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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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마리아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1891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3·1 운동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미국에서 유학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44년 평양에서 사망 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으며,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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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김마리아 |
한글 | 김마리아 |
한자 | 金瑪利亞 |
로마자 표기 | Gim Maria |
출생일 | 1891년 6월 18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장연군 |
사망일 | 1944년 3월 13일 |
사망 장소 |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
직업 | 한국 독립운동가 |
모듈 | hangul: 김마리아 hanja: 金瑪利亞 rr: Gim Maria mr: Kim Maria |
정보 | |
![]() |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윤방 |
어머니 | 김몽은 |
친척 | 서병호(친정 종고모부), 김순애(친정 종질녀), 김규식(친정 종질서) |
경력 | |
주요 활동 | 대한애국부인회 상임고문, 독립운동가 겸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 겸 교육인 |
기타 활동 | 한국독립당 상임위원, 재미국한인근화회 회장, 함경남도 원산신학교 교수 |
임시 정부 활동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무총장 예하 비서관 직무대리 |
정당 | |
소속 정당 | 대한애국부인회 |
종교 |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학력 | |
학력 | 미국 뉴욕 성서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
임시 정부 경력 | |
임기 시작 | 1933년 12월 15일 |
임기 종료 | 1934년 1월 16일 |
외무총장 | 김규식 |
외무차장 직무대행 서리 | 차리석 |
주석 | 이동녕 |
국무총리 | 양기탁 |
기타 |
2. 생애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윤방은 기독교 신자로, 고향에 초등학교를 설립한 선각자였다. 김마리아는 아버지가 세운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숙부인 김윤오, 김필순 등의 손에서 자랐다.[1]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강한 명문가였다. 고모부 서병호와 그의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고,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김마리아에게 5촌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를 다니며 민족 정신이 투철한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았다.[1]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히로시마시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공부했다.[1]
2. 1. 학창 시절
황해도 장연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윤방은 기독교 신자로, 고향에 초등학교를 설립한 선각자였다. 김마리아는 아버지가 세운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숙부인 김윤오, 김필순 등의 손에서 자랐다.[1]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강한 명문가였다. 고모부 서병호와 그의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고,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김마리아에게 5촌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며 민족 정신이 투철한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았다.[1]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히로시마시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공부했다.[1]


어린 시절 미국 북장로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6년 한성으로 이주하여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과 연동여학교(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에서 공부하였다. 1910년 졸업 후, 선교사 제니 스피어(Jennie Speer)가 광주에 설립한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5년 일본 여자학원에 유학하여 미국인 선교사 미스 런던(Miss London)의 가르침을 받았다.[2]
2. 2. 독립운동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 독립 선언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같은 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다.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한 후, 192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뉴욕에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2. 2. 1.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 독립 선언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2·8 독립 선언 후, 김마리아는 졸업 후 도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선언문 사본을 숨겨 가지고 왔다. 이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언에 영감을 주었다.[4]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5] 3·1 운동 직전, 김마리아는 여학생과 여교사들을 조직하여 운동 참여를 독려했다.[5] 3·1 운동에서는 주모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병원(현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2. 2. 2.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정신여학교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항일 독립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되자, 김마리아는 퇴원 후 합류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3] 김마리아는 전 7장 32개조로 된 본부 규칙을 작성하는 등 부진했던 조직을 재건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를 모색하였다.1919년 8월, 김마리아는 여러 여성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의 지휘 아래, 단체들은 남성 지도자들을 위한 자금 모금에서 벗어나 독립 운동을 직접 수행하기 시작했다.[3] 단체는 독립 운동 사진이 담긴 소책자를 발간하여 다른 나라에 배포하고, 독립 운동의 진행 상황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했다. 뿐만 아니라, 단체 여성들은 자원봉사, 교육, 간호 등에 참여하며 사회에 기여했다.[6]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곧 조선 전역과 주요 도시는 물론 하와이와 간도까지 지부를 확장하여 회원 수가 2000명에 달했으나, 같은 해 11월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다. 김마리아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의 한 회원이 일본에 단체를 밀고하는 배신 행위를 저질렀고, 김마리아를 포함한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체포되었다.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그녀가 이끈 기도회는 매우 격렬하여 "찬송 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고 전해진다.[3]
2. 2. 3. 상하이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고,[7]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하였다.[7]1920년 고문 후유증과 정신쇠약을 이유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보석되었고, 미국인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큐언(George Shannon McCune, 조선명: 윤산온, 조지 M. 매큐언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6월 29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중국 위하이웨이에 상륙했다.[7] 1922년 2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을 인정받았다.[7]
2. 2. 4. 미국 유학과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 활동
1923년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뉴욕에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7] 1929년 한국학생연맹 부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안창호가 주최하는 재미 한국인 단체 흥사단에 입회하여 조국의 미래 독립을 준비했다.[8]2. 3. 귀국과 최후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1]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다.[1]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1]1932년 미국 정부가 허가한 유학 기간이 만료되어 캐나다 선교사의 협조를 받아 밴쿠버에서 하와이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3]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엄중한 감시 하에 놓였다.[3] 이듬해 취업 금지 명령이 해제되어 마르다 윌슨 신학교 교수로 신학을 가르치며 여성 전도사 양성에 힘썼다.[3] 한편 황에스타 등과 함께 기독교 전도에 기반한 농촌 계몽을 실천했으나, 1943년 황민화 정책의 강행으로 조선의 선교 학교들이 일제히 강제 폐교되었다.[3] 1944년 평양의 병원에서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화장된 후 대동강에 유골을 뿌렸다.[3] 사후인 196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3]
2·8 독립 선언에도 참여했던 이광수의 시 '자매'(1933년)는 김마리아 귀국을 기념하여 지어진 작품이다.[4]
3. 사후
2ㆍ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시 〈누이야〉(1933년)를 발표했으며[14], 안창호는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5] 일본 검사가 고문을 하던 중에도 김마리아의 의지가 강하여 탄복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16]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김마리아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17]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18] SGI서울보증은 2019년 5월 24일 창립 50주년과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자리했던 본사 부지(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29)에 흉상을 건립했다.[19]
4. 김마리아에 대한 평가
김마리아는 소재필의 저널인 코리아 리뷰와 미국 신문에 언급되었다.[10][11]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방영된 TV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배우 김애경이 김마리아를 연기했다.
4. 1. 긍정적 평가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다.[14]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5] 고문을 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16]김마리아는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이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17]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18] SGI서울보증은 2019년 5월 24일 창립 50주년과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자리했던 본사 부지(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29)에 흉상을 건립했다.[19]
참조
[1]
간행물
조국과 결혼한 동정녀 김마리아
교회연합신문
2006-12-08
[2]
뉴스
나의 이력서/서영훈 <32> 김마리아 열사
한국일보
2004-05-04
[3]
서적
Resistance and theological ethics
[4]
논문
Background to the March First Movement: Koreans in Japan
1989
[5]
논문
From Three Obedience's to Patriotism and Nationalism
[6]
논문
Korean Women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1920-06-00
[7]
뉴스
Students from Overseas to Speak Here
Kansas City Star
1925-01-15
[8]
뉴스
Mme. Schumann-Heink to Sing At Plymouth Church Tomorrow
The Brooklyn Citizen
1932-03-12
[9]
뉴스
Young Girl Sentenced
The Sacramento Bee
1920-09-10
[10]
논문
Korean Courage
https://e-gonghun.mp[...]
1919-08-00
[11]
논문
Oriental News
https://e-gonghun.mp[...]
1920-09-00
[12]
문서
호적상의 출생년월일은 1892년 6월 18일이다.
[13]
웹인용
김마리아
https://terms.naver.[...]
2019-05-27
[14]
웹사이트
조국과 결혼한 동정녀 김마리아
http://www.iepn.co.k[...]
교회연합신문
2006-12-08
[15]
웹사이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http://contents.npst[...]
청교도넷
2006-04-14
[16]
웹사이트
김마리아, 민족혼에 대한 자각과 여성해방 운동
http://weekly.hankoo[...]
주간한국
2002-02-05
[17]
웹사이트
나의 이력서/서영훈 <32> 김마리아 열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4-05-04
[18]
뉴스인용
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 어록비 제막식
http://www.kwangsank[...]
광산김씨대종보
2004-11-01
[19]
웹사이트
서울보증, 김마리아 선생 흉상 제막식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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