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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동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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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1885년 독일이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세운 보호령으로, 현재의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모잠비크 일부 지역을 포함했다. 카를 페터스가 원주민 추장들과 계약을 맺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파견하여 잔지바르 술탄의 저항을 무력화하면서 설립되었다. 독일은 식민지 통치 과정에서 마지 마지 반란과 같은 저항에 직면했지만, 철도 건설, 농업 개발, 교육 시스템 구축 등 경제 발전에 힘썼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후,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분할되어 영국의 탕가니카, 벨기에의 르안다-우룬디, 포르투갈의 키온가 삼각지대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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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동아프리카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독일령 동아프리카
현지 명칭(도이치-오스트아프리카)
일반 명칭독일령 동아프리카
시대신 제국주의
국가독일
지위독일의 식민지
존속 기간1885년 - 1919년
건국 사건독일 동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설립
건국 날짜1885년 2월 27일
주요 사건 1헬고란트-잔지바르 조약
날짜 11890년 7월 1일
주요 사건 2마지마지 반란
날짜 21905년 10월 21일
주요 사건 3제1차 세계 대전 동아프리카 전역
날짜 31914년 8월 3일
주요 사건 4항복
날짜 41918년 11월 25일
종료 사건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공식 해체
종료 날짜1919년 6월 28일
선행 국가 1독일 동아프리카 회사
선행 국가 2잔지바르
선행 국가 3르완다
선행 국가 4부룬디
후행 국가 1탕가니카
후행 국가 2루안다-우룬디
후행 국가 3모잠비크
식민지 사무소의 국기
식민지 사무소의 국기
독일 제국의 국장
독일 제국의 국장
통치
국가 원수황제
국가 원수 1빌헬름 1세
재임 기간 11885년–1888년
국가 원수 2프리드리히 3세
재임 기간 21888년
국가 원수 3빌헬름 2세
재임 기간 31888년–1918년
총독총독
총독 1카를 페터스
재임 기간 11885년–1891년 (최초)
총독 2하인리히 슈네
재임 기간 21912년–1918년 (최후)
수도
수도바가모요(1885–1890)
수도다르에스살람(1890–1916)
수도타보라(1916, 임시)
지리
면적 (1912년)994996 km2
인구 통계
인구 (1912년)7,700,000명
언어
공용어독일어 (공식)
스와힐리어
아랍어
키룬디어
키냐르완다어
마사이어
수쿠마어
이라쿠어
차가지역 언어
종교
종교이슬람
전통 아프리카 종교
기독교 (가톨릭 교회 및 루터교)
통화
통화독일령 동아프리카 루피

2. 역사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역사는 1884년경 독일 식민지협회의 창립자 카를 페터스가 아프리카 동부 해안의 원주민 부족장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5][6][7] 1885년 독일 제국 정부는 이 지역에 보호령 설치를 공식화하며 페터스의 회사에 통치권을 위임했다.[5]

초기 독일의 진출은 당시 해안 지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잔지바르 술탄의 반발을 샀으나,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여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8] 1886년 독일은 영국과 협정을 맺어 각자의 세력권을 분할했으며, 이후 1890년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통해 잔지바르 연안 지역을 매입하고 영국령 동아프리카와의 경계를 확정지었다.[10][11] 이 과정에서 독일은 바가모요, 다르에스살람, 킬와 등 주요 거점을 확보했다.

독일의 식민 통치는 원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888년 해안 지역에서 아부시리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영국군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는 내륙의 헤헤족이 무크와와 추장의 지도 아래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무크와와는 1898년 자결했다.[14] 1905년에는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마지 마지 반란이 발생했다.[16] 당시 총독 구스타프 아돌프 폰 괴첸은 초토화 작전과 의도적인 기근 유발 정책까지 동원하여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17][18] 특히 카를 페터스를 비롯한 초기 식민 관료들의 잔혹 행위는 악명이 높았으며, 이는 독일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15]

마지 마지 반란 이후 불거진 식민 통치의 문제점으로 인해 1907년 독일 정부는 식민지 행정 개선을 시도했다.[19][20] 질서 유지와 세금 징수 등 행정 업무에서 원주민 족장들에게 더 의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일부 수정되었고, Schutztruppe|슈츠트루페de(보호령 군대)라 불리는 군대가 주요 거점에 주둔하며 통치를 뒷받침했다.[21]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가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주둔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을 상대로 탕가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전쟁 기간 내내 끈질기게 저항했다.[37] 레토프포어베크의 부대는 독일 본국의 항복 소식을 듣고 나서야 전투를 중단했으며, 종전 후 독일에서 영웅 대우를 받았다.[38][39] 전쟁 결과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영국(탕가니카), 벨기에(르안다-우룬디), 포르투갈(키온가 삼각지대)에 의해 분할되어 1920년 1월 10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41][42]

2. 1. 설립 배경

1888년 독일령 동아프리카 연안 지도


1892년 독일령 동아프리카 역사 지도


독일 식민지 역사의 시작은 독일 식민지협회의 창립자이자 모험가인 카를 페터스가 1884년잔지바르에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도착하여 현지 원주민 추장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비롯되었다.[5][6][7] 1885년 베를린 회의가 끝난 직후인 3월 3일, 독일 정부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가 서명한 제국 칙허장을 페터스의 회사에 부여하여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독일 보호령을 설치할 계획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 칙허는 이미 2월 17일에 비밀리에 승인된 상태였다.[5] 이후 페터스는 전문가들을 모집하여 남쪽으로는 루피지 강, 북쪽으로는 케냐 해안의 라무 인근 비투 지역까지 탐험하며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5][6][7]

당시 인도양 연안 지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잔지바르 술탄 바르가쉬 빈 사이드는 독일의 이러한 움직임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비스마르크 총리는 5척의 군함(슈토슈, 그나이제나우, 프린츠 아델베르트 등 포함)을 파견하여 1885년 8월 7일 잔지바르에 도착했고, 술탄의 궁전을 향해 포구를 겨누며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8] 잔지바르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모색하던 대영 제국과 독일, 프랑스1886년 협의를 통해 동아프리카 대륙에서의 각자 세력권을 설정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은 훗날의 케냐(영국령 동아프리카) 지역을, 독일은 훗날의 탕가니카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잔지바르 술탄의 지배 영역은 잔지바르 섬 등 일부 도서 지역과 해안선에서 내륙으로 약 16.09km까지만 인정되었다.[50][9] 프랑스는 코모로 제도 영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이 경계선을 승인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술탄은 결국 이 합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8]

포트 바가모요, 1891년경


독일은 신속하게 바가모요, 다르에스살람, 킬와 지역을 장악하며 지배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독일의 통치에 대한 반발로 1888년 아부시리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 반란은 이듬해 영국의 지원을 받아 진압되었다. 1890년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북해헬골란트섬을 얻는 대가로, 잔지바르 술탄이 명목상 지배하던 해안 지역의 권리를 포기하고 잔지바르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했다. 독일은 이 해안 지역을 매수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다만, 영국령 동아프리카와의 정확한 국경선은 1910년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10][11]

독일의 팽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헤헤족은 추장 무크와와의 지도 아래 독일의 진출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이 독일 측에 협력하면서 헤헤족은 결국 패배했다. 무크와와는 이후에도 게릴라 활동을 이어갔으나, 계속된 추격 끝에 189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4]

2. 2. 초기 확장과 저항



독일 식민지 역사는 독일 식민지 협회(Society for German Colonization)의 창설자이자 모험가인 카를 페터스(Carl Peters)가 1884년잔지바르에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도착하여 현지 부족장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조약들은 표면적으로는 "독일의 보호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5][6][7] 베를린 회의가 끝난 후인 1885년 3월 3일, 독일 정부는 비스마르크 총리가 2월 17일 서명한 제국 칙허장을 통해 페터스의 독일 식민지 협회에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보호령을 설립하고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음을 공표했다. 페터스는 이후 전문가들을 모집하여 남쪽으로는 르피지 강(Rufiji River)까지, 북쪽으로는 해안의 비투(Witu, 스와힐리란드)와 그 부근의 라무(Lamu)까지 탐험을 진행했다.[5][6][7]

당시 아프리카 대륙 인도양 연안부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잔지바르 술탄 바르가쉬 빈 사이드(Barghash bin Said)는 독일의 진출에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이 잔지바르와 본토의 통치자임을 주장했다. 이에 비스마르크 총리는 비스마르크급 코르벳 "슈토슈", 그나이세나우", 라이프치히급 코르벳 "프린츠 아달베르트", 알코나급 프리깃 "엘리자베트" 등 5척의 군함을 파견했다. 함대는 1885년 8월 7일 현지에 도착하여 술탄의 궁전을 향해 포구를 겨누며 압박했다. 술탄은 결국 해안을 따라 약 16.09km 이내의 좁은 지역을 제외한 본토에 대한 독일의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8]

1886년 11월, 대영 제국(잔지바르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들도 동아프리카 진출을 모색했다), 독일, 프랑스는 협의를 통해 동아프리카 대륙부를 분할하고 각자의 세력권을 설정했다. 영국은 훗날의 케냐(영국령 동아프리카) 지역을, 독일은 훗날의 탕가니카 지역을 확보했으며, 잔지바르 술탄의 지배 영역은 잔지바르 섬 등 일부 도서 지역과 대륙 연안에서 내륙으로 약 16.09km까지만 인정되었다.[50][9] 프랑스는 코모로 제도 영유에 대한 영독 양국의 승인을 받는 대가로 이 경계선을 인정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잔지바르 술탄은 이 합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빠르게 바가모요, 다르에스살람, 킬와 지역에 지배력을 확립했다. 오스카 바우만(Oscar Baumann)과 같은 탐험가들이 파견되어 마사이랜드와 우룬디 등을 탐험했으며, 톰 폰 프린스(Tom von Prince), 빌헬름 랑헬트, 에민 파샤(Emin Pasha), 찰스 스토크스 (상인)(Charles Stokes) 등의 캐러밴이 주요 교역로 장악을 위해 활동했다. 다른 식민 열강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이 지역의 자원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대신 기존 노예 무역을 규제하고 새로운 "징집 노동력" 확보를 선호하는 정책을 취했다.[4]

1896년 독일 지휘 하의 아스카리 병사들


그러나 독일의 확장은 순탄치 않았다. 1888년 해안 지역에서 아부시리의 반란이 발생했으나, 독일은 이듬해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진압했다. 1890년 영국과 독일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북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헬골란트섬을 영국으로부터 넘겨받는 대신, 잔지바르와 비투 랜드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고 잔지바르 술탄이 명목상 지배하던 해안 지역을 매입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영토로 확정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와 영국령 동아프리카 보호령 사이의 국경선이 대체로 결정되었으나, 정확한 경계 측량은 1910년까지 완료되지 않았다.[10][11] 국경 측량 작업에는 영국인 형제 찰스 스튜어트 스미스와 조지 에드워드 스미스가 참여하여, 1892년과 그 이후 12년 동안 해안에서 빅토리아 호수까지 이어지는 긴 국경선을 측량했다.[12]

독일의 식민지 팽창은 비스만 트루페(Wissmann Truppe)와 같은 군사 조직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독일인 장교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용병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현대 무기를 사용하여 원주민 저항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13] 특히 초기 식민지 개척을 주도했던 카를 페터스는 극단적인 폭력성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므코노-와-다무"(Mkono-wa-Damu), 즉 "피 묻은 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정복 과정에서 마을 전체를 학살하고,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착취했으며, 잔혹한 고문과 처형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15] 이러한 폭력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다른 유럽 열강 사이에서 "채찍질 식민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에 맞서 원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내륙의 헤헤족은 므콰와 추장(Chief Mkwawa)의 지도 아래 독일의 진출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헤헤족은 한때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으나, 독일이 다른 부족들을 동원하여 공격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므콰와 추장은 이후에도 수년간 게릴라 활동을 이어갔지만, 계속되는 추격 끝에 1898년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4]

1905년에는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마지 마지 반란이라는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16] 당시 총독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 폰 괴첸(Gustav Adolf von Götzen) 백작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과 함께 의도적으로 기근을 유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약 3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이 아사하거나 전투 및 학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7][18] 마지 마지 반란의 참혹한 진압 과정과 식민 행정의 부패 및 잔혹 행위가 독일에 알려지면서 큰 스캔들이 되었고, 1907년 독일 재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식민지성을 설치하고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Bernhard Dernburg)를 장관으로 임명하여 식민 통치 방식의 개선을 지시했다.[19][20] 이후 독일 식민 당국은 질서 유지와 세금 징수를 위해 원주민 부족장들에게 더 많이 의존하는 방식으로 통치 정책을 일부 수정했다. 1914년 1월 1일 기준으로, 현지 경찰 외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군사력인 슈츠트루페(Schutztruppe, 보호령 군대)는 다르에스살람, 모시, 이링가, 마헨게 등에 주둔했으며, 독일인 장교 110명(군의관 42명 포함), 부사관 126명, 그리고 아스카리(Askari)라 불리는 원주민 병사 2,47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21]

2. 3. 마지마지 반란과 식민 통치 변화

1905년 마지 마지 반란(Maji Maji Rebellion)이 발생했으며, 이는 식민지 총독 구스타프 아돌프 폰 겐첸 백작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 진압 과정과 그 이후 식민 통치 과정에서 부패와 잔혹 행위가 자행되었음이 드러나면서 독일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다.[51]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07년 독일 재상 베른하르트 폰 뷔로는 식민지성을 신설하고, 베른하르트 데르부르크를 초대 장관으로 임명하여 식민지 행정의 개선을 지시했다. 데르부르크 장관 하에 추진된 개혁은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원주민의 불만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는 향후 독일 식민 통치의 '모델 케이스'로 평가받기도 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일부 원주민들은 독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1]

개선된 통치 방식 아래 독일인 식민지 관리들은 질서 유지에 힘썼고, 세금 징수와 같은 행정 업무는 원주민 부족의 족장에게 위임하여 이들의 협조를 얻고자 했다. 1914년 1월 1일 기준으로, 현지 경찰 외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군사력인 Schutztruppe|슈츠트루페de(보호령 군대)는 110명의 독일인 장교(42명의 군의관 포함), 126명의 부사관, 그리고 2,472명의 아스카리(Askari)라 불리는 원주민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다.[51] 이들 군대는 다르에스살람, 모시, 이링가, 마헨게 등 주요 거점에 배치되었다.[52]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종식

아스카리 중대, 1914-1918년경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방위대인 슐츠트루페(Schutztruppe)는 사령관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 대령(당시 계급)의 지휘 아래 연합국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59][60][61] 전쟁 초기 독일 방위대는 약 3,000명의 유럽인과 11,000명 이상의 원주민 아스카리 및 짐꾼으로 구성되었다.[37]

레토프포어베크는 연합군, 특히 영국군을 동아프리카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게릴라 전술과 기습 작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군을 상대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탕가 전투(1914년 11월 3일~5일)이다. 이 전투에서 레토프포어베크의 부대는 8배가 넘는 규모의 영국군을 격파하며 승리했다.[37]

탄자니아 이링가에 있는 제1차 세계 대전 독일군 기념비


레토프포어베크의 끈질긴 저항은 영국군에게 막대한 물자 손실과 상당한 인명 피해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군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벨기에령 콩고 군대가 서쪽에서 공격해오면서(타보라 전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레토프포어베크는 결국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38]

1917년 11월 응고마노 전투에서 독일군이 로부마 강을 건너 포르투갈 주둔군을 공격하는 모습


그는 휘하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벗어나 남쪽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훗날의 모잠비크)로 침투했고, 이후 서쪽의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까지 이동하며 전투를 계속했다. 1918년 11월, 독일 본국이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는 소식을 사흘 뒤에야 접한 레토프포어베크는 마침내 전투 중지에 동의했다.[38]

한편, 독일 해군의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 역시 동아프리카 연안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연료인 석탄이 고갈되고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자, 1915년 7월 르피지 강 삼각주에서 자침했다. 배의 승무원들은 함포를 해체하여 육상으로 옮긴 뒤 지상군에 합류하여 전투를 이어갔다.[40]

전쟁이 끝난 후, 파울 폰 레토프포어베크와 그의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독일 식민지 군대로 평가받으며 독일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비록 수적 열세로 인해 여러 차례 후퇴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저항을 이어간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와 함께 싸웠던 아스카리 병사들에게는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서독 정부로부터 연금이 지급되었다.[39]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결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독일령 동아프리카도 연합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서부의 르안다-우룬디(훗날 르완다부룬디)는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41][42] 남동부 로부마 강 이남의 작은 지역인 키온가 삼각지대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 편입되었다.[41] 나머지 가장 넓은 지역은 탕가니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41] 이 조약은 1920년 1월 10일에 발효되어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3. 통치 시스템

독일이 동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때, 많은 지역에서는 그전까지 잔지바르 술탄이 사용하던 통치 조직을 계승했다. 이는 각 마을에 줌베(촌장)를 두고, 여러 마을을 다스리는 아키다(군장)라는 중간 통치자를 정부가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초기 아키다에는 읽고 쓸 줄 아는 아랍인이나 스와힐리인이 주로 임명되었으나, 이후 교육받은 다른 아프리카인도 채용되었다. 다만 내륙의 규모가 큰 부족에 대해서는 부족의 족장을 중간 통치자로 공식적 또는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이들 중간 통치자는 도로 및 다리 건설 같은 토목 공사에 필요한 노동 부역 동원, 정부 캐러밴의 짐 운반, 독일인이 운영하는 농원의 노동자 공급, 가옥세 징수 등을 담당했다. 족장이나 촌장은 징수한 세금의 5%를 보수로 받았다. 세금은 현금 납부가 원칙이었기 때문에, 환금 작물 재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부역으로 세금을 대신 내는 제도도 있었으나, 이는 주민들의 큰 불만을 샀다. 부역에 응하지 않는 주민은 아키다나 족장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거나 가축을 빼앗기기도 했다. 1905년에는 이러한 무보수 노동 부역 제도가 임금 노동 제도로 변경되어, 노동자는 임금을 받아 세금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두세가 도입되면서 점차 가옥세를 대체해 나갔다. 가옥세와 인두세를 합한 세수는 1909년에 마르크에 달했으며, 이는 식민지 전체 세수의 34%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한편, 내륙의 하야족이 거주하는 부코바 지역, 르완다 왕국, 부룬디 왕국 세 곳은 인구가 많고 중앙 집권적 제도를 갖춘 대규모 부족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이 세 지역은 자치구로 지정되었고, 각 지역의 왕이나 족장은 내정에 관한 권한을 유지했다. 각 자치구에는 독일인 주재관이 파견되어 경제 개발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고 외국인과 현지 주민의 출입국을 관리 감독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치구는 상대적으로 경제 개발이 더디었고, 세금 징수도 19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4. 경제 개발

사이잘삼 농장. 약 1906/18


사이잘삼 공장, 약. 1906/18.


독일의 통치 아래 상업과 경제 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40000ha 이상의 면적에서 사이잘삼이 재배되어 식민지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었다.[22] 또한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이 운영되었고, 2백만 그루의 커피 나무와 80000ha에 달하는 고무 나무가 심어졌다.[23]

식민지 초기에는 상아와 야생 고무 같은 수렵 및 채집 생산물이 수출 경제의 기반이었으나,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로 인해 해안 지역 아프리카인 소유 농장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유럽인이 소유한 농장 수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커피나 고무와 같은 상품의 세계 시장 가격 변동성이 크고 토양 및 기후 조건이 항상 유리하지 않아 많은 농장이 수익을 내지 못했다. 유럽인 농장주들은 사이잘삼 재배를 통해 비로소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24]

초기 독일 식민 정책은 유럽인 이주자를 우대했으나, 마지 마지 반란 이후 변화가 생겼다. 독일 식민지성 초대 장관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와 이전 총독 구스타프 아돌프 폰 괴첸의 뒤를 이어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폰 레헨베르크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중점은 소수의 유럽인 보호에서 현지 아프리카인에 의한 농업 개발 지원으로 옮겨갔다.[25] 레헨베르크 총독 재임 기간(1906-1912) 동안 식민 행정부는 아프리카 소규모 자작농의 경제적 잠재력에 주목하고 철도 건설을 통한 지원을 모색했다.[25]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필수적이었다. 1888년부터 탕가에서 모시(Moshi)까지 이어지는 우삼바라 철도(Usambara Railway, 북방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농산물의 시장 운송을 도왔다. 더 긴 노선인 탄자니아 중앙 철도는 다르에스살람에서 모로고로, 타보라를 거쳐 키고마까지 총 1250km에 달했다. 레헨베르크 총독은 내륙 지역의 환금 작물 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철도 건설을 우선시했으며, 탕가니카 호 동쪽 연안까지 이어지는 최종 구간은 1914년 7월에 완공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는 대규모 축제와 함께 농산물 견본시와 무역 박람회가 열렸다. 철도 개통과 인도 상인들의 활동은 내륙 지역의 환금 작물 보급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철도 건설 비용은 독일 국고에서 빌린 차관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식민지 정부는 막대한 차관 상환 부담을 안게 되었다. 1914년에는 식민지 정부 세입의 32%가 차관 상환에 사용될 정도였다. 한편, 1891년 이후 독일 식민 행정부는 기존의 대상 경로를 전천후 도로로 개편하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31]

항만 시설 역시 확충되었다. 탕가, 바가모요, 린디 등의 항구에는 전기 크레인, 철도 연결선, 창고 등이 건설되거나 개선되었고 부두가 개축되었다. 1912년 한 해 동안 다르에스살람과 탕가에는 356척의 증기 화물선 및 여객선과 1,000척 이상의 연안선 및 역내 무역선이 입항했다.[21]

1914년까지 다르에스살람과 주변 지역의 인구는 166,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중 유럽인은 1,050명(독일인 1,000명)이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전체에는 3,579명의 독일인이 거주했다.[63] 다르에스살람은 당시 열대 아프리카 전체에서 모범적인 도시로 여겨졌다.[64]

현대 탄자니아의 금광 채굴은 독일 식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빅토리아 호수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1907년 금이 발견된 후 키론다-골드미넨-게젤샤프트(Kironda-Goldminen-Gesellschaft)는 1909년부터 세켄케 금광(Sekenke Gold Mine)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식민지 최초의 금광 중 하나였다.[33]

은화 1 루피, 독일령 동아프리카, 1902년 발행. 그려진 초상은 빌헬름 2세이다.


그러나 농업 및 경제 개발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들도 발생했다. 특히 농장 운영에 필수적인 아프리카 노동력 확보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 고용 조건은 매우 열악했으며 때로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다. 독일 본국 정부는 모든 형태의 강제 노동을 금지했지만, 현지 독일 관리들은 유럽인 농장주들과 결탁하여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르에스살람에서 공포된 노동 관련 법령들은 내륙 지역에서는 거의 무시되었다. 운야메지(Unyamezi)나 우수쿠마(Usukuma)와 같은 지역에서 농장 노동자로 대규모 인력이 이동하면서 해당 지역 사회와 경제는 종종 파괴적인 영향을 받았다.[27][28][29][30]

이러한 모든 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독일 제국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본국 재무성의 보조금에 의존해야 했다. 라이너 테츨라프(Rainer Tetzlaff)는 식민지 경제 발전에 대한 연구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이민자 정착지로서, 원자재 공급자로서, 수출 시장으로서 독일 제국에 실질적인 중요성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26]

5. 교육

1914년 3월 독일령 동아프리카 학교의 교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등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소유국가들과는 다르게, 독일은 초등학교, 중등학교 및 직업 훈련 학교를 개설하여 아프리카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은 당시 다른 열대 아프리카 지역과 비교했을 때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교육 수준에 대해 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교사의 채용 조건, 교육 과정, 교과서, 교재 등 모든 것이 다른 열대 아프리카의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달했다."[64][32][56]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0년 후이자 영국이 해당 지역을 통치한 지 6년이 지난 1924년, 현지를 방문한 미국의 펠프스-스토크스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며 독일 통치하 교육의 성과를 인정했다.

: "학교에 관련해 독일인은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다. 교육을 독일인이 실시한 수준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32][56]

학교를 뜻하는 스와힐리어 단어인 ''shule''는 독일어 단어 ''Schule''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독일 교육 시스템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35]

6. 유산

(내용 없음)

6. 1. 지명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 지명은 한동안 현지 지명의 독일어 철자를 유지했는데, 예를 들어 우지지는 "Udjidji", 킬리만자로 산은 "Kilimandscharo", 아루샤-치니는 "Kleinaruscha", 현재 모시로 알려진 도시는 "Neu-Moschi"로 불렸다. (키고마는 한때 "Rutschugi"로 알려졌다.)[43]

많은 지역이 아프리카 이름을 얻거나 이전 이름을 되찾았다:[44][45][46][47]

독일어 지명현재/아프리카 지명비고
알트 랑겐부르크 (Alt Langenburg)Ikombe[45]
베르크프리덴 (Bergfrieden)Mibirizi[45]
비스마르크부르크 (Bismarckburg)카상가탕가니카 호 남동쪽 끝[46][45]
엠마베르크 (Emmaberg)Ilembule[45]
피셔슈타트 (Fischerstadt)롬보[45]
프리트베르크 (Friedberg)Nyakanazi[45]
고토르프 또는 노이-고토르프 (Gottorp / Neu-Gottorp)우빈자탕가니카 호 북동쪽 근처
호엔프리데베르크 (Hohenfriedeberg)Mlalo[45]
호프눙스회 (Hoffnungshöhe)키사라웨[45]
카이저아우에 (Kaiseraue)Kazimzumbwi[45]
키론다탈 (Kirondathal)키론다탈금광
랑겐부르크 및 노이-랑겐부르크 (Langenburg / Neu-Langenburg)투쿠유니아사 호 북쪽[45]
로이도르프 (Leudorf)리가가[45]
마리아힐프 (Mariahilf)이굴와[45]
마리엔탈 (Marienthal)우셰투[45]
노이-베텔 (Neu-Bethel)Mnazi[45]
노이-본 (Neu-Bonn)미케세[45]
노이-호르노우 (Neu-Hornow)슈메북동부의 파레 산맥
노이-랑겐부르크 (Neu-Langenburg)Lumbira[45]
노이-트리어 (Neu-Trier)음불루[45]
페터스베르프트 (Peterswerft)난시오[45]
작센발트 (Sachsenwald)세켄케금광
성 모리츠 (St. Moritz)갈룰라[45]
스핑크스하펜 (Sphinxhafen)리울리니아사 호 동쪽 해안
비트하펜 (Wiedhafen)만다니아사 호 동쪽 해안
빌헬름스탈 또는 빌헬름스도르프 (Wilhelmstal / Wilhelmsdorf)루쇼토북동부의 팡가니 강
비스만하펜 (Wissmannhafen)카상가비스마르크부르크 항구, 탕가니카 호 남동쪽 끝
카이저-빌헬름-슈피체 (Kaiser-Wilhelm-Spitze)킬리만자로 산
바이트만스하일 (Weidmannsheil)타보라
베르겐 (Bergen)음베야


6. 2. 사회 기반 시설

광물 자원 탐사 과정에서 남동부 린디 주 방면의 중생대 지층(텐다구루 지층)에서 공룡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1909년에는 이 지역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완전한 골격이 발굴되었다. 이 브라키오사우루스 표본은 독일 본국으로 수송되어 수십 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쳤으며,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룡 골격 표본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베를린의 훔볼트 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되어 있다. 또한 켄트로사우루스 역시 같은 지역에서 독일 발굴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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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서적 Koloniales Jahrbuch https://archive.org/[...] Berlin : C. Heymann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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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서적 Deutsches Kolonial-Lexikon 2017-08-31
[47] 서적 Deutscher kolonial-kalender und statistisches Handbuch...: Nach amtlichen Quellen neu Bearb https://archive.org/[...] Deutscher kolonial -verlag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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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간행물 Das Ende eines Kolonialreiches. Campus, Frankfurt a.M./New York
[50] 문서 この沿岸部も1888年にはドイツ・イギリスの租借地にされた。
[51] 문서 オスマン帝国に由来しアラビア語で「兵士」を意味する。その後アフリカのヨーロッパ植民地におけるアフリカ人兵を指すようになった。
[52] 문서 Haupt, Deutschlands Schutzgebiete in Übersee 1884-1918, p. 32
[53] 문서 Haupt, p. 30
[54] 문서 Haupt, p. 155
[55] 문서 Miller, Battle for the Bundu, p. 22
[56] 문서 Miller, p. 21
[57] 간행물 Das Ende eines Kolonialreiches. Campus, Frankfurt a.M./New York
[58] 문서 2.7배
[59] 문서 Originally an Arabic word for 'soldier' adopted from Osmanli, i.e. Ottoman Turkish, then applied to indigenous African troops in European colonies.
[60] 문서 Haupt, Deutschlands Schutzgebiete in Übersee 1884-1918, p. 32
[61] 문서 SS-Oberführer Julian Scherner was born here in Bagamoyo in 1895.
[62] 문서 Haupt, p. 30
[63] 문서 Haupt, p. 155
[64] 문서 Miller, Battle for the Bundu,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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