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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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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즉조당을 사용하다가 협소하여 건립이 시작되었다. 1904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었으며, 고종의 승하 후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명문이 이전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으며, 2009년 행각이 복원되고 2019년 광명문이 원래 위치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목조건물로, 정면 9칸, 측면 4칸에 'ㄱ'자형 구조를 가지며, 광명문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897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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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3년의 덕수궁 함녕전 전경
2013년의 모습. 문화재청 제공
이름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유형보물
지정 번호820
지정일1985년 1월 8일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시대조선시대
소유국유

2. 역사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1897년, 새로운 침전의 필요성에 따라 건립되었다.[1] 건립 과정에 대해서는 경복궁의 건물을 옮겨왔다는 설과 새로 지었다는 설이 공존한다.[2][3]

1904년 아궁이에서 시작된 화재로 함녕전은 전소되었고, 이 불은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등 경운궁의 주요 건물까지 태우는 큰 피해를 낳았다. 화재 직후 재건 공사가 시작되어 같은 해 말에 완료되었다.[4]

함녕전은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승하 후 빈전과 혼전(효덕전)으로 사용되었고, 3·1 운동 당시에는 탑골공원에서 이동한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들어와 이곳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현대에 들어 2009년에는 행각이 복원되었고, 2019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옮겨졌던 광명문이 원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2. 1. 건립과 소실 (1897년 ~ 1904년)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했을 당시에는 함녕전이 아직 지어지지 않아 즉조당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이 비좁아 새로운 침전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같은 해 6월 19일 윤용선을 상량문제술관으로 임명하는 등 함녕전 공사가 시작되었다.[1]

함녕전의 건립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경복궁에 있던 만화당(萬和堂) 건물을 경운궁으로 옮겨와 개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궁궐지》에는 36칸 규모의 만화당을 경운궁으로 이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만화당과 함녕전의 규모 및 문 배치가 유사하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2] 다른 하나는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옮겨진 만화당 건물은 어진을 모시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함녕전은 별도로 지어졌다는 견해이다.[3]

이렇게 지어진 함녕전은 1904년 아궁이에서 시작된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이 화재는 경운궁 중심부까지 번져나가 당시 중층 건물이었던 중화전을 비롯하여,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즉조당과 석어당까지 모두 파괴하는 큰 피해를 남겼다.

2. 2. 재건과 대한제국 시기 (1904년 ~ 1910년)

1904년 함녕전 아궁이에서 시작된 화재로 건물은 전소되었다. 이 불은 경운궁 중심부까지 번져 당시 중층 건물이었던 중화전과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즉조당, 석어당까지 모두 파괴하는 큰 피해를 남겼다.

화재 직후 함녕전 재건 공사가 시작되어, 1904년 음력 3월에 주춧돌을 놓고 8월에 기둥을 세웠으며, 같은 해 12월에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마쳤다. 이 과정에서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4]

2. 3.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1910년 ~ 현재)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이곳에 빈전과 혼전을 마련하였고, 혼전은 효덕전(孝德殿)이라 이름 붙였다. 3·1 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였던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와 효덕전에 참배하고 만세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이후 현대에 들어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2009년에는 함녕전의 행각이 복원되었고, 2019년에는 일제강점기 때 제 위치를 벗어나 옮겨졌던 광명문을 원래의 자리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3. 구조 및 기능

고종이 왕위를 양위한 뒤 거처하던 침전이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갔다.[1] 함녕전은 목조 건물이며, 주변에는 행각(行閣)이 있었고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1]

3. 1. 건물 구조

목조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으로 4칸이 더 붙어 'ㄱ'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익공으로 결구된 비교적 간결한 구조의 건물이다. 본래 침전이 아니었던 만화당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침전 건물에는 일반적으로 없는 용마루가 남아 있으며, 쇠서 1개를 사용한 몰익공 양식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3. 2. 행각

함녕전의 행각은 남행각, 서행각, 북행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행각의 세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규모 및 특징
남행각정면 16칸 규모로, 왼쪽에서 7번째 칸부터 3칸은 치중문이었고, 여기서 3칸 건너뛴 한 칸은 평강문으로 추정된다.
서행각향복당嚮福堂|향복당zho과 풍안당豐安堂|풍안당zho이라는 당호가 있었으며, 문도 한 칸 있었다.
북행각정면 9칸 규모의 만희당萬禧堂|만희당zho이 있었으며, 문도 한 칸 있었다.



행각 건물은 민도리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었다.[5]

1913년에는 북측 행각 바깥에 구여당九如堂|구여당zho을 지으면서 행각의 규모가 확장되었고, 복도가 새로 만들어졌다.[5]

3. 3. 광명문

고종황제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광명문의 모습 (1919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광명문(光明門)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다. 1897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다시 지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이왕가미술관을 지을 때, 광명문은 미술관 남쪽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이전된 광명문 안에는 신기전,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 등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2016년,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문화재청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현재 광명문과 배치 형태가 같은 건물 터 1동을 확인하였다. 이 건물 터는 12개의 적심 시설을 갖춘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1910년 경운궁 중건 배치도에 나타난 광명문의 위치, 배치, 평면 형태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광명문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를 통해 2018년 마침내 원래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6]

참조

[1] 실록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6월 19일 양력 2번째기사
[2] 논문 고종대 경운궁 중창에 대한 연구 일지사 2008
[3] 저널 Changes in the King’s Portrait House and the Succession of ‘Kyujanggak’ under Gojong https://www.kci.go.k[...] 2021
[4] 서적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행각 복원공사보고서 문화재청 2009-12
[5] 서적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6] 웹인용 덕수궁, 제 모습 찾기 본격적으로 시작 https://www.cha.go.k[...]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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