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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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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궁과 월지는 신라 시대 별궁으로, 본래 월지(月池)로 불리다가 조선 시대에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다.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되어 연못과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나라의 경사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연못, 건물 터,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3개의 건물이 복원되어 공개되었다. 2011년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복원 사업 과정에서 유네스코의 반대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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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동궁과 월지
대한민국 지정 사적 제1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위치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517번지 일대
면적350,042m²
종류유적 (궁궐, 별궁, 원지)
지정 번호사적 제18호
지정 날짜1963년 1월 21일
건설 시기통일신라 시대
관리 주체경주시 외
웹사이트국가문화유산포털
명칭
한국어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다른 이름임해전지 (臨海殿址), 안압지 (雁鴨池)
로마자 표기Gyeongju Donggunggwa Wolji
일본어慶州 東宮と月池 (Gyeongju Donggū to Wolchi)
세계유산 정보
등재 기준문화유산: (2), (3)
등재 연도2000년
속하는 유산경주 역사 지역
ID976
상세 정보
특징통일신라 시대의 궁궐, 별궁, 원지

2. 명칭과 시대

'''동궁과 월지'''는 원래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 멸망 후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문인들이 안압지라는 이름을 붙였다.[82]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 나타난다.[82]

1980년에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을 조사한 결과, 신라 시대에 이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83]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시대에 궁궐 안에 새로운 연못을 만들고, 이 연못에 꽃과 새들이 번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쇠퇴하던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2]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동궁은 문무왕 19년(679년)에 창건되었다.

안압지 부근에서는 의봉 4년(679년)의 "의봉4년개토"명 평와가 발견되었고,[25][30] 안압지 발굴 조사(1975년 3월-1976년 12월[31])에서는 조로 2년(680년)명 전(磚|전중국어)[35]「보상화문전」이 출토되었다.[36][37]

신라 시대의 원지 명칭은 '''월지'''였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에는 헌덕왕 14년(822년)에 왕의 동생 수종(후일 흥덕왕)을 부군(왕태자)으로 삼아 '''월지궁'''에 있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12][42]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무왕이 만든 안압지 서쪽에 '''임해전'''이 있었고, 그 초석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19]

"임해"라는 이름은 연못을 바다로 비유한 것이다.[45] 동궁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임해전에서 효소왕 6년(697년) 9월,[49][50] 혜공왕 5년(769년),[52] 헌강왕 7년(881년)에 연회가 개최되었다.[53] 경순왕 5년(931년)에는 고려 태조를 임해전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54]

다음은 사료에 언급된 내용이다.

왕조연도기록
문무왕 14년 2월674궁 내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금수를 길렀다.
문무왕 19년 8월679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 6년 9월697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덕왕 11년 8월752동궁아를 경덕왕 11년에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
혜공왕 5년 3월769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성왕 2년 4월800폭풍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가고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 5년 7월804임해전을 중수하고 새로 동궁 만수방을 지었다.
헌덕왕 14년 1월822동복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
문성왕 9년 2월847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안왕 4년 9월860왕이 임해전에 군신을 모았다.
경문왕 7년 1월867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강왕 7년 3월881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연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하였다.
경순왕 5년 2월931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도 근방에 이르러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로 나 와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마주 대하며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예우하고 임해전에 모셔 연회를 베풀었다.


3. 역사

동궁과 월지는 원래 '월지'(月池)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신라 왕궁인 반월성 가까이에 있었다. 1980년 발굴된 토기 파편 등을 통해 신라 시대에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82]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조성되었으며,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이 건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동궁과 월지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궁과 월지 관련 내용
연도기록 내용
문무왕14년 (674년)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문무왕19년 (679년)동궁을 짓고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지었다.
효소왕6년 (697년)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덕왕11년 (752년)동궁아(衙)를 설치하고 상대사 1인, 차대사 1인을 두었다.
혜공왕5년 (769년)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성왕2년 (800년)폭풍으로 인해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괴되었다.
애장왕5년 (804년)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 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헌덕왕14년 (822년)왕의 동생 수종을 부군(副君)으로 삼고 월지궁에 들였다.
문성왕9년 (847년)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안왕4년 (860년)임해전에서 군신을 모았다.
경문왕7년 (867년)임해전을 중수하였다.
헌강왕7년 (881년)임해전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경순왕5년 (931년)고려 태조를 임해전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조선 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난다.[82] 2011년 7월부터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83]

4. 발굴



동궁과 월지의 항공사진. A 건물지가 표시되어 있다.


동궁과 월지 부근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1970년대와 21세기에 걸쳐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1970년대 발굴조사에서는 연못과 건물터, 3만 3천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21세기에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도로 동궁 관련 시설 및 신라 왕궁의 화장실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4. 1. 일제강점기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1929년부터 2주 동안 경주의 신라시대 도성지와 사지를 조사한 내용을 담은 《조선건축사론》에 동궁과 월지 부근에 대한 최초의 조사 자료가 실려 있다. 이때 월성의 건축에 대한 내용에서 안압지와 임해전지에 대해 간단히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월지에 접한 건물지 1동을 임해전지로 비정하고 신라시대 궁전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예로 언급하였으며, 임해전지와 안압지를 《삼국사기》 기사에 등장하는 동궁이나 월지와 구분하여 병렬적으로 나열하였다.[86][87]

4. 2. 1970년대

1974년 11월부터 경주시는 방치되어 있던 안압지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경주사적관리소는 호수 중심부에 2m 가량의 트렌치를 내고 조사하던 중, 12월 16일에 명문 기와 등 다량의 신라시대 유물을 발견했다.[88] 이를 문화재위원회 및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하여 1975년 3월 24일부터 경주고적발굴단이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87]

발굴조사는 연못 조사와 연못 주변 건물지 조사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연못 조사는 1975년 3월 24일부터 1976년 3월 25일까지 1년간, 건물지 조사는 1976년 5월 10일부터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87] 발굴 내역은 1978년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로 출판되었다.[89]

월지 서편과 남편에서 건물지들이 확인되었으며, 서편의 A건물지에 대한 발굴기록은 2018년에 보고서로 발간되었다.[87]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진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연못에서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구 결과, 연못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연못의 서쪽에서 남쪽에 걸쳐 5개의 건물 터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수로 시설도 확인되었다.

약 3만 3천 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정교하게 디자인된 기와, 건축 자재, 도자기, 금도금 불상, 장신구, 액세서리 및 기타 일상 용품 등 풍부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불교 미술과 신라 시대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2]

4. 3. 21세기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현황 및 구역별 위치도


200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동궁과 월지 북동쪽 일대에 대한 중장기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그 결과 동궁과 월지의 영역, 동궁 내 대형 건물지군, 담장, 배수로 등 동궁 관련 시설을 확인하였다.[90] 2012년과 2014년에는 각각 《경주 동궁과 월지 Ⅰ》과 《경주 동궁과 월지 Ⅱ》로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 성과를 공개하였다.[91]

2020년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 Ⅲ》보고서에서 동궁과 월지 북동쪽 지역 중 '가'지구에 대한 조사 내역을 발표하였다.[91] '가'지구는 약 6500m2 면적으로, 월지 북동쪽으로 지나가는 동해남부선 철로 북쪽 공간에 해당한다. 남북 담장을 중심으로 2기의 대형 적심 건물지와 깊이 10m가량의 대형 우물, 창고시설로 추정되는 줄기초[92] 건물지 등이 발굴된 곳이다.[91]

《경주 동궁과 월지 Ⅲ》에는 ‘가’지구 안에 있는 담장으로 나눠진 공간들과 그 공간 안의 건축 유구의 구조와 배치 등에 대한 조사 결과가 주로 담겨있다. 크고 작은 건물지 40동과 담장, 우물, 배수로 등 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각종 생활 시설, 기와와 벽돌, 토기와 도기, 금속 유물 등 591점의 선별된 유물이 수록됐다.[91]

특히, 조사 구역 남쪽에서 확인된 29호 건물지는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 시설, 오물 배수 시설까지 함께 발굴되어 신라 왕궁의 화장실 유구인 것으로 확인됐다. 화장실 유구는 초석 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되어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93]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변기형 석조물은 신라에서는 불국사에서, 백제에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있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이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4]

고급 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변기 시설과 오물 제거에 수세식 방식이 사용된 점,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 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의 전돌(쪼개어 만든 벽돌)을 깔아 마감한 점에서 통일신라 왕궁에서 사용된 고급 화장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된다.[94]

‘가’지구에서 나온 인골의 DNA 조사와 분자유전학적 분석, 함께 출토된 각종 동물(사슴, 개, 소, 남생이, 상어 등)의 뼈와 식물(밤나무, 복사나무, 잣나무, 참외 씨앗 등)의 유체 조사도 이루어졌다. 인골 분석을 통해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벼, 보리, 콩 등의 작물과 단백질을 얻기 위해 소, 개, 사슴 등을 섭취했던 결과를 확인하는 등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었으며, 동·식물 유체 분석을 통해 인근에 서식하던 동물들과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주변 식생 등도 추정하였다.[91]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8년에 ‘가’지구에 대한 기본 정비 계획을 마련하여 해당 유적 내 중요 유구에 대한 정비·활용안을 관련 지자체에 제안한 바 있으며, 2020년부터 ‘나’지구 발굴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91]

5. 유적

동궁과 월지의 유적은 크게 연못(월지)과 건물지, 그리고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나눌 수 있다. 1970년대 발굴 조사를 통해 연못의 구조, 건물 배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월지의 바닥에 여러 개의 트렌치가 조성되어 있다.


서안 석축 밑에 소도가 보인다.


1975년 발굴에 앞서 동궁과 월지 주변은 현황대로 기록되었고, 연못 서안(西岸)으로부터 남북 폭 2.5m의 트렌치 120개소를 설정하여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와 함께 연못 전 구역에 기준점 및 기준선 설정 측량작업도 이루어졌으며, 기준점은 남북 및 동서 각 10m로 구획되었다. 각 트렌치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연못 호안 주변에서 석축이 노출되어 호안석축의 축조공법과 내용이 확인되었다.[95]

경주 인왕동에 위치한 동궁과 월지는 경주국립공원의 일부이다. 약 730점의 유물이 경주국립박물관 특별 전시관인 안압지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임해전 터 또한 부지 내에 위치해 있으며, 이는 이 부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왕세자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유적은 복원되었지만, 다른 유적들은 자연 상태로 남아 있다.[4][5]

1975-1976년을 중심으로 한 발굴로 3만 3000여 점(그중 완형 1만 5000여 점[70])이 출토되었다.[75] 유물의 대부분은 7세기 말부터의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 주를 이루지만, 불상은 거의 9세기 후반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동물(거위, 오리, 염소, 사슴, 돼지, , [66])의 뼈도 출토되었다.[77]

5. 1. 월지

월지는 면적이 15658m2로, 동서 200m, 남북 180m 구역에 조성되었다. 연못의 서쪽과 남쪽은 건물의 부지로, 직선적이고 높은 석축으로 호안을 설치했으며, 동·북쪽 둑보다 2.5m 정도 높다. 반면 동·북쪽은 자연스럽고 복잡한 곡선을 이루며 바위와 흙을 쌓아 만든 산이 배치되었다.[57] 연못의 둘레는 1005m에 달한다.[45][58]

건물지 기단 석축은 물에 잠긴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된 부분의 축석 기법이 다르다. 물에 잠긴 부분은 모두 괴석(塊石)으로 면만 골라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된 부분은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맞추어 쌓았다. 그러나 장대석 기단 석축은 거의 파괴되어 밑에 한·두 단만 제 위치에 남아 있다.[87]

연못에는 3개의 섬이 설치되었는데, 북서쪽의 "중도(中島)"는 596m2, 중앙 약간 남쪽의 "소도(小島)"는 62m2, 남(남동)쪽의 "대도(大島)"는 1094m2[59], 모두 인공섬으로 주변에는 흙을 쌓아 높이 약 1.7m의 호안을 설치했다. 3개의 섬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따라 삼신산(봉래·방장·영주)을 상징하며, 더욱이 동·북쪽 둑의 흙으로 만든 산과 기암괴석으로, 사료에 있는 무산 12봉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60][61]

1974년부터의 문화재청 정비 사업에 따라[64], 1975-1976년에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통해 연못의 남동쪽 끝에 입수구, 북쪽 둑의 중간 부분(중도의 동쪽[45])에 출수구가 갖춰져 있었음이 확인되었다.[65] 특히 입수 장치에 설치된 6단계 구성 중[66], 2개의 석조는[67] 자라 모양을 하고 있으며, 통과한 물은 2단 폭포 형태로 연못에 쏟아졌다.[68] 또한 4단계로 구성된 배수구에는[66] 수위 조절을 위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69]

연못의 남동 모서리에서는 2단 수조(水槽)로 구성된 입수구를 확인하였다. 수조 양 쪽에는 넓적한 판석을 깔고, 그 아래는 3단으로 구분하여 물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입수구 쪽은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연못 바닥에는 큰 판석을 깔았다. 출수구는 중도의 동북모서리에서 확인되었다. 호안 석축 면에 장대석을 기초로 놓고 그 위에 높이 1.8m의 장방형 판석을 세우고, 판석에 상중하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물높이를 조절하였다.[87]

5. 2. 건물지

연못 발굴조사 후 연못 주변의 서편 및 남편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연못 서편 건물지 조사에서는 서쪽 호안 석축과 접한 5개의 독립된 건물지와 그 서편으로 독립된 건물지 여섯 개를 비롯하여 문지門址와 장랑지長廊址 등 많은 건물지와 배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다.[87][96][97] 각 건물지는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이거나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심 건물지 좌우로는 익랑으로 이어져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물 배치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그 속에 다시 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조선시대 궁궐 배치와 아주 유사하다. 서쪽의 호안 석축에 돌출되어 노출된 다섯 개의 건물지는 연못 내의 세 개 섬과 굴곡진 호안을 바라볼 수 있어서 연회나 휴식을 위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87][96][97]

연못 남쪽에서는 크고 작은 13개의 건물지와 9개의 원장垣墻 시설이 확인되었다. 연못 남쪽 호안 석축으로부터 약 30~60m 떨어진 범위에서 확인되었으며, 동서 범위는 120m에 걸쳐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건물지는 독립건물지이거나 상호 관련된 것으로, 대규모의 독립 건물과 장랑長廊 형식의 건물지, 그 부속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외 중복 건물지와 소규모이거나 규모가 불분명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87]

이때 동서 200m, 남북 180m의 대형 연못과 건물지군이 확인되었으며 '월지月池'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과 '동궁東宮'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679년인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 적힌 기와 역시 출토되어 그 조성 시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87]

서편 건물지 중 A건물지에 대한 보완조사가 2018년에 이루어졌는데, 정면 7칸에 측면 4칸짜리 건물로, 중심부에 적심이 발견되지 않아 정전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장경호가 발굴되어 그 연대가 7세기 중후엽으로 동궁의 축조 시기와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서·남쪽에는 건물, 회랑, 석축의 유구가 확인되었다.[70] 연못의 서쪽 둑을 따라 5개의 건물이 연못 쪽으로 돌출된 것이 확인되었으며[71][72], 서쪽 건물의 유구는 동서 17.8m, 남북 16m의 주전(主殿)을 중심으로 남·북에 건물을 배치하고, 북쪽 건물의 동·서에 익랑(翼廊)과 같은 건물이 갖춰져 있었으며, 이들 건물은 회랑으로 통하고 있었다. 또한 남쪽에도 몇 채의 건물 유구가 늘어서 있었다.[73][74] 그 남쪽 방향에는 현재 주차장이 있지만, 1980년의 발굴로 건물의 유구가 확인되어, 현재의 도로 부근까지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70]

5. 3. 유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3만여 점에 달하며, 주로 연못 서편 건물지 주변의 갯벌층에서 발견되었다. 유물은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칠기류, 철제류 등으로 분류된다.[87]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와전류이다. 1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편과 20여 종의 전돌이 발견되었다. 치미편, 귀면와, 이형와 등 5,7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조로2년 한지벌부군 약소사.....3월 3일 작강"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문 전편과 "의봉4년개토" 명문 기와는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87]
의봉사년개토가 적혀있다.


목칠류는 1,100여 점 이상 출토되었다. 목선, 건축부재, 묵서명 목간, 주령구 등의 목재류와 쟁반형 칠기, 찬합 등이 있다. 연못 동쪽에서 완형으로 출토된 목선은 길이 5.9m, 너비 1.2m, 높이 60cm로, 소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선수와 선미는 참나무 빗장목으로 연결되어 신라 시대 선박 건조 기술을 보여준다.[87]

그 외에도 14면체 주사위인 주령구, 목조 남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87]

5. 3. 1. 주령구

주령구의 발굴 당시 모습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에 출토된 14면체 주사위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져 있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cm2이고,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cm2로 각 면이 나올 확률은 거의 1/14로 균등하다. 재질은 참나무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출토된 진품은 서울연구소에서 유물 보존 처리 중 목질을 경화하는 장치에서 기기 오작동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불타 소실되었다.[98]

6. 복원 및 논란

1976년까지의 복원을 통해 확인된 유적지의 위치와 획득한 자재들을 바탕으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시작했다. 이때 3개의 전각이 복원되었으나, 이후 추가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9]

현재 동궁과 월지에는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이 복원 과정에서 전혀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신라 시대 궁궐 건축물은 조선 시대와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금동 장식 마개 등을 달아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건물이 금빛으로 빛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 기와를 활용했지만 마무리가 어설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청 또한 논란의 대상인데, 고려 말~조선 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칠했기 때문이다.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어, 삼국시대에 상록하단 단청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신라 시대 단청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여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6300억 정도를 들여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동궁과 월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유네스코는 충분한 고증 없이 무리하게 복원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100]

1976년 12월까지의 발굴 조사 이후, 안압지 복원 및 조성이 시작되었다. 연못 호안(護岸) 축조에는 발굴된 석재와 새로운 석재가 함께 사용되었다.[78] 확인된 5개 건물 중 3개 동의 복원 및 조축이 이루어졌고, 1980년부터 공개되었다.[6]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일부로 등록되었다.[10] 2011년 7월,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된 후, 2012년 경주시는 동궁의 정전 등 6개 주요 건물을 순차적으로 복원하는 종합 정비 기본 계획을 세웠다. 2017년 12월, 이듬해부터 건물 복원 예정지에 대한 발굴 조사와 보존·정비를 실시하고, 정전부터 복원을 시작할 것을 고시했다.[79] 2017년 문화재청의 승인을 얻은[80] 경주시는 세계유산센터의 승인을 받을 예정이었으나,[9] 세계유산센터는 고증 사료가 부족하고 추측에 의한 복원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81]

7.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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