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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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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은 1953년 신익희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후 귀국했을 때,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신익희와 조소앙의 뉴델리 비밀 회동 의혹을 제기하며 시작되었다. 함상훈은 신익희가 '제3세력'과 내통하여 중립화 정권 수립을 논의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국민당은 이를 부인하고 함상훈을 제명했다. 국회 진상조사에서도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고, 사건의 배후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이 사건은 자유당에 의해 '제3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김창룡, 김준연 등이 조작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김준연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2. 진행

1953년 5월 신익희는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함상훈이 공개한 성명서에 의하면 신익희가 돌아오는 중에 북한에서 온 조소앙뉴델리에서 비밀리에 밀회, 한국을 비공산, 비자본주의 국가로 중립화하자는 문제를 협의했다는 것이다.[1]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신익희가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당초 영국을 방문하고 3월 16일에 돌아온 최두선 역시 초청하였으나 최두선은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영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6] 조병옥은 이날 저녁 민국당 간부들을 자신의 집에 소집했다. 조병옥의 집에는 민주국민당 간부급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6] 6.25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의례적으로 회식을 하였고,[6] 김준연최두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피로하다고 사절하였다.[5]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5]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는 신각휴, 송필만 등도 있었다.[5] 그러나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2. 1. 발단

1953년 5월, 신익희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은 성명서를 통해 신익희인도에서 조소앙과 비밀리에 만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1]

함상훈신익희가 귀국길에 뉴델리에서 조소앙과 만나 한국을 비공산, 비자본주의 국가로 중립화하는 문제를 협의했다고 주장했다.[1] 또한 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후 귀국하던 신익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조소앙인도 뉴델리에서 만나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2]

함상훈1954년 3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가 만났다고 추가로 주장했다. 그는 '제3세력'이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했으며, 그 일환으로 신익희조소앙뉴델리에서 만났고, 조소앙이 보낸 특사를 신익희가 만났다는 내용을 폭로했다.[2]

2. 2. 경과

민주국민당은 함상훈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부정했고[1], 내무장관 백한성함상훈을 불러 의혹 제보자를 추궁했으나, 함상훈은 구체적인 제보자를 밝히지 못했다.[3]

자유당은 이 사건을 '제3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했다.[4] 자유당은 이를 통해 당내 비주류계의 이탈을 막고 야당과의 결탁을 견제했으며, '중립화반대협상배격결의안'을 통과시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4]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신익희조소앙의 만남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고,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되었다. 조병옥김준연 등은 함상훈을 두둔했으나 출당을 막지는 못했다.

2. 3. 사건 이후

영구 집권 개헌 구실로 이용된 뉴델리 밀회 사건의 배후 조작 여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4] 항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모 의원이 조작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4]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 역시 밀회 조작 사건의 배후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하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라고 말한 것이 의혹의 원인이었다.[5]

김준연은 훗날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5] 김준연은 각 신문사 인터뷰, 정계야화 편집 시에도 자신이 억울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3. 주요 관련자

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역할과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인물역할 및 입장
신익희민주국민당 위원장.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후 귀국길에 조소앙과 밀회했다는 의혹을 받음.
조소앙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던 정치인. 신익희와의 밀회 의혹을 받았으나, 실제 만남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함상훈민주국민당 선전부장. 신익희조소앙의 밀회 의혹을 폭로. 증거 불충분으로 민주국민당에서 제명됨.
김창룡당시 특무대장. 뉴델리 밀회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 중 하나.[4]
김준연민주국민당 출신. 밀회 조작 사건을 날조한 인물로 의심받았으나, 자신은 억울하다며 부인함.
조병옥민주국민당 간부. 신익희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며, 당내 간부 회의에서 이를 주장함.



자유당은 이 사건을 크게 문제시하여 제3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하였다.[4] 자유당은 이 공포심을 이용하여 당내 비주류계의 이탈을 막고, 그들이 야당인 민주국민당과 결탁하지 못하도록 견제했으며, 11월에는 '국가안전에 관한 중대사항은 국민투표로서 결정한다'는 조항과 함께 '중립화반대협상배격결의안'을 통과시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4]

3. 1. 신익희

1953년 5월 신익희는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인도에서 조소앙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의혹은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를 통해 공개되었는데, 함상훈민주국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1]

함상훈의 성명서에 따르면, 신익희는 귀국 도중 북한에서 온 조소앙뉴델리에서 비밀리에 만나 한국을 비공산, 비자본주의 국가로 중립화하는 문제를 협의했다고 한다.[1] 함상훈신익희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참석 후 귀국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조소앙인도 뉴델리에서 만나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2]

함상훈1954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 민국당 위원장이 만났다고도 주장했다. 즉, '제3세력'이 민국당 위원장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했고, 그 일환으로 신익희와 조소앙뉴델리에서 만났으며, 조소앙이 보낸 특사를 신익희가 만났다는 것이다.[2]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 간부들을 소집하여 신익희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했다. 영국 방문 후 같은 날 귀국한 최두선도 초청했으나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

1954년 3월 16일 당시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영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6] 조병옥은 이날 저녁 민국당 간부들을 소집했고, 조병옥의 집에 민주국민당 간부급 인사들이 모였다.[6] 6.25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의례적으로 회식을 하였고,[6] 1954년 3월 16일에도 회식을 하였다.[5] 김준연최두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피로하다고 사절하였다.[5]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주장했다.[5]

그 자리에는 신각휴, 송필만 등도 있었다.[5]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3. 2. 조소앙

조소앙은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던 정치인이었다. 신익희와의 밀회 의혹을 받았으나, 실제 만남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1] 함상훈신익희1953년 5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조소앙인도 뉴델리에서 만나 남북협상 문제를 밀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2] 함상훈1954년 3월에는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가 만났다고도 주장하였다.[2]

3. 3. 함상훈

민주국민당 선전부장이었던 함상훈1953년 5월 신익희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참석 후 귀국하는 길에 인도 뉴델리에서 조소앙과 만나 한국을 비공산, 비자본주의 국가로 중립화하는 문제를 협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1] 1954년 3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조소앙의 밀사 오경심을 신익희가 만났다고 주장하며, '제3세력'이 신익희와 내통하여 김일성이승만 정권을 배제한 중립화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것이다.[2]

민주국민당은 이 의혹을 적극 부정했고,[1] 내무장관 백한성함상훈을 추궁했으나, 함상훈은 제보자를 밝히지 못했다.[3]

대한민국 국회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 함상훈신익희조소앙의 밀회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민주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조병옥김준연 등은 함상훈을 두둔했으나 출당을 막지는 못했다.

3. 4. 김창룡

당시 특무대장이었던 김창룡은 뉴델리 밀회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4]

3. 5. 김준연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은 밀회 조작 사건을 날조한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5]'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김준연은 후일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5]'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김준연은 각 신문사와의 인터뷰, 정계야화 편집 시에도 자신은 억울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 간부들을 소집했고, 신익희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당초 영국을 방문하고 3월 16일에 돌아온 최두선 역시 초청하였으나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영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6] 조병옥은 이날 저녁 민국당 간부들을 소집했다. 조병옥의 집에는 민주국민당 간부급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6] 6.25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의례적으로 회식을 하였고,[6] 1954년 3월 16일에도 회식을 하였다.[5] 김준연최두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피로하다고 사절하였다.[5]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는 신각휴, 송필만 등도 있었다.[5]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3. 6. 조병옥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는 신익희가 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영국을 방문하고 3월 16일에 돌아온 최두선 역시 초청하였으나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6]

같은 날 저녁 조병옥의 집에서 민주국민당 간부급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6] 한국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의례적으로 회식을 하였고,[6] 1954년 3월 16일에도 회식을 하였다.[5]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서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5]

내 판단에 의하면 신익희씨가 인도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난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한국어

그 자리에는 신각휴, 송필만 등도 있었다.[5]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4. 사건의 영향 및 평가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 개헌 구실로 이용되었으나, 누가 조작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4] 항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모 의원이 꾸민 조작이라는 말이 있었다.[4]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 역시 밀회 조작 사건을 날조한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5]

김준연은 후일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김준연은 각 신문사 인터뷰, 정계야화 편집 시에도 이 말을 반복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5]

4. 1. 정치적 영향

자유당은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아 제3세력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했다.[4] 자유당은 이 공포심을 이용하여 당내 비주류계의 이탈을 막고, 그들이 야당인 민주국민당과 결탁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4] 이어 11월에는 '국가안전에 관한 중대사항은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조항과 함께 '중립화반대협상배격결의안'을 통과시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4]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 개헌 구실로 이용되었는데, 누가 조작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4] 항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모 의원이 꾸민 조작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4] 한편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 역시 밀회 조작 사건을 날조한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5]'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

김준연은 후일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5]'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4. 2.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 구실로 이용되었지만, 누가 조작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4] 항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모 의원이 꾸민 조작이라는 말이 있었다.[4]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 역시 조작 사건의 배후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하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5]고 말한 것이 의심을 받게 된 이유였다.

김준연은 훗날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5]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각 신문사 인터뷰와 정계야화 편집 시에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4. 3. 역사적 평가

진보 진영에서는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을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 공작 사건으로 평가하며, 권력 유지를 위해 야당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례로 비판한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북한과의 내통 가능성을 경계해야 할 사례로 간주하기도 한다.[4] 항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모 의원이 꾸민 조작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4]

민주국민당 출신 김준연 역시 밀회 조작 사건을 날조한 인물로 의심받았다.[5] 그러나 김준연1954년 3월 조병옥의 발언에 동조,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말한 것이 원인이었다.[5] 김준연은 후일 '이 사실을 내가 조작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조작한 것은 아니고 그 때에 그런 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을 잘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5. 기타

1954년 3월 16일 저녁, 조병옥의 집에서 민주국민당 간부들의 회식이 있었다. 신각휴, 송필만 등이 참석했다.[5]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모종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조병옥이 신익희뉴델리 밀회 의혹을 강하게 주장하여 다른 이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5. 1. 조병옥의 확신

1954년 3월 16일 조병옥신익희최두선을 제외한 민주국민당 간부들을 소집했다.[5] 조병옥신익희조소앙을 만났다고 확신하였다. 당초 영국을 방문하고 같은 날 돌아온 최두선도 초청했으나, 최두선은 피로를 이유로 거절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영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했다.[6] 조병옥은 이날 저녁 민국당 간부들을 자기 집에 소집했다. 6.25 전쟁 중 부산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조병옥의 집에 모여 의례적으로 회식을 하였고,[6] 1954년 3월 16일에도 회식을 하였다.[5] 김준연최두선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피로하다고 사절하였다.[5] 조병옥은 서랍에서 한 장의 도표를 꺼내 설명하며 신익희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조병옥신익희인도 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5]

그 자리에는 신각휴, 송필만 등도 있었다.[5] 민주국민당 내에서는 함상훈이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조병옥 역시 신익희뉴델리에서 조소앙을 만났다고 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5. 2. 최두선의 불참

1954년 3월 16일, 영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동아일보사 사장 최두선조병옥이 소집한 민주국민당 간부 회의에 피로를 이유로 불참했다.[5][6]

참조

[1] 서적 송건호 전집 07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6
[2] 간행물 역사비평:1995년 여름 역사비평사 1995
[3] 문서
[4] 서적 송건호 전집 07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6
[5]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6
[6] 서적 나의 길 동아출판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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