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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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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헌병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 내 좌익 숙청, 각종 정치 사건 조작, 김구 암살 배후 의혹 등에 연루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헌병 보조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조직 색출에 기여했고,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탈출하여 육군에 입대, 숙군 사업을 주도하며 반공 투사로 부상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특무부대장을 역임하며 이승만의 신임을 받았으나, 권력 남용과 각종 사건 조작 의혹으로 비판을 받았다. 1956년 암살당했으며, 친일 행적과 논란으로 인해 묘소 훼손 등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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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창룡
한자金昌龍
로마자 표기Gim Changryong
일본어 표기キム・チャンニョン
출생일1920년 7월 18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사망일1956년 1월 30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1가
사망 원인총격 암살
묘소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69호
본관수안(遂安)
옥도(玉島)
종교불교
거주지서울
배우자도상원(都相媛)
자녀장녀 김미원(金美元)
아들 김경진(金慶震)
차녀 김미경(金美敬)
삼녀 김미영(金美英)
군사 경력
소속관동군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중장 (추증)
복무 기간1941년 ~ 1956년
참전태평양 전쟁
여순 사건
한국 전쟁
군 복무관동군 헌병 오장
대한민국 육군 소장
지휘육군 특무부대장
근무육군 특무부대
정치 및 직책
직책국방부 특무부대장
임기1952년 11월 23일 ~ 1956년 1월 30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함태영
국무총리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국무총리
백한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국방부 장관신태영 국방부 장관
손원일 국방부 장관
국방부 차관이호 국방부 차관
장건식 국방부 차관 직무대리
김용우 국방부 차관
기타
별명뱀 김(Snake Kim)

2. 생애

일제 강점기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서 항일독립군을 추격하고 체포했던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여 여순 사건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육군 특무부대장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각종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 권력 남용과 비리를 일삼은 대표적인 정치군인으로 평가받는다.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으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이름이 올라 있다.

1920년 함경남도 영흥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으로 활동하며 항일 조직 색출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특진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친일파로 지목되어 북한에서 두 차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여 월남했다. 1946년 5월 서울에 도착하여 우여곡절 끝에 조선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 1947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정보 분야에서 활동하며 군 내 좌익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남로당 핵심 인물들을 검거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48년 여순 사건 당시에는 박정희 소령을 직접 수사하기도 했다. 숙군 활동과 김삼용, 이주하 등 거물급 남로당 간부 체포 등의 공로로 빠르게 진급했다.

1949년 김구 암살 사건 당시, 범인 안두희의 소속 부대장이었으며 사건 이후 안두희를 비호하고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는 등 배후 은폐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특무부대장 등을 역임하며 부역자 색출과 공산 세력 소탕을 명분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의 비호 아래 특무부대장으로서 군 내외의 정적 제거와 정치 공작에 앞장섰다. '동해안 반란 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등 수많은 용공 사건 및 간첩 사건을 조작하거나 과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활동으로 군 내외에 많은 적을 만들었으며, 특히 군 수뇌부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그의 무자비함과 권력 남용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뱀 김'(Snake Kim영어)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고속 승진했으나, 이는 군 내부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강문봉 중장 등이 사주한 허태영 대령 일당에게 저격당해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당일 중장으로 추서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나, 친일 행적과 인권 탄압 논란으로 인해 국립묘지 안장 자격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13][14]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인상리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3]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에 영흥농잠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중국어를 배우고 2년 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영흥의 가타쿠라 제사 공장(片倉製糸工場)에서 2년간 일했으며, 이후 사장의 추천을 받아 만주국 신경(新京)역 직원으로 2년간 근무했다.

이후 일본인의 소개로 북지(北支) 일본군 헌병 부대 군속(軍屬)이 되었다.[3] 헌병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군속이 아닌 실제 헌병이 되기를 원하게 되었다.[3]

1941년 4월, 만주국 신경의 헌병교습소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후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주로 조선중국의 항일 조직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10월, 중지군(中支軍) 감박(甘粕) 사단 파견 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련-만주 국경 부근에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중국공산당과 소련 관련 첩보 활동에 종사하며 일본 사복헌병으로서 정탐 활동을 벌였다.

1943년에는 흥안북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한 지하 조직 색출 활동 중,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王近禮)를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었다. 관동군 헌병대는 왕근례를 이용한 역공작을 통해 소만 국경 부근에서 활동하던 9개의 지하 조직을 추가로 색출하고 50여 명의 조직원을 체포했다. 김창룡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군 오장(伍長, 대한민국 국군하사에 해당)으로 특진했다. 1943년 9월에는 만주리(満州里) 헌병대와 면도하(免渡河) 헌병대 분견을 겸임했다. 해방 전 2년 동안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50건이 넘는 항일 조직을 적발하는 등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2. 2. 해방 이후 ~ 한국 전쟁 이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으로 돌아왔으나, 소련군 점령 하에서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 출신이라는 이유로 치안대에 구금되었다. 이후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두 차례나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극적으로 탈출하여 1945년38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월남했다.[3]

1946년 5월 서울에 도착한 김창룡은 일본군 시절 알고 지내던 원용덕(元容德)의 부관이었던 박기병(朴基丙) 소위를 만나 그의 추천으로 제5연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연대 부관 백남권(白南權) 소위가 일본군 헌병 출신은 장교가 될 수 없다며 불합격시켰다.[2] 이에 김창룡은 제5연대를 무단 이탈하여 제3연대에 있던 박기병 대위를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제3연대에 재입대했다.[4] 제3연대에서 정보 하사관으로 근무하며 연대장 김백일(金白一) 등 상관들의 신임을 얻었고, 김백일 연대장의 추천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4]

1947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군번 10579번)로 임관하여 제1연대 정보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일제 강점기 헌병 보조원으로 항일 조직을 색출했던 경험을 살려 정보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 촬영 사실을 적발하여 추방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경찰과 헌병 출신자들로 정보소대를 편성하여 연대 내외의 사상 검열을 담당하며 본격적인 숙군(肅軍)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북한에서의 경험으로 확고한 반공주의자가 된 김창룡은 군 내부의 좌익 세력 색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남로당 간부 이재복, 이중업, 그리고 남로당의 거물로 평가받던 김삼룡, 이주하 등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송호성 등 군 내부 인사들이 좌익과 연계되었다고 주장하며 숙군 작업을 주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에게 용공(容共) 혐의로 지목된 장교들은 송호성처럼 광복군 출신이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 많았다는 비판적 분석도 있다.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제3과 특별조사과)로 보직되었다. 정보국에서 김안일(金安一) 소령과 함께 숙군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10월 발생한 여수·순천 사건 진압과 관련자 색출 및 처벌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군사 총책 혐의를 받던 박정희 소령을 직접 체포하고 심문했으나,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 등 군 수뇌부의 요청에 따라 박정희의 구명에 관여하기도 했다.[10] 이러한 숙군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령으로 특진했다. 한편, 1948년 가을경 민간인을 고문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을 일으켰으나,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으로 위자료를 지급하고 사건을 무마할 수 있었다.

숙군 활동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으며, 1949년 10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경무대로 불려가 격려를 받고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받는 등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김창룡은 2주에 한 번꼴로 비밀리에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직접 중요 정보를 보고하며 권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49년 1월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26일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암살범 안두희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 포병 소위였기 때문에 김창룡은 사건의 배후로 강력하게 의심받았다. 그는 범행 당일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송하여 특별히 관리했으며, 이후 안두희의 감형과 군 복귀, 예비역 편입 후까지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는 등 사건 은폐 및 축소에 깊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다수 지적된다.

1949년 7월 14일에는 특별정보대(Special Intelligence Service, SIS) 대장(소령)이 되었다.[5] 그러나 같은 해 10월, 부하 도진희(都晉熙) 이등중사가 연루된 민간인 사망 사건(서울 동대문 민보단 단장 사망 사건)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공군본부로 좌천되었다.

2. 3. 한국 전쟁 시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 5월 서울에 도착한 김창룡은 육군 정보 부서(G-2)에 배치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군 내부의 부패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남조선로동당의 핵심 인물인 김삼용과 이주하를 체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군 장악을 정권 유지의 핵심으로 보았고, 김창룡을 군 내부의 반대 세력을 제거할 적임자로 여겼다. 김창룡은 미국 육군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CIC(방첩대) 창설에 관여했으며, 이를 통해 수천 명에 달하는 북한 스파이 혐의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의 무자비함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뱀 김'(Snake Kim)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49년 7월까지 약 5,000명의 군인과 장교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할 때는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활동했으며, 1·4 후퇴 이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직을 이어갔다. 당시 31세였던 김창룡은 수사권을 독점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를 갖춘 권력 실세였다.

전쟁 이후에도 김창룡은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아래 제1공화국 시기 여러 공안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용공 사건 및 간첩 사건 대부분은 훗날 조작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 1950년 남로당 이강국의 연인으로 지목된 김수임을 체포하여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이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

2. 4. 한국 전쟁 이후 ~ 사망

한국 전쟁 중 서울 수복 직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 탐문,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하게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재직하며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각종 정치 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의 계기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을 꾸미는 등 용공조작을 일삼았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 역시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외에도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비슷한 성격의 사건으로 평가된다.

김창룡은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까지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혁혁한 전공과 실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으나, 자신보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은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 척결과 수사기관 간 갈등 해결을 지시했다. 하지만 공국진은 임무 수행 과정에서 직무 한계를 넘어서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김창룡은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시도했고, 경무대의 의중을 등에 업은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조차 자신이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막지 못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 군단장의 제2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마저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는 월권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이나 유학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했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를 집중 수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는 결국 정일권과 강문봉이 김창룡 암살을 음모하고 교사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정일권에게는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각각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특무대를 이끌며 군 내 좌익 세력을 솎아내는 숙군 작업을 주도하고, 일제 헌병 시절 배운 공작 기법과 고문 수법을 동원해 수많은 조작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는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미국 육군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CIC(방첩대)를 설립하여 수천 명의 북한 스파이 의심자를 체포하고 심문하기도 했다. 그의 무자비함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뱀 김"(Snake Kimeng)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49년 7월까지 약 5,000명의 군인과 장교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953년 준장으로, 1955년 소장으로 빠르게 승진했지만, 이는 동료들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또한 한국 전쟁 중 형성된 최전선 장교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해 동료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이미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원효로 1가 자택 근처에서 차량으로 길을 막고 있던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범인들은 군복 차림이었으며 번호판 없는 지프차를 타고 도주했다. 사건 직후 빈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범인 체포를 명령했다. 특무대는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경찰, 헌병총사령부 등과 공조하여 수사를 벌였으나 초기에는 난항을 겪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치러진 후에도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전국 특무부대장 회의와 부대원 인사기록카드 조사 끝에 전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잠복과 감시 끝에 2월 23일 허태영이 체포되었다. 이후 도피했던 공범 신초식, 송용고, 운전사 이유회 등과 사건 관련자들(허병익 중위, 이진용 대령, 안정수 소령, 도진희 민의원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다.[1]

이승만은 김창룡 암살 소식을 듣고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가 유해를 확인한 뒤, 당일 그를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애도를 표하고 조속한 범인 체포를 엄명했으며, 군은 전국 비상경계망을 펴고 전군 장병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일 전군 부대에 조기가 게양되었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곡과 음주가 금지되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낼 것을 약속하며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했다.[12]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69호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친일 행적과 인권 탄압 논란으로 인해 국립묘지 안장 자격에 대한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13][14]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김창룡의 묘비명은 역사학자 이병도가 작성했는데,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비문에는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업적'도 기록되어 있으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15]

암살범으로 체포된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의 전횡과 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에 강문봉 등 다른 인물이 있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으며, 정확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강문봉을 포함한 6명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강문봉 등 2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나머지 4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1] 김창룡 암살 사건은 이승만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군부 내 경쟁 구도가 극단적인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3. 논란과 의혹

일제강점기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항일 독립군을 추격하고 체포했던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로 비판받는다.[15]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깊은 신임을 바탕으로 육군 특무부대장 등 군 정보기관의 핵심 요직을 거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여순 사건 진압과 숙군 작업을 주도하며 군 내 좌익 및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고,[10] 수많은 정치 공작과 사건 조작, 월권 행위를 통해 제1공화국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25 전쟁 중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부역 혐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원성을 사기도 했다.

특히 1949년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여러 중대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16] 또한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5]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그는 당대부터 많은 비판과 원한을 샀으며, 그의 암살 배경에도 이러한 전횡과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의 행적과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7]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그의 묘 이장 문제가 거론되기도 한다.

3. 1. 김구 암살 배후 의혹

1949년 1월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10] 그해 6월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었다. 암살범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였으므로, 김창룡은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았다. 김구가 암살될 당시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으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제공한 사실이 있다. 이로 인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역시 다수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김창룡은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특히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암살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의심받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 등의 입을 막기 위해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만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당시 계급이 소령에 불과했던 김창룡이 단독으로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김창룡은 사건 전체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라고 평가했다.[16] 김창룡은 이러한 의혹과 그의 과거 행적들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그를 전범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후일 암살범 안두희가 김창룡을 배후로 지목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러한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다. 김구 관련 단체 등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김창룡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이장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창룡의 김구 암살 연루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김창룡이 암살 이후 안두희를 도운 정황은 있으나, 실제 암살 작전의 책임자는 당시 포병사령관이었던 장은산 중령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장은산은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7월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1949년 김구 암살 당시 김창룡은 상대적으로 하급 장교였기 때문에, 단독으로 암살과 같은 중대한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할 만한 위치나 권한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3. 2. 각종 사건 조작 의혹

일제강점기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을 추격하고 체포했던 김창룡은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 특무부대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아래 여러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에 관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6.25 전쟁 중 서울 수복 직후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가혹 행위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특무대장으로 재직하며 김창룡은 여러 정치 사건을 조작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대표적인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동해안 반란사건: 제1군단이 연루된 사건으로,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이승만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을 조작하여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자신의 공적을 위해 육사 졸업식에서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고 진술했다.
  •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를 제공한 사건으로, 공비 출현을 가장하여 계엄령 선포의 명분을 만들었다는 의혹이 있다.
  • 정국은 국제간첩 사건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검거한 사건이지만, 당시 이범석이 이끌던 족청계를 숙청하기 위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1955년): 한국 전쟁 중 월북한 조소앙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내용의 사건으로, 이 역시 조작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김창룡은 출세욕과 자기 과시욕이 강했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까지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공공연히 무시하며 군 내부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김창룡 암살에 가담한 한 장성은 "그대로 두었다면 그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죄를 뒤집어씌워 도태시킬 기세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상관과 부하를 무자비하게 중상하고, 군 장성 간의 이간질을 획책하며 군의 단결을 해쳤기 때문에 제거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승만 정권 시대의 군 수뇌부였던 백선엽, 이형근 등은 김창룡이 실수는 있었지만 국가 안보에 기여한 공로도 크다고 평가했다. 백선엽은 숙군 작업을 통해 전쟁 전 군 내 좌익 세력을 제거한 것이 한국 전쟁 중 집단 투항 사례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이형근 역시 김창룡의 청렴함과 업무 능력, 특히 반공 분야에서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김창룡은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도 받는다.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언론 인터뷰에서 김창룡을 배후로 지목했으나, 이후 진술을 번복했다. 또한 김종필은 보도연맹 사건 당시 김창룡이 학살 명령을 내린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증언했다.

3. 3. 권력 남용 및 월권 행위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김창룡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이 권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정치공작과 사건 조작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월권 행위와 비리를 저질렀다.

한국 전쟁 중 서울 수복 직후에는 군·검찰·경찰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서울 잔류 시민들의 부역 혐의를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 혐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재직하면서 '동해안 반란사건', '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 등 여러 정치 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위장사건’ 역시 그가 꾸민 용공조작 사건 중 하나였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은 당시 족청계를 이끌던 이범석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이나, 1955년 한국 전쟁 중 월북한 조소앙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한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역시 비슷한 성격의 조작 사건으로 여겨진다.

김창룡의 권력 남용은 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까지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상관인 강문봉 중장 등을 공공연히 무시하며 감정적인 대립을 만들었다. 심지어 당시 대표적인 반공 검사로 알려진 오제도마저 용공 혐의로 몰아 제거하려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가 권력 유지와 확대를 위해 얼마나 무리한 방법을 동원했는지 보여준다.[11]

1954년 5월,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군 내부 부패 척결과 수사기관 간 갈등 해소를 위해 자신과 가까운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공국진은 직무 수행 과정에서 김창룡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김창룡은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조작하여 그를 해임시키려 했다. 결국 정일권 참모총장마저 김창룡의 압력에 굴복하여 공국진의 해임을 명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제2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과정에서도 김창룡은 이를 방해했다. 심지어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는 월권 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정일권강문봉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던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이나 유학을 건의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김창룡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했다. 김창룡은 정일권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맞섰고, 이는 결국 정일권강문봉이 김창룡 암살을 모의하고 교사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졌다. 주목할 점은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김창룡은 남조선로동당의 핵심 인물인 김삼용과 이주하를 체포하면서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이승만은 군에 대한 완전한 통제가 정권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김창룡을 군 내부를 장악하고 잠재적 위협 세력을 제거할 이상적인 인물로 보았다. 김창룡 자신은 일본군 복무 경력 때문에 대중적 지지 기반이 약해 이승만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등에 업은 김창룡은 수사 과정에서 거침이 없었고, 부패나 반정부 활동에 연루된 많은 군 장교들의 원한을 샀다. 그는 미국 육군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CIC(방첩대)를 창설하고 수천 명의 북한 스파이 혐의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의 무자비함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그를 "뱀 김(Snake Kim)"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49년 7월까지 약 5,000명의 군인과 장교가 숙군 과정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김창룡은 출세욕과 과시욕이 매우 강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오른쪽 눈 밑의 흉터와 함께 풍기는 어두운 인상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그에게 잘못 보이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김창룡 암살 사건에 연루된 허태영은 김창룡의 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김 중장 살해를 결심한 것은 지난해(1955년) 10월 중순부터이며,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 김 중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상관과 부하를 무자비하게 중상했다.

# 조병폐 사건 등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또 대통령의 관심을 사기 위해 육사 졸업식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 군 장성(장관)들의 이간질을 획책하거나 군의 단결을 흩뜨리고 있으므로, 육군의 미래는 물론 국가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거를 결심했다.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한 장군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그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비록 건군의 원훈이며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켜낸 원동력이 된 장군이었다 하더라도, 어떤 구실로든 죄를 뒤집어씌워 도태될지도 모를 기세였다. 그의 권세는 따라올 자가 없었고, 이대로 가면 김창룡의 군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예감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면, 백선엽, 이형근 등 당시 군 수뇌부 인사들은 김창룡에게 과오가 많았지만 국가 안보에 기여한 공로 또한 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백선엽은 책임자로서 숙군에 종사했고, 한국 전쟁에서 집단적으로 투항한 사례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전쟁 전에 군 내 좌익을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해안 반란 사건에서 대립했던 이형근도 김창룡의 청렴한 사생활과 온힘을 다한 업무 태도와 실적을 높이 평가하며, “반공에 관한 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려 했지만, 자신이 요직에 오르자 자신에게 극히 겸손해졌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암살의 배후에 김창룡이 있다고 고백했지만, 이후 진술을 번복했다. 김종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창룡이 보도연맹 사건 당시 학살 명령을 내린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증언했다.

3. 4. 민간인 학살 연루 의혹

역사학자 이병도가 쓴 김창룡의 묘비 비명에는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15]

또한, 김종필국민보도연맹원 및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 처형 사건인 보도연맹 사건을 명령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김창룡을 지목하기도 했다.

4. 평가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이 허무하게 하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7]

김창룡은 출세욕과 자기과시욕이 매우 강했으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른쪽 눈 밑의 흉터 때문에 어두운 인상을 주었고, 그와 마주치면 잘못이 없는 사람조차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는 특무부대의 상징을 호랑이로 삼았는데, 이는 호랑이가 사소한 먹잇감을 잡을 때도 모든 지혜와 힘을 집중하는 것처럼, 치밀한 계획, 신중한 경계, 끈기 있는 인내, 신속한 결단력을 본받고자 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창룡 암살을 주도한 허태영은 김창룡의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김창룡 중장 살해 결심은 1955년 10월 중순부터였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 김 중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상관과 부하를 무자비하게 중상모략했다.

# 조병창 사건 등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자신의 공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위해 육사 졸업식에서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 군 장성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군의 단결을 해치므로, 육군의 미래는 물론 국가의 미래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 생각하여 제거를 결심했다.

김창룡 암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한 장군은 "그대로 두었다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비록 건군의 원로이고 나라를 지켜낸 장군이라 할지라도, 어떤 구실로든 죄를 뒤집어씌워 제거될 기세였다. 그의 권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고, 이대로 가면 군대가 김창룡의 사병(私兵)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반면, 백선엽, 이형근 등 이승만 정권 시대 군 수뇌부는 김창룡에게 과오도 있었지만 국가 안보에 기여한 공로 역시 크다고 평가했다. 백선엽은 숙군 작업의 책임자로서, 한국 전쟁 중 국군의 집단 투항 사례가 없었던 것은 전쟁 전 군 내부 좌익 세력을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해안 반란 사건 당시 김창룡과 대립했던 이형근 역시 그의 청렴한 사생활과 업무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 실적을 높이 평가하며, "반공에 관한 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비록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려 했지만, 내가 요직에 오르자 극히 겸손해졌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면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창룡의 암살은 군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함경도 출신 세력(북동파)의 이탈을 초래하여 이승만 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일각에서는 김창룡이 살아있었다면 장면이 부통령이 되거나 4.19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1992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암살 배후에 김창룡이 있다고 증언했으나, 이후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

김종필은 국민보도연맹 사건 당시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 학살 명령을 내린 인물 중 한 명으로 김창룡을 지목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안양시의 사설 묘역에 안장되었으나, 1998년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으로 이장되었다.[6]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어, 2019년 6월 6일 대전 현충원에 있는 김창룡의 묘비에 오물이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7]

5. 학력

학력비고
함경남도 영흥보통학교졸업
함경남도 함흥고등보통학교졸업
함경남도 영흥농잠실습전문학교졸업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3기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졸업
조선경비보병학교졸업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졸업


6. 김창룡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김창룡 저격 사건 https://theme.archiv[...] 2023-06-25
[2] 뉴스 (3667)金昌龍の入隊―第79話陸士卒業生(120)((3667)김창용의 입대-제79화 육사졸업생들(120)) https://www.joongang[...] 1983-03-22
[3] 뉴스 (3666)第79話陸士卒業生(119)―金昌龍少尉((3666) 제79화 육사졸업생들(119)-김창룡소위) https://www.joongang[...] 1983-03-21
[4] 뉴스 남기고싶은이야기<3668>제79화육사졸업생들<121>김창룡의 육사입교 https://www.joongang[...] 1983-03-23
[5] 뉴스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피로 얼룩진 격동과 혼란의 세월 http://weekly.khan.c[...] 2015-12-15
[6] 뉴스 [박성진의 한국군 코멘터리]‘김재규 사진’ 못 걸고…장군 수에 목숨 거는 육군총장 http://news.khan.co.[...] 2018-03-29
[7] 웹사이트 親日派の国立顕忠院埋葬、韓国の市民団体が汚物をまき抗議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19-06-07
[8] 웹사이트 太極武功勳章 授與 金昌龍少將에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ihs21.org[...] 2006-12-24
[10] 기타
[11] 간행물 한국에도 베리아는 있다 4 주간 삼천리 1961-07-01
[12] 서적 1950년대의 인식 한길사 1990
[13] 뉴스 김창룡 묘 이장 찬반 '맞대결' 시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6-06
[14] 뉴스 시민연대 “친일파 김창룡 묘 국립묘지서 옮겨라”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8-06-06
[15] 서적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 인물과사상사 2004
[16] 뉴스 당시 정권차원의 범행 안두희)증언 빙산일각 일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2-04-15
[17] 서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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