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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사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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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사 애덤스는 미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아내이자, 미국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부인이다. 1775년 런던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97년 존 퀸시 애덤스와 결혼하여 외교관의 아내로서 유럽 각지에서 생활했다.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영부인으로서 백악관에서 활동했으나, 건강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으로 고통받았다. 영부인 퇴임 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며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으며, 1852년 사망했다. 그녀는 미국 최초의 외국 출신 영부인으로, 역사학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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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사 애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자 애덤스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루이자 애덤스 초상화 (1821년 ~ 1826년 경)
본명루이자 캐서린 존슨
출생1775년 2월 12일
출생지영국 런던
사망1852년 5월 15일
사망지미국 워싱턴 D.C.
배우자존 퀸시 아담스(1797년 결혼, 1848년 사별)
자녀조지 워싱턴 애덤스
존 애덤스 2세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시니어
종교유니테리언
서명
직책
직함미국의 영부인
대통령존 퀸시 아담스
임기 시작1825년 3월 4일
임기 종료1829년 3월 4일
이전엘리자베스 먼로
이후에밀리 도넬슨(직무 대행)
매장지
위치미국 제일 연합 교구 교회

2. 어린 시절과 교육 (1775-1797)

1775년 2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미국인 상인 조슈아 존슨(1744-1802)과 영국 출신 부인 캐서린 누트 존슨(1757-1811)의 차녀(언니 1명, 여동생 5명, 남동생 1명)로 태어났다.[22] 루이자는 미국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부인이다.[22][23] 조슈아의 형 토머스 존슨은 초대 메릴랜드 주지사를 역임했다.[22]

1777년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가족은 프랑스 낭트로 이주했다.[24]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루이자는 프랑스어에 능통해져 그녀의 제1언어가 되었다.[24] 1783년 조슈아가 상인으로 일하면서 런던 주재 미국 총영사도 맡게 되어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왔다.[24]

루이자는 1789년까지 영국의 여학교 기숙학교에 다녔고, 수학, 철학, 자수, 재봉, 그림 등을 배웠다.[22] 1789년부터 1793년까지는 자택에서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으며 와 에세이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22]

아버지 조슈아는 런던 자택에 많은 미국인을 초대하여 파티를 자주 열었다. 주 네덜란드 전권 공사를 역임한 존 퀸시 애덤스1795년에 처음으로 가족을 방문했고, 이때 루이자와 알게 되었다.[25]

2. 1. 출생과 가족 배경

1775년 2월 12일, 영국 런던에서 미국인 상인 조슈아 존슨과 영국인 어머니 캐서린 너스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1] 아버지 조슈아 존슨은 미국 독립을 지지했으며,[7] 루이자의 삼촌 토마스 존슨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2] 어머니 캐서린 너스의 결혼 전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3][4] 루이자는 혼외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미국 영부인 중 유일한 사례일 수 있다.[5]

2. 2. 프랑스에서의 성장

미국 독립 전쟁에 대응하여 1778년 존슨 가문은 영국을 떠나 프랑스 낭트로 이주하여 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7] 루이자는 낭트의 가톨릭 기숙 학교에 다녔으며,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음악과 문학에 능숙해졌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1][5] 가톨릭교를 실천했으며,[8] 프랑스 문화에 몰입하여 훗날 영어를 다시 배워야 했다.[6]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도 능통했다.[2]

2. 3. 영국으로의 귀환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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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혼과 가족 (1797-1825)

1797년 7월 26일, 존 퀸시 애덤스와 루이자 캐서린 존슨은 런던에서 결혼했다. 그해 3월 애덤스의 아버지 존 애덤스는 제2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이자는 애덤스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이를 낳았다.[22]

이름출생-사망설명
조지 워싱턴 애덤스1801년-1829년조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대통령직을 목표로 어릴 때부터 기대를 받았다. 정치인의 길을 걸었으나, 압박감으로 아편 중독, 알코올 중독, 빚 문제에 시달렸다. 1829년 4월 29일 뉴욕증기선 벤자민 프랭클린호에서 롱아일랜드 만을 지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승객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망상에 시달렸다고 하며, 6월 초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하녀 엘리자 돌프와의 사이에서 혼외자를 낳은 사실도 밝혀졌다.[27][28]
존 애덤스 2세1803년-1834년백악관에서 아버지의 비서로 일했다. 이후 가족 소유의 제분업을 물려받았으나, 경영 실패, 알코올 중독, 실명으로 31세에 사망했다.[29] 1828년 루이자의 조카 마리아 캐서린과 대통령의 아들로서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결혼했다.[30]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1세1807년-1886년정치인이 되어 미국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18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토지당의 미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주 영국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31]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1811년-1812년



1816년 찰스 로버트 레슬리가 그린 초상화


1821년부터 1825년 사이에 찰스 버드 킹이 그린 초상화


애덤스는 옷차림에 무관심하여 10년 동안 같은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였고, 어머니 애비게일로부터 옷차림에 대한 지적을 자주 받았다[32]. 루이자는 남편의 옷차림에 불만이 많았고, 화를 잘 내는 그의 성격과 상의 없이 일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이 때문에 루이자는 항상 안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26].

1797년 애덤스는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루이자는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공무원의 아내로서의 임무를 시작했다. 1801년 장남 조지 워싱턴 애덤스가 태어나기 전, 루이자는 이곳에서 첫 유산을 경험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 유산, 실신 발작, 발열, 극심한 피로감 등으로 고통받았다[22].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의 아버지가 패배하면서 애덤스는 귀국했고, 루이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22].유럽에서 태어나 자란 루이자에게 미국 사회의 관습은 이상하게 보였다고 한다[23]. 애덤스의 부모와도 처음 만났는데, 아버지 존은 루이자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어머니 애비게일에 대해서는 "감상적이고 히스테릭한 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22].

1802년 애덤스가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워싱턴 D.C.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루이자는 영부인 역할을 하던 돌리 매디슨이 연 만찬에 참석하여 환대를 받았다[22].

1809년 남편 애덤스는 아내에게 상의 없이 주 러시아 전권 공사 임명을 받아들였고, 장남과 차남은 미국에 남겨두고 삼남 찰스만 러시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루이자는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22].

루이자는 러시아 제국상트페테르부르크 생활에서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추위로 인해 몸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23].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루이자를 마음에 들어 해 종종 댄스 파트너로 지명했다[22].1811년 딸을 출산했지만, 이듬해 1812년에 사망하여 큰 상실감을 느꼈다[25].

1814년 애덤스는 미영 전쟁 평화 협상을 위해 네덜란드 겐트로 떠났고, 이후 루이자에게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33]. 루이자는 8살 아들 찰스와 하인 3명을 데리고 마차로 유럽을 횡단하는 고된 여행을 했다. 한겨울 들판을 질주하고 눈과 얼음 속에서 부서진 바퀴를 수리하며 나아갔다. 나폴레옹 1세 군대가 마차를 에워쌌을 때 미국 여권을 보여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1815년3월 21일 출발 40일 후 파리에 도착했다[34]. 러시아에서 폴란드,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도착한 이 체험기는 루이자의 사후 손자에 의해 출판되었다[22],[25].

1815년부터 1817년까지 애덤스는 영국에서 주영 전권 공사로 근무했고, 루이자는 두 아들과 6년 만에 재회했다. 이 시기는 루이자에게 매우 행복한 기간이었다[22].

1817년 애덤스가 국무 장관으로 임명되자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주했다[23]. 루이자는 영부인 엘리자베스 먼로가 중단했던 답례 방문을 맡아 매일 워싱턴 D.C.를 돌아다니며 사교 활동을 했다[35]. 루이자의 접견실은 워싱턴 인사들의 교류 중심지가 되었고[23], 화요일 밤마다 대규모 리셉션 파티와 댄스 파티를 열어 정치인, 신문 기자와 유대 관계를 맺었다. 1824년 1월 8일에는 앤드루 잭슨을 초대하여 뉴올리언스 전투 승전 기념 무도회를 열었지만, 잭슨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22].

3. 1. 존 퀸시 애덤스와의 만남

에드워드 새비지의 초상화, 1794년


1790년, 루이자의 아버지 조슈아 존슨이 영국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자는 저명한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을 도왔다.[5] 이들 중에는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와의 결혼을 압박받던 존슨가의 딸들이 눈여겨보던 잠재적 구혼자들도 있었다.[9] 1795년, 존 퀸시 애덤스가 미국 외교관 신분으로 존슨 가문을 방문했다.[1] 그는 매일같이 나타났고, 존슨 가족은 처음에 그의 관심이 루이자의 언니 낸시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야 그가 루이사를 구애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1][3] 루이자는 그가 낭만적인 시를 써 달라는 농담 섞인 요청에 응한 후에야 그를 잠재적인 구혼자로 여기게 되었다.[9]

루이자와 애덤스는 구애를 시작했지만, 간헐적이었고 서로에게 즉시 끌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전에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2][6] 결국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서로의 재능과 명성이었다. 특히 애덤스는 루이자의 노래와 음악적 재능에 매료되었다.[3][9] 이러한 관계는 루이자와 언니 사이에 질투심을 유발했는데, 언니는 자신이 구애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에 대해 질투심을 느꼈다.[9]

3. 2. 결혼과 갈등

존 퀸시 애덤스는 1795년 미국 외교관 자격으로 런던에 왔고, 1797년 7월 26일 런던에서 루이자와 결혼했다.[1][5] 애덤스는 결혼에 대해 재정, 성격 충돌, 애비게일 애덤스의 반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려를 표명했다.[2][5] 특히, 애비게일 애덤스는 아들이 영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2][5]

결혼 직후, 루이자의 친가인 존슨 가족은 재산을 잃고 파산하여 루이자와 애덤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주었다.[3][6] 루이자는 훗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쓴 회고록에서 "그(존 퀸시 애덤스)가 폐허가 된 가문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고 회고했다.[25]

부부는 가정 내에서 아내의 역할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었으며, 애덤스는 종종 루이자와 상의 없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1][6] 예를 들어 1809년 존이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루이사와 상의하지 않고 루이사가 동행하고 두 아들은 미국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1]

3. 3. 자녀

루이자는 애덤스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22]

이름출생-사망설명
조지 워싱턴 애덤스1801년-1829년조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대통령직을 목표로 어릴 때부터 기대를 받았다. 정치인의 길을 걸었으나, 압박감으로 아편 중독, 알코올 중독, 빚 문제에 시달렸다. 1829년 4월 29일 뉴욕증기선 벤자민 프랭클린호에서 롱아일랜드 만을 지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승객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망상에 시달렸다고 하며, 6월 초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하녀 엘리자 돌프와의 사이에서 혼외자를 낳은 사실도 밝혀졌다.[27][28]
존 애덤스 2세1803년-1834년백악관에서 아버지의 비서로 일했다. 이후 가족 소유의 제분업을 물려받았으나, 경영 실패, 알코올 중독, 실명으로 31세에 사망했다.[29] 1828년 루이자의 조카 마리아 캐서린과 대통령의 아들로서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결혼했다.[30]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1세1807년-1886년정치인이 되어 미국 하원 의원을 역임했다. 18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토지당의 미국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주 영국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31]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1811년-1812년


4. 외교관의 아내 (1797-1825)

1809년 남편 존 퀸시 애덤스가 주 러시아 전권 공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자는 두 아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남편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 떠나야 했다. 루이자는 훗날 이때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22] 이 결정에 대해 후회하며 아들을 떠나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고,[7] 남편을 원망하며 이 일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1][3] 러시아로 가는 80일간의 여정은 불쾌했으며, 그들은 러시아와 나폴레옹 전쟁 중인 프랑스 선박을 끊임없이 경계했다.[9]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생활은 루이자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혹독한 추위 때문에 끊임없이 몸 상태가 나빠졌다.[23]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루이자를 마음에 들어 하여 종종 그녀를 자신의 댄스 파트너로 지명했지만,[22] 잦은 질병과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18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딸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를 출산했지만, 1812년 이질로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25]

1814년, 미영 전쟁 평화 협상을 위해 남편이 네덜란드 겐트로 떠나면서 루이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겨졌다. 이후 남편은 루이자에게 "재산을 처분하고 즉시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33]

1815년 루이자는 남편의 지시에 따라 8살 된 아들 찰스, 그리고 출발 직전에 고용한 하인 3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러시아의 재산을 처분하고 파리로 향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을 횡단해야 했던 이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겨울 들판을 질주하고 눈과 얼음 속에서 여러 번 멈춰 서서 부서진 바퀴를 수리하며 나아갔다. 가는 길에 살인이 일어난 직후에도 단호하게 전진했으며, 나폴레옹 1세 파의 군대가 러시아제 마차를 보고 에워싸고 "죽여라"고 소리치는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때 루이자가 미국 여권을 보여주자 병사들은 "미국 만세"를 외쳤고, 그녀도 "나폴레옹 만세"라고 프랑스어로 응대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출발 40일 후인 1815년 3월 21일, 루이자는 파리에 도착하여 남편과 재회했다.[34] 여정의 경로는 러시아에서 폴란드를 거쳐 독일을 지나 프랑스에 도착하는 것이었다.[22]

1815년, 존 퀸시 애덤스영국 주재 공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사와 존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이들도 런던으로 보내져 가족은 이후 2년 동안 그곳에서 재회하여 함께 살았다.[1][6]

1817년 존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6] 루이사는 앤드루 잭슨1824년 1월 8일에 초대하여 그의 뉴올리언스 전투에서의 승전 기념일을 기념하여 연 참가자 1천 명의 무도회를 열기도 했다.

4. 1. 프로이센에서의 생활 (1797-1801)

1797년 존 퀸시 애덤스가 프로이센 주재 미국 전권 공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자는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6] 이 곳에서 루이자는 여러 차례 유산을 겪어 건강이 악화되었고, 남편과의 관계도 더욱 어려워졌다.[5] 1801년에는 첫 아들 조지 워싱턴 애덤스를 출산했다.[5]

루이자는 프로이센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그의 왕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3][5]

4. 2. 미국으로의 귀환과 상원 의원 부인 (1801-1809)

1801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당선 후 존 퀸시 애덤스가 베를린에서 소환되면서, 루이자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5][6] 매사추세츠주 퀸시에 있는 시댁으로 향하던 중, 백악관에서 제퍼슨 가족과 불편한 저녁 식사를 하고 마사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3] 퀸시에 도착하여 시부모를 만났는데, 시아버지 존 애덤스와는 빠르게 가까워졌지만, 시어머니 애비게일 애덤스는 루이자를 며느리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5][6]

1802년, 루이자의 아버지 조슈아가 사망하면서 가족은 재정적 지원을 잃게 되었다. 1803년, 남편 존 퀸시 애덤스가 미국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자, 루이자는 남편과 함께 매사추세츠와 워싱턴 D.C.를 오가며 생활했다. 워싱턴 D.C.를 더 선호했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가족은 매사추세츠에서는 존의 친척들과, 워싱턴에서는 루이자의 친척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1803년에 둘째 아들 존 애덤스 2세를 낳았다.[2][5] 남편이 혼자 여행을 떠날 때가 많아 루이자는 자주 홀로 남겨졌고, 이 때문에 깊은 불만을 느꼈으며 유산을 겪기도 했다.[5] 1807년에는 셋째 아들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를 출산했다.[1] 1808년, 남편은 정책 문제로 연방당과 의견 충돌을 빚어 상원 의원직을 사임했다.[3]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배신으로 여겨졌고, 가족은 보스턴 사교계에서 소외되었다.[3][9]

4. 3. 러시아에서의 고난 (1809-1815)

1809년 남편 존 퀸시 애덤스가 주 러시아 전권 공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자는 두 아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남편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 떠나야 했다. 루이자는 훗날 이때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22]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생활은 루이자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혹독한 추위 때문에 끊임없이 몸 상태가 나빠졌다.[23]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루이자를 마음에 들어 하여 종종 그녀를 자신의 댄스 파트너로 지명했지만,[22] 잦은 질병과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18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딸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를 출산했지만, 1812년 이질로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25]

1814년, 미영 전쟁 평화 협상을 위해 남편이 네덜란드 겐트로 떠나면서 루이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겨졌다. 이후 남편은 루이자에게 "재산을 처분하고 즉시 파리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33]

1815년 루이자는 남편의 지시에 따라 8살 된 아들 찰스, 그리고 출발 직전에 고용한 하인 3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러시아의 재산을 처분하고 파리로 향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을 횡단해야 했던 이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겨울 들판을 질주하고 눈과 얼음 속에서 여러 번 멈춰 서서 부서진 바퀴를 수리하며 나아갔다. 가는 길에 살인이 일어난 직후에도 단호하게 전진했으며, 나폴레옹 1세 파의 군대가 러시아제 마차를 보고 에워싸고 "죽여라"고 소리치는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때 루이자가 미국 여권을 보여주자 병사들은 "미국 만세"를 외쳤고, 그녀도 "나폴레옹 만세"라고 프랑스어로 응대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출발 40일 후인 1815년 3월 21일, 루이자는 파리에 도착하여 남편과 재회했다.[34] 여정의 경로는 러시아에서 폴란드를 거쳐 독일을 지나 프랑스에 도착하는 것이었다.[22]

4. 4. 런던과 워싱턴 D.C. (1815-1825)

찰스 로버트 레슬리가 1816년에 그린 루이사의 초상화가 있다.


1815년, 존 퀸시 애덤스영국 주재 공사로 임명되면서 루이사와 존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이들도 런던으로 보내져 가족은 이후 2년 동안 그곳에서 재회하여 함께 살았다.[1][6] 루이사는 다른 곳보다 런던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외교적 책임이 가벼웠고, 정기적으로 성공회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3] 그녀는 가족을 관리하고 남편의 일을 돕는 데 더 많은 책임을 맡았다. 특히 남편이 눈 감염으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고 손 부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된 후에는 더 그랬다.[9]

1817년 존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6] 루이사는 워싱턴의 사회 정치에 불쾌감을 느꼈고, 존은 그런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워싱턴에서 정치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매주 화요일마다 파티를 열고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부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1] 그들이 마지막으로 워싱턴에 살았을 때부터 발전해온 복잡한 사회적 규칙을 따르는 대신, 애덤스 부부는 먼저 미국 의회 의원들을 방문하여 사회적 위계에서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기대를 무시했다.[9][10] 그 결과 생긴 갈등은 대통령 내각에서 다루어질 정도로 커졌다.[9] 루이사와 존의 관계는 그가 점점 더 일에 몰두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3] 마침내 미국으로 돌아온 후 시어머니의 존경을 얻었고, 그들은 우호적인 재회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까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애비게일은 1818년에 사망했다.[3]

영부인 엘리자베스 먼로가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의 사교계의 중심 역할은 애덤스 가문에 돌아갔다.[5] 이 역할에서 루이사가 가장 칭송받는 업적은 1824년 1월 앤드루 잭슨을 위해 열었던 무도회였는데, 이 행사는 도시의 가장 웅장한 사교 행사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3][6] 존이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직을 추구했을 때, 루이사는 그의 선거 운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했고, 그와 동등한 파트너로서 함께 일했다.[6][9] 선거에서 승자가 나오지 않아 미국 하원의 결정에 의해 존이 선택되었을 때, 존은 부정 거래로 비판받았고, 루이사는 그가 직면한 비판을 함께 받았다.[3]

5. 미국의 영부인 (1825-1829)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퀸시 애덤스는 일반 투표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패배했지만, 잭슨이 대통령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하원에서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 애덤스는 또 다른 경쟁자였던 헨리 클레이에게 국무장관 자리를 약속하고 지지를 얻어내어 당선되었다.[35] 이로 인해 잭슨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고, 애덤스 행정부는 정적들로부터 거센 방해를 받았다.[35] 루이자는 유권자를 무시한 이러한 거래에 대해 남편에게 크게 실망했고, 파벌 증가에 낙담했다.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는 대통령보다 외교 사절단이 더 어울렸을 거예요"라고 결론지었다.[22]

6. 영부인 이후의 삶 (1829-1852)

1829년 백악관을 떠난 직후, 루이사는 장남 조지 워싱턴 애덤스의 사망으로 큰 슬픔에 잠겼다.[1][5] 조지는 개인적, 재정적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1][5]

1830년, 루이사와 남편 존 퀸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피스필드로 이사하여 안정을 찾았다.[9] 그러나 남편이 하원 의원에 출마하면서 다시 워싱턴 D.C.로 돌아가야 했다.[9]

1834년, 루이사는 둘째 아들 존 애덤스 2세마저 잃는 비극을 겪었다.[5] 그녀는 두 아들의 실패와 죽음에 대해 남편을 부분적으로 비난하며, 어린 시절에 부모와 떨어지지 않았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5]

남편의 정치 경력을 지지하며, 루이사는 노예제 폐지와 여성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가졌다.[5][6][11] 1837년에는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다.[8]

1848년, 남편 존 퀸시 애덤스가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루이사는 과부가 되었다.[1] 1849년, 루이사 역시 뇌졸중으로 쇠약해질 때까지 워싱턴 D.C.와 퀸시를 오가며 생활했다.[1]

1852년 5월 15일, 루이사는 77세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1] 그녀는 장례를 위해 의회가 휴회하는 영예를 누린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5] 루이사는 유나이티드 퍼스트 교구 교회에 남편, 시부모와 함께 안장되었다.[1]

7. 유산

루이자 애덤스는 미국 최초로 외국에서 태어난 영부인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어서야 미국을 방문했다. 2017년 슬로베니아계 미국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영부인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유일한 외국 출신 영부인이었다.[12] 애덤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당대 가장 여행을 많이 한 여성"으로 여겨졌으며,[10] 19세기 유일하게 그토록 광범위하게 여행한 영부인이었다.[12]

애덤스 국립 역사 공원은 애덤스와 그녀의 남편이 만년에 거주했던 피스필드를 관리하고 있다. 이 공원에는 그녀가 만든 침대보와 에드워드 새비지가 그린 그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13][14] 스미소니언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실루엣과 상아 목걸이에 새겨진 초상화를 포함하여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의 초상화 여러 점을 소장하고 있다.[15][16]

미국 조폐국은 대통령 1달러 기념 주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8년 5월 29일에 루이자 애덤스를 기리는 10USD 금화와 구리 메달을 발행했다.[41]

2008년 영부인 기념 주화 시리즈의 대통령 달러 주화에 새겨진 애덤스

7. 1. 역사학자 평가

1982년부터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는 역사학자들에게 미국의 영부인들을 여러 독립적인 기준에 따라 누적 점수를 매기도록 설문 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해왔다.[17] 루이사 애덤스는 이러한 설문 조사에서 역사학자들에 의해 일관적으로 영부인 상위권에 평가받았다. 누적 평가 측면에서 루이사 애덤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받았다.

연도순위 (총 평가 대상)
1982년14위 (42명)[18]
1993년16위 (37명)[18]
2003년12위 (38명)[18]
2008년21위 (38명)[18]
2014년18위 (38명)[19]



2014년 설문 조사에서 루이사 애덤스와 그녀의 남편 존 퀸시 애덤스는 "파워 커플" 측면에서 39쌍의 퍼스트 커플 중 19위로 평가받았다.[20]

8. 가계도

애덤스 가계도
존 애덤스
(1735–1826)
애비게일 애덤스 (née 스미스)
(1744–1818)
윌리엄 스테판스 스미스
(1755–1816)
애비게일 아멜리아 애덤스 스미스
(1765–1813)
존 퀸시 애덤스
(1767–1848)
루이자 캐서린 애덤스 (née 존슨)
(1775–1852)
찰스 애덤스
(1770–1800)
토머스 보일스턴 애덤스
(1772–1832)
조지 워싱턴 애덤스
(1801–1829)
존 애덤스 2세
(1803–1834)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1세
(1807–1886)
애비게일 브라운 애덤스 (née 브룩스)
(1808–1889)
프랜시스 카드왈라더 크라우닌실드
(1839–1911)
존 퀸시 애덤스 2세
(1833–1894)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2세
(1835–1915)
헨리 브룩스 애덤스
(1838–1918)
마리안 후퍼 애덤스
(1843–1885)
피터 샤르동 브룩스 애덤스
(1848–1927)
조지 캐스퍼 애덤스
(1863–1900)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3세
(1866–1954)
프랜시스 애덤스 (née 러버링)
(1869–1956)
존 애덤스
(1875–1964)
헨리 스터지스 모건
(1900–1982)
캐서린 러버링 애덤스 모건
(1902–1988)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4세
(1910–1999)
토머스 보일스턴 애덤스
(1910–1997)


9. 저술

루이자 애덤스는 자서전과 희곡 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녀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다.


  • 《별 볼일 없는 사람의 모험》[3]
  • 《1815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의 여행기》 - 사후에 하퍼스 매거진과 스크리브너스 매거진에 출판되었다.[5]
  • 《인생의 기록, 혹은 나의 이야기》[5]


희곡으로는 ''의혹, 또는 박해받는 순수함''이 있다.[3]

9. 1. 자서전


  • 《별 볼일 없는 사람의 모험》[3]
  • 《1815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의 여행기》 - 그녀의 손자에 의해 사후에 하퍼스 매거진과 스크리브너스 매거진에 출판됨[5]
  • 《인생의 기록, 혹은 나의 이야기》[5]

9. 2. 희곡

''의혹, 또는 박해받는 순수함''[3]

참조

[1] 서적 First Ladies: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Facts on File
[2] 서적 First Ladies of the United States: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Lynne Rienner Publishers
[3] 서적 The Adams Women: Abigail and Louisa Adams, Their Sisters and Daughter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4] 서적 A Companion to First Ladie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2-10-18
[5] 서적 American First Ladies: Their Lives and Their Legacy https://archive.org/[...] Garland Publishing
[6] 서적 Presidential Wive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7] 논문 "A Republican in a Monarchy": Louisa Catherine Adams in Russia https://www.jstor.or[...] 1997
[8] 웹사이트 Louisa Adams Biography :: National First Ladies' Library http://archive.first[...] 2024-06-02
[9] 서적 Louisa: The Extraordinary Life of Mrs. Adams https://archive.org/[...] Penguin Press 2016
[10] 서적 First Ladies: From Martha Washington to Michelle Obama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First Ladies: The Saga of the Presidents' Wives and Their Power, 1789-1961 https://archive.org/[...] William Morrow and Company
[12] 간행물 Meet the Only First Lady Before Melania Trump Not to Have Been Born in the U.S. https://time.com/453[...] 2023-05-16
[13] 서적 Furnishings Report, Old House, Vol. IX http://archive.org/d[...] 1970
[14] 서적 Furnishings Report, Old House, Vol. II http://archive.org/d[...] 1968
[15] 웹사이트 Louisa Catherine Johnson Adams https://womenshistor[...] 2022-07-16
[16] 웹사이트 Louisa Catherine Johnson Adams https://npg.si.edu/o[...] 2022-07-16
[17] 웹사이트 Eleanor Roosevelt Retains Top Spot as America's Best First Lady Michelle Obama Enters Study as 5th, Hillary Clinton Drops to 6th Clinton Seen First Lady Most as Presidential Material; Laura Bush, Pat Nixon, Mamie Eisenhower, Bess Truman Could Have Done More in Office Eleanor & FDR Top Power Couple; Mary Drags Lincolns Down in the Ratings https://scri.siena.e[...] Siena Research Institute 2022-05-16
[18] 웹사이트 Ranking America's First Ladies Eleanor Roosevelt Still #1 Abigail Adams Regains 2nd Place Hillary moves from 5 th to 4 th; Jackie Kennedy from 4th to 3rd Mary Todd Lincoln Remains in 36th https://scri.siena.e[...] Siena Research Institute 2022-05-16
[19] 웹사이트 Siena College Research Institute/C-SPAN Study of the First Ladies of the United States 2014 FirstLadies2014_Full Rankings.xls https://scri.siena.e[...] Sienna College Research Institute/C-SPAN 2022-10-21
[20] 웹사이트 2014 Power Couple Score https://scri.siena.e[...] Siena Research Institute/C-SPAN Study of the First Ladies of the United States 2022-10-09
[21] 뉴스 The height differences between all the US presidents and first ladies https://www.business[...] ビジネス・インサイダー
[22] 웹사이트 First Lady Biography: Louisa Adams http://www.firstladi[...] National First Ladies' Library 2014-04-22
[23] 웹사이트 Louisa Catherine Johnson Adams http://www.whitehous[...] The White House 2014-04-22
[24] 웹사이트 Louisa Adams http://millercenter.[...] Miller Center 2014-04-22
[25] 웹사이트 Louisa Adams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4-04-22
[26]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27]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28] 서적 Cannibals of the Heart: A Personal Biography of Louisa Catherine and John Quincy Adams New York, McGraw-Hill
[29]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0] 웹사이트 John Quincy Adams marries Louisa Johnson http://www.history.c[...] History.com 2014-04-22
[31] 웹사이트 ADAMS, Charles Francis, (1807 - 1886) http://bioguide.cong[...] Biographical Directory of the United States Congress 2014-04-22
[32] 웹사이트 John Quincy Adams 1825 - 1829 Sixth President http://www.classroom[...] Classroomhelp.com 2014-04-23
[33]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4]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5]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6]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7] 서적 The Living White House White House Historical Assn
[38]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39] 서적 ファーストレディ物語 文藝春秋
[40] 웹사이트 Louisa Adams http://www.history.c[...] History.com 2014-04-22
[41] 웹사이트 Louisa Adams First Spouse Coin and Medal Available May 29 https://www.usmint.g[...] アメリカ合衆国造幣局 201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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