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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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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상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3.1 운동 이후 독립 자금 모집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 기초에 참여했다. 이후 자유당 독재에 반대하며 호헌동지회에 참여했고, 4.19 혁명 이후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62년 사망 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친일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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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상일
서상일
국적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출생일1886년 7월 9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대구도호부
사망일1962년 4월 18일
본관미상
학력미상
직업미상
경력미상
부모미상
형제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군 복무미상
종교미상
서명미상
의정 활동
의원 선수1
의원 대수1·2
정당미상
수상
상훈미상

2. 생애

대구부 서상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서 계몽활동에 참여했으며, 1909년 안희제, 김동삼 등과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독립청원서 전달 등에 관여했으며, 잠시 만주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대구청년회 등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동아일보 대구지국 운영, 각종 회사 설립 및 운영 등 사회경제적 활동도 병행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총무를 맡았으며,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비상국민회의 위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7년에는 미군정청 토목부 소방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제헌헌법 제정에 참여했다.[1] 이후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고, 1956년 조봉암진보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곧 탈당했다. 4.19 혁명 후인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대표총무위원을 맡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활발한 의정 활동은 하지 못했다. 5·16 군사 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통일대중당을 창당했으나 1962년 사망했다.

사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독립운동

대구부 서상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서봉기와 이영천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여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계몽활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 동지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권총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독립청원서 전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잠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1920년 초에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1년에는 조선인산업대회에 참여하였고,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2년에는 대구운송주식회사 감사와 대구청년회 임시 회장을 맡았으며, 1923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1924년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 설립에 참여하였고, 1931년 대구산업금융주식회사에 주주로 참여했으며, 1937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 이사로 선출되는 등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2. 2. 광복 전 사회 활동

대구부 서상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여 계몽활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권총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독립청원서 전달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잠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1920년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사회경제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에 참여하였고,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2년에는 대구운송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대구청년회 임시 회장을 맡았다. 1923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1924년에는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 설립에 참여하였고, 1931년에는 대구산업금융주식회사에 주주로 참여했으며, 1937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 이사로 선출되었다.

2. 3. 광복 후 정치 활동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총무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송진우 등이 주도한 건준 반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목적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설립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민선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7년 3월 20일에는 뇌물 수수와 방화복 납품 관련 비리로 미군정청 소방국장 천종효가 구속 및 해임되자, 그를 대신하여 미군정청 토목부 소방국장직을 맡았다.

1948년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는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며, 6월 2일부터 21일까지 유진오, 윤치영, 이윤영, 허정 등과 함께 제헌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참여했다. 6월 2일에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도입을 주장하며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후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가입이 무산되자 이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를 탈퇴하였다. 1956년에는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조직에 참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탈당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대구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인해 의정 활동은 활발히 하지 못했다.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이후 통일대중당을 창당했으나 1962년 사망하였다.

사망 후,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4. 사후

사망 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친일 의혹 논란

1939년 조선군사령부가 주최한 병사부장 회의에 서상일이 대구 병사부 소속 대표로 참석했다는 사실이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2]

이후 1941년 12월 12일, 일제가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지 6일 뒤, 대구 신사(달성공원)에서 열린 친일 집회에 참석자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 집회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선동하는 성격의 대회였다. 당시 매일신보는 이 집회를 "피끓는 국민대회, 성대하게 열렸다"고 현장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하며, 서상일을 포함한 참석자 대표들이 일제의 침략 전쟁을 다음과 같이 목청 높여 찬양했다고 보도했다.[2]

: 멸사봉공과 신도(臣道) 실천에 매진하여 총력을 결집, 미국과 영국을 타도하여 정전을 관철하자


: — 매일신보 1941년 12월 14일자[2]

이처럼 1930년대 이후 서상일은 독립운동가와는 상반된 행보를 보인 사실이 확인되었다.[2]

4.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연도선거 종류구분소속 정당선거구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8년총선제1대 국회의원한국민주당대구부 을11,777 (43.75%)1위당선초선
1948년대선제1대 부통령한국민주당대한민국1 (0.51%)2위낙선
1950년총선제2대 국회의원민주국민당대구시 을8,921 (27.74%)2위낙선
1958년총선제4대 국회의원민주혁신당대구시 을10,815 (31.39%)2위낙선
1960년총선제5대 국회의원사회대중당대구시 을15,348 (44.80%)1위당선재선


5. 서상일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뉴스 制憲에 迃餘曲折많았다 경향신문 1957-07-17
[2] 웹사이트 건국 훈장의 그늘 https://newstapa.org[...] 20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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