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고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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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 고시지는 197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1994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22년간 활동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그는 통산 310세이브를 기록하며,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뉴욕 양키스에서 셋업/마무리 투수 분업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1975년, 1978년, 1980년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 1위를 차지했으며, MLB 올스타전에 9회 선정되었다. 200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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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고시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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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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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스 고시지 |
본명 | 리치 고시지 |
영어 이름 | Rich Gossage |
출생일 | 1951년 7월 5일 |
출생지 |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MLB 데뷔 | 1972년 4월 16일 |
MLB 데뷔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
NPB 데뷔 | 1990년 7월 4일 |
NPB 데뷔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MLB 마지막 경기 | 1994년 8월 8일 |
MLB 마지막 팀 | 시애틀 매리너스 |
NPB 마지막 경기 | 1990년 10월 10일 |
NPB 마지막 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경력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2년 ~ 1976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1977년) 뉴욕 양키스 (1978년 ~ 1983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84년 ~ 1987년) 시카고 컵스 (198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9년) 뉴욕 양키스 (198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0년) 텍사스 레인저스 (1991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2년 ~ 1993년) 시애틀 매리너스 (1994년) |
기록 (MLB) | |
승-패 | 124승 107패 |
평균자책점 | 3.01 |
탈삼진 | 1,502 |
세이브 | 310 |
기록 (NPB) | |
승-패 | 2승 3패 |
평균자책점 | 4.40 |
탈삼진 | 40 |
세이브 | 8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9회 (1975년–1978년, 1980년–1982년, 1984년, 1985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1978년 |
AL 롤레이즈 구원 투수상 | 1978년 |
AL 세이브 리더 | 3회 (1975년, 1978년, 1980년) |
명예의 전당 | |
종류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입성 년도 | 2008년 |
득표율 | 85.8% (9번째 투표) |
신체 정보 | |
키 | 190.5cm |
몸무게 | 98.4kg |
기타 정보 | |
드래프트 | 1970년 드래프트 9라운드 |
2. 초기 경력
리처드 마이클 "구스" 고시지는 1951년 7월 5일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태어나 N. 캐스케이드 애비뉴 근처에서 자랐다. 1970년 와슨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고교 시절 야구와 농구팀에서 활약하여 학교의 운동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3] 그의 아내 코르나 고시지 역시 와슨 고등학교 졸업생이다.
1970년 드래프트 9라운드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되어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72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75년 팀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아 26세이브(리그 1위), 평균자책점 1.84를 기록하며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나, 1976년 선발 전환 시도는 9승 17패로 실패했다.
1970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9라운드로 지명되어 계약했다. 계약 후 루키 리그 GCL 화이트삭스에서 3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2.81을 기록했고, 이후 미드웨스트 리그의 애플턴으로 옮겨가서는 평균자책점 5.91을 기록했다. 1971년에는 애플턴에서 18승 2패, 평균자책점 1.83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리그를 압도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1972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
시즌 후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여 1977년 한 시즌 동안 다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11승 9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2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78년에는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여 6년간 팀의 핵심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이적 첫해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1980년에는 6승 2패 33세이브(리그 1위),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 사이 영 상 투표 3위에 오르는 등 전성기를 보냈다.
1984년부터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카고 컵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거쳤고, 1989년 시즌 중반 뉴욕 양키스로 잠시 복귀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스프링 캠프 테스트 불합격에도 불구하고 팀의 마무리 투수 부재로 인해 시즌 중반 합류했으나, 첫 등판부터 홈런을 맞는 등 부진했고, 번트 수비 시 퀵 모션 약점을 공략당하는 등 고전했다. 최종 성적은 2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4.40에 그쳐 시즌 후 방출되었다.
1991년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하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93년 8월, 공 가방에 걸려 넘어져 손목 골절 부상을 당한 것이 은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1994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2000년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었으나 여러 차례 고배를 마셨다. 2007년에는 파드리스 시절 팀 동료였던 토니 귄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며 고시지의 탈락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마침내 2008년, 85.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경험자로는 래리 도비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명예의 전당 입성 기록이다.
한편, MLB 내 약물 문제에 대해 그는 "같은 상황에 놓여도 약물에 손대지 않겠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약 사용했다면) 나는 제대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는 약물 사용 의혹이 있는 마크 맥과이어에게 갈 표 일부가 그에게 향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3. 1.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2-1976)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태어나 자란 고시지는 1970년 아마추어 드래프트 9라운드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되었다. 마이너 리그를 거쳐 1972년 20세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그해 36경기에 등판해 7승 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28을 기록했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그해 MVP를 수상한 딕 앨런 등의 활약으로 오랜 부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1973년에는 메이저 리그에서 부진하여 시즌의 절반 가량을 AAA팀인 아이오와 오크스에서 보냈다. 1974년에는 39경기에 등판하여 4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13을 기록했다.
1975년 화이트삭스의 마무리 투수로 정착하여 62경기에 등판, 9승 8패, 아메리칸 리그 1위인 26세이브와 1.8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 시기 그는 1971년에 팀에 합류한 좌완 테리 포스터와 함께 강력한 좌우 계투 조합을 형성하기도 했다. 포스터 역시 고시지보다 1년 앞선 1974년에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1976년, 폴 리처즈 감독은 강력한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는 선발로 나서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고시지를 선발 투수로 전환시켰다. 고시지는 선발로 29경기에 등판했으나, 지구력과 추가적인 구종의 부족으로 9승 17패, 평균자책점 3.94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흥미롭게도 팀 동료였던 테리 포스터 역시 같은 해 선발 전환 시도를 했으나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시즌 종료 후 고시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적하게 된다.
연도 | 구단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고의 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방어율 | WHIP |
---|---|---|---|---|---|---|---|---|---|---|---|---|---|---|---|---|---|---|---|---|---|---|---|---|---|
1972 | CWS | 36 | 1 | 0 | 0 | 0 | 7 | 1 | 2 | -- | .875 | 352 | 80.0 | 72 | 2 | 44 | 3 | 4 | 57 | 7 | 0 | 44 | 38 | 4.28 | 1.45 |
1973 | 20 | 4 | 1 | 0 | 0 | 0 | 4 | 0 | -- | .000 | 232 | 49.2 | 57 | 9 | 37 | 2 | 3 | 33 | 6 | 0 | 44 | 41 | 7.43 | 1.89 | |
1974 | 39 | 3 | 0 | 0 | 0 | 4 | 6 | 1 | -- | .400 | 397 | 89.1 | 92 | 4 | 47 | 7 | 2 | 64 | 2 | 1 | 45 | 41 | 4.13 | 1.56 | |
1975 | 62 | 0 | 0 | 0 | 0 | 9 | 8 | 26 | -- | .529 | 582 | 141.2 | 99 | 3 | 70 | 15 | 5 | 130 | 3 | 0 | 32 | 29 | 1.84 | 1.19 | |
1976 | 31 | 29 | 15 | 0 | 1 | 9 | 17 | 1 | -- | .346 | 956 | 224.0 | 214 | 16 | 90 | 3 | 9 | 135 | 6 | 0 | 104 | 98 | 3.94 | 1.36 |
3. 2. 피츠버그 파이리츠 (1977)
1976년 시즌 종료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구스 고시지와 테리 포스터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보내고, 실비오 마르티네스와 리치 지스크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4] 이는 당시 곧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예정이었던 선수들을 교환한 이례적인 경우였다.파이리츠로 이적한 고시지는 다시 클로저를 맡아 1977년 한 해 동안 활약했다. 그는 72경기에 등판하여 11승 9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2를 기록했다. 26세이브는 내셔널 리그 전체 3위에 해당하는 뛰어난 성적이었으며, 3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1977년 시즌 종료 후, 고시지는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어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팀을 옮겼다.
3. 3. 뉴욕 양키스 (1978-1983)
1977년 시즌 이후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은 고시지는 6년 360만달러 계약을 맺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5] 그의 합류로 기존 마무리 투수이자 사이 영 상 수상자였던 스파키 라일은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고시지는 1978년 (27세이브)과 1980년 (33세이브)에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 1위를 차지했다. 특히 1978년에는 중요한 경기에서 활약했는데, 10월 2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AL 동부 우승 결정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했다. 버키 덴트의 홈런으로 4-2로 앞선 7회 1사 상황에 등판하여 8회에 2실점했지만, 9회 2사 2루에서 칼 야스트렘스키를 3루수 그레이그 네틀스의 내야 뜬공으로 처리하며 5-4 승리를 지켰다. 5일 뒤 ALCS에서도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9회에 등판하여 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어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도 8회에 등판하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팀의 2년 연속 우승을 마무리했다.
1979년 4월 19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 동료 클리프 존슨과 언쟁 끝에 몸싸움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시지는 오른손 엄지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3개월간 결장했다. 이 사건은 팀의 월드 시리즈 3연패 도전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으며[6], 격분한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두 선수에게 벌금을 부과했고, 존슨은 두 달 뒤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되었다.[7]
1980년에는 시즌 33세이브로 개인 최다 기록을 세우며 다시 리그 세이브 1위에 올랐다. 그러나 ALCS에서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조지 브렛에게 결정적인 3점 홈런을 허용하며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는 양키스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ALCS에서 로열스를 꺾었던 흐름을 끊는 결과였다.
1981년은 선수 파업으로 단축된 시즌이었지만, 32경기에 등판하여 0.77이라는 뛰어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AL 디비전 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팀이 거둔 3승 모두에서 세이브를 기록하며 6과 3분의 2이닝 동안 무실점 투구를 펼쳤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ALCS에서도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2년에는 30세이브를 기록했고, 양키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83년에는 13승 5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2.27을 기록하며 스파키 라일이 가지고 있던 양키스 팀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141개)을 경신했다. (이 기록은 1988년 데이브 리게티가 150세이브로 다시 경신했다.) 그는 양키스에서 500이닝 이상 던진 투수 중 통산 평균자책점(2.14)과 이닝당 피안타율(6.59)에서 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고시지는 구단 운영에 간섭하는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저 위에 있는 뚱뚱한 남자")와의 불화와 빌리 마틴 감독의 기용 방식에 대한 불만 등으로 인해 1983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어 팀을 떠났다.[9] 고시지가 양키스에서 뛰던 시절 팀에는 레지 잭슨, 서먼 먼슨, 그레이그 네틀스, 캣피쉬 헌터, 루 피니엘라, 데이브 윈필드, 론 기드리 등 유명 선수들이 많았다.
3. 4.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84-1987)
1984년 시즌 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다년 자유 계약을 맺었다. 이적 첫 해인 1984년, 팀의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1984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서는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6-3으로 앞선 상황에서 마지막 2이닝을 책임졌고, 조디 데이비스를 병살타로 처리하며 팀의 월드 시리즈행을 확정짓는 세이브를 기록했다.그러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맞붙은 1984년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주자 2명이 있는 상황에서 1루가 비어 있었지만, 딕 윌리엄스 감독의 고의 사구 지시를 거부하고 커크 깁슨과의 승부를 택했다. 결과는 깁슨의 홈런으로 이어졌고, 이는 타이거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홈런이 되었다.
1985년과 1986년에도 각각 20개 이상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활약했고, 파드리스 소속으로 1984년과 1985년 MLB 올스타전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팀은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에서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1986년 8월 17일에는 피트 로즈의 메이저 리그 마지막 타석에서 그를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10]
1987년에는 기량이 저하되는 모습을 보였고, 선수들의 실력보다 품성을 더 중시하는 구단 운영 방식을 비판하며 경영진과 충돌하기도 했다.
3. 5. 시카고 컵스 (1988)
구스는 1988년 2월 12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레이 헤이워드와 함께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파드리스는 그 대가로 키스 모어랜드와 마이크 브럼리를 받았다.[11] 1988년 8월 6일, 컵스 소속으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 7-4로 앞선 9회 말 2사 주자 2명이 있는 상황에 등판했다. 그는 필 브래들리를 2루수 라이언 샌드버그의 뜬공으로 처리하며, MLB 역사상 두 번째로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한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89년 3월 컵스에서 방출되었다.[12]3. 6.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9)
1989년 4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했다.[13] 자이언츠에서 시즌을 시작했으나, 시즌 도중 뉴욕 양키스로 복귀했다.3. 7. 뉴욕 양키스 복귀 (1989)
1984년부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카고 컵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거쳐 1989년 시즌 도중 뉴욕 양키스로 돌아왔다. 양키스는 8월에 웨이버를 통해 고시지를 영입했다.[14]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3. 8.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0)
구스 고시지는 1990년 일본 프로 야구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1990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스프링 캠프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불합격했다. 하지만 팀의 마무리 투수 부재 상황으로 인해 다시 입단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7월 2일에 급하게 합류하게 되었다(선수 등록은 6월). 당시 39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MLB 통산 307세이브 (당시 역대 2위)라는 실적 덕분에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7월 4일 긴테쓰 버팔로즈와의 데뷔전에서 8회말 첫 타자 짐 트레이버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부진한 출발을 보였다. 또한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는 번트 작전 시 느린 퀵 모션이 약점으로 지적되며 공략당하는 등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최종적으로 2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4.40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종료 후 팀에서 방출되었다.3. 9. 텍사스 레인저스 (1991)
1991년 시즌을 앞두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을 맺고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해당 시즌 중간 계투 및 마무리로 44경기에 등판하여 4승 2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3. 10.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2-1993)
1991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복귀한 후, 고시지는 199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1년 계약을 맺고 1993년까지 활동했다.[13] 애슬레틱스에서는 주로 중간 계투로 활약했다. 1993년 8월, 공 가방에 걸려 넘어져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는데, 이것이 은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시애틀 매리너스를 거쳐 1994년 시즌 후 은퇴했다.3. 11. 시애틀 매리너스 (1994)
고시지는 1994 시즌을 앞두고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42세의 나이로 그는 1994년 매리너스 소속으로 36경기에 등판하여 3승 0패를 기록했다. 그의 평균자책점 4.18은 팀 평균자책점 4.99보다 나았다. 당시 매리너스에는 젊은 켄 그리피 주니어(.323 타율, 40홈런)와 랜디 존슨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1994년 8월 4일, 고시지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세 번째로 1,000경기에 출전한 투수가 되었다. 그는 2-1로 뒤진 7회 2아웃 주자 2, 3루 상황에 등판했다. 매리너스가 8회에 3점을 뽑아 4-2로 역전승하면서 고시지는 승리 투수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메이저 리그 마지막 승리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1/3 이닝을 투구했다.
8월 8일 텍사스 레인저스 전은 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등판이 되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14-4로 크게 앞선 상황에서 마지막 3이닝을 책임지며 9명의 타자를 모두 아웃시키고 15개월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세이브였다. 호세 칸세코의 좌익수 플라이 아웃이 그의 경력 마지막 아웃카운트였다.
그 해 1994-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이 일어나 시즌이 중단되었고, 고시지는 다음 시즌에 복귀하지 않고 1994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4. 투구 스타일
구스 고시지는 주로 100mph에 달하는 떠오르는 패스트볼을 던지는 파워 피처였다.[1] 그는 이 단 하나의 구종을 주로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투수 중 한 명이었지만, 가끔 슬러브나 체인지업을 던지기도 했다. 1978년 MLB 올스타전에서는 최고 구속 103mph의 직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투구폼은 와인드업에서 던지는 팔 동작이 위압감을 주는 사이드암에 가까운 스리쿼터 형태였으며, 묵직한 공의 질은 특히 우타자들이 공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용하는 구종은 직구 외에도 슬라이더, 포크볼, 체인지업 등이 있었다.
고시지는 타자에게 위협적인 투구를 하는 투수로 명성이 높았지만, 정작 본인은 선수 경력 동안 의도적으로 맞힌 타자는 론 간트, 안드레스 갈라라가, 알 범브리 세 명뿐이라고 주장했다.[26]
그러나 제구력과 체력에는 약점이 있었다. 또한, 공을 던진 후 몸이 1루 쪽으로 크게 쏠리는 버릇이 있어 번트 수비나 전반적인 수비 능력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5. '소방수' 역할의 선구자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뉴욕 양키스는 현대 야구에서 표준적인 방식이 된 셋업 투수와 마무리 투수의 분업 체계를 선도적으로 도입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양키스의 가장 효과적인 조합은 론 데이비스가 주로 7회나 8회에 등판하고, 구스 고시지가 경기를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강력한 조합 덕분에 양키스는 6회 이후 리드를 잡은 79경기 중 77경기에서 승리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고시지와 그 시대의 뛰어난 구원 투수들은 경기 중 리드가 위협받는 상황, 특히 주자가 있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이닝에 상관없이 등판하여 2~3이닝을 책임지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역할을 ''소방수''라고 불렀다.[18][19][20] 실제로 고시지는 마무리 투수로 뛴 첫 시즌에 한 경기에서 10개 이상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경기가 17번이나 되었고, 그중 3경기는 7이닝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세 시즌 동안 구원 투수로서 130이닝 이상을 던졌으며,[19] 통산 기록을 보면 1이닝 이하로 짧게 던져 세이브를 올린 경우보다 2이닝 이상 길게 던져 세이브를 기록한 경우가 더 많았다.[21]
시간이 흐르면서 에이스 구원 투수의 역할은 점차 변화하여, 주로 팀이 9회에 3점 이하로 앞서고 있을 때 등판하는 현대적인 마무리 투수의 역할로 진화했다.[22]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리아노 리베라의 경우, 통산 세이브 중 7개 이상의 아웃 카운트를 잡으며 기록한 세이브는 단 한 번뿐이었지만, 고시지는 이러한 세이브를 53번이나 기록했다.[24] 고시지 본인도 이러한 역할 변화에 대해 "나는 (리베라)가 내가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역대 최고의 구원 투수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는 최고의 현대적 마무리 투수일 수도 있지만, 사과와 사과를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했던 일을 하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시대 '소방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25]
6. 별명
'구스(Goose)'라는 별명은 고시지의 원래 별명인 '고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친구가, 고시지가 포수가 내는 사인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는 모습이 거위와 같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27][28] 고시지는 대중 매체에서 일반적으로 "리치(Rich)"라고 불리지만, 그의 고향인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청소년 스포츠 단지는 "릭 '구스' 고사지 청소년 스포츠 단지"라는 이름으로 "릭(Rick)"을 사용하고 있다.[29]
7. 은퇴 이후
고세이지는 은퇴 후 고향인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거주하며 지역 사회에서 청소년 스포츠를 후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1995년 콜로라도 스프링스 시는 청소년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를 위한 5개의 경기장을 갖춘 릭 "구스" 고세이지 청소년 스포츠 단지를 헌정했다.[30] 그는 과거 그릴리와 파커에서 '버거스 앤 스포츠'(Burgers N Sports)라는 햄버거 레스토랑을 소유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자서전 ''The Goose is Loose''를 출간했다.
그의 아들 토드 고세이지는 Can-Am 리그의 서섹스 스카이호크스, 뉴어크 베어스, 록랜드 볼더스 등에서 활동한 프로 야구 선수 출신이다.
고세이지는 2010년 7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열린 타코 벨 올스타 레전드 & 셀러브리티 소프트볼 게임에서 아메리칸 리그 팀 코치를 맡았다.[31]
2008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고세이지는 자신의 경력에 도움을 준 많은 야구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명예의 전당 주간 경험을 여러 차례 "놀랍다"고 표현했다.[32] 당시 함께 헌액된 인물 중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감독이었던 딕 윌리엄스도 있었다. 행사 후 두 사람은 ESPN 인터뷰에 함께 참여하여 관중들의 질문에 답하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특히 1984년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 커크 깁슨이 고세이지를 상대로 친 홈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2014년 6월 22일, 뉴욕 양키스는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고시지를 기리는 기념패를 설치했다.[33]
은퇴 후 고세이지는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의 반대자들을 비판했으며,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과 관련 단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34] 이러한 발언들과 더불어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특히 마리아노 리베라)과 브라이언 캐시먼, 할 스타인브레너 등 구단 운영진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인해, 고세이지는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이나 '올드 타이머스 데이'와 같은 구단 행사에 초청받지 못하게 되었다.[35]
8. 수상 및 명예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 1위를 세 차례 달성했다 (1975년, 1978년, 1980년). 올스타에는 총 9번 선정되었다 (1975–1978, 1980–1982, 1984, 1985). 1980년에는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MVP 투표에서 3위, 사이 영 상 투표에서도 3위를 기록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꾸준히 득표율을 높여갔다. 첫 자격 연도인 1999년에 3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2006년에는 64.6%, 2007년에는 71.2%까지 상승했다. 마침내 2008년 1월 8일, 85.8%(466표)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되었으며, 그해 유일하게 헌액된 선수였다.
고시지는 일본 프로 야구 경험이 있는 선수로는 래리 도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다만, 두 선수 모두 일본 프로 야구가 아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의 업적을 바탕으로 선정되었다.
내역 | 횟수/연도 | 비고 |
---|---|---|
아메리칸 리그 세이브 1위 | 3회 | 1975년 (26세이브), 1978년 (27세이브), 1980년 (33세이브) |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정 | 9회 | 1975–1978, 1980–1982, 1984, 1985 |
MVP 투표 | 3위 | 1980년 |
사이 영 상 투표 | 3위 | 1980년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회 | 2008년 |
9. 가족 관계
그의 아들 토드 고시지는 독립 리그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조카 케빈 고시지는 마이너 리그에서 2006년과 2007년에 활동했다. 아내 코르나 고세지는 와슨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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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kees' Goose Gossage defends Curt Schilling, Donald Trump in revealing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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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kees great Goose Gossage prays bleeping liberals 'go off the cliff' for attacking President Trump in epic 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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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oments that define Goose Gossage's c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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