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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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덕왕은 효성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되었으며, 742년 일본 사신의 방문을 거부하고, 753년에도 오만한 일본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다. 그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했던 시기에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여 관직과 제도를 개편하고, 9주 5소경으로 행정 구역을 개혁했다. 불교 중흥을 위해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고 불국사 등을 건립했으며,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제작했다.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을 했으며,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시켜 귀족 연합 세력과의 타협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지방 지명을 중국식으로 변경하고, 관료 기구를 정비했다. 765년에 사망하여 경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경주시 내남면의 경덕왕릉이 사적 제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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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경덕왕 때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때 완성된 토함산 중턱의 석굴 사찰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조각상들과 독창적인 건축미로 한국 불교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경덕왕 -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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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의 아들인 성덕왕은 36년간 신라를 다스리며 당과의 외교, 구휼 사업, 관료 기구 정비, 국방 강화 등 국내외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 8세기 한국의 군주 - 효소왕
효소왕은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신문왕의 아들이자 신목왕후의 아들이며, 당나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받고 국내 통치를 시작하여 서시전과 남시전을 설치하고 일본 사신을 접견했으며 이찬 경영의 모반을 진압하다가 1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덕왕 |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덕왕 |
한자 | 景德王 |
로마자 표기 | Gyeongdeok Wang |
개인 이름 (한글) | 김헌영 |
개인 이름 (한자) | 金憲英 |
개인 이름 (로마자 표기) | Gim Heonyeong |
왕위 | |
왕국 | 통일신라 |
재위 기간 | 742년–765년 |
즉위 년도 | 742년 |
선왕 | 효성왕 |
후왕 | 혜공왕 |
생애 | |
출생 년도 | 723년 |
출생 장소 | 경주, 경북, 신라 |
사망 년도 | 765년 |
사망 장소 | 경주, 경북, 신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성덕왕 |
어머니 | 소덕왕후 |
배우자 | 만월부인 |
기타 정보 | |
능묘 | 경덕왕릉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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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대 국왕 | |
목록 | 제35대 신라 국왕 |
2. 생애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효성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 힘써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고, 굴불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건립하였다. 특히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은 국보 제29호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751년에는 불국사가 완공되었다.[24][25]
경덕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당나라 제도를 본떠 제반 제도와 관직을 개편하고, 757년에는 전국 행정체제와 행정단위 명칭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행정구역은 9주 5소경으로 정비되었다.(→ 신라의 행정 구역 참조).[24][25] 757년 3월에는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으며, 국학을 태학감으로, 집사부의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 관리 탄핵을 위한 사정부를 설립하고,[17] 정찰을 배치하여[18] 관료 기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752년에는 징세 업무 증대에 대응하여 창부(징세)의 사(3차관)를 3명 증원하였다.
757년 12월, 지방 통치를 위해 고구려, 백제 지역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지명을 중국식 한자 2자로 변경하고, 759년 정월에는 중앙 관청 및 관직명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율령 체제하에서 지방 행정을 재편하려는 의도였다.[19] 그러나 757년 3월, 관료 봉급 제도를 폐지하고 녹읍 제도를 부활시켜, 귀족 연합의 요구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0]
762년 5월에는 황해도 방면에 육성을 쌓아 발해를 방비하였다. 또한, 동궁과 영창궁 수선, 궁중에 대지 조성, 문천에 월정교·춘천교 가설, 영흥사·원연사 수축 등 토목 사업을 벌였다.
재위 24년 만인 765년 6월에 사망하여 모기사한국어(『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묻혔다. 경주시 내남면의 사적 제23호가 경덕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다.
2. 1. 당과의 관계
경덕왕은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743년에는 당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사지절충녕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직접 주석을 단 『효경』을 받기도 했다.[16] 이후에도 왕제를 하정사로 파견하고 여러 차례 조공하는 등 당과의 친선을 이어갔다.2. 2. 일본과의 관계
경덕왕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전의 저자세 외교에서 벗어나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742년 10월과 753년 8월에 일본 사신이 방문했으나, 경덕왕은 그들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22][23] 이는 성덕왕 때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된 것으로, 당나라와의 관계 회복과 발해의 외교적 변화에 따른 결과였다.[16]3. 업적
경덕왕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742년과 75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사신이 방문했으나, 무례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22][23]
경덕왕은 당나라 제도를 본떠 여러 제도와 관직을 개편하고, 757년에는 전국의 행정 체제와 행정 단위 명칭을 한자식으로 고치고 9주 5소경으로 행정 구역을 정비했다.(→ 신라의 행정 구역 참조).[24][25]
불교 중흥에도 힘써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고, 굴불사, 영흥사, 원연사, 불국사 등의 절을 세웠다.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만들게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했다. 성덕대왕 신종은 맑고 멀리까지 울리는 소리로 유명하며,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자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당나라와 활발히 교역하며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당에서는 선왕의 관작을 계승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743년에는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사지절충녕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되었다. 현종이 직접 주석을 단 『효경』을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왕제를 하정사로 당나라에 파견하고, 여러 차례 조공을 하는 등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성덕왕 때부터 대립이 시작되었다. 발해가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 일본에도 접근하면서, 신라와 일본의 외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양국 간 사신 왕래는 있었으나, 정부에서는 사신을 공식적으로 맞이하지 않았다.[16]
751년에는 불국사가 완공되었고, 757년 3월에는 녹읍이 다시 지급되었다. 국학을 태학감이라 고치고, 집사부의 중시를 시중으로 고쳤다.
경덕왕은 월성 남서쪽에 동서 약 40미터, 남북 약 50미터 크기의 연못을 건설하기도 했다.[14]
3. 1. 중앙 집권 강화
경덕왕은 정부 조직과 관직 명칭, 그리고 관례를 정비하여 신라의 중앙 집권화를 더욱 강화하려 했다.[1] 지방 귀족이 아닌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지역을 다스리는, 중국식 통치 체제와 유사한 정부 시스템을 만들고자 노력했다.[1]경덕왕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명칭 관례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기술자들의 관청 명칭이 “전(典)”에서 “방(房)”으로 바뀌었고,[5] 대장장이 직책도 철유전(鐵鍮典)에서 축야방(築冶房)으로 변경되었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같았다.[5][7]
경덕왕 시대에는 지명 또한 표준화되었다. 『삼국사기』에는 757년 신라와 정복한 고구려, 백제의 지명을 중국식 이름으로 표준화한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6] 이 기록에는 새로운 표준 중국식 이름과 원래 이름의 음역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식 이름의 의미와 유사하다.[6] 예를 들어, 현재 경상남도에 있는 산음현(山陰縣)은 신라 시대에는 집음촌(集陰村)이라고 불렸으나, 산음으로 개명되어 궐성군(闕城郡)에 편입되었다.[8]
757년 12월에는 지방 통치를 위해 고구려, 신라, 백제의 구주, 오소경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지명을 고유어에서 중국식 한자 두 글자로 변경했다.[19] 759년 정월에는 중앙 관청과 그에 속하는 관직명에 대해서도 중국식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지명 개칭은 단순히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삼국 시대의 전통을 고려한 지방 행정을 율령 체제에 맞게 재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19]
관리들을 탄핵하는 기능을 가진 사정부를 설립하고,[17] 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해 정찰을 배치하는[18] 등 관료 기구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752년에는 창부(징세)의 사(3차관)를 3명 증원하여 징세 업무 증가에 대응하는 등 왕권과 국력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757년에는 상대등 김사인을 병을 이유로 해임하고, 763년에는 후임 김신충도 정치적 책임을 물어 파면했다. 상대등은 신라 중앙 귀족 연합 세력의 정점에 있는 유력자로서, 일왕 대에는 사직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경덕왕 대에는 상대등의 지위 자체가 저하되어 중앙 관료제에 편입된 일관직에 불과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율령 체제를 추진하는 정책과 함께, 757년 3월에는 관료에 대한 봉급 제도를 폐지하고 녹읍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는 토지와 인민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신문왕 시대(689년)에 녹읍 제도에서 봉급 제도로 이행한 지 70년도 되지 않아 이루어진 것으로, 지역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 연합의 요구에 타협한 결과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율령 체제 추진파와 귀족 연합 체제로의 복귀파 사이에 정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3. 2. 행정 제도 개혁
경덕왕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효성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덕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당나라 제도를 본떠 행정 제도를 개혁하였다. 757년에는 전국의 행정 체제 및 행정 단위 명칭을 한자식으로 바꾸고, 행정 구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신라의 행정 구역 참조).[24][25]경덕왕은 중앙 관료제를 강화하기 위해 752년에는 징세 업무를 담당하는 창부의 차관급 인사를 3명 증원하였고,[17] 관리 감찰을 위해 정찰을 배치하였다.[18] 762년 5월에는 현재의 황해도 지역에 오곡(서흥), 곽암(봉산), 한성(재령), 지성(해주), 덕곡(곡산)의 6개 성을 쌓아 발해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 외에도 동궁과 영창궁을 수리하고, 궁중에 대지를 조성하는 등 토목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경주시 남천에는 월정교와 춘천교를 건설하였고, 영흥사와 원연사 등을 수축하였다.
3. 2. 1. 지명 및 관직명 개칭
경덕왕은 한국의 중앙 집권화를 더욱 추진하기 위해 정부 조직과 관직 명칭 관례를 정비했다.[1] 지방 귀족이 아닌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지역을 통치하는 중국식 통치 체제와 유사한 정부 시스템을 수립하고자 노력했다.[1]경덕왕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원에서 명칭 관례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기술자들의 관청 명칭이 “전(典)”에서 “방(房)”으로 바뀌었고,[5] 대장장이 직책도 철유전(鐵鍮典)에서 축야방(築冶房)으로 변경되었는데, 본질적인 의미는 동일하다.[5][7]
757년 12월, 경덕왕은 지방 통치를 목적으로 구주·오소경을 포함한 전국 각지의 지명을 고유어에서 중국식 한자 2자로 변경했다.[19]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757년 신라와 정복한 고구려, 백제의 지명을 중국식 이름으로 표준화한 목록이 있다.[6] 기록에는 새로운 표준 중국식 이름과 원래 이름의 음역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식 이름의 의미와 유사하다.[6] 예를 들어 현재 경상남도에 있는 산음현(山陰縣)은 신라 시대에는 집음촌(集陰村)이라고 불렸으나, 산음으로 개명되어 궐성군(闕城郡)에 편입되었다.[8]
759년 정월에는 중앙 관청과 그에 속하는 관직명에 대해서도 중국식으로 변경했다.[19] 지명 개칭은 주에 소속된 군현의 구역 개정도 함께 실시하여, 단순한 미명 개칭이 아니라, 종래의 삼국 시대의 전통을 고려한 지방 행정을 율령 체제의 입장에서 재편 추진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19]
3. 2. 2. 녹읍 부활 논란
757년 3월, 관료에 대한 봉급 제도를 폐지하고 녹읍 제도를 부활시켰다. 신문왕 시대(689년)에 토지와 인민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녹읍 제도에서 봉급 제도로 이행했지만, 70년도 못 되어 제도를 복구한 것은 지역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 연합의 요구에 타협한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율령 체제 추진파와 귀족 연합 체제로의 복귀파 간의 정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3. 3. 불교 진흥
경덕왕은 불교 진흥에 힘써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고, 굴불사, 영흥사, 원연사, 불국사 등의 절을 세웠다.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어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은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소리로 유명하며,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속칭 에밀레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자 국보(29호)로 지정되었다.3. 3. 1. 불국사와 석굴암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건축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덕대왕신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지만,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1][2][10] 경덕왕은 산치 대탑과 바르후트 탑의 양식을 본떠 성덕왕의 능을 만들기도 했다.[4]경덕왕은 불교 건축에도 많은 지원을 했다. 751년 재상 김대성이 석굴암 건립을 시작했고, 같은 해 불국사와 다보탑 건립도 감독했다.[2][11][12] 경덕왕은 원표화상의 도움에 감사하며 보림사에 장생표를 세웠다.[13]
경덕왕 시대에 불국사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다음 혜공왕 시대까지 이어져 완성되었다.
4.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왕 | 성덕왕 | |
모후 |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 | |
이복형 | 효상태자(孝殤太子) | |
이복누나 | 사소부인 | |
형 | 효성왕 | |
왕후 | 삼모부인 김씨(三毛夫人 金氏) |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 |
왕후 | 만월부인 김씨(滿月夫人 金氏) |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
아들 | 건운(乾運) | 760년 태자 책봉, 765년 혜공왕 즉위 |
외조부 | 김정명(金正明) | 642년 ~ 692년 |
외조모 | 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 金氏) | 655년 ~ 700년 |
5. 문화재
경덕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건축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명명하고 제작을 지시한 성덕대왕신종이다.[1][2][10] 성덕대왕신종 제작은 742년에 시작되어 혜공왕 재위 기간에 완성되었다.[10] 성덕대왕의 능 또한 경덕왕에 의해 산치 대탑과 바르후트 탑 양식에 맞춰 완성되었다.[4]
경덕왕은 불교 건축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751년에는 재상 김대성의 주도로 석굴암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에 불국사와 다보탑 건립도 감독하였다.[2][11][12] 또한 경덕왕은 행정 개혁을 도운 원표화상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보림사에 장생표를 건립하였다.[13]
경덕왕이 월성 남서쪽 지역에 동서 약 40m, 남북 약 50m 크기 연못을 건설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4]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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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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