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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강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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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산 노강서원 강당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위치한 서원의 강당으로, 1675년 김수항의 발의로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유학 교육을 위해 건립되었다. 노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노강서원은 전학후묘의 배치와 솟을외삼문, 강당, 동·서재,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상에 둔 정연한 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1출목 3익공 양식의 공포와 겹처마 맞배지붕에 덧지붕을 갖춘 건축적 특징을 보여준다. 17세기 말 서원 건축의 시대적 양상과 기호 유교 건축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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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강서원 강당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논산 노강서원 강당
한자 표기論山 魯岡書院 講堂
지정 종류보물
지정 번호1746
지정일2011년 12월 30일
위치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
시대조선 시대
소유자노강서원
참고 자료논산 노강서원
노강서원 강당
상세 정보
면적알 수 없음
수량1동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문화재청 ID12,17460000,34

2.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노강서원은 동북쪽 노성의 호암산 자락이 길게 뻗어 형성된 나지막한 구릉을 등지고 마을 뒤편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그 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전형적인 '야거형(野居形)'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평지에 서원을 배치하여 공간적인 위계를 부여하는 방식은 주로 기호 지역의 서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서원의 공간 배치는 초입에 세워진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솟을외삼문을 만나게 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강당이 중심 건물로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 앞마당의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되어 강학 공간을 형성한다. 강당 뒤편의 높은 터에는 내삼문과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제향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교육 공간인 강학 공간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제향 공간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원칙을 따른 것이다.

또한,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 등 주요 건물이 하나의 중심 축 선상에 놓이고, 동재와 서재가 이 축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정돈되고 질서 있는 구도를 보여준다. 노강서원이 건립된 17세기 후반은 서원 건축에서 정형화된 배치가 점차 자유롭게 변화하던 시기였으나, 노강서원은 그 이전 시기의 서원들이 보여주었던 엄격한 배치 질서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내삼문의 경우 일반적인 서원에서 볼 수 있는 한 동짜리 건물이 아니라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제례 시 신(神)이 드나드는 문과 사람이 드나드는 문을 예법에 따라 엄격히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특징이다.

3. 연혁 및 건축적 특징

노강서원 강당은 충청남도 논산시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서원 건물로,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숙종 원년(1675)에 세워졌다. 이후 숙종 8년(1682)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며, 윤문거, 윤선거, 윤증 등 윤황의 후손들이 차례로 추가 배향되었다. 정쟁의 여파로 숙종 43년(1717) 현판이 철거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경종 2년(1722) 복원되었다. 특히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적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를 가지며, 충청남도 지역 서원 강당 중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건물 중앙에는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양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잘 다듬은 기단 위에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화려한 익공 양식의 공포를 짜 올렸다.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이며, 지붕 옆면 박공 아래에 달린 짧은 덧지붕은 노강서원 강당의 중요한 건축적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3. 1. 연혁

숙종 1년(1675) 김수항의 발의로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건립되었다. 숙종 8년(1682)에는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았으며, 같은 해 윤황의 아들인 윤문거를 추가 배향하였다(추향). 이후 경종 3년(1732)에는 윤선거와 그의 아들인 윤증을 추향했다.

숙종 43년(1717) 당시의 정쟁으로 인해 소론의 주요 인물이었던 윤선거·윤증 부자가 관직을 삭탈당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되었다. 경종 2년(1722) 두 사람의 관직이 회복되면서 현판도 복원되었다(복액).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노강서원은 철폐되지 않고 존속하여, 330여 년 동안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3. 2. 건축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충남 지역에 있는 서원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큰 편이다.[1] 평면은 가운데에 넓은 대청을 3칸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1칸씩 배치한 구조이다. 대청 부분의 기둥 간격(주칸)은 동일하지만, 온돌방 부분의 기둥 간격은 대청보다 조금 더 넓게 잡았다.[1] 건물 정면에는 모두 4짝으로 이루어진 굽널띠살 들문(들어 열 수 있는 문)을 달았고, 대청과 양쪽 온돌방 사이에는 앞쪽으로 2짝짜리 맹장지 들문이 나 있다.[1] 이러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맹장지 들문 형식은 소수서원(중건 1602년)이나 도동서원(이건 1605년)의 강당에서도 볼 수 있는 오래된 양식이다.[1]

구조는 잘 다듬은 긴 돌(장대석)을 여러 층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초석)을 놓고, 가운데 부분이 약간 볼록한(배흘림) 원기둥(원주)을 세웠다.[1] 기둥의 높이가 비교적 높아 기둥 부분(축부)과 지붕 부분(옥개부)의 비율이 약간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로서 위엄을 갖추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1] 덧지붕 부분은 네모난 주춧돌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1]

공포는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 무게를 받치기 위해 짜 맞춘 부재로, 1출목 3익공식으로 만들었다.[1] 첫 번째와 두 번째 익공(새 날개 모양의 부재)은 위로 향하는 형태(앙서형)로 끝을 반듯하게 잘랐고, 그 위에 각각 연꽃 봉오리와 연꽃 무늬를 새겼다. 세 번째 익공은 구름 모양(운공형)으로, 그 위에 덩굴무늬(당초)를 조각했다.[1] 대들보(보)의 머리 부분(보머리)도 아래의 구름 모양 익공처럼 조각되어 있다.[1] 출목을 받치는 첨차는 양 끝을 비스듬하게 자르고 아래쪽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연화두)으로 장식하여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1] 기둥과 기둥 사이의 화반(장식 부재)은 정면에는 조각을 넣어 화려하게 만들고, 뒷면에는 장식 없이 네모난 판재를 사용하여 실용성을 높였다.[1] 대청 위쪽의 지붕틀(가구)은 5량가 구조로, 자연스러우면서도 크고 웅장한 대들보가 건물의 위용을 더한다.[1]

지붕(옥개부)은 겹처마 맞배지붕 형태이다.[1] 지붕 옆면 삼각형 벽(박공)의 널빤지(풍판) 아래에는, 가례서에서 '영(榮)'이라고 언급된 짧은 덧지붕이 마치 눈썹처럼 달려 있다.[1] 이러한 덧지붕은 근처 돈암서원의 응도당에서도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 노강서원 강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1]

4. 지정 가치

노강서원1675년 건립 이후 한 번도 옮겨 짓지 않았으며, 대원군 집권기의 서원 훼철 당시에도 살아남은 기호 유학의 대표적인 서원 중 하나이다. 들판에 자리 잡고 있고, 교육 공간인 강당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전학후묘 형식으로 지어져 기호 지역 서원의 배치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강당 건물은 충청남도 지역 서원 강당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이러한 규모에 걸맞게 잘 다듬어진 기단과 초석을 갖추고 있으며, 장식성과 소박함이 조화를 이루는 공포 형식이 특징이다. 특히 기둥 위에는 익공 세 개를 중첩하여 쌓아 올린 1출목 3익공 양식을 적용하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맞배지붕 양옆에 덧붙여진 '영(榮)'이라는 작은 지붕은 다른 서원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귀한 시설로, 이는 비바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소 높아 보일 수 있는 건물의 외관에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또한, 팔작지붕처럼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곡선미를 조심스럽게 더해 서원 건축 특유의 검소함을 잃지 않도록 한 뛰어난 건축 기법을 엿볼 수 있다. 강당 중앙 대청과 양쪽 방 사이의 창호는 맹장지를 바른 4짝의 굽널띠살 들어열개문으로, 이는 17세기 초 건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고풍스러운 멋을 더한다.

이처럼 노강서원 강당은 기호 지역 유교 건축의 중요한 양식적 특징과 지역성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 서원 건축의 시대적 양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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