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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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공왕은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경덕왕과 만월부인 김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왕은 원래 여자로 태어났으나 남자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8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만월부인의 섭정을 받았다.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고, 경덕왕 때 추진되었던 관제 개혁은 폐지되었다. 780년 김지정의 난 때 살해되었으며, 무열왕계의 직계 혈통은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다. 혜공왕 사후,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되었고, 신라는 하대 시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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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혜공왕 |
휘 | 김건운 (金乾運), 김천운 (金乾運) |
출생 | 758년 |
사망 | 780년 4월 |
신상 정보 | |
부왕 | 경덕왕 |
모후 | 경수왕후 |
왕후 | 신보왕후, 창창부인 |
재위 정보 | |
즉위 | 765년 |
폐위 | 해당사항 없음 |
시호 | 혜공대왕 (惠恭大王) |
묘호 | 없음 |
능묘 | 위치 정보 없음 |
생애 | |
출생 | 경덕왕과 경수왕후 사이에서 출생 |
즉위 | 8세의 나이로 즉위 |
주요 사건 | 잦은 반란과 정변으로 정치적 혼란 야기 |
암살 | 780년 4월, 반란군에 의해 왕궁에서 암살당함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교 |
2. 생애
2. 1. 탄생 설화
고려 후기의 명승(名僧)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전한다. 신라 35대 임금인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 고승(高僧) 표훈에게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표훈이 천제에게 청하였으나, 천제는 아들을 낳으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경덕왕이 나라가 망해도 좋으니 아들을 원한다고 간청하여, 만월부인이 아들 건운을 낳았다.경덕왕은 표훈에게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천제에게 청해주지 않겠소?"라고 부탁했고, 표훈은 "천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은 괜찮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라고 전했다. 왕은 재차 청했고, 천제는 "사내아이를 점지해 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왕은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왕위를 이을 아들이 생기면 만족하오"라고 말했다. 결국 만월왕후가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혜공왕으로 즉위했으나, 8세였기에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혜공왕은 본래 여자였으나 남자가 되었기에, 여자의 몸짓을 하고 비단 주머니를 차는 것을 좋아했으며, 결국 선덕왕 등에게 살해당했다.
2. 2. 치세
765년부터 78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65년부터 778년까지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하였고 778년부터 78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9]혜공왕 때 신라에는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768년 7월, 일길찬 (7등관) 대공·아찬 (6등관) 대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귀족 연합 체제 부활파로 추정되며, 왕도를 33일간 포위했으나 왕의 군대가 평정했다.[9] 770년 8월에는 대아찬 (5등관) 김융이 반란을 꾀하다 살해되었다. 김융은 조선 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운 김유신의 일족으로, 중앙 귀족에 대항하는 지방 세력을 대표하는 율령 체제 추진파로 보인다.[9] 775년 6월, 이찬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전 시중 김은거는 김융의 반란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귀족 연합 체제 부활파로 추정된다.[9] 같은 해 8월, 이찬 염상과 시중 (현직) 정문이 반란을 꾀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정문은 김은거가 물러난 후 시중에 취임하였으며, 귀족 연합 체제 부활파로 추정된다.[10]
경덕왕 때 단행된 관제 개혁은 혜공왕 때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 등 대신들의 주도로 모두 취소되었다.[9] 776년 정월에는 율령 체제를 강력하게 추진한 경덕왕이 당나라 풍으로 개명한 백관의 명칭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귀족 연합 체제파에 대한 양보로 보이지만, 같은 해 3월 창부(징세)의 사(3차관)를 8명 증원하는 등 율령 체제 추진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11]
767년 7월, 이찬 김은거를 당나라에 조공사로 파견하여, 768년에 당나라 대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왕모 김씨가 대비로 책립되었다. 이후에도 조공사·하정사를 자주 파견하여 당나라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9]
삼국사기에는 780년에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혜공왕이 난의 과정에서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시해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야사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이 김양상, 김경신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武烈王係)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9] 780년 2월,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중을 포위하였고, 4월에 상대등 김양상 (후의 선덕왕)이 이찬 김경신 (후의 원성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제거하였다. 혜공왕은 이 난리 중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9]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김양상은 무열왕계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덕왕이 되었다. 김양상은 사다함의 증손이자 내물왕의 10세손이라고 한다.[9] 혜공왕의 치세 종말과 함께 중대(中代) 신라는 끝나고, 왕위(王位) 투쟁과 호족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지는 하대(下代) 신라가 시작된다.
780년 4월, 혜공왕은 재위 16년 만에 내란 속에서 왕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사후, 신라 왕위를 계승한 김양상 (선덕왕)에 의해 혜공왕으로 시호되었다. 왕릉의 소재는 불명이다.[9]
3. 가계
증조부는 신라 제31대 왕 신문왕이고 증조모는 신목왕후 김씨이다. 조부는 신라 제33대 왕 성덕왕이고 조모는 소덕왕후 김씨이다.[12][13] 아버지는 경덕왕이며, 어머니는 경수왕후 김씨(만월부인 김씨)이다. 외조부는 김의충이며, 증외조부는 김순정이고, 증외조모는 수로부인이다.
왕후는 신파부인(신보왕후 유씨)으로 각간(角干) 위정(魏正)의 딸이자 이찬 유성(維誠)의 딸이다. 다른 왕후는 창창부인 김씨로 이찬 김장(金璋)의 딸이다.
4. 평가
5. 기타
5. 1. 에밀레종 전설

정식 명칭은 성덕대왕신종이며,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덕왕 시대부터 주조를 시작하여 혜공왕 7년(771년)에 완성되었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으며, 녹은 쇳물 속에 소녀를 제물로 던져 넣은 후에야 겨우 주조에 성공했고, 종을 치면 "에밀레(에밀레, 엄마)! "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에밀레의 종(에밀레 종)이라는 애칭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범종이며, 높이 333cm, 구경 227cm, 무게 25톤에 달한다. 대한민국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종소리에 관해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현재는 실제로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녹음된 오리지널 음원을 재생하여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작 과정에서 소녀를 녹은 쇳물 속에 던져 죽인 것에 대해서는, 물리적으로 인간의 신체에는 인이 많기 때문에, 구리에 인을 첨가하여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 전설의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현대에는 종을 만들기 위해 구리에 인을 첨가할 때는, 인광석에서 채취한 인을 사용한다.
참조
[1]
뉴스
[삼국유사 오디세이] 34. 황복사탑이 혜공왕을 점지한 천궁이었을까
https://www.kyongbuk[...]
2024-02-28
[2]
뉴스
[삼국유사 오디세이] 34. 황복사탑이 혜공왕을 점지한 천궁이었을까
https://www.kyongbuk[...]
2024-02-28
[3]
웹사이트
혜공왕(惠恭王)
http://encykorea.aks[...]
2018-05-13
[4]
서적
삼국사기·삼국유사(이병도 역)
http://www.krpia.co.[...]
[5]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1-08-26
[6]
웹사이트
누가 혜공왕을 시해했을까
https://h21.hani.co.[...]
2021-05-20
[7]
문서
삼국유사 관련 내용
[8]
문서
삼국사기 관련 내용
[9]
문서
삼국사기 관련 내용
[10]
문서
井上秀雄의 저서 관련 내용
[11]
서적
古代朝鮮
NHK出版
[12]
문서
삼국유사
[13]
문서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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