아즈카리(所預)라고 불렸다.[45] 소아즈카리는 각자의 가신단을 거느렸고, 성지는 소조카마치로서 번성했다.[45]

또한, 사타케 일족에는 본가 외에 유력한 4가문(동, 서, 남, 북가)이 있었다. 서가(사타케 성을 허가받음)는 오다테, 남가는 유자와, 북가는 가쿠노에 배치되었고, 동가는 구보타 조카마치에 상주했다.[45] 이처럼 구보타 번에서는 근세에도 지방 지행제가 강하게 행해졌으며, 이는 번정 중기 이후 번주 권한 강화 움직임에 대한 내분 원인이 되기도 했다.[45]

9. 가로

사타케 북가(데와 가쿠노다테 소유, 번주 일문) : 유신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사타케 요시토나리 - 요시아키 - 요시노부 - 요시모토 - 요시쿠니 - 요시미 - 요시후미 - 요시노리 - 요시유 - 요시미치 - 요시히사

사타케 서가(데와 오다테 소유, 번주 일문) : 유신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원래는 고바씨였으나, 만지 원년(1658년)경 3대 요시후사 때 사타케 성을 하사받았다.

고바 요시나리 - 요시야스 - 요시후사 - 요시타케 - 요시카타 - 요시무라 (아내는 이시즈카 요시타카의 딸) - 요시큐 (아내는 이시즈카 요시노부의 딸) - 요시타네 - 요시모토 - 요시시게 - 요시유키 - 쇼이치

이시즈카씨 (번주 일문. 아키타로 국체 후에는 가로직을 역임)

이시즈카 요시타츠 (고바 요시나리의 동생) - 요시마사 - 요시사토 (사타케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 요시모토 - 요시타카 (사타케 요시히데의 아들) - 요시노부 - 요시토모 - 요시야스 - 요시사다

오야마씨 (데와 인나이 소유, 번주 일문)

도무라씨(주타유 가) (데와 요코테 소유, 번주 일문)

도무라 요시쿠니 - 요시무네 - 요시쓰라 - 요시스케 (요시히로) - 요시미 - 요시후 - 요시타카 - 요시미치 - 요시야스 - 요시토쿠

이마미야씨 (번주 일문. 초기는 수험도·사인 두령을 세습)

이마미야 미치요시 - 요시카타 - 요시노리 - 나가노리 - 요시토오 (동생) - 요시키 - 요시에이 (동생) - 요시오

오노오카씨 (번주 일문)

오카모토씨 (번주 일문격)

후루우치씨 (번주 일문)

사타케 남가(데와 유자와 소유, 번주 일문) : 유신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요시아키 - 요시쓰구 - 요시히라 - 요스야스 - 요시히로 - 요시모치 (요스야스의 아들) - 요시스케 (요시히로의 아들) - 요시이 (※하야카와 도쿠히사의 아들) - 요시요시 - 요시치카 - 요시타케 - 요시마코토 - 요시린 (※하야카와 무쓰토모의 아들) - 요시오 (※하야카와 치호의 아들) - 요시모토 - 요시스케 (요시모토의 동생)

(※하야카와씨는 사타케 요시타네의 차남 노부나오를 시조로 하는 사타케씨 일문. 또한, 하야카와 치호는 요시치카의 아들이자 요시타케의 친동생이다.)

우쓰노미야씨 : 우쓰노미야 무네야스(유키 아사카쓰) - 미쓰쓰나 (마카베 시게모토의 조카, 시게모토의 차남) - 아키쓰나 - 노리쓰나 - 미쓰쓰나 - 다케쓰나 (사타케 요시토모의 차남, 훗날의 사타케 요시미치) - 아키쓰나 - 손쓰나 - 시게쓰나 - 모쓰나

다가야씨(데와 히야마 소유, 번주 일문) : 역대 당주들은 사타케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았다. 다가야 '''노리'''이에 - '''다카'''쓰구(히코타로) - '''다카'''이에(다카쓰구의 친동생) - '''다카'''쓰구(쇼겐) - '''가쿠'''시게 (도무라 도코의 아들) - '''미네'''쓰구 (가쿠시게의 친동생) - '''미네'''아키라 (도무라 요시미의 삼남) - '''아쓰'''타카 - '''아쓰'''마사 (사타케 요시토모의 삼남) - '''카즈'''쓰구 - '''아쓰'''타카 - '''무쓰'''사다 - '''무쓰'''아키라 (무쓰사다의 동생, 훗날 이에토모)

아키타 다테씨 : 역대 당주들은 사타케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았다. 다테 모리시게 - '''노리'''무네 (사타케 요시히사의 아들) - '''다카'''무네 - '''도쿠'''토키 - '''도쿠'''무네 (사타케 요시히데의 아들) - '''미네'''무네 - '''아쓰'''무네 (아쓰무네의 친동생) - '''카즈'''무네


  • 향씨 (데와 요코테성 아래 지배)
  • 시부에 씨 (데와 카리와노성 아래 지배)

 *역대 당주의 (굵게 표시)의 첫 글자는 사타케 씨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은 것이다.

시부에 마사미츠 - '''노부'''미츠 - 미쓰히사 - '''타카'''미츠 (사타케 요시아키의 아들) - '''토코'''미츠 - '''가쿠'''미츠 - '''미네'''미츠 - '''츠보네'''미츠 - '''아키'''미츠 - '''아츠'''미츠 - '''카즈'''미츠 - '''아츠'''미츠

  • 스다 씨 (인도 2번 자리부터)
  • 마츠노 씨 (인도 2번 자리부터)
  • 히키타 씨

히키타 사다모리 - 사다야스 - 사다츠네 - 사다쓰나 (아쓰쓰나) - 사다노리 - 사다쓰네

  • 사토 씨
  • 우메즈 씨 (데와 카쿠마가와성 아래 지배) - 시인・우메즈 타다아키가 알려져 있다.[46] 키라 요시히사와 교류가 있었다.
  • 구로사와 씨

9. 1. 引渡一番座 (인도 제일좌)


  • 사타케 북가(데와 가쿠노다테 쇼요·번주 일문) 유신 후 남작

사타케 요시토나리 - 요시아키 - 요시노부 - 요시모토요시쿠니 - 요시미 - 요시후미 - 요시노리=요시유=요시미치=요시히사

  • 사타케 서가(데와 오다테 쇼요·번주 일문) 유신 후 남작 원래는 고바씨이며, 만지 원년(1658년)경, 3대 요시후사의 때, 사타케 성을 허락받았다.

고바 요시나리 - 요시야스=사타케 요시후사 - 요시타케=요시카타=요시무라 (아내는 이시즈카 요시타카의 딸) - 요시큐 (아내는 이시즈카 요시노부의 딸) - 요시타네 - 요시모토 - 요시시게 - 요시유키 - 쇼이치

  • 이시즈카씨(번주 일문. 아키타로 국체 후에는 가로직이 된다)

이시즈카 요시타츠 (고바 요시나리의 동생) - 요시마사=요시사토 (사타케 요시아키의 셋째 아들) - 요시모토=요시타카 (사타케 요시히데의 아들) - 요시노부 - 요시토모 - 요시야스 - 요시사다

  • 오야마씨 (데와 인나이 쇼요·번주 일문)
  • 도무라씨(주타유 가) (데와 요코테 쇼요·번주 일문)

도무라 요시쿠니 - 요시무네 - 요시쓰라 - 요시스케 (요시히로) - 요시미 - 요시후 - 요시타카 - 요시미치 - 요시야스 - 요시토쿠

  • 이마미야씨 (번주 일문. 초기는 수험도·사인 두령을 세습)

이마미야 미치요시 - 요시카타 - 요시노리 - 나가노리=요시토오 (동생) - 요시키=요시에이 (동생) - 요시오

  • 오노오카씨 (번주 일문)
  • 오카모토씨 (번주 일문격)
  • 후루우치씨 (번주 일문)

9. 2. 引渡二番座 (인도 이번좌)

사타케 남가(데와 유자와 소유・번주 일문)는 유신 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사타케 요시아키 - 요시쓰구 - 요시히라 - 요스야스 - 요시히로=요시모치(요스야스의 아들)=요시스케(요시히로의 아들)=요시이(※하야카와 도쿠히사의 아들) - 요시요시 - 요시치카 - 요시타케 - 요시마코토=요시린(※하야카와 무쓰토모의 아들)=요시오(※하야카와 치호의 아들) - 요시모토=요시스케(요시모토의 동생) 순으로 이어졌다.

(※하야카와씨는 사타케 요시타네의 차남・노부나오를 시조로 하는 사타케씨 일문. 또한, 하야카와 치호는 요시치카의 아들이자 요시타케의 친동생이다.)

우쓰노미야씨 가문은 우쓰노미야 무네야스(유키 아사카쓰)=미쓰쓰나(마카베 시게모토의 조카・시게모토의 차남) - 아키쓰나=노리쓰나 - 미쓰쓰나=다케쓰나(사타케 요시토모의 차남, 훗날의 사타케 요시미치)=아키쓰나=손쓰나 - 시게쓰나 - 모쓰나 순으로 이어졌다.

다가야씨(데와 히야마 소유・번주 일문)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사타케씨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았다. 다가야'''노리'''이에='''다카'''쓰구(히코타로)='''다카'''이에(다카쓰구의 친동생) - '''다카'''쓰구(쇼겐)='''가쿠'''시게(도무라 도코의 아들)='''미네'''쓰구(가쿠시게의 친동생)='''미네'''아키라(도무라 요시미의 삼남) - '''아쓰'''타카='''아쓰'''마사(사타케 요시토모의 삼남) - '''카즈'''쓰구 - '''아쓰'''타카 - '''무쓰'''사다='''무쓰'''아키라(무쓰사다의 동생, 훗날 이에토모) 순으로 이어졌다.

아키타 다테씨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사타케씨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았다. 다테 모리시게='''노리'''무네(사타케 요시히사의 아들) - '''다카'''무네 - '''도쿠'''토키='''도쿠'''무네(사타케 요시히데의 아들) - '''미네'''무네 - '''아쓰'''무네(아쓰무네의 친동생) - '''카즈'''무네 순으로 이어졌다.

9. 3. 廻座 (회좌, 일부)


  • 향씨(데와 요코테조 아래 지배)
  • 시부에 씨(데와 카리와노조 아래 지배)

 *역대 당주의 (굵게 표시)의 첫 글자는 사타케 씨 구보타번 역대 번주에게서 편휘를 받은 것이다.


시부에 마사미츠 - '''노부'''미츠=미츠히사='''타카'''미츠 (사타케 요시아키의 아들)='''토코'''미츠='''카쿠'''미츠 - '''미네'''미츠 - '''츠보네'''미츠='''아키'''미츠 - '''아츠'''미츠='''카즈'''미츠 - '''아츠'''미츠

  • 스다 씨 (인도 2번 자리부터)
  • 마츠노 씨 (인도 2번 자리부터)
  • 히키타 씨

히키타 사다모리 - 사다야스 - 사다츠네 - 사다쓰나 (아쓰쓰나) - 사다노리 - 사다쓰네

  • 사토 씨
  • 우메즈 씨 (데와 카쿠마가와조 아래 지배) - 시인・우메즈 타다아키가 알려져 있다[46]. 키라 요시히사와 교류가 있었다.
  • 쿠로사와 씨

10. 번저

구보타 번은 에도에 번저를 두고, 내신다(현재의 지요다구 내신다 2초메)에 상저를 설치했다. 그러나 덴나 2년(1682년)에 시타야로 이전했다.[47] 구 저택에는 사타케 히데요시를 모시는 사타케 신사가 있었는데, 메이지 시대에 무격사가 되었지만 이후 신사 합사로 이나리 신사와 통합되어 현재는 사타케 이나리 신사로 남아있다.[47]

호에이 연간에는 상저가 시타야 시치켄초(현재의 다이토구 다이토, 사타케 상점가 주변[48][49])에, 중저가 도리코에에, 하저가 후카가와에 있었다. 또한 우메다(현재의 아다치구 우메다 6초메)에 안채를 두었다.[50]

막말에는 시타야 시치켄초에 상저, 칸다 사쿠마초와 혼조 짓켄가와에 중저, 도리코에, 혼조 나카노고, 닛포리에 하저가 있었다. 오사카 누노야초에는 오사카 번저, 교토 야나기바바 도리시조상루에는 교토 번저를 두었다.

11. 보제사

본국에서의 보제사는 만국산 천덕사이다. 번주나 번사가 에도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하시바의 묘귀산 소센지를 보제사로 삼았다.

12. 막말의 영지

12. 1. 구보타 번

구보타 번은 한 체제의 대부분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몇 개의 단절된 영토로 구성되었다.[27][28]

상기 외에 메이지 유신지시마국 쿠나시리군의 2만 석이 더해졌다.

12. 2. 이와사키 번

데와국(우고국) 오가치군의 일부이다.

13. 구보타 번을 소재로 한 작품

만화 《눈의 고개》 (이와아키 히토시)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Memories of Silk and Straw
[2] 서적 Nihon no kassen: monoshiri jiten
[3] 웹사이트 Satake-shi http://www2.harimaya[...] 2008-08-15
[4] 웹사이트 Kubota-han http://www.asahi-net[...] 2008-08-15
[5] 서적
[6]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7] 서적 Through Closed Doors: Western Influence on Japanese Art 1639–1853
[8] 웹사이트 Akita ranga http://www.aisf.or.j[...] 2008-08-19
[9] 서적
[10] 서적 Zusetsu: Nihon meijō-shū
[11] 서적 Boshin nanboku sensō to Tōhoku seiken
[12] 문서 Tomura Jūdayū
[13] 서적 Aizu Boshin senshi
[14] 서적
[15] 문서 July 4th by the lunisolar calendar
[16] 서적 Boshin nanboku sensō to Tōhoku seiken
[17] 서적 Ōuetsu Reppandōmei
[18] 서적
[19] 서적
[20] 문서 July 15th by the lunisolar calendar
[21] 서적 Woman in the Crested Kimono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28]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29] 웹사이트 Genealogy http://reichsarchiv.[...]
[30] 웹사이트 Edo daimyo.net http://www1.parkcity[...]
[31] 서적 秋田市史 第四巻
[32] 웹사이트 るもい風土資産カード https://www.hkd.mlit[...] 北海道開発局留萌開発建設部 2021-10-06
[33]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4]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5]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6]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7]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8]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39]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40]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41] 서적 「梅津政景日記」読本
[42] 간행물 あきた(通巻69号) http://common3.pref.[...] 1968-02-01
[43] 논문 角館城下町の歴史 無明舎出版 1982-12
[44] 서적 文明としての江戸システム 2002
[45] 서적 秋田市史 第四巻
[46] 서적 梅津忠昭日記 秋田県公文書館
[47] 문서 社には「扇に日の丸」の佐竹家家紋がある。稲荷神社の神使である狐像は無い。
[48] 학술지 くぼた旧町名物語・まちの生い立ち ④江戸屋敷跡 編 東京に今も残る“佐竹”の名と紋章 http://www.city.akit[...] 秋田市 2014-06-14
[49] 웹사이트 商店街の歴史 http://www.satakesho[...] 佐竹商店街振興組合 2014-06-14
[50] 문서 一般財団法人千秋文庫(千代田区)が所蔵する「梅田御屋敷絵図」や登録有形文化財「千住花又瀬崎辺之図」に「佐竹大膳(佐竹義格)屋敷」と描か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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