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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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은호는 한국 화가로, 북종화 계열의 채색화를 통해 한국 풍속화를 발전시키고, 일본화 기법을 활용한 사녀도와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일본 유학 후 일본화 양식을 수용하여, 아름다운 여성을 묘사하거나 왕실 인물 초상화를 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향로〉, 〈미인승무도〉, 〈금차봉납도〉 등이 있으며, 1919년 3·1 운동 참여 후 일본 유학을 거쳐 친일 행위로 비판받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김은호는 또한 김기창을 배출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활동하며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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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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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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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은호 |
아명 | 김양은 |
일본식 이름 | 쓰루야마 마사시노기 (鶴山殷鎬) |
아호 | 이당 (以堂) |
인물 정보 | |
출생 | 1892년 6월 24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인천군 |
사망 | 1979년 2월 7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직업 | 동양화가, 한국화가, 대학교수 |
분야 | 동양화, 한국화 |
소속 | 前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
학력 | |
교육 |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 졸업 |
기타 정보 | |
대표적인 제자 | 운보 김기창 |
2. 작품 및 화풍
김은호는 한국 화가로는 드물게 북종화 계통의 화가로서, 채색화를 통해 한국의 풍속화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중국 명나라의 구영이나 일본의 우키요에와 비견될 만한 사녀도(仕女圖) 형식의 한국적 화풍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0] 산수, 인물, 화조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쳤으며, 재래 도화서풍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10]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하면서 한국에서 전문 화가로 자리매김했다.[4]
2. 1. 초기 화풍
김은호는 1912년 20세의 나이로 경성서화미술원에 입학했다. 경성서화미술원은 1911년 윤영기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안중식, 조석진 등 당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세대의 한국 화가들에게 수묵화와 서예를 가르쳤다.[1] 김은호는 이곳에서 1913년 안중식으로부터 '이당'이라는 아호를 받았다.[1] 경성서화미술원에서 수학한 것은 김은호가 수묵화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2. 2. 일본 유학 이후의 화풍 변화
김은호는 경성서화미술원을 졸업한 후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도쿄 미술학교에 다녔다.[2] 당시 도쿄 미술학교는 동아시아에서 서양화 스타일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유일한 기관이었으며, 중국, 한국, 대만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김은호는 일본화 스타일을 익혔다. 일본화는 일본에 서양식 '요가'가 유입되면서 발전한 새로운 수묵화 스타일을 의미한다.김은호는 일본 화풍인 일본화 양식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서양화나 요가와 차별성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화 기법을 따라 아름다운 여성을 공정하고 우아하게 묘사하며, 보는 이와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자녀를 기르거나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은 오리엔탈리즘에 따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적인 기대를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섬세한 붓놀림과 정교한 무늬를 보여주는 초상화로도 유명했다.[4] 그는 주로 비단이나 종이와 같은 재료에 먹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화가였다. 그의 그림 중 많은 작품이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다루어졌지만, 불교와 자연과 관련된 작품도 많이 그렸다.
2. 3. 초상화
김은호는 초상화 전문가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그릴 기회를 자주 얻었다.[4] 특히 순종 황제(1874-1926)의 초상화를 1912년, 1923년, 그리고 1923년부터 1928년 사이에 세 점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초상화들은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 대신 황제의 사진을 참고하여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7]고종의 손자인 이우(1912–1945)는 1917년 운현궁의 후사로 지명되었는데, 김은호는 이우가 공식 궁정 복장을 하고 금관을 쓴 사진을 참고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7]
2. 4. 대표작
- 1922년 - 〈미인승무도〉: 두 명의 아름다운 비구니가 불교 무용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1]
- 1923년 - 〈응시〉: '모던 걸' 또는 '신여성'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얇고 짧은 한복을 입고 짧은 단발 머리를 한 여성을 묘사했다.[8]
- 1927년 - 〈교외의 봄〉: 어머니와 두 자녀의 행복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센텐 회화의 예시이다.[9]
- 1927년 - 〈오늘의 운세를 읽는 여인〉: 한복을 입은 여인이 운세를 읽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5]
- 1937년 - 〈금차봉납도〉: 애국부인회 지도자들이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금비녀를 헌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품이다.[6]
- 1944년 - 〈화합〉: 노래하는 딸,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아들, 그리고 그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를 통해 행복하고 조화로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다.[6]
- 1944년 - 〈매〉: 거친 해안선 바위 꼭대기에 매달린 매를 그린 그림으로, 전투기 조종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9]
3. 항일과 친일 논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으나,[11] 1920년대 후반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광복 후 뚜렷한 친일 경력으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후소회를 통해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어 미술계 중심으로 복귀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12][13]
3. 1. 친일 논란과 관련된 비판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김은호를 선정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4]김은호는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11]하는 등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과 일본풍 화풍 때문에,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14] 일부 평론가와 미술사학자들은 김은호가 일본 정부의 규칙을 준수하며, 그림을 통해 일본의 의제를 재현한 화가였다고 비판한다.[6]
4. 후진 양성 및 영향
김은호는 일본에서 외국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일본화(니혼가) 화가 중 한 명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유명한 예술가이자 교사로 자리 잡았다. 운보라는 아호로 활동한 김기창(1913-2001)은 1930년대 김은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5] 그는 김은호에게 서예, 수묵화, 특히 일본화(니혼가) 화풍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다.
5.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의 관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은호는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수년간 연속으로 입선했다.[4]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 정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전람회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미술계를 통제하고 특정 주제와 부문을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홍보하는 방식이었다. 전람회는 세 개의 하위 부문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동양화' 부문으로 일본의 남화와 일본화 양식을 사용하여 그린 공식적으로 인정된 동양화였다. 다른 하나는 서양화와 조각 부문으로 일본 아카데미즘 양식의 회화가 포함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서예 부문은 나중에 공예로 개편되었다.[4]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이 입선하고 전시된 작가들은 한국에서 전문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김은호는 이 전람회를 통해 한국에서 알려진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김은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참가자'로 인정받은 한국 화가 3인 중 한 명이었다.[6] 이는 김은호가 당시의 저명한 예술가였음을 나타내지만, 일부 평론가와 미술사학자들은 김은호가 일본 정부의 규칙을 준수하며, 그림을 통해 일본의 의제를 재현한 화가였다고 주장한다.[6]
6. 학력
- 경기도 인천일어학교 졸업
- 경기도 인천 인흥측량기술학교 졸업
-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 졸업
-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 졸업[2]
참조
[1]
서적
Interpreting Modernism in Korean Art: Fluidity and Fragmentation
ROUTLEDGE
[2]
학술지
Modern art in late Colonial Korea: A research experiment
https://modernismmod[...]
2018-01-01
[3]
뉴스
[오늘의 인천소사] 친일화가 이당 김은호 기념관 개관
https://www.incheont[...]
2024-10-13
[4]
서적
A Companion to Korean Art
John Wiley & Sons, Inc.
[5]
서적
Korean Art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Present
Reaktion Books
[6]
서적
Gender and Power in the Japanese Visual Field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7]
서적
Treasures from Korea Arts and Cultures of the Joseon Dynasty, 1392 - 1910
Yale Univ. Press
[8]
서적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Korea
Hollym International Corporation
[9]
서적
Art and War in Japan and Its Empire: 1931-1960
Leiden: Brill
[10]
문서
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 동양화/김은호, 《글로벌 세계 대백과》
[11]
뉴스
“붓으로 화폭으로 진충보국하라”-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전’…미술계 거목들의 친일대표작 한자리에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4-10
[12]
서적
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04-01
[13]
뉴스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8-06-02
[14]
뉴스
친일화가 춘향영전 파문
http://jeollailbo.co[...]
전라일보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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