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시 야스쓰나는 가가 번 출신의 사무라이로, 육군 교도단을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그는 독일 유학 후 일본 육군의 독일식 개혁을 주도했으며, 러일 전쟁에서 한국 임시 파견대 사령관, 제23보병여단장 등을 역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소장으로 진급 후 대만 수비군 참모장, 육군 참모본부 근무, 제1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사령관을 거쳐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3년 육군대신을 지냈으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폐지 문제로 육군과 갈등을 겪고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 이후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다 193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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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소장으로 진급하여 대만 수비군 참모장이 되었고,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러일 전쟁에서 제23보병여단을 지휘하며 사데푸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전후 만주군 참모, 제1사단, 제5사단, 제6사단 사령관을 역임하고, 1907년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13년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되었으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폐지에 찬성하여 육군과 갈등을 빚었다. 1914년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군에서 은퇴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54년 4월 22일, 가가번의 가신이자 포술 사범이었던 가토 다다나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같은 번의 봉행직이었던 기고시 야스마의 양자가 되었다.
육군교도단을 거쳐 1875년육군사관학교 (구 1기)에 입학했다. 사관학교 재학 중이던 1877년에 임관하여 서남 전쟁에 참전했다.[1]1883년에는 독일로 유학하여 몰트케 아래에서 독일 참모본부를 직접 견학했다. 귀국 후에는 프랑스식이던 일본 육군을 독일식으로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 2.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참전
청일 전쟁에서는 제3사단 참모로서 제3사단장 가쓰라 타로 아래에서 활약하여,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내로 진격해 들어갔다.[1] 이때, 직속 상관이었던 가쓰라 다로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를 계기로 조슈벌의 총아로서 출세해 나갔다.
러일 전쟁에서는 한국 임시 파견대 사령관으로서 가장 먼저 출정했다. 보병 제23여단을 이끌고 사세보를 출발, 인천항에 상륙하여 철도로 경성으로 향했고, 한국 주차대를 지휘 하에 두었다. 한반도 확보 후, 구로키 다메모토 대장의 제1군의 선봉으로서 압록강 도하 작전에 종사하여, 제1군 최우익에서 도하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공격,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그 후, 자신의 여단에 기병, 포병, 공병 각 1개 중대를 더해 기고시 지대를 편성, 사단 전위로서 요양으로 진격, 켈레르 중장의 동부 지대를 격퇴했다. 8월 30일에 시작된 요양 회전에서는 오쵸산을 공격하고, 후속 오카자키 쇼조 소장의 만두산 공격을 독단으로 1개 연대를 파견하여 지원, 그 점령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10월 13일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 제5사단장으로서 헤이커우타이 회전에 참가하여, 제8사단 (타치미 나오후미 중장)을 전멸에서 구했다. 또한, 그리펜베르크 대장이 이끄는 부대를 격파, 이로 인해 러시아군의 동계 총공격의 기세를 꺾었고, 봉천 회전의 승리에 기여했다.[1]
기고시 야스쓰나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그의 영전(栄典)은 위계, 훈장 등, 외국 훈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1880년 정8위를 시작으로 1916년 종2위까지 위계가 승진했다. 1889년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 1907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외국 훈장으로는 독일 관대공 필립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오스트리아 철관 훈장, 대한제국 훈1등 태극장과 대훈위 이화대수장 등을 받았다.
레오 칭(Leo T.S. Ching)의 《일본되기: 식민지 대만과 정체성 형성의 정치》(Becoming Japanese: Colonial Taiwan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Formation,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 2001년), ISBN 0-520-22553-8
제프리 주크스(Geoffry Jukes)의 《러일 전쟁 1904-1905》(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Osprey Essential Histories, 2002년), ISBN 978-1-84176-446-7
메이리언 해리스(Meirion Harries)의 《태양의 군인들: 일본 제국 육군의 흥망성쇠》(Soldiers of the Sun: The Rise and Fall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랜덤하우스, 1994년), ISBN 0-679-75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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