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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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준(1904년)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서양화가, 미술사학자, 미술 평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종우에게 그림을 배운 후,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했다.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귀국 후 서울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사 연구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다가,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강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모색했으며, 1967년 자살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다른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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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원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미술사학자로, 유화 작품과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으며 미술사 저술과 고구려 벽화 평론을 발표하고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 일제강점기의 미술 평론가 -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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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은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30년대 유럽 화단에서 활동하며 한국적인 색채의 유화와 판화 작품을 선보인 화가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좌익 활동, 한국 전쟁 중 월북 등으로 논란이 되었으나 북한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해금 조치 이후 재조명받고 있다.
김용준 (190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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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관 | 안동 김씨 (신 안동) |
호 | 근원(近園) |
출생 | 1904년 9월 22일 |
사망 | 1967년 9월 22일 (향년 63세) |
직업 | 미술 평론가 수필가 |
학력 | |
최종 학력 | 와세다 대학 철학과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휘문고등학교 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
가족 | |
배우자 | 윤덕영의 서녀 윤정원 |
자녀 | 6남매 |
작품 | |
저서 | 《근원수필》 《조선미술대요》 |
기타 | |
관련 정보 | 북한에서 사망 |
2. 생애
김용준은 1904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경성부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이종우에게 그림을 배운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1928년 귀국 후 서울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길진섭과 함께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계에서도 선구자 격의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본래 서양화가로 출발하였으나 목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된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화의 기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임시 학장을 맡았고, 그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월북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을 역임했다. 월북 직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을 역임했고,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가 신설된 이후 1959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5년 《단원 김홍도》, 1958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등을 집필했고, 1958년 중국 방문 후 평양 국립중앙미술박물관에서 《중국 방문 귀환전》을 개최했다. 1960년대 이후 북한 내부에서 조선화의 방향이 '채색화'로 집중되면서 위상이 약화되었고, 《조선미술》에 〈채색화 기법〉을 연재했다.
정지용, 이태준과 함께 광복 전·후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대안 파동 당시 미 군정과 충돌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임시 학장이 되었다가 어쩔 수 없이 월북하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성혜랑은 2000년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김용준이 1967년 자살했다고 기록했다.[21] 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았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려 처벌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김용준은 1904년 경상북도 선산(현재의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화가 이종우에게서 그림을 배웠다.[1][4]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건설이냐? 파괴냐?〉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화단에 등장했다.2. 2. 일본 유학과 귀국 후 활동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류했다.[3]1928년 귀국 후 서울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길진섭과 함께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1] 1930년대에는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고 미술 단체를 결성했다. 1930년 4월, 도쿄 미술학교 출신 한국인 동문들로 구성된 동미회(東美會)의 단체전인 동미전(東美展)에 참여했다. 이 전시는 한국 미술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하기 위해 현대 미술의 모든 측면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5]
1930년 12월, 도쿄에서 길진섭, 구본웅(1906–1952), 이마동(1906–1980), 김응진(1907–1977)과 함께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결성했고, 1934년에는 목일회(牧日會)를 결성하여 서양 모더니즘과 한국화 전통을 융합, 지역적이고 '진정한 한국적' 유화 스타일을 만들려고 시도했다.[6][7]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연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주최하는 연례 전시회인 서화협회전(書畵協會展, 1921–1936)에 참여했다.
김용준은 ''동아일보'' 등 잡지와 신문에 사설과 에세이를 자주 기고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글은 한국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당시 프롤레타리아 예술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초기에 그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지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8] 김용준은 혁명적인 예술과 관습적인 부르주아 아카데미즘을 넘어선 예술적 표현의 필요성을 믿었지만, 예술이 혁명을 달성하는 도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지를 강조했다.[9] 현대 한국(조선) 미술을 찾기 위한 그의 평생에 걸친 탐구는 민족주의적 정치적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지와도 일치했다.[5]
2. 3. 미술사 연구와 평론 활동
김용준은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 분야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화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13][14] 동아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1920년대 후반부터 한국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 예술 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8] 그는 혁명적인 예술과 관습적인 부르주아 아카데미즘을 넘어선 예술적 표현의 필요성을 믿었지만, 예술이 혁명을 달성하는 도구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지를 강조했다.[9]1948년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했다.[20] 1949년 한국 미술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조선미술대요》를 출판했다. 《조선미술대요》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 미술사를 다루었으며, 다양한 사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 저자가 쓴 한국 미술사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이고 학술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고 있다.[20]
2. 4. 광복 후 교수 활동과 월북
광복 후 김용준은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사학 교육에 힘썼다.[17] 1948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용준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임시 학장을 맡았다.[18] 같은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18]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국대안 파동 당시 미 군정과 충돌했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임시 학장이 되었다가 어쩔 수 없이 월북하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21]
2. 5.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
월북 후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을 역임했다. 월북 직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을 역임했고,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가 신설된 이후 1959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5년 《단원 김홍도》, 1958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등을 집필했고, 1958년 중국 방문 후 평양 국립중앙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 《중국 방문 귀환전》을 개최했다. 북한에서 조선화 발전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19] 1960년대 이후 북한 내부에서 조선화의 방향이 '채색화'로 집중되면서 위상이 약화되었고, 《조선미술》에 <채색화 기법>을 연재했다.[21]성혜랑은 2000년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김용준이 1967년 자살했다고 기록했다.[21] 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았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려 처벌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3. 주요 저작
1948년 김용준은 짧은 에세이 모음집인 《근원수필》을 출판했으며, 1949년에는 조선 미술사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인 《조선미술대요》를 출판했다.[20] 《조선미술대요》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한국 미술사를 다루었으며, 다양한 사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 저자가 쓴 한국 미술사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이고 학술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고 있다.[20]
4. 평가
김용준은 서양화가로 출발했으나, 목일회가 해체된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화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21]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 월북했다. 월북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하고 평양미술대학 강좌장이 되는 등 북한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북한에서 그린 말년의 작품들은 조선화가 대다수이다.[21]
그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에서도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55년 《단원 김홍도》, 1958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등을 집필하며 미술사 연구에 기여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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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1970년대 북한, 그리고 ‘가장’ 곁에서 본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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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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