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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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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북 9성은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 정벌 후 쌓은 9개의 성을 의미한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이후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했고, 그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성장하여 완안부가 고려를 침략하자,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을 정벌했다. 예종 2년(1107년)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함주 등 9성을 쌓았으나, 여진족의 반격과 9성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예종 4년(1109년)에 9성을 반환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평야 일대, 함경남도 일대, 두만강 이북 지역 등 3가지 설이 존재한다. 9성 반환 이후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하여 고려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고, 결국 고려는 금에 사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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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
개요
동북 9성 추정 지도
동북 9성 추정 지도
한글동북 9성
한자東北九城
히라가나도호쿠 규조
가타카나톤부 쿠손
상세 정보
정의고려가 쌓은 성
관련 인물윤瓘
관련 정책북진 정책
관련 군사 조직별무반
관련 방어 시설천리장성
위치 관련 정보
제1설함관령 이남에서 정평 이북의 넓은 의미의 함흥평야 일대
제2설길주 또는 마운령 이남에서 정평까지의 주로 함경남도 일대
제3설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이북으로 보고, 그보다 남쪽에서 정평까지의 함경도 일대
비고제2설이 가장 유력함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9성 설치 이전의 역사적 배경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이후 북방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부터 함경도 영흥 지역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장성의 동북쪽에는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아가던 여진족이 있었는데, 12세기 초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며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초기 여진족 정벌 시도에서 임간윤관이 연이어 패배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예종 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여진 정벌을 준비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후 동북 9성 설치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1]

2. 1. 고려와 여진의 관계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부터 현재의 함경도 영흥 지역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했다. 이 천리장성의 동북쪽에는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동번(東蕃)이라고도 불렸으며 생여진 계통에 속했다. 여진족은 함경도를 비롯하여 두만강 유역, 더 나아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까지 넓게 분포하여 살고 있었다. 다수의 여진족은 유목 생활을 영위했지만, 함경도 해안 지역이나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는 농경에 종사하는 부족들도 존재했다. 당시 여진족은 통일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1]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진족의 한 부족인 완안부가 점차 강성해졌다. 완안부는 갈란전(曷懶甸) 지역, 즉 현재의 마천령 이남부터 정평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을 습격하여 본래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족 마을들을 점령했다. 심지어 정평 부근의 천리장성 근처까지 출몰하며 고려의 국경을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임간 등을 파견하여 여진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윤관을 다시 보내 정벌을 시도했지만, 윤관 역시 큰 패배를 겪고 겨우 화약을 맺고 돌아와야 했다. 임간과 윤관의 연이은 패배는 정평의 천리장성 바깥 지역에 있던 여진족 마을들이 모두 완안부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1]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윤관은 기존의 군사력만으로는 여진족 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숙종에게 정규군과는 별도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창설할 것을 건의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그리고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숙종은 여진 정벌의 뜻을 품고 별무반 창설을 추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예종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여진 정벌을 준비하게 된다[1]

2. 2. 거란과의 전쟁과 천리장성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겪은 후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압록강 하구에서 현재의 함경도 영흥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했다. 이 천리장성의 동북쪽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동번(東蕃)이라 불렸으며 생여진의 한 갈래였다. 여진족은 함경도를 비롯하여 두만강 유역, 더 나아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 등 넓은 지역에 걸쳐 거주했다. 다수의 여진족은 유목 생활을 영위했으나, 함경도 해안 지역이나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는 농경에 종사하는 부족들도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하나의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1]

그러나 여진족의 여러 부족 중 완안부가 점차 강성해지면서 갈란전(曷懶甸) 지역(오늘날 마천령 이남, 정평 이북)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완안부는 본래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족 마을들을 점령하고, 나아가 정평의 천리장성 부근까지 출몰하며 고려의 국경을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임간 등을 파견하여 여진족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다시 윤관을 보내 정벌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큰 전투에서 패배하고 겨우 화약을 맺고 돌아오는 데 그쳤다. 임간과 윤관의 연이은 패배는 정평의 천리장성 바깥 지역에 있던 여진족 마을들이 모두 완안부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1]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윤관은 당시 왕이었던 숙종에게 건의하여 정규군과는 별도로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사 조직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별무반은 말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인 신기군, 말이 없는 자들로 이루어진 보병 부대인 신보군, 그리고 승려들로 조직된 강마군으로 구성된 특수 군단이었다. 숙종은 여진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뒤를 이은 예종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진 정벌을 추진하게 된다[1]

2. 3. 여진족의 성장과 완안부의 등장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현재의 함경도 영흥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의 동북쪽 지역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생여진 계통으로 동번(東蕃)이라 불렸다. 여진족은 함경도에서부터 두만강 유역, 더 나아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까지 넓게 퍼져 살았다. 대부분의 여진족은 유목 생활을 했으나, 함경도 해안 지역이나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는 농사를 짓는 부족들도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1]

그러나 12세기 초, 여진족의 한 부족인 완안부가 점차 강성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완안부는 함경도 남부의 갈란전(曷懶甸) 지역(오늘날 마천령 이남, 정평 이북)을 습격하여 본래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족 마을들을 점령했다. 나아가 정평의 천리장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의 국경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임간 등을 파견하여 완안부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윤관을 보내 정벌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크게 패하여 결국 화약을 맺고 돌아오는 데 그쳤다. 임간과 윤관의 연이은 군사적 실패로 인해 정평의 천리장성 바깥 지역에 있던 여진족 마을들은 모두 완안부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1]

잇따른 패배에 위기감을 느낀 윤관은 당시 왕이었던 숙종에게 여진족 정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 편성을 건의했다. 그 결과 기존의 정규군과는 별도로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가 조직되었다. 별무반은 말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인 신기군(神騎軍), 말이 없는 보병 부대인 신보군(神步軍), 그리고 승려들로 이루어진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되었다. 숙종은 여진 정벌의 뜻을 품고 별무반 창설을 추진했으나, 정벌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예종이 아버지 숙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본격적인 여진 정벌을 준비하게 된다[1]

3.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설치

예종 2년(1107년), 장군 윤관은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이듬해인 1108년에는 정벌한 지역에 9개의 성을 쌓았다.[4]

그러나 9성을 개척한 지 1년 만인 예종 4년(1109년), 고려 조정은 윤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게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하였고, 일부 고려군이 해당 성에 남아 여진족들을 다스렸다.

3. 1. 별무반 편성

여진족의 한 갈래인 완안부가 세력을 키워 함경도 남부의 갈란전(曷懶甸) 지역을 습격하고, 고려에 속해 있던 여진족 마을들을 점령하며 정평의 천리장성 부근까지 진출하였다.[1] 이에 고려는 임간을 보내 여진족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였고, 다시 윤관을 파견했지만 그 역시 큰 손실을 입고 화약을 맺고 돌아와야 했다. 이로 인해 천리장성 바깥의 여진족 마을들은 완안부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1]

거듭된 패배를 겪은 윤관은 기존의 군사 체계로는 강력한 여진 기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숙종에게 새로운 군대의 편성을 건의하였고, 그 결과 정규군과는 별도로 특수 부대인 별무반(別茂班)이 조직되었다.[1] 별무반은 말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기병 부대인 신기군(神騎軍), 말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 구성된 보병 부대인 신보군(神步軍), 그리고 승려들로 이루어진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정예 부대였다. 이는 당시 고려의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북방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비록 숙종은 여진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예종이 그 유지를 이어받아 별무반을 중심으로 북방 경략을 추진하게 된다.[1]

3. 2. 9성 축조

예종 2년(1107년), 윤관은 원수로, 오연총은 부원수로 임명되어 별무반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여진족의 135개 촌락을 점령하고 5,000여 명을 포로로 잡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정벌 이후, 윤관은 1108년까지 점령지에 9개의 성을 쌓았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 9성의 이름이 함주(咸州, 현 함흥시), 복주(福州, 현 단천시), 영주(英州), 길주(吉州, 현 길주군), 웅주(雄州), 통태진(通泰鎭), 진양진(眞陽鎭), 숭녕진(崇寧鎭), 공험진(公嶮鎭)으로 기록되어 있다.[4][3]

조선 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윤관이 "함주에서 공험진(公險鎭)까지 9성을 쌓고,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를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 이는 고려의 적극적인 북방 영토 개척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9성 축조 이후, 고려는 남쪽 지방의 백성 6만 9천여 호를 이주시켜 새로 개척한 지역을 안정시키려 하였다.[1] 그러나 이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러 기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학계의 지속적인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2]

4. 9성의 위치 논쟁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사료 해석의 차이와 기록의 불분명함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이다. 특히 핵심적인 위치인 공험진(公險鎭) 등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 주요 사료마다 다르게 나타나, 9성의 전체적인 범위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4. 1.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세종대왕 시기, 김종서육진 개척 이전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기록에는 공험진(公險鎭)에 이르는 경로가 상세히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소다로(所多老, 현재 함경북도 경원군 룡당리)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於豆下峴)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60리를 가면 동건리(童巾里, 현재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 옛 종성군 종성면 동관동)에 이른다. 동건리에서 북쪽으로 약 3리를 가서 두만강 여울(豆滿江灘)을 건너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나온다. 여기서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100리를 가면 영가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 소하강(蘇下江)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진(鎭)은 윤관이 설치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동일하게 실려 있다.

반면, 육진 개척으로 두만강 유역까지 영토가 확장된 이후 세종대왕의 명으로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 여러 설(說)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사》는 공험진이 예종 3년(1108년)에 성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었으며, 예종 6년(1111년)에는 산성을 쌓았다고 기록하면서도, 그 위치에 대해서는 "공주(孔州, 현재 경흥군) 또는 광주(匡州)라고도 하고, 혹은 선춘령의 동남쪽이면서 백두산의 동북쪽이라고도 하며, 혹은 소하강변에 있다고도 한다"고 하여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4. 2. 3가지 학설

현재 이들의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2].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1].

# '''제1설''' - 함관령 이남에서 정평 이북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설.

# '''제2설''' - 길주 또는 마운령 이남에서 정평에 이르는 주로 함경남도 일대로 보는 설[1].

# '''제3설''' -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이북으로 보고, 그 남쪽에서 정평에 이르는 함경도 일대에 걸쳐 있었다고 보는 설.

5. 9성의 반환과 그 이후

고려가 개척한 동북 9성은 여진족의 계속된 반환 요구와 막대한 유지 비용 및 인명 피해 때문에 결국 1109년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되었다.[1][2]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아골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1115년 금나라를 세웠고, 이후 강성해진 금나라는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는 등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1][2]

5. 1. 9성 반환 결정

고려가 개척한 9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윤관이 9성을 구축하자 여진족은 생활 근거지를 잃게 되었고, 완안부의 오아속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고려를 침범하는 한편, 강화 교섭을 요청하며 9성의 반환을 요구했다.[2] 고려 조정 역시 9성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고 인적 피해가 잇따르자 부담을 느꼈다.[2] 결국 개척한 지 2년이 채 안 된 예종 4년(1109년)[1], 고려는 9성에서 군대와 백성을 철수시키고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1][2]

5. 2. 금나라 건국과 고려-금 관계

고려가 개척한 동북 9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윤관이 9성을 쌓자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완안부의 오아속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고려를 공격하는 한편, 강화를 요청하며 9성 반환을 요구했다.[2] 고려 역시 9성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명 피해를 겪고 있었기에, 결국 1109년 (예종 4년)[1]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군대와 백성을 철수시켰다.[1][2]

9성을 돌려받은 여진 완안부는 1113년 (예종 8년) 아골타의 지도 아래 세력을 크게 키워 중국 동북부 대부분을 장악했고, 2년 뒤인 1115년에는 마침내 금나라를 건국했다. 세력이 강대해진 금나라는 1117년 (예종 12년)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여 고려와 금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금나라는 이후에도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1125년 (고려 인종 3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키고, 곧이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까지 함락시키며 명실상부한 중원패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나라는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강요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금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금나라의 현실적인 힘 앞에서 무력 저항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국 사대의 예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 대한 내부의 불만은 이후 묘청의 난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1]

참조

[1] 서적 韓国歴史地図 https://www.heibonsh[...] 平凡社
[2] 문서 韓国史/中世社会の発展/高麗の発展と制度整備/高麗の対外政策#九城
[3] 문서 韓国史/中世社会の発展/高麗の発展と制度整備/高麗の対外政策#九城
[4] 문서 고려사 지
[5] 간행물 세종실록 지리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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