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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디언 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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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디언 맨텔은 1790년에 태어나 1852년에 사망한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지질학자, 고생물학자이다. 그는 1820년대에 이구아노돈 화석을 발견하여 공룡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맨텔은 초기 생애에 의학을 공부하고 개업하여 의료 활동을 펼치는 한편, 지질학 연구를 병행했다. 1819년에는 육상 및 담수 생태계 화석을 발견했고, 1822년에는 이구아노돈의 이빨 화석을 발견하여 중생대 파충류임을 밝혀냈다. 그는 이구아노돈 외에도 여러 공룡 속을 발견했고, 1838년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자신의 화석 컬렉션을 대영 박물관에 매각했다. 말년에는 척추 부상과 아편 복용으로 고통받았으며, 1852년 아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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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디언 맨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기디언 알저논 맨텔
원어 이름Gideon Algernon Mantell
출생1790년 2월 3일
출생지영국, 서식스주, 루이스
사망1852년 11월 10일
사망지영국, 런던
직업외과 의사, 고생물학자
배우자메리 앤 맨텔
자녀월터 맨텔 (아들)
수상월러스턴 메달 (1835년)
로열 메달 (1849년)
연구 분야
주요 업적이구아노돈 설명
소속 기관
영향
학술
기타
회원 자격왕립 외과 대학 회원 (MRCS)
왕립 학회 회원 (FRS)

2. 초기 생애와 의료 경력

기디언 맨텔 – 초기 초상화


기디언 맨텔은 1790년 2월 3일 서식스주(현재 이스트서식스주) 루이스에서 구두 수선공 토마스 맨텔과 사라 오스틴의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1][2] 그는 세인트 메리 레인에 있는 작은 코티지에서 두 명의 누이와 네 명의 형제와 함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지질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주변 지역의 채석장을 탐사하며 암모나이트, 성게 껍질, 물고기 뼈, 산호 등 죽은 동물의 잔해 화석을 수집했다.[3][4]

맨텔의 아버지는 감리교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 12개의 무료 학교는 성공회 신앙으로 양육된 아이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기디언은 지역 문법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대신 세인트 메리 레인의 사립학교에서 한 노파에게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그 후, 아버지와 정치적 신념이 비슷한 철학적 급진주의 휘그 당원 존 버튼에게 2년간 교육을 받았고,[5] 스윈던에 사는 침례교 목사인 삼촌에게 개인 교습을 받기도 했다.

15세가 되던 1805년, 맨텔은 루이스로 돌아와 지역 휘그당 지도자의 도움으로 외과의 제임스 무어의 견습생이 되었다.[6] 그는 5년 동안 무어 밑에서 일하며 숙식을 제공받고 의료 실무를 배웠다. 초기에는 약병을 닦고 약품을 분리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지만, 곧 알약과 다른 제약품 제조법을 배우고, 약 배달, 장부 정리, 청구서 작성, 환자 발치 등의 업무를 맡았다.[7] 1807년 7월 11일, 아버지 토마스 맨텔이 57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들의 학업을 위한 약간의 유산을 남겼다.[8][9] 맨텔은 견습 기간이 끝나갈 무렵 인간 해부학을 독학하며 의학 교육을 준비했고, '뼈의 해부학 및 혈액 순환'이라는 제목의 책에 태아와 성인 골격 특징에 대한 수십 개의 상세한 그림을 포함하여 자신의 지식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10]

이후 맨텔은 런던에서 정식 의학 교육을 받았고, 1811년 영국 왕립 외과 대학 회원 자격을 취득했다. 나흘 뒤에는 자택에서 기혼 여성을 위한 출산 자선 단체로부터 산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증명서도 받았다.



자격을 갖춘 맨텔은 루이스로 돌아와 이전 스승인 제임스 무어와 즉시 동업을 시작했다. 당시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맨텔은 하루에 5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고, 1년에 200~300명의 아기를 받는 등 매우 바쁜 의사 생활을 했다. 그는 나중에 회상했듯이, 압도적인 업무량 때문에 "6~7일 밤을 연속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료소 수입을 연간 250GBP에서 750GBP로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맨텔은 여가 시간을 쪼개 자신의 열정인 지질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종종 이른 아침까지 햄지의 이회토 구덩이에서 발견한 화석 표본을 식별하며 연구했다. 1813년에는 저명한 박물학자이자 삽화가인 제임스 소어비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수집한 많은 화석 표본을 그에게 보냈다. 소어비는 맨텔이 제공한 표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암모나이트 종 중 하나에 Ammonites mantelli|암모니테스 만텔리la라는 학명을 붙여주었다. 같은 해 12월 7일, 맨텔은 런던 린네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년 후인 1815년, 그는 루이스 지역에서 발견된 화석의 특징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을 발표했다.

1816년, 맨텔은 3년 전 사망한 환자의 딸이자 당시 20세였던 메리 앤 우드하우스와 결혼했다. 메리 앤은 21세 미만으로 영국 법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동의와 특별 허가를 받아 5월 4일 세인트 메리르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맨텔은 루이스에 자신의 개인 진료소를 구입했으며, 링머에 있는 왕립 포병 병원의 의사로도 임명되었다.

3. 지질학 연구

틸게이트 채석장에서 화석 발굴을 감독하는 기디언 맨텔의 스케치


1811년 메리 애닝도싯주 라임 레지스에서 거대한 악어와 유사한 화석(훗날 어룡으로 밝혀짐)을 발견한 사건은 맨텔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서식스주 더 위얼드(The Weald) 지역에서 발견되는 동물과 식물의 화석 연구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초기에 그가 수집한 화석들은 주로 이 지역의 백악질 언덕에서 나온 것으로, 백악기 후기의 해양 생물 화석들이었다.

1819년 경, 맨텔은 쿡필드 근처 화이트맨스 그린(Whitemans Green)의 한 채석장에서 새로운 종류의 화석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화석들은 당시까지 영국에서 발견된 백악기 화석들과 달리, 육상 및 담수 생태계의 생물 유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그 지층이 형성될 당시의 환경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랐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맨텔은 이 새로운 지층을 역사적인 삼림 지역의 이름을 따 '틸게이트 숲 층'(Tilgate Forest bed)이라고 명명했으며, 이 지층은 이후 백악기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820년 무렵부터 맨텔은 쿡필드에서 매우 큰 뼈 화석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옥스퍼드셔주 스톤스필드에서 윌리엄 버클랜드가 발견했던 화석(훗날 메갈로사우루스로 명명됨)보다도 훨씬 큰 것들이었다. 그리고 1822년, 그의 첫 저서 『사우스다운의 화석』(The Fossils of South Downs) 집필을 마무리할 무렵, 그의 아내 메리 앤 맨텔(혹은 맨텔 자신이라는 주장도 있음[8])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매우 큰 이빨 화석 여러 개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훗날 이구아노돈이라는 새로운 공룡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맨텔의 연구는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1821년 그가 서식스 지역의 지질학에 관한 다음 책 출판을 위해 구독자를 모집했을 때, 영국 국왕 조지 4세를 포함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을 신청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격려 속에서 맨텔은 새로 발견한 이빨 화석을 다른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이빨이 어류나 포유류의 것이라거나, 중생대보다 훨씬 이후 시대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저명한 프랑스 해부학자인 조르주 퀴비에조차 처음에는 이 이빨을 코뿔소의 것이라고 단정했다.[9] 찰스 라이엘에 따르면, 퀴비에는 다음 날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품었지만, 이러한 입장 변화는 당시 맨텔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주변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맨텔은 이 이빨 화석이 중생대 지층에서 발견된 것이며, 거대한 파충류의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이 이빨이 현생 이구아나의 이빨과 형태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크기는 훨씬 거대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이 이빨의 주인이 대략 18m 길이에 달하는 거대한 파충류였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 이빨 화석의 정체와 새로운 파충류의 명명 과정은 이후 그의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3. 1. 이구아노돈의 발견과 인정

1822년경, 맨텔은 『사우스다운의 화석』(The Fossils of South Downs)이라는 책의 집필 막바지에 동정 불가능한 몇 개의 큰 이빨 화석을 발견했다.[8] 이것이 훗날 이구아노돈의 이빨로 밝혀진 화석이다.

맨텔은 이 화석이 중생대 지층에서 나온 파충류의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다른 과학자들에게 이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윌리엄 버클랜드는 이 이빨이 물고기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저명한 프랑스의 박물학조르주 퀴비에조차 처음에는 코뿔소의 것이라고 단정했다.[9] 당시 영향력 있던 학자 리처드 오웬 역시 이빨이 포유류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맨텔과 대립했다.

그럼에도 맨텔은 그 치아가 중생대의 것이라고 믿고 조사를 계속하여, 발견된 이빨이 현생 이구아나의 이빨과 매우 흡사하지만 그 크기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이빨의 주인이 거대한 파충류였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고생 끝에 맨텔의 의견이 인정된 후, 마침내 이 새로운 파충류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맨텔은 처음에 '이구아나사우루스'(''Iguanasaurus'')라는 이름을 생각했으나, 영국의 지질학자 윌리엄 대니얼 코니베어로부터 그 이름이 현생 이구아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어 적절하지 않다는 조언을 편지로 받았다. 코니베어는 '이구아노이데스'(''Iguanoides'') 또는 '이구아노돈'(''Iguanodon'')이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맨텔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 '이구아노돈'이라는 이름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1825년, 마침내 이구아노돈은 정식으로 으로 승인되었다.

수년 후, 맨텔은 이구아노돈의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화석 증거를 확보하여, 리처드 오웬 경이 주장한 것처럼 포유류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맨텔은 오웬이 다양한 종에 속한다고 주장했던 화석 척추가 모두 ''이구아노돈''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맨텔은 이구아노돈 연구 외에도 ''힐라에오사우루스''라는 새로운 공룡 을 발견하고 명명했으며, 이러한 지속적인 연구 성과를 통해 선사 시대 파충류에 대한 권위자가 되었다.

4. 후기 생애

1833년, 맨텔은 브라이턴으로 이주했지만, 의료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거의 파산 직전이었으나, 브라이턴 시 의회가 그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도록 지원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맨텔은 이곳에서 강연을 진행했고, 이 강연 내용은 1838년 ''지질학의 경이, 또는 지질 현상의 친숙한 해설: 브라이턴에서 행해진 일련의 강연의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2] 그러나 맨텔이 방문객들에게 입장료를 자주 면제해주면서 박물관 운영은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맨텔은 1838년 자신의 모든 화석 컬렉션을 대영 박물관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5000GBP를 제안했으나, 최종적으로 4000GBP에 판매하고 런던 남부의 클래펌 커먼으로 이주하여 의사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맨텔에게 개인적인 어려움도 계속되었다. 1839년 아내 메리 앤 우드하우스가 그를 떠났고, 같은 해 아들 월터 맨텔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월터는 이후 뉴질랜드에서 발견된 중요한 화석들을 아버지에게 보내주기도 했다.[10] 1840년에는 딸 한나가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1841년, 맨텔은 마차 사고를 당해 척추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고삐에 걸린 채 먼 거리를 끌려간 이 사고는 이후 그를 평생 괴롭힌 척추측만증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몸이 불편하고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맨텔은 화석화된 파충류 연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사망 직전까지 여러 과학 서적과 논문을 발표했다. 1844년에는 핌리코로 거처를 옮겼고, 1845년부터는 극심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852년 11월 10일, 맨텔은 아편 과다 복용으로 의식을 잃고 결국 사망했다. 사후 검시를 통해 그의 척추가 심하게 변형되어 있었음이 밝혀졌고, 이는 사고 이후 오랫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경쟁자였던 리처드 오웬은 맨텔의 척추 일부를 수습하여 왕립 외과 의과대학에 보관했으나, 이 표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기디언 맨텔은 현재 웨스트 노우드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2000년에는 그의 고생물학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1822년 그가 처음으로 이구아노돈 화석을 발견했던 장소인 쿡필드의 휘트먼스 그린에 맨텔 기념비가 세워졌다.

5. 유산 및 기념

맨텔은 당시 알려진 5개의 공룡 속 중 이구아노돈을 포함한 4개를 발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3] 그의 발견과 고생물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2000년, 컬크필드의 화이트맨스 그린에 '맨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맨텔이 1822년에 처음으로 이구아노돈 화석을 발견하고 기술했던 장소로 확인된 곳이다.



맨텔은 웨스트 노우드 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는 아몬 헨리 와일즈[4]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르코파구스 형태이며, 이는 나타카마니의 아문 신전 성소를 재현한 것이다. 이 묘는 2급(Grade II*) 건축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4]

사후 검사에서 척추 측만증이 확인된 맨텔의 척주 일부는 제거되어 보존되었고, 영국 왕립 외과대학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이 표본은 1969년 공간 부족 문제로 파괴되었다.

6. 저작 목록

아가시와 스트릭랜드의 《동물학 서지》(Bibliographia Zoologiæ)에는 67권의 책과 회고록이, 왕립 학회의 목록에는 48편의 과학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 [https://archive.org/details/fossilsofsouthdo00mant 《사우스 다운스 화석》(The Fossils of the South Downs)]. 왕립 4절판,[5] 42개의 판. 런던 1822년. 그의 첫 번째 책으로, 판화는 그의 아내가 그렸다. 3.3파운드(3기니)로 비쌌다. 두 배 가격으로 수채화 판화가 있었다.[6]
  • 《루이스 주변의 자연사 개요》(Outlines of the natural history of the environs of Lewes). 4절판, 24쪽, 3개의 판. 루이스, 1824년.
  • 《서식스 지질학 삽화》(Illustrations of the Geology of Sussex), 틸게이트 숲의 화석 그림과 설명을 포함. 왕립 4절판, 20개의 판, 2.15파운드 6펜스. 1827년.
  •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nyp.33433062755602;view=1up;seq=199 《파충류의 지질학적 시대》(The Geological Age of Reptiles)]. 제임슨의 에든버러 철학 저널, 1831년, 11권, 81–85쪽.
  • [https://archive.org/details/narrativeofvisit00mant 《가장 자비로운 국왕 윌리엄 4세와 아델라이드 여왕의 1830년 10월 22일 루이스 고대 자치구 방문 이야기》(A Narrative of the Visit of their most Gracious Majesties William IV and Queen Adelaide, to the Ancient Borough of Lewes, on the 22nd of October 1830)]. 런던: 루프턴 렐프, 1831년.
  • [https://archive.org/details/geologyofsouthea1833mant 《잉글랜드 남동부의 지질학》(The Geology of the South-East of England)]. 8절판, 컬러 지도, 단면, 다수의 판, 1.1파운드. 1833년.
  • [https://archive.org/details/thoughtsonapebb00mantgoog 《조약돌에 대한 생각》(Thoughts on a Pebble)]. 1836년.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8630893 8판, 1849년]
  • 《지질학의 경이》(The Wonders of Geology) 또는, 지질학적 현상의 친숙한 해설: 브라이튼에서 진행된 강의 내용. 2권, 런던, 1838년. 그의 아내가 그린 석판화 판. 1840년 4판 데이터: [https://archive.org/details/wondersofgeology01mantrich 1권:] 428쪽, 전면 삽화와 4개의 판; [https://archive.org/details/wondersofgeology02mantrich 2권:] 429–795쪽과 부록, 용어집 및 기타 자료, 컬러 전면 삽화와 10개의 컬러 판, 대부분 그의 아내가 그렸다. 맨텔의 가장 광범위한 저서.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9735912 《창조의 메달》(The Medals of Creation)]. 2권, 1844년.
  • 《루이스 고대 도시에서의 하루의 산책》(A Day's Ramble in and about the Antient Town of Lewes). 런던: 헨리 G. 본, 1846년.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2001592 《미세 생물에 대한 생각》(Thoughts on Animalcules)]. 소형 4절판, 144쪽, 12개의 컬러 판. 런던: 머레이, 1846년. 1850년 제목: 《현미경으로 드러난 보이지 않는 세계 또는, 미세 생물에 대한 생각》(The invisible world revealed by the microscope or, thoughts on animalcules).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7700935 《와이트 섬과 도셋셔 인접 해안을 둘러싼 지질학적 여행》(Geological Excursions round the Isle of Wight and along the adjacent Coast of Dorsetshire)]. 1847년.
  • [https://archive.org/details/pictorialatlasof00mant 《파킨슨의 "전세계의 유기물"과 아티의 "홍수 전 식물학"에서 선택된 컬러 삽화로 구성된 화석 유물의 그림 아틀라스》(Pictorial Atlas of Fossil Remains consisting of coloured Illustration selected from Parkinson's "Organic Remains of Former World" and Arti's "Antediluvian Phytology")]. 런던: Bohn, 1850년.
  • [https://catalog.hathitrust.org/Record/001495618 《석화와 그 가르침》(Petrifactions and their teachings)]. 1851년.

참조

[1] 서적 Brighton: A Very Peculiar History https://books.google[...] Salariya 2009
[2] Google books The wonders of geology, or, A familiar exposition of geological phenomena: being the substance of a course of lectures delivered at Brighton https://archive.org/[...]
[3] DNB
[4] NHLE 2017-04-03
[5] 문서 Royal 4to is a paper size. It produces a fairly large book, with pages of 10 by 12.5 inches (250 by 320 mm) untrimmed.
[6] 문서 Price details from trade adverts in other volumes.
[7] 웹사이트 G.A.Mantell, F.R.S. (1790-1852) https://www.nature.c[...] NATURE 2024-05-28
[8] 문서 この発見は彼の妻によってなされたという説もある。
[9] 문서 サイはキュヴィエの研究対象の一つであった。また、[[스코틀랜드]]の地質学者[[チャールズ・ライエル]]によるとキュヴィエはこの判定をした翌日の朝に考え直し、やはりマンテルの歯はサイ以外の動物のものに違いないと言ったとある。しかし、この話はイギリスには伝わらず、結局マンテルは軽くあしらわれた形となった。
[10] 문서 後年、ウォルターはニュージーランドで採取された貴重な化石を父に送り届けること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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