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나베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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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나베번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일본의 번으로, 현재의 미야자키현 다카나베 지역을 중심으로 했다. 아키즈키 씨족이 다스렸으며, 1604년 다카라베성(다카나베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재정난을 겪었으나, 3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노부의 개혁과 교육 진흥을 통해 번의 발전을 이끌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다카나베 현이 되었고, 아키즈키 씨족은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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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나베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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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다카나베 번 |
원어 명칭 | 高鍋藩 (たかなべはん) |
이전 명칭 | 다카라베 번 (財部藩 (たからべはん)) |
역사 | |
성립 | 1587년 |
폐지 | 판적봉환 |
행정 구역 | |
국가 | 일본 |
지방 | 휴가국 |
현재의 행정 구역 | 미야자키현 |
통치 | |
정치 체제 | 번 |
번청 | 다카나베성 |
다이묘 | 아키즈키씨 |
기타 | |
시대 | 에도 시대 |
2. 역사
아키즈키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과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다카나베번을 성립시켰다. 초기에는 가로 시라이 타네모리와 그 아들 타네시게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에도 시대 중기, 6대 타네미츠의 차남은 요네자와번에 들어가 명군으로 알려진 우에스기 하루노리가 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다카나베번은 다카나베현이 되었다. 그 후, 미미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을 거쳐 가고시마현에서 분리, 미야자키현에 편입되었다. 번주 가문은 1884년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1. 초기 역사
아키즈키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과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다카나베번을 성립시켰다. 초기에는 가로 시라이 타네모리와 그 아들 타네시게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정난으로 번사들의 녹봉은 최고 300석을 넘지 못했다. 3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노부는 시라이 일파의 전횡으로 생긴 문제를 해결하고 번 재정 회복에 힘썼으며, 1673년 성의 이름을 다카라베에서 다카나베로 바꾸었다. 4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마사는 1689년 동생에게 3천 석을 분봉하여 번의 규모가 2만 7천 석으로 줄었다.2. 1. 1. 규슈 정벌과 아키즈키씨
아키즈키씨는 원래 치쿠젠국 아키츠키를 다스렸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 때, 당시 당주 아키즈키 타네자네가 시마즈씨에 대항해 저항하다가, 후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휴가국 쿠시마 3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타네자네는 한창때 30만 석 이상의 영지를 지배했기 때문에 대폭적인 감봉이라 할 수 있다.2. 1. 2. 세키가하라 전투와 영지 안도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아키즈키 타네나가는 서군 편이었으나, 9월 15일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서군이 괴멸하자 재빨리 동군으로 전향했다.[1] 오가키성에 있던 서군의 여러 장수들을 살해하고 성문을 열었기 때문에 영지를 안도받았다.[1] 그 후, 게이초 9년 (1604년)에 거성을 타카라베성(다카나베성)으로 옮겼는데, 이 시점부터 타카나베번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1]2. 2. 에도 시대
아키즈키 타네나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처음에는 서군에 속해 오가키성을 수비했지만, 본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자 동군으로 돌아서서 서군의 장수들을 죽이고 성을 넘겨주었다. 이 공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인정받았다.[1] 1604년에는 거성을 다카라베 성(다카나베 성)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다카나베 번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1]초대 번주 타네나가 때부터 2대 타네하루 시대까지는 가로였던 시라이 타네모리・타네시게 부자의 전횡으로 번정에 어려움을 겪었다.[1] 4대 타네마사는 1689년 동생 타네쿠니에게 3천 석을 분할해 주어 다카나베 번은 2만 7천 석이 되었다.[1]
에도 시대 중기, 6대 타네미츠의 차남은 요네자와번에 들어가 명군으로 알려진 우에스기 하루노리가 되었다.[1]
2. 2. 1. 번정 개혁과 번 재정
3대 번주 타네노부는 가로 시라이 타네모리・타네시게 부자의 전횡으로 생긴 문제 (우에가타 시타가타 소동)를 해결하고, 악화된 번 재정 회복에 힘썼다. 번사들의 녹봉은 최고로 많이 받는 사람도 3백 석도 안될 정도로 재정이 핍박했었다.[1] 엔호 원년 (1673년)에는 다카라베에서 다카나베로 성의 이름을 바꾸었다.[1]2. 2. 2. 번교 메이린도와 교육
안에이 7년 (1778년) 아키즈키 타네시게가 번교 메이린도를 설립하였다.[1] 다카나베번은 번사 교육에 힘써 "교육의 번"으로 알려졌으며, 인근 번들 사이에서는 "다카나베에서 학자 행세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았다.[2]2. 2. 3. 미사키우마와 번 목장
에도 시대 초기, 다카나베번은 다른 번들과 마찬가지로 군사용 기마나 운반용으로 축산을 추진하였다. 특히 말 생산에 주력한 목장이 번의 번지였던 미사키 목장(현 미야자키현 구시마시 도이 곶)에 있었다. 타네미츠 시대에는 번이 운영하는 목장이 다카나베에 1곳, 구시마시에 7곳 있었다. 이 무렵부터 방목되어 그대로 반 야생화된 것이 도이 곶의 미사키마(곶 말)이다. 미사키마는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7] 다카나베번에서는 매년 가을 무렵 "고마오이(駒追い)"(말을 검사하면서 2세 수말을 잡는 행사)가 행해졌다.[7] 명목은 조금 달라졌지만, "도이 곶 말 몰이"로서 현재도 매년 계속되고 있다.[8]2. 3.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다카나베번은 다카나베현이 되었다. 그 후, 미미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을 거쳐 가고시마현에서 분리되어 미야자키현에 편입되었다. 번주 가문은 1884년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3. 역대 번주
대수 | 이름 | 초상화 | 재임 기간 | 통칭 | 관위 | 비고 |
---|---|---|---|---|---|---|
1 | 아키즈키 타네나가 | -- | 1587년 ~ 1614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지쿠젠국 아키즈키성에서 전봉 |
2 | 아키즈키 타네하루 | -- | 1614년 ~ 1659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세자・아키즈키 타네사다의 아들 |
3 | 아키즈키 타네노부 | -- | 1659년 ~ 1689년 | 사도노카미(佐渡守) | 종5위하 | |
4 | 아키즈키 타네마사 | -- | 1689년 ~ 1710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
5 | 아키즈키 타네히로 | -- | 1710년 ~ 1734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
6 | 아키즈키 타네미츠 | -- | 1734년 ~ 1760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
7 | 아키즈키 타네시게 | -- | 1760년 ~ 1788년 | 사도노카미(佐渡守) | 종5위하 | |
8 | 아키즈키 타네노리 | -- | 1788년 ~ 1807년 | 야마시로노카미(山城守) | 종5위하 | |
9 | 아키즈키 타네타다 | -- | 1807년 ~ 1843년 | 지쿠젠노카미(筑前守) | 종5위하 | |
10 | 아키즈키 타네토미 | -- | 1843년 ~ 1871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5위하 |
4. 번사의 신분
다카나베번 번사의 신분은 상사와 그 이하로 나뉘며, 녹봉 및 역할에 따라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상사에게는 녹봉에 해당하는 부지미(扶持米)가 지급되었고, 그 이하 계층에게는 지카타(地方)라 하여 농지를 지급하여 직접 경작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부식, 조미료, 땔감, 절미(切米), 밭작물(보리) 등이 지급되었다.
- 상사(上士): 기마(騎馬)가 가능하고 쥬샤(従者)에게 창을 들게 할 수 있는 신분으로, 큐진(給人)과 코규(小給)가 여기에 해당한다.
- 큐진(給人): 사무라이 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녹봉은 60석에서 300석이었다.
- 코규(小給): 원래 명칭은 오코쇼(大小姓)이며, 녹봉은 30석에서 60석이었다.
- 츄고쇼(中小姓): 전쟁 시 번주(藩主)의 친위대를 담당하는 역할로, 녹봉은 15석에서 50석이었다.
- 카치(徒士): 녹봉은 10석에서 35석이었다.
- 아시가루(足軽): 카치(徒士) 이상의 번사보다 4배 많은 수가 존재했으며, 총, 활, 창 등 각자의 역할로 나뉘었다. 녹봉은 3석에서 8석으로 적었기 때문에 스스로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 의사(医者): 큐진(給人) 급, 코규(小給) 급, 츄고쇼(中小姓) 급으로 나뉘며, 부지미를 지급받았다.
- 쿠미하즈레(組外): 차스님(茶坊主), 북스님(太鼓坊主), 코반(小番) 등 사무라이에도 아시가루(足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녹봉은 2석에서 15석을 받는 사람부터 코반(小判) 2냥을 받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 쇼쿠닌(職人): 대장장이, 목수, 미장이, 기와장이 등 기타 기술자들로, 부지미를 지급받았다.
5. 막부 말기의 영지
막부 말기 다카나베번의 영지는 휴가국 내에 있었다. 이 중 나카군 18개 마을은 제1차 부현 통합 당시 미야코노죠현에 편입되었다.
6. 번 저택 및 에도 보다이지
에도 번저택은 아자부 학쇼쵸에 카미야시키, 쵸쟈가마루에 시모야시키가 있었다. 오사카 번저택은 에도호리 4초메에 있었다. 에도 보다이지는 시모타니에 있던 임제종 다이토쿠지파 엔만산 코토쿠지였다.[1]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13-05-28
[7]
서적
串間市史
串間市
1996-03
[8]
웹사이트
草原駆ける 都井岬「馬追い」
https://www.the-miya[...]
宮崎日日新聞
20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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