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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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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운성은 한국 최초로 유럽에서 유학한 화가로, 유화와 판화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3년 유럽으로 건너가 유학하며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한국적인 색채를 담아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했으며, 광복 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초대 학부장을 지냈다.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수립 후 전향했으며,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김일성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는 월북 화가로 오랫동안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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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배운성은 집안이 가난하여 부호인 백인기의 집에서 기숙하다가 1923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에 동행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유럽에서 고학으로 유화를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로 유럽 지역에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되었다. 광복 후 홍익대학교에 미술학부를 설치해 초대 학부장을 맡았으며,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지만 대한민국 수립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미술제작소 판화부를 담당하였고,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2]

배운성은 대한민국에서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 1988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사진 자료로만 일부 알려졌던 유럽 시절의 작품이 프랑스 유학생 전창곤에 의해 발굴되어 2001년 대거 소개되었다.

2. 1. 유럽 유학 시기 (1923-1940)

1923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에 동행했다. 배운성은 이를 기회로 삼아 유럽에서 고학으로 유화를 공부할 수 있었고, 한국인 최초로 유럽 지역에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대에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다가 1940년 경에 귀국했다. 배운성의 유화는 한국적인 색채가 강한 것으로 평가되어 유럽의 미술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주요 활동 분야는 판화와 유화였다. 유명한 〈가족도〉(1935)를 비롯한 채색인물화와 한국의 전통 풍습을 소재로 한 풍속화, 가상 공간 속의 인물 및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1]

2. 2. 귀국과 친일 논란 (1940-1945)

배운성이 귀국한 시점은 일제강점기 말기로, 미술계도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전시체제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에 가담하였고,[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2. 3. 광복 후 활동과 전향 (1945-1950)

홍익대학교에 미술학부를 설치해 초대 학부장을 맡았으며,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배운성의 부인은 여성 지식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이정수였는데, 배운성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 이후 북조선으로 가지 않은 좌익 출신 미술인들인 이쾌대, 정현웅, 정종여, 최재덕 등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하였고,[1] 1949년 열린 초대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때 출품한 작품은 종교적 소재를 담은 〈성호(聖護)〉였다.

2. 4. 월북과 북한에서의 활동 (1950-1978)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미술제작소 판화부를 담당하였고,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1] 북조선에서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원쑤를 반드시 갚으리라〉(1953) 등 이념성이 있는 판화, 유화, 수채화 작품을 발표했다.[2]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3. 작품 세계

배운성은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백인기의 집에서 기숙하다가, 1923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에 동행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 유화를 공부하며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대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고, 그의 유화는 한국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주요 분야는 판화와 유화였다. 대표작으로는 〈가족도〉(1935) 등이 있다.

1940년 경 귀국한 배운성은 일제강점기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홍익대학교에 미술학부를 설치해 초대 학부장을 맡았고,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부인 이정수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1], 1949년 초대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종교적 소재를 담은 〈성호(聖護)〉를 출품했다.

대한민국에서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다가 1988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언급되기 시작했다. 2001년 프랑스 유학생 전창곤에 의해 유럽 시절의 작품이 대거 발굴되어 소개되었다.

3. 1. 유럽 시기 작품

1923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의 독일 유학에 동행하면서, 배운성은 유럽에서 고학으로 유화를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이를 통해 한국인 최초로 유럽 지역에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대에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다. 배운성의 유화는 한국적인 색채가 강한 것으로 평가되어 유럽의 미술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주요 활동 분야는 판화와 유화였다. 유명한 〈가족도〉(1935)를 비롯한 채색인물화와 한국의 전통 풍습을 소재로 한 풍속화, 가상 공간 속의 인물 및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1]

3. 2. 월북 이후 작품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미술제작소 판화부를 담당하였고,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2] 북조선에서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원쑤를 반드시 갚으리라〉(1953) 등 이념성이 있는 판화, 유화, 수채화 작품을 발표했다.[2]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4. 재조명과 의의

배운성은 대한민국에서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1988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사진 자료로만 일부 알려졌던 유럽 시절의 작품이 프랑스 유학생 전창곤에 의해 발굴되어 2001년 대거 소개되었다.

참조

[1]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2] 저널 분단 50년, 월북 미술인 68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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