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권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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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시권은 일제강점기 동안 관료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1884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나 1908년 관립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대한제국 재무서 주사로 관직에 들어섰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함경북도 군수를 거쳐 여러 지역의 군수, 도 참여관, 도지사를 역임했으며, 3·1 운동 당시 온성군수로서 시위를 진압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41년에는 지원병 제도 홍보에 참여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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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권 (관료) | |
---|---|
인물 정보 | |
이름 | 김시권 |
한글 표기 | 김시권 |
한자 표기 | 金時權 |
가타카나 표기 | キム・シグォン |
2. 생애
김시권은 1884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1939년 관직에서 물러나 조선 마그네사이트 개발 주식회사 상임 감사로 취임했다. 1940년 국민총력 조선 연맹 이사, 1943년 1월에는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해 4월 경기도 시흥군 동면장에 취임했다.
사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다.[3]
2. 1. 대한제국 시기
1908년 평양에 설립된 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대한제국 재무서 주사로 임명되어 원산에서 근무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2. 2.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함경북도 회령군 군서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병합 직후 군수로 승진하여 함경북도 경원군, 회령군, 온성군, 경흥군에서 군수직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온성군수로서 만세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1][2]1922년 함북 이사관에 임명되어 상공부장과 사회과장, 지방과장을 거친 뒤 평안남도 산업과장이 되었고, 도 사무관으로 승진한 뒤에는 함경남도 재무부장, 함북 내무부장을 지냈다. 1932년 경상북도 참여관 겸 도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산업부장을 겸임했다. 이후 도지사로 승진해 강원도와 전라북도 지사를 지냈다.
1929년 훈5등 서보장을 받는 등 1934년 기준으로 정5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경북 참여관으로 재직 중이던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4][5] 《조선인사흥신록》에 따르면, 김시권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함경북도의 오지에서 근무하면서 어려운 사업에 많은 힘을 기울인 인물로서 두뇌가 명석하고 부지런한 관리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동안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1941년 지원병 제도 홍보를 위해 결성된 지원병보급설전대 일원으로 경성부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했다.
2. 3. 친일 행적
김시권은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1908년 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대한제국 재무서 주사로 임명되면서 관직을 시작했다.[1]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함경북도 회령군 군서기로 재직 중이었으며, 병합 직후 군수로 승진하여 함경북도 여러 군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온성군수로서 만세 시위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1][2]1922년 함경북도 이사관으로 임명된 후, 평안남도 산업과장, 함경남도 재무부장, 함경북도 내무부장을 거쳐 1932년 경상북도 참여관 겸 도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이후 도지사로 승진하여 강원도와 전라북도 지사를 역임했다.[1][2]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4][5] 《조선인사흥신록》에 따르면, 김시권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함경북도의 오지에서 근무하면서 어려운 사업에 힘을 기울인 인물로서 두뇌가 명석하고 부지런한 관리였다고 평가된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활동했다.[3] 1941년에는 지원병 제도 홍보를 위해 결성된 지원병보급설전대의 일원으로 경성부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지원병 참전을 권유하기도 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 세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3]
참조
[1]
웹사이트
김시권 ( 金時權 )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
웹사이트
김시권(金時權)
http://encykorea.aks[...]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3]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4]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5]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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