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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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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애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비밀결사 송죽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펼쳤다.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3.1 운동에도 가담하여 투옥되었으며,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투옥되었다.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촌 계몽과 여성 계몽, 기독교 전도에 힘썼으며, 광복 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결성 및 여성단체총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구호 활동을 펼쳤으며,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전쟁 부상자 등을 지원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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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황에스더
황에스더
본명황애덕
한글황애덕
한자黃愛德
가타카나후앙 에도쿠
히라가나고 아이토쿠
다른 이름황에스더
출생일1892년 4월 19일
사망일1971년 8월 24일
성별여성
국적한국
직업사회 운동가
가족 정보
학력
경력
사회 활동
관련 활동독립운동
기타 정보

2. 생애

황애덕은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아버지 황석청은 유학자였다. 애시덕(愛施德)은 그의 이름인 에스터를 한글로 음차한 것이다.[1]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3세에 평양 정진여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1] 서울 이화학당 중등과를 1910년에 졸업하고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 비밀결사 '송죽회'를 결성하여 조선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1]

1917년 미국인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권유로 도쿄 여자 의학 전문학교에 유학하여, 김마리아 등과 '재도쿄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에 참여하고 기관지 '여자계'의 편집을 담당했다. 조선인 유학생 단체 '학우회'에서는 남자 유학생 중심의 운동을 비판했다.[3]

1919년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참여하고,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했다. 독립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김마리아 등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했다.[3] 1919년 12월 조직이 적발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20년 가석방되었다.[3][1]

1920년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태화여자관 야간 학급에서 여공에게 한글과 산술 등을 가르쳤다.[1] 1925년 컬럼비아 대학교에 유학하여 농촌 문제를 배우고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1] 1928년 귀국하여 1929년 이후 기독교의 전도에 기반한 농촌 계몽 실천을 위해 협성여자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농촌에 파견하고, 황해도 수안군의 동양척식회사 소유 토지를 구입하여 농촌 여성 교육에 종사했다. 경성여자소비조합, YMCA, '근우회' 등의 설립에도 힘썼다.[1] 1935년 만주로 건너가 '자유 농장' 건설에 앞장섰다.

1945년 해방 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1946년 여성 단체 협의회에 참여하여 여성 교육과 참정권 문제 해결에 힘썼다.[4]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미국에 머무르며 구호 물품을 모아 대한민국에 보냈고, 휴전 후 귀국하여 전쟁 고아, 부상자 등을 위한 사회 사업을 펼쳤다. 1971년 사망했으며,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1892-1917)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학자인 황석청의 딸로 태어났다. 애시덕(愛施德)은 그의 이름인 에스터를 한글로 음차한 것이다.[1] 황신덕1898년생으로 그의 여동생인데, 일설에는 1889년생인 그의 언니라는 설도 있다.[1]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3세 때 평양 정진여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1] 1905년 정진여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부로 올라와 이화학당 중등부에 입학하여 1910년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였다.[1]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1] 그해 한일 합방이 터지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고, 1913년 비밀결사 송죽회를 구성해 운영했다.[1]

1913년 동료 교사 김경희, 교회 친구 안정석과 더불어 비밀 여성학생 결사대인 송죽회를 조직하고, 애국사상이 깊던 학생들을 엄선하여 한글 교육과 국사 교육 등의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지부 설립과 연락망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군자금과 물자를 마련하여 중국만주의 조선인 항일 독립 단체에 송금하였다.[1]

2. 2. 일본 유학과 독립 운동 (1918-1924)

1918년 선교사 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중 김마리아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의 친목, 기독교 활동, 배일사상 고취, 애국심 고양 등의 활동을 펼쳤다.[3]

1919년 2·8 독립 선언3·1 운동에 참여했다.[3]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했다.[3] 독립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김마리아 등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 임시 정부를 지원했다.[3]

1919년 12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조직이 적발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중퇴, 1920년 가석방되었다.[3][1]

2. 2. 1. 일본 유학 초기

1918년 선교사 홀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로 건너가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김마리아, 나혜석, 현덕신, 송복신, 이은혜, 정자영 등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일본 유학 중인 조선인 여자 유학생 간의 친목과 더불어 기독교 종교 활동,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조선인 여학생들을 찾아다니며 독립 선언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고, 1919년 2월 6일 동경유학생회 총회 때까지 남녀는 만물의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독립운동에 여자들도 당연히 참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과 여자도 국민이고 백성이라는 점을 들어 구국의 운동에 동참해야 함을 적극 역설하였다.

2. 2. 2.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가 풀려났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인 여성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몇몇 남녀 결사대원들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했으나 실패하였다.[2]

여성 대표로는 신마실라가 선정되었는데, 황애덕과 단원들은 여비 마련을 위하여 노파, 부랑자, 여성 잡부, 노숙자, 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하여 각자 고향과 지역 연고지를 찾아 모금하였다.[2] 그해 3월부터 전국적으로 3·1 만세 운동이 확산되자 국내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2] 3월 19일 3·1 만세 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9월에 가석방되었다.[2]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자리에 김마리아, 유영준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조선으로 돌아와 3·1 운동에도 참여했다.[3]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했다.[3]

2. 2. 3. 애국부인회 사건과 투옥

김마리아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에 참여하여 총무직을 맡아 조직을 전국 규모로 확대하였다. 그 후 대한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가 출범하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무부장이 되었다.[1] 그러나 밀정의 제보로 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상해 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모금, 송달하다가 발각되었다.[1]

12월 애국부인회 조직이 적발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애국부인회 임원이 일제히 검거될 때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이송되었다.[1] 이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 이로 인해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는 복학하지 못하고 중퇴해야 했다.[1]

재판 결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 생활을 하던 중 옥중 수감된 여성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고 기독교 신앙인으로 입교시켰다.[1] 1920년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하였다.[1]

2. 3. 미국 유학과 계몽 활동 (1925-1945)

1920년 이화학당 대학부(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이화여전 기숙사 사감을 겸임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김마리아, 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귀국한 뒤로는 경성여자소비조합을 결성했다.[1]

192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8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간 후, 시카고에서 가정부 일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 등을 벌다가 너무 힘들어 친구 신마실라의 도움을 받고자 뉴욕으로 갔다가 한때 향수 장사 등을 하였다.[1]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윤원길, 박인덕 등의 미국 동부지역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김마리아, 총무 황에스터, 서기 이선행, 재무 남궁쪼애안, 실업부 황에스터, 안헬린, 윤원길, 교육부 김마리아, 김애회, 주영순, 사교부 김인덕, 림메리, 류동지 등으로 피선 구성되었다.[2] 이 중 이선행은 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 후배 동창으로 곽대학에도 함께 다닌 바 있으며, 김인덕은 박인덕인 것이다.[2]

1927년 근우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8년 귀국 후 농촌계몽사업과 여성계몽사업, 기독교 신앙전도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9년 무렵 김활란, 최활란(崔活蘭), 황에스더 등 일부 기독교 여성운동가들은 근우회에 '발을 끊은 상태'였다.[3] 나중에 김활란은 '조직과 기관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교양사업에 주력'하자면서 '사상을 통일시키려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반'이라고 자기 행동을 해명했다.[3]

1930년 혼인 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열차편으로 만주로 건너갔다. 이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농장에 취직, 농장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포들에게 야학과 계몽 운동을 하였다.

1925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유학하여, 농촌 문제를 배우고,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8년에 귀국하여, 1929년 이후 기독교의 전도에 기반한 농촌 계몽 실천을 위해,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지도 학생들을 각지의 농촌에 파견하고, 황해도 수안군의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한 10만 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농촌 여성의 교육에 종사했다. 그와 동시에 경성여자소비조합, YMCA,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내세우는 여성 통일 단체 '근우회' 등의 설립에 힘을 쏟아, 폭넓게 여성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했다. 1935년에 만주로 건너가, '자유 농장' 건설에 앞장섰다.

2. 4. 해방 이후 (1945-1971)

해방 후, 1945년 12월부터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1946년에는 여성 단체 협의회에 참여하여 여성 교육과 참정권 문제 해결에 힘썼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구호 물품을 모아 대한민국에 보냈고, 휴전 후 귀국하여 전쟁 고아, 부상자, 장애인, 미망인 등을 위한 사회 사업을 펼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4. 1. 광복 직후

8·15 광복 후 이은혜, 김활란, 동생 황신덕기독교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여성단체총연맹의 회장을 맡는 등 우익 여성단체에서 활동했다.[4] 1945년 12월부터는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섰고 1946년에는 여성단체협의회에 참여하여 여성 교육 문제, 여성의 참정권 문제 타결에 힘썼다. 제헌국회 총선에도 여성단체총연맹 소속으로 서울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 4. 2. 생애 후반

1950년 미국에 체류 중 6.25 전쟁 소식을 접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 있었던 그는 미국 내 한인 교민사회를 찾아가 고국에 구호물품을 보내고 모금 활동을 하였다. 이후 미국 내 12개 주를 순방하며 구호품을 수합하여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 이후 전쟁 부상자와 장애인, 미망인과 고아, 이재민 등을 위한 기술 지도를 위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전쟁 부상자와 장애인, 과부와 고아, 이재민에 대한 구호, 지원 사업, 직업훈련 지원과 알선 활동을 추진했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1운동 선도자 제1회 찬하회를 주관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 후 1967년에는 3.1 운동과 2.8 독립 선언 등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 여성운동 동지들을 규합하여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2. 5. 사후

1971년 8월 24일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상훈

黃愛德|황애덕중국어은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황석청
  • 어머니:
  • 자매: 황신덕
  • 이질: 임형빈

5.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8년총선여성단체총연맹4,253표 (6.50%)5위낙선서울 중구 국회의원


참조

[1]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국학자료원 1999
[2] 서적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국학자료원 1999
[3]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4] 간행물 해방 후 국가건설과정에서 우익 진영 여성들의 의회진출운동 200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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