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인덕은 1896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한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며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여성 계몽 운동과 실업 교육에 힘썼으며, 인덕실업학교(현 인덕대학교)를 설립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적 의혹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유관순 기념 사업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9월의 원숭이》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판타지 작가 - 김활란
김활란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자 여성운동가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여성 교육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비판받았다. - 나혜석 - 김명순 (1896년)
김명순은 개화기 여성 작가이자 신여성으로,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여성의 삶과 자유 연애를 주제로 활동했으나, 사회적 편견과 어려움 속에서 고독한 말년을 보낸 소설 『김연실전』의 실존 모델이며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 나혜석 - 백성욱
백성욱은 일제강점기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한국인 최초 독일 철학 박사이며 동국대학교 총장과 해방 후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 대한민국의 기독교 선교사 - 차미리사
차미리사는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교육가로, 근화여학교 등을 설립하고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여성의 자립과 사회 참여를 강조했다. - 대한민국의 기독교 선교사 - 양영자
양영자는 현정화와 함께 1987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및 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로, 은퇴 후에는 주니어 탁구팀 코치 및 대한체육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인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개인 정보 | |
이름 | 박인덕 |
한글 | 박인덕 |
한자 | 朴仁德 |
로마자 표기 | Park In-deok |
출생일 | 1896년 9월 24일 |
출생지 | 서울, 조선 |
사망일 | 1980년 4월 3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
국적 | 대한제국, 이후 대한민국 |
직업 | 시인, 저널리스트, 화가 |
장르 | 시, 소설, 미술, 그림, 수필, 드라마 |
별칭 | 은봉 |
한글(별칭) | 은봉 |
한자(별칭) | 銀峰 |
로마자 표기(별칭) | Eunbong |
다른 이름(한글) | 임덕 |
다른 이름(한자) | 姙德 |
다른 이름(로마자 표기) | Imdeok |
정치 및 사회 활동 | |
정당 | 무소속 |
직업 | 사상가, 교육자, 작가, 사회운동가, 계몽운동가, 여성주의 운동가, 정치인, 육영사업가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배우자 | 김운호(이혼) |
자녀 | 김혜란(첫째딸) 김혜련(둘째딸) |
부모 | 박영하(부), 김온유(모) |
형제 | 오빠 2명, 남동생 1명 |
학력 |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
추가 정보 |
2. 생애
박인덕은 1896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유학자 집안의 4남 1녀 중 넷째 딸로 자랐다. 어린 시절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 김온유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7] 갑오경장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아버지와 남동생을 콜레라로 잃은 후, 어머니는 박인덕을 진남포의 삼숭학교에 입학시켰고, 이때 이름을 임덕에서 인덕으로 고쳤다.
삼숭학교 시절 윤심덕, 김일엽, 나혜석 등과 교류했으며,[9] 1908년 경성의 이화학당으로 진학하여 선교사의 지원으로 중학부(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대학부(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부터 음악과 연설에 재능을 보였다.[6]
1919년 나혜석과 함께 3·1 운동을 계획하고 참여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김운호와 결혼했으나, 1926년 미국 유학을 떠나 웨슬리안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다. 1928년 뉴욕에서 근화회 창립에 참여했다.
1931년 귀국 후, 남편의 외도와 가치관 차이로 이혼을 선언하고 위자료 2000KRW을 지불하며 두 딸의 양육권을 얻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후 박인덕은 황애시덕, 최활란 등과 조선직업부인협회를 결성하고 여성 경제학 강연을 진행했으며, 농촌 여성과 빈민층을 위한 무료 교육 활동을 펼쳤다. 1940년 경성YWCA 부회장을 역임하고, 1941년 윤치호의 실력 양성론에 영향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여성 실업 교육에 힘썼다.
1945년 광복 후, 독립촉성중앙회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미군정의 국제부인대회 대표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해방 후 유관순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며 유관순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61년 인덕대학의 전신인 인덕실업학교를 설립하고, 1962년 재단법인 인덕학원을 설립, 1963년 인덕실업고등학교 이사장 겸 교장 서리를 지냈다. 1980년 인덕대학에서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2. 1. 생애 초반
박인덕은 1896년(고종 34년) 9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진남포면(뒷날 남포직할시 용강군) 억양리에서 유학자 박영하와 김온유의 4남 1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7] 아버지는 딸에게 덕을 갖춘 여인이 되라는 뜻에서 '임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녀 시절 박임덕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어머니 김온유는 딸의 장래를 위해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과거 준비를 하던 아버지 박영하는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남동생도 그해에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기독교계인 진남포의 삼숭학교에 박인덕을 입학시켰고, 이때 이름을 임덕에서 인덕으로 고쳐주었다.
박인덕이 살던 시대는 여성 차별 사상이 만연하여 여자들을 위한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친척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에 박인덕을 보내 한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이때 남학생처럼 꾸미고 서당에 다녔다. 1903년(광무 6년) 해주 진남포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삼숭학교(三崇學校)에 다니게 되었다.
삼숭학교 시절 윤심덕, 김일엽, 나혜석 등과 절친한 친구였다.[9] 1905년(광무 8년) 9세 때 교회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1908년 감리교 계열 여성 학교인 경성의 이화학당으로 진학했다. 선교사의 지원으로 이화학당 중학부(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로 진학하여, 1912년 3월 중학부를 졸업하고 대학부로 진학했다. 1916년 3월에는 이화학당 대학부(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전신)를 제3회로 졸업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부터 음악과 연설에 재능을 보였다.[6]
2. 1. 1. 출생과 유년기
박인덕은 1896년(고종 34년) 9월 24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진남포면(뒷날 남포직할시 용강군) 억양리(億兩里)의 먼양 뜰 부락에서 유학자 박영하(朴永河)와 김온유(金溫柔)의 4남 1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7] 그의 집은 진남포 읍내 서쪽 5km의 변두리에 있었다. 한편 그의 선대는 근처 대대면에 살았는데, 호적상 본적지는 용강군 대대면(大代面) 덕동리(德洞里) 322번지였다.아버지 박영하는 그에게 처음 덕을 갖춘 여인이 되라는 뜻에서 '임덕'(姙德)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소녀 시절 박임덕은 성탄절 날 교회에 가서 선물을 받는 것이 즐거워 교회에 몇 번 다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계속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때 그의 어머니 김온유는 딸의 장래를 내다보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빠 세 명이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고, 그가 태어난 뒤 남동생이 한 명 태어났지만 역시 요절하였다.
양반 가의 후예였던 박인덕의 아버지 박영하는 평생 글만 읽은 선비였고, 돈 벌 생각도 없이 오직 글을 읽으며 평생 과거 준비에만 매달렸다. 생계는 어머니 김온유의 몫이었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그는 신세 한탄만 하다가 박인덕이 7살 되던 해에 전국에 유행하던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어린 남동생도 그해에 콜레라로 사망한다.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기독교 계열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과부가 된 어머니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하나 뿐인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신념에서 기독교계인 진남포의 삼숭학교에 입학 시킨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가 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임덕에서 인덕으로 고쳐주었다.
그는 일찍부터 매력적인 소녀였다. 총명하고 얼굴 예쁘며 말솜씨가 고와, 만나보면 귀여워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이화여전에 다닐 때 '노래 잘하는 박인덕/인물 잘난 박인덕/연설 잘하는 박인덕'하는 동요가 퍼졌을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8]
2. 1. 2. 소녀 시절
박인덕이 살던 시대는 여성에게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여성 차별 사상이 만연하였다. 그래서 여자들을 위한 학교는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 김온유는 자신의 먼 친척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에 박인덕을 보내 한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이때 그는 남학생처럼 꾸미고 서당에 다녔다. 어머니 김온유는 어린 박인덕에게 검은색 바지를 입히고 빨간 리본 대신 검은 리본을 달아 머리를 땋아주었으며, 이름도 남자 아이들처럼 "인덕(仁德)"으로 개명했다.1903년(광무 6년) 8세 되던 해 해주 진남포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머리에 검은 리본 대신 빨간 리본을 매어주고 치마를 입혀 여자아이처럼 꾸미고 신식 학교인 삼숭학교(三崇學校)에 다니게 되었다.
삼숭학교 시절 그의 절친한 친구로는 윤심덕, 김일엽, 나혜석 등이 있었다. 진남포 학교에 입학한 윤심덕, 박인덕, 김일엽은 단짝 친구로 지냈다.[9]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9]

1905년(광무 8년) 9세 때 교회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데, 3.1 만세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919년 3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진술을 받을 때 9세되던 해에 세례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2. 1. 3. 이화학당 재학 시절
1908년 감리교 계열 여성 학교인 경성의 이화학당으로 진학했다. 윤심덕 자매가 이화학당에 다니는 것을 보고 이화학당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가정 환경은 어려웠다. 그러나 선교사의 지원으로 이화학당 중학부(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로 진학하여, 1912년 3월 중학부를 졸업하고 대학부로 진학했다. 1916년 3월에는 이화학당 대학부(이화여자전문학교의 전신)를 제3회로 졸업했다.진남포 시절부터 친구였던 윤심덕,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이 이 시기에 함께 교류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부터 다재다능하고 미모가 뛰어나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으며,[6] 음악과 연설에도 재능을 보였다.
2. 2. 교육 계몽 활동
1919년 초, 일본에서 귀국한 나혜석과 만나 3·1 운동을 계획한다. 나혜석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귀국하여 3·1 운동에 참여했고, 이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을 찾아와 독립운동 방향을 의논했다.[10] 나혜석은 개성과 평양에서 지인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했고, 3월 5일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10]1919년 4월, 3·1 운동 가담 혐의로 김마리아, 황애시덕, 나혜석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3·1 운동에 대거 참여하면서, 담임 교사였던 신준려와 박인덕이 학생들을 선동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2. 2. 1. 결혼
1910년대 후반 사교계에서 부호가의 아들인 김운호를 만났다.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은 박인덕이 학교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고 미국 웨슬리언 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으나, 박인덕은 이를 거절하고 김운호와의 결혼을 선택한다.[13]김운호는 열렬히 구애하였는데, 10000KRW 상당의 피아노를 선물하고 이화여전에 다니는 여동생을 통해 날마다 옷가지와 패물을 전하여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성공했다.[8] 또한 수만원의 큰돈을 들여 경성 다방골에 호화주택을 짓고 미국에다 자동차까지 주문하여 신부에게 바쳤다.[8]
그러나 이화학당의 교사인 아펜젤러를 비롯한 미국 선교사들은 그가 결혼하기보다는 독신으로 남아 개신교 선교 사업과 여성 교육에 헌신해주기를 기대하였다. 어머니 김온유 역시 김운호와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박인덕은 1920년 6월 경성부의 정동교회에서 김운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친구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아 '마치 장례식과 같았다'고 한다.
2. 2. 2. 도미 유학 생활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않자 미국 유학을 결심, 당시 배화학교의 음악 교사였던 루비 리(Rubie Lee) 등의 협조와 지원으로 192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926년 8월 미국 유학차 한국을 출발하여, 동년 9월 15일 조지아주의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했다.[16]
그 뒤로는 하루 걸러큼씩, 혹은 날마다, 기차로, 자동차로 낫선 동리에 가서 짐을 풀었다, 묵었다, 새 사람을 만났다 떠났다. 나의 생활이 맛치 찝시와 갓고 물 우에 뜬 부평초갓치 바람에 밀니는 물결 따라 이 언덕, 저 해안에 닷게 되었다.|그 뒤로는 하루 걸러큼씩, 혹은 날마다, 기차로, 자동차로 낯선 동리에 가서 짐을 풀었다, 묵었다, 새 사람을 만났다 떠났다. 나의 생활이 마치 집시와 같고 물 위에 뜬 부평초같이 바람에 밀리는 물결 따라 이 언덕, 저 해안에 닿게 되었다.영어[17]
유학 생활 중 학비를 지원받지 않았다. 미국 유학 초기에는 아르바이트와 막일을 하다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되면서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장학금과 강연료를 모아, 매달 20~30원씩 고국의 남편에게 생계비를 보냈다. 해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부양하는 것은, 남성이 가부장으로서 가정 생계를 부양해야 된다는 당시 사회통념과는 판이하여 조선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1928년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 학위와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미국 유학 중에 김마리아, 황애덕 등과 함께 민족주의적인 여성 유학생 모임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국내 정세를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으로 졸업 후 해외 선교를 위한 미국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가담하여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1931년 귀국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인 1928년 가을부터 1931년 봄까지 국제기독교청년회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32개국을 순회하며 순회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컬럼비아대학,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프랑스 파리 대학 등 구미 유수 대학에서 초청된 순회강연회는 260회에 달했다.
1931년 10월 귀국하였으며, 귀국하자 윤치호 등 국내의 감리교계 인사들이 명월관에서 환영회를 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남편 김운호는 그가 미국에서 부쳐준 생활비로 다시 다른 첩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2. 3. 근화회 활동과 강연 활동
1928년 1월 미국 뉴욕에서 근화회 조직에 참여하고, 근화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임원진은 회장 김마리아, 총무 황에스터, 서기 이선행, 재무 남궁쪼애안, 실업부 황에스터, 안헬린, 윤원길, 교육부 김마리아, 김애회, 주영순, 사교부 김인덕(박인덕), 림메리, 류동지 등으로 구성되었다.[18]1928년에는 잡지 우라키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오천석과 황창하는 시카고 근교 에반스턴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에 다니면서 우라키를 창간하였다. 특히 제6호는 뉴욕 한인교회에서 편집되었고, 이때 이 교회와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들이 이 잡지 편집에 대거 참여하였다. 강용흘과 황창하를 비롯하여 이병두, 장덕수, 한승인, 노재명, 박인덕, 장리욱, 박경호, 박마리아, 윤치영, 최순주, 윤홍섭 등이 이 잡지에 글을 발표하거나 편집 일에 관여하였다.[19]
그밖에도 그는 여성 교육자들의 모임으로 조직된 망월구락부에도 가입해 활동하였다.
2. 3. 이혼, 사회 활동
1931년 박인덕은 귀국 직후 가출과 이혼을 선언한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 자녀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겠다며 비 오는 날 손가방 하나만 들고 가출한 것이다.[8] 김운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박인덕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자식 양육을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했고, 박인덕은 이혼 소송과 함께 자녀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두 딸의 양육권을 획득한다.당시는 유학자 계열과 유교적 가치관이 남아있던 시대라 박인덕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난이 거세게 나타났고, 기독교계에서는 이혼을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토론이 벌어졌고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20]
인물 | 발언 내용 |
---|---|
조선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 “이혼은 불가합니다. ….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다. …. 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 기성 종교단체 안에 들어와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으므로….”[20] |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김창준 |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 있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 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20] |
동아일보사 취재부 기자 이청전 | “이혼이니 결혼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일을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20] |
이화전문학교 교수 이온상 | “도시 모를 일.”[20] |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인덕은 이혼을 감행한다.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20]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 달 만에 이혼을 하였다. “사랑 없는 가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 몸을 묻어버릴 수 없고, 무지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인덕은 남편과 자식을 떠나며 가정을 던지고 나서는 '조선의 현대적 노라'로 일컬어졌다.[21] 1931년 10월 김운호에게 위자료 2000KRW을 주고 이혼하였고, 두 딸의 양육권은 박인덕이 가졌다.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이혼을 하면 여자가 가정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박인덕은 당당하게 자신이 이혼을 하는 것이라 밝혔다.
두 딸에 대해 박인덕은 자신의 양육권을 강력히 주장했다.[8] 이유는 '내 자식이라는 것보다 한국여성의 일원으로써 공부시키고 싶어서'[8]였다. 이혼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역시 사회적으로 이슈와 논란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남자가 여자에게 위자료를 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당시, 그가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것은 당대의 화제가 되었다.
유학 시절 남편이 부치는 편지는 '여자란 남편이나 섬기고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본위이니 속히 돌아오라'는 데 일관되었다.[8] 그러나 남편 김운호는 그가 보내준 생활비로 새로 첩을 하나 더 들였고, 귀국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인덕은 이혼을 감행하였다. 주변에서는 그를 만류하였으나 이혼이 성립되었고 위자료는 이혼남이 이혼녀에게 주는 것이 관례요 상식인데 박인덕은 오히려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어 화제가 되었었다.[8] 이를 두고 '곧 이혼을 요구한 주체가 자신임을 선언한 한국여성사상 획기적인 일'[8]이란 시각도 있다.
3.1 운동 당시 여성들의 시위를 모의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박인덕과 나혜석은 1920년대 초반 결혼으로 주목받았고,[22] 1930년대에는 이혼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23]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여성들이었기에 이들의 불행해 보이는 개인사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많은 여학생들에게는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의 실패담으로 받아들여져 반면교사가 되었다.[23]
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혼의 합법성 여부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윤치호, 이광수 등 소수만이 이혼을 옹호하였다. 1931년 12월 신동아 12월호에는 몽통구리라는 필명으로 "가정에서 사회로: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고, 1932년 7월 제일선 7월호에는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성리학 선비, 보수적인 유학자 계층, 일부 기독교인들은 박인덕을 비난하고 멸시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 언론,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5년 삼천리 3월호에 "그리운 이화 칼리지여"라는 특집 기고를, 1938년에는 삼천리 11월호에 "파란 많은 내 반생"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932년 박인덕은 황애시덕, 최활란 등과 함께 망월구락부를 조선직업부인협회로 바꾸어 여교사가 아닌 일반 직장여성들도 참여시키고,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 활동을 했다.[1] 1933년 농촌의 저소득, 저학력 여성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고, 농촌 부녀자, 도시빈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이동학교를 개설, 강의에 참여했으며, 한국감리교회 부설 농촌보녀지도자수양소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1] 그밖에도 농촌 계몽 운동에도 참여했다.[1]
1934년 4월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장립발기준비위원회 준비위원과 조선인가정부인협회의 한복연구를 위한 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1]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저술, 발간했고,[1]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농촌사업부 총무로 선출되었다.[1] 1935년 11월 미국을 시찰하기 위해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출국, 미국을 방문한 뒤 1937년 9월 귀국하였다.[1]
2. 3. 1. 이혼 논란
1931년 귀국 직후 박인덕은 가출, 이혼을 선언한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 자녀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겠다며 비 오는 날 손가방 하나만 들고 가출한 것이다.[8] 이때 김운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박인덕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식 양육을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했다. 그녀는 이혼 소송과 함께 자녀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두 딸의 양육권을 획득한다.유학자 계열과 유교적 가치관이 잔존하던 시대라 박인덕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난이 거세게 나타났고, 기독교계열에서는 그녀의 이혼을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토론이 벌어졌고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20]
인물 | 발언 내용 |
---|---|
조선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 “이혼은 불가합니다. ….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다. …. 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 기성 종교단체 안에 들어와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으므로….”[20] |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김창준 |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 있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 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20] |
동아일보사 취재부 기자 이청전 | “이혼이니 결혼이니 당사자끼리 하는 일을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20] |
이화전문학교 교수 이온상 | “도시 모를 일.”[20] |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혼을 감행한다.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20]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 달 만에 이혼을 감행했다. “사랑 없는 가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 몸을 묻어버릴 수 없고, 무지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떠나며 가정을 던지고 나서는 '조선의 현대적 노라'로 일컬어졌다.[21]
2. 3. 2. 이혼의 주체성 확인
1931년 귀국 직후 박인덕은 가출과 이혼을 선언한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 자녀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겠다며 비 오는 날 손가방 하나만 들고 가출한 것이다.[8] 김운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박인덕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식 양육을 대가로 위자료를 요구했다. 그녀는 이혼 소송과 함께 자녀 양육권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두 딸의 양육권을 획득한다.유학자 계열과 유교적 가치관이 잔존하던 시대라 박인덕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난이 거세게 나타났고, 기독교계에서는 그녀의 이혼을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박인덕이 그간 쌓아 온 명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혼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고 찬반양론이 벌어졌다. 당시 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 이슈가 되어 토론이 벌어졌고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란 제목으로 한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20]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혼을 감행한다. 1931년 늦가을 종교계와 여성계는 떠들썩했다. 이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온 박인덕이 “가정을 떠나 사회로”를 선언하며 이혼을 한 때문이었다.[20] 10월 귀국한 박인덕은 한 달 만에 이혼을 감행했다. “사랑 없는 가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 몸을 묻어버릴 수 없고, 무지한 남편을 부양하는 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떠나며 가정을 던지고 나서는 '조선의 현대적 노라'로 일컬어졌다.[21] 박인덕은 결국 1931년 10월 김운호에게 위자료 2000KRW을 주고 이혼하였고, 두 딸의 양육권은 박인덕이 가졌다.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조선 사회에서는 이혼을 하면 여자가 가정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박인덕은 당당하게 자신이 이혼을 하는 것이라 밝힌다.
두 딸에 대해 박인덕은 자신의 양육권을 강력히 주장했다.[8] 이유는 '내 자식이라는 것보다 한국여성의 일원으로써 공부시키고 싶어서'[8]였다.
이혼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의 그의 발언 역시 사회적으로 이슈와 논란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남자가 여자에게 위자료를 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당시, 그가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것은 당대의 화제가 되었다.
유학 시절 남편이 부치는 편지는 '여자란 남편이나 섬기고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본위이니 속히 돌아오라'는 데 일관되었다.[8] 그러나 남편 김운호는 그가 보내준 생활비로 새로 첩을 하나 더 들였고, 귀국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인덕은 이혼을 감행하였다. 주변에서는 그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곧, 이혼이 성립되었고 위자료는 이혼남이 이혼녀에게 주는 것이 관례요 상식인데 박인덕은 오히려 자신이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어 화제가 되었었다.[8] 이를 두고 '곧 이혼을 요구한 주체가 자신임을 선언한 한국여성사상 획기적인 일'[8]이란 시각도 있다.
2. 3. 3. 시중의 화제
3.1 운동 당시 여성들의 시위를 모의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박인덕과 나혜석은 1920년대 초반 결혼으로 주목받았고,[22] 1930년대에는 이혼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23]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여성들이었기에 이들의 불행해 보이는 개인사는 더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많은 여학생들에게는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의 실패담으로 받아들여져 반면교사가 되었다.[23]박인덕의 이혼은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혼의 합법성 여부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윤치호, 이광수 등 소수만이 이혼을 옹호하였다. 1931년 12월 신동아 12월호에는 몽통구리라는 필명으로 "가정에서 사회로: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고, 1932년 7월 제일선 7월호에는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성리학 선비, 보수적인 유학자 계층, 일부 기독교인들은 박인덕을 비난하고 멸시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 언론,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5년 삼천리 3월호에 "그리운 이화 칼리지여"라는 특집 기고를, 1938년에는 삼천리 11월호에 "파란 많은 내 반생"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2. 3. 4. 여성 계몽 운동
1932년 박인덕은 황애시덕, 최활란 등과 함께 망월구락부를 조선직업부인협회로 바꾸어 여교사가 아닌 일반 직장여성들도 참여시키고,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 활동을 했다.[1]1933년 농촌의 저소득, 저학력 여성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고, 농촌 부녀자, 도시빈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이동학교를 개설, 강의에 참여했으며, 한국감리교회 부설 농촌보녀지도자수양소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1] 그밖에도 농촌 계몽 운동에도 참여했다.[1]
1934년 4월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장립발기준비위원회 준비위원과 조선인가정부인협회의 한복연구를 위한 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1]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저술, 발간했고,[1]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농촌사업부 총무로 선출되었다.[1] 1935년 11월 미국을 시찰하기 위해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출국, 미국을 방문한 뒤 1937년 9월 귀국하였다.[1]
2. 4. 일제 강점기 후반
1940년 경성기독교여자청년회(경성YWCA)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인도를 방문, 서부에서 북부를 거쳐 동부로 여행하며 인도를 직접 목격했다. 박인덕의 기행문은 인도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 얻은 다른 조선인들과 다르지 않았다.[25] 오랜 미국 유학과 그 영향을 받은 박인덕은 불행한 인도 여성을 위해 일하는 서양 선교사가 인도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조를 보였다.[26]1941년 윤치호의 실력 양성론에 공감하여 덴마크와 미국의 실업계 학교를 본떠 덕화여숙을 설립했다. 덕화여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간 공업과 상업 등의 실업 교육을 실시하는 직업훈련 학교였다. 농촌 및 여성 계몽 활동 중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등의 단체를 개설하고, '숙화의숙'을 설립하였다.[27]
1941년 덕화여숙 설립 당시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을 받았다.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약 4년간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덕화여숙 폐교조치가 반일사상 고취였다는 점에서 확실하지 않다.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했고, 《매일신보》, 《신시대》에 친일 논설을 실었다.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으나 명의 도용 여부는 불명확하다.
김동환은 임전체제 하 황민화운동의 일환으로 각계 유력자 198명에게 안내장을 보냈는데, 박인덕에게도 보내졌다.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는 신흥우의 사회로 열렸다.[28] 8월 28일 경성호텔에서 제1차 위원총회를 개최하고 회명을 임전대책협력회로 변경, 임전대책연설회 개최, 채권가두유격대 조직 등을 결의하고 상무위원으로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辛泰嶽), 신흥우, 임흥순(任興淳) 등 11명을 선정 발표했다.[29] 이 결의에 의해 9월 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시대책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연사는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 신흥우, 윤치호, 이종린, 최린 등이었다.[29] 박인덕은 채권가두유격대 종로담당의 한사람이 되었다.[29] 1941년 12월 27일 조선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결전 부인대회'가 개최되었다. 연사로는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임숙재, 최정희 등이었다.[30]
1945년 초 조선총독부로부터 반일 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덕화여숙이 폐쇄당했다.
2. 4. 1. 사회적 비판과 갈등
박인덕은 남편 김운호와 결혼할 당시 김운호는 본처가 있었는데, 이화학당에서 명성이 높았던 박인덕과 결혼하기 위해 김운호는 본처와 이혼했다.[21] 그러나 박인덕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이혼을 선언하자, 세간에서는 그를 비난하였다.결혼 후 집안이 망하자 박인덕은 남편과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 바로 이혼을 선언했다.[24]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박인덕이 부유했던 남편이 가난해지자 그를 버렸다고 비난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24]
당시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과 함께 박인덕은 유교학자와 남성 지식인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광수와 윤치호 등 극소수는 박인덕을 변호하였다. 윤치호는 성서에 이혼 금지 조항이 없다며 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고, 이광수는 결혼처럼 이혼도 할 수 있으며 이혼이 범죄는 아니라고 옹호하였다. 윤치호는 남성은 바람을 피우고 첩도 거느리는데 여성에게만 의무를 강요한다며 박인덕과 나혜석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적극신앙단 사건으로 윤치호와 다소 소원해진 뒤에도 이광수 등은 그녀를 옹호하였다.
1940년 경성기독교여자청년회(경성YWCA)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인도를 방문했다. 인도 서부에서 북부를 거쳐 동부로 여행하며 인도를 직접 목격한 박인덕의 기행문은 인도에 대한 지식을 간접적으로 얻은 다른 조선인들과 다르지 않았다.[25] 오랜 미국 유학과 그 영향을 받은 박인덕은 불행한 인도 여성을 위해 일하는 서양 선교사가 인도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조를 보였다.[26]
2. 4. 2. 태평양 전쟁 전후
3·1 운동 때 학생선동자로 지목되어 신준려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제자인 유관순의 고문 치사를 목격하였다.[8] 박인덕은 황에스더, 김마리아, 신줄리아와 함께 1919년 7월 24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다고 회고했지만,[11] 1919년 8월 4일자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의 예심종결확정서는 8월 4일 면소, 8월 5일 출감으로 기록하고 있다.[11] 유관순 등과 같은 곳에 투옥되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이후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떠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간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적극신앙단의 지도자인 신흥우와 가깝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이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독교단체 활동은 이혼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의 부정적 시선으로 순탄하지 않았다. 김활란, 차미리사 등과 국내 여성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농촌 및 여성 계몽 활동 중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등의 단체를 개설하고, '숙화의숙'을 설립하였다.[27] 1941년 윤치호의 실력 양성론에 공감하여 덴마크와 미국의 실업계 학교를 본떠 덕화여숙을 설립,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1년간 공업과 상업 등의 실업 교육을 실시하는 직업훈련 학교였다.
1941년 덕화여숙 설립 당시 친일 단체 녹기연맹의 지원을 받았다. 1945년 광복 시점까지 약 4년간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덕화여숙 폐교조치가 반일사상 고취였다는 점에서 확실하지 않다.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했고, 《매일신보》, 《신시대》에 친일 논설을 실었다.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했으나 명의 도용 여부는 불명확하다.
김동환은 임전체제 하 황민화운동의 일환으로 각계 유력자 198명에게 안내장을 보냈는데, 박인덕에게도 보내졌다.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는 신흥우의 사회로 열렸다.[28] 1941년 8월 28일 경성호텔에서 제1차 위원총회를 개최하고 회명을 임전대책협력회로 변경, 임전대책연설회 개최, 채권가두유격대 조직 등을 결의하고 상무위원으로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辛泰嶽), 신흥우, 임흥순(任興淳) 등 11명을 선정 발표했다.[29] 이 결의에 의해 9월 4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임시대책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연사는 김동환, 박인덕, 신태악, 신흥우, 윤치호, 이종린, 최린 등이었다.[29] 박인덕은 채권가두유격대 종로담당의 한사람이 되었다.[29]
2. 4. 3. 광복 직전
1941년 12월 27일 조선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결전 부인대회'가 개최되었다.[30] 연사로는 박인덕,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임숙재, 최정희 등이었다.[30]1945년 초 조선총독부로부터 반일 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덕화여숙이 폐쇄당했다. 그해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2. 5. 해방 이후
1945년 10월, 박인덕은 우익 단체인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했고, 그해 말에는 독립촉성중앙회의 산하기관이자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 가담했다. 미군정에 의해 국제부인대회 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했다.[1]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 김구 등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여 유명해졌다. 독립촉성회 회의의 사회자, 독촉국민회 정보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1947년 12월, 미군정청의 지시로 문화사절단으로 다시 미국에 파견되었다.[1]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여성대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역사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현황을 알리고 홍보하며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구하는 강연 활동을 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도 출연하여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돌아왔다.[1] 잠시 귀국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
1950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교육, 장학 재단인 부려재단(Beri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1] 1954년에는 미국 순회강연 도중 켄터키주의 실업계 학교인 베리야 대학을 견학하고 실업계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1] 1950년대에는 주로 미국에 머무르면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자전적 영문 소설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영어)》(1954)를 출판했다.[1] 저서로는 이 책의 후편인 《The Hour of the Tiger》(1965), 《The Cock Still Crows》(1977)와 속담집인 《The Wisdom of the Dragon》(1970)가 있다.[1]
해방 후, 박인덕은 유관순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유관순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던 중,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교육, 장학 사업, 불우한 고학생 지원과 실업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강연 활동을 하였다. 유관순에 대한 증언 외에 유관순 추모 사업에도 참여했다.[1] 1961년 인덕대학의 전신인 인덕실업학교(후에 인덕공업전문대학)를 설립하고, 1962년 재단법인 인덕학원을 설립하였다.[1] 1963년 인덕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 겸 교장 서리를 지냈다.[1] 1972년 인덕실업학교가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로 승격 인가되었으며, 딸인 김혜란은 인덕전문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다.[1]
1980년 4월 3일 인덕대학 교내 공관에서 향년 84세로 세상을 떴다.[1]
2. 5. 1. 광복 직후 활동
광복 직후 1945년 10월 우익 단체인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고, 그해 말 독립촉성중앙회의 산하기관이자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 가담하였으며, 미군정에 의해 국제부인대회 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했다.[1]1945년 12월 이승만, 김구 등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여 유명해졌으며, 독립촉성회 회의의 사회자, 독촉국민회 정보부장을 역임했다.[1] 1948년 임시정부 계열 인사가 만든 친일파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1]
1947년 12월 미군정청의 지시로 문화사절단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1]
2. 5. 2. 유관순 역사 작업
해방 후 박인덕은 유관순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과 신봉조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중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박인덕이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었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백 명이다.
2. 5. 3. 정부 수립과 도미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에서 개최된 자유국가여성대회에 대한민국의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역사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현황을 알리고 홍보하며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구하는 등의 강연 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도 출연하여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돌아왔다.[1] 그 뒤 잠시 귀국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 이후 1950년대에는 주로 미국에 머무르면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자전적 영문 소설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영어)》(1954)를 출판했다.[1] 저서로 이 책의 후편격인 《The Hour of the Tiger》(1965), 《The Cock Still Crows》(1977)와 속담집인 《The Wisdom of the Dragon》(1970)가 있다.[1]1950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교육, 장학 재단인 부려재단(Beri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1] 1954년 미국 순회강연 도중 켄터키주의 실업계 학교인 베리야 대학을 견학하고 실업계 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운다.[1]
2. 5. 4. 만년
귀국 후 그는 교육, 장학 사업, 불우한 고학생 지원과 특히 실업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유관순에 대한 증언, 진술 외에 유관순 추모 사업에도 참여하여 활동했다.[1]1961년에 자신의 사재와 인세, 강연료, 기금 등을 모아 인덕대학의 전신인 인덕실업학교(후에 인덕공업전문대학으로 개명)를 설립하고, 1962년 10월 재단법인 인덕학원을 설립하였다.[1] 1963년 12월에는 인덕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 겸 교장 서리를 지냈다.[1] 1972년 3월 자신이 세운 인덕실업학교가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로 승격 인가되었으며, 김운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중 맏딸인 김혜란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인덕전문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다.[1]
1980년 4월 3일 인덕대학 교내 공관에서 향년 84세로 세상을 떴다.[1]
3. 사상적 측면
박인덕은 3·1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나라가 독립하려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육, 사회단체 활동 외에도 시민 계몽 활동과 경제, 산업 인력 육성을 위해 학생들에게 실업 교육을 강조했다.
1939년 '박인덕 여사의 연애관, 연애란 우주의 미의 결정임이여'(삼천리, 1939. 1)라는 글에서 "진정한 연애를 의미한 연애감정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며, "인류를 사랑하고 국가사회를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도 이 높고 아름다운 연애감정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며 새로운 연애관을 주장했다.[31]
서구 문명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미국과 러시아를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재산사유 대 재산국유', '종교를 공인하는 사회 대 공인치 않음', '가정제도를 존중하는 대 이에 무관심' 등으로 비교하며 '둘 다 우리에게는 부적당'하다고 답했다.[32]
3. 1. 실력 양성론
3·1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던 그는 나라가 독립하려면 실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판단, 교육, 사회단체 활동 외에도 시민 계몽 활동과 경제, 산업 인력 육성을 위해 학생들에게 실업 교육을 강조하기도 했다.3. 2. 연애관
박인덕은 1939년에 '박인덕 여사의 연애관, 연애란 우주의 미의 결정임이여'(삼천리, 1939. 1)라는 글에서 과거의 모든 연애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우리 머리에 박힌 연애 관념이 실제의 연애를 더럽힌 것이라 보고 새로운 연애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였다.[31] 그에 따르면 "진정한 연애를 의미한 연애감정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며, "인류를 사랑하고 국가사회를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도 이 높고 아름다운 연애감정을 토대로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31]3. 3. 미국과 소련 비교
박인덕은 서구 문명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과 러시아처럼 생의 진로에 있어서 서로 정반대되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정반대'를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재산사유 대 재산국유, 종교를 공인하는 사회 대 공인치 않으며, 가정제도를 존중하는 대 이에 무관심'으로 분석하면서 '둘 다 우리에게는 부적당'하다고 설문에 답했다.[32]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남편 | 김운호 (1931년 이혼) |
딸 | 김혜란(金慧蘭, 미국명은 Iris, 1921년 - 1996년 1월 4일, 교육자) |
외손 | 이중희(李重熙, 1948년 - , 사회사업가, 베리아 재단 이사장) |
외손 | 이선희(李善熙) |
딸 | 김혜련(金慧蓮, 미국명은 Lotus) |
5. 논란과 의혹
박인덕은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과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 유관순 열사를 이용했다는 논란, 신흥우와의 염문설 등 여러 논란과 의혹에 휩싸여 있다.
박인덕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참가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친일 행적 의혹' 하위 섹션에 서술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하려 시도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33] 유관순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박인덕이 주도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33] 일각에서는 유관순이 해방 이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각되었다는 견해도 있다.[34]
유관순 사후 박인덕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유관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 과도하게 띄웠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5]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며,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한다.[35]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는 신흥우와의 염문설이 감리교계에서 확산되기도 했다.[1]
그 외에도 박인덕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1],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2],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3],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인사가 만든 친일파 명단[4]에 포함되었다.
5. 1. 친일 행적 의혹
박인덕은 일제 강점기에 다음과 같은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주요 친일 행적 |
---|
이러한 활동들이 자발적이었는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5. 2. 친일 행적 은폐 의혹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하려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 말 친일 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33]'라는 것이다.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33]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이 한국판 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34]
5. 3. 유관순 이용 논란
유관순 사후 박인덕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유관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 과도하게 띄웠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35]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가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한다.[35] 이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 구체적인 자료를 확인한 결과이다.[35]2011년 김상구는 저서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에서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기독교 세력에 대해 폭로했다. 그는 유관순이 친일 전력을 덮는 동시에 개신교 선교 전략에 효과적으로 활용된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36]
5. 4. 신흥우와의 염문설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감리교계에서는 박인덕이 신흥우와 내연 관계라는 염문이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현동완 등 일부 경건주의자들은 박인덕을 기피하고 비토하였다.[1]박인덕이 남편 김운호와 이혼한 것과 나혜석이 이혼한 것을 두고 윤치호는 나혜석과 박인덕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였으나, 신흥우와의 염문설과 적극신앙단 사건을 전후해서는 박인덕을 신흥우의 사람으로 의심하였다.[1]
5. 5. 기타
-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되었다.[1]
-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포함되었다.[2]
-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3]
-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인사가 만든 친일파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6. 평가와 비판
박인덕은 자유 이혼을 감행하여 '조선의 노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38]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비판과 함께 생존 시에도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5]
1931년 삼천리지는 박인덕을 '"재덕과 미모로 이름을 날리던" 허영숙, 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윤심덕'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꼽았다.[37]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2009년 11월 한 포럼에서 "박인덕은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숙화의숙' 등을 만들었지만 (결혼과 이혼 때문에)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재감이 약한 국외자로 남게 되었다."며 지나치게 폄하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27]
6. 1. 당대의 시각
1931년 삼천리지는 박인덕을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재덕과 미모로 이름을 날리던" 박인덕, 허영숙, 김명순, 김원주, 나혜석, 윤심덕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신여성[37]'으로 꼽았다.6. 2. 긍정적 평가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2009년 11월 한 포럼에서 "박인덕은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숙화의숙' 등을 만들었지만 (결혼과 이혼 때문에)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재감이 약한 국외자로 남게 되었다."며 지나치게 폄하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27]박인덕은 자유 이혼을 감행하여 '조선의 노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8]
6. 3. 부정적 평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가정을 파괴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왔다. 박인덕 생존 시에도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5]에 시달려야 했다.7. 저서
- 《9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영어, 1954)
- 《The Hour of the Tiger》(1965)
- 《The Cock Still Crows》(1977)
- 속담집 《The Wisdom of the Dragon》(1970)
8. 상훈 기장
1976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기장을 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Park Indeok
https://archive.toda[...]
[2]
논문
Formation of Modern Literary Field: Intersection of Gender and Coloniality in Korean History
http://deepblue.lib.[...]
University of Michigan
2012-05-17
[3]
뉴스
Korean Lady Addresses Three Regina Audiences Telling of Native Land
https://www.newspape[...]
The Leader-Post
2021-11-22
[4]
기타
[5]
웹사이트
한국을 대표하는 신여성, 박인덕
http://world.kbs.co.[...]
[6]
뉴스인용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⑩]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http://www.dongailbo[...]
신동아
2008-05-16
[7]
기타
[8]
뉴스
[이규태 역사에세이] 가출신여성 이야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1-25
[9]
서적
경성 자살 클럽:근대 조선을 울린 충격적 자살사건
도서출판 살림
[10]
뉴스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
http://legacy.www.ha[...]
한겨레
2002-11-04
[11]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국학자료원
[12]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13]
기타
[14]
서적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
소명출판
[15]
서적
1920년대 초기 시의 이념과 미학
소명출판
[16]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국학자료원
[17]
서적
희귀 잡지로 본 문학사
깊은샘
[18]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국학자료원
[19]
서적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
뉴스
봉건의 굴레 벗어난 교육사업가 박인덕
http://h21.hani.co.k[...]
한겨레 21
1997-09-11
[21]
서적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22]
서적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소명출판
[23]
서적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소명출판
[24]
서적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25]
서적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
푸른역사
[26]
서적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
푸른역사
[27]
뉴스
일제강점기 기독신여성 3인 삶·신앙 비교 눈길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09-11-09
[28]
서적
송건호 전집 4
한길사
[29]
서적
송건호 전집 4
한길사
[30]
서적
송건호 전집 4
한길사
[31]
서적
역사에 사랑을 묻다:한국 문화와 사랑의 계보학
도서출판 이숲
[32]
서적
근대지식으로서의 사회주의
깊은샘
[33]
뉴스
유관순의 역사가 숨쉬는 곳 이화학당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3-09-13
[34]
뉴스
[잠깐읽기] 권력화된 종교계 향한 쓴소리 外
http://www.kookje.co[...]
국제신문
2011-07-01
[35]
뉴스
"종교법인법 제정만이 종교계 투명해지는 길"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11-06-27
[36]
웹사이트
믿음이 왜 돈이되는가?
http://www.bulkyo21.[...]
[37]
서적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소명출판
2002
[38]
서적
역사에 사랑을 묻다:한국 문화와 사랑의 계보학
도서출판 이숲
20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