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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데이라-마모레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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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데이라-마모레 철도는 브라질의 포르투 벨류에서 볼리비아의 과자라미린까지 366km 구간을 연결했던 철도이다. 19세기 말 고무 수요 증가에 따라, 아마존 강 상류의 급류를 우회하여 고무를 운송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190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12년에 완공되었으나, 험난한 지형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철도 건설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1931년 브라질 정부에 매각된 후 1972년에 폐선되었다. 현재는 일부 구간이 관광 철도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철도 박물관과 유적을 통해 그 역사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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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데이라-마모레 철도
노선 정보
노선명마데이라-마모레 철도
로마자 표기Madeira-Mamori cheoldo
원어 표기Estrada de Ferro Madeira-Mamoré
위치브라질 혼도니아 주, 포르투벨류 - 과자라미링
운영 주체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
노선 길이366km
궤간1,000mm (미터 궤간)
연혁
개통1912년
폐선1972년
기타 정보
참고 자료中武, 1998, pp=62
中武, 1998, pp=61

2. 역사적 배경

1846년, 호세 아우구스틴 팔라시오스와 루돌프 오스카 케셀링은 볼리비아 당국에 대서양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마존을 통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1]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의 접근이 있었으나, 1884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하여 잃었으며, 미국 및 유럽과의 수익성 있는 무역 경로는 대서양에 있었다.[1] 1851년,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산 고무에 대한 접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리어드너 기번 중위와 계약하여 항해 가능한 아마존 강과 볼리비아 생산 중심지 사이의 철도 연결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했다.[1] 기번의 연구는 마데이라 강 급류를 따라 철도를 건설하면 라 파스 볼리비아 수도에서 미국 시장으로 효율적인 상품 운송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1]

19세기 말 자전거자동차의 보급으로 타이어 등의 원료인 천연 고무의 수요가 증대되었다.[9] 베니 강, 마드레 데 디오스 강, 아크레 강 등 아마존 유역 상류의 저지대에는 파라고무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10] 이 때문에 아마존 지역에는 '고무 호황'이 일어나 많은 상인들이 벨렝, 마나우스, 포르투 벨류에 라텍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출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라텍스 채취 노동자로서 아마존 지역으로 들어갔다.[10] 볼리비아에서는 산타 크루스 지방에서 고무 자생 지역으로 1860년부터 1910년까지 반세기 동안 약 8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10] 이 때문에 마데이라 강의 포르투 벨류보다 상류 지역의 개척과 운송 수단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마데이라-마모레 철도의 Baldwin Locomotive No. 12


1936년 BMAG 베를리너 마쉬넨바우 (미카도 타입) 2-8-2 No. 17 & No. 18 EFMM 구아자라미림


볼리비아는 페루와 연합하여 태평양 연안 지역의 초석구아노의 천연 자원을 놓고 칠레와 싸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여 태평양 쪽 항구를 잃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대서양 쪽으로 출구를 모색했고, 그 루트로서 아마존 강에 주목했다.

이러한 수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미개척지였던 마데이라 강 상류에 철도를 건설하는 구상은 1860년대부터 브라질볼리비아 양쪽에 존재했다.[11] 아마존 강의 대서양 하구에서 포르투 벨류까지 약 1,124km는 선박의 항행이 가능했으나,[12] 포르투 벨류보다 상류에는 큰 폭포가 있고, 급류나 여울이 존재하여 소형 선박으로도 항행이 어려웠다.[12] 이 때문에 포르투 벨류와 그 상류 지역 사이의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도로, 철도, 급류를 우회하는 운하 등 운송 수단의 건설 구상이 있었다.

2. 1. 고무 붐과 수송로의 필요성

1846년, 호세 아우구스틴 팔라시오스와 루돌프 오스카 케셀링은 볼리비아 당국에 대서양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마존을 통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1]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의 접근이 있었으나, 1884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하여 잃었으며, 미국 및 유럽과의 수익성 있는 무역 경로는 대서양에 있었다.[1] 1851년,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산 고무에 대한 접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리어드너 기번 중위와 계약하여 항해 가능한 아마존 강과 볼리비아 생산 중심지 사이의 철도 연결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했다.[1] 기번의 연구는 마데이라 강 급류를 따라 철도를 건설하면 라 파스 볼리비아 수도에서 미국 시장으로 효율적인 상품 운송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1]

19세기 말 자전거자동차의 보급으로 타이어 등의 원료인 천연 고무의 수요가 증대되었다.[9] 베니 강, 마드레 데 디오스 강, 아크레 강 등 아마존 유역 상류의 저지대에는 파라고무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10] 이 때문에 아마존 지역에는 '고무 호황'이 일어나 많은 상인들이 벨렝, 마나우스, 포르투 벨류에 라텍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출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라텍스 채취 노동자로서 아마존 지역으로 들어갔다.[10] 볼리비아에서는 산타 크루스 지방에서 고무 자생 지역으로 1860년부터 1910년까지 반세기 동안 약 8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10]

볼리비아는 페루와 연합하여 태평양 연안 지역의 초석구아노의 천연 자원을 놓고 칠레와 싸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여 태평양 쪽 항구를 잃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대서양 쪽으로 출구를 모색했고, 그 루트로서 아마존 강에 주목했다.

이러한 수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미개척지였던 마데이라 강 상류에 철도를 건설하는 구상은 1860년대부터 브라질볼리비아 양쪽에 존재했다.[11] 아마존 강의 대서양 하구에서 포르투 벨류까지 약 1,124km는 선박의 항행이 가능했으나,[12] 포르투 벨류보다 상류에는 큰 폭포가 있고, 급류나 여울이 존재하여 소형 선박으로도 항행이 어려웠다.[12] 이 때문에 포르투 벨류와 그 상류 지역 사이의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도로, 철도, 급류를 우회하는 운하 등 운송 수단의 건설 구상이 있었다.

2. 2. 볼리비아의 대서양 진출 노력

1846년, 호세 아우구스틴 팔라시오스와 루돌프 오스카 케셀링은 볼리비아 당국을 설득하여 대서양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마존을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 볼리비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하여 태평양으로의 접근을 잃었으며, 미국 및 유럽과의 수익성 있는 무역 경로는 대서양에 있었다.[1] 1851년,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산 제품 (특히 고무)에 대한 접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리어드너 기번 중위와 계약을 맺어 항해 가능한 아마존 강과 볼리비아 생산 중심지 사이의 철도 연결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했다.[1] 기번의 연구는 마데이라 강 급류를 따라 철도를 건설하면 라 파스 볼리비아 수도에서 미국 시장으로 효율적인 상품 운송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1]

19세기 말 자전거자동차의 보급으로 타이어 등의 원료인 천연 고무의 수요가 증대되었다.[9] 베니 강, 마드레 데 디오스 강, 아크레 강 등 아마존 유역 상류의 저지대에는 파라고무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10] 이 때문에 아마존 지역에는 '고무 호황'이 일어나 많은 상인들이 벨렝, 마나우스, 포르투 벨류에 라텍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출했다.[10] 또한 많은 노동자들이 라텍스 채취 노동자로서 아마존 지역으로 들어갔다. 볼리비아에서는 산타 크루스 지방에서 고무 자생 지역으로 1860년부터 1910년까지 반세기 동안 약 8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10]

볼리비아는 페루와 연합하여 태평양 연안 지역의 초석구아노의 천연 자원을 놓고 칠레와 싸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여 태평양 쪽 항구를 잃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대서양 쪽으로 출구를 모색했고, 그 루트로서 아마존 강에 주목했다.

이러한 수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미개척지였던 마데이라 강 상류에 철도를 건설하는 구상은 1860년대부터 브라질볼리비아 양쪽에 존재했다.[11] 아마존 강의 대서양 하구에서 포르투 벨류까지 약 1,124km는 선박의 항행이 가능했다.[12] 그러나 포르투 벨류보다 상류에는 큰 폭포가 있고, 급류나 여울이 존재하여 소형 선박으로도 항행이 어려웠다.[12] 이 때문에 포르투 벨류와 그 상류 지역 사이의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도로, 철도, 급류를 우회하는 운하 등 운송 수단의 건설 구상이 있었다.

2. 3. 초기 철도 건설 구상

1846년, 호세 아우구스틴 팔라시오스와 루돌프 오스카 케셀링은 볼리비아 당국을 설득하여 대서양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마존을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의 접근이 있었으나, 1884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하여 잃었으며, 미국 및 유럽과의 수익성 있는 무역 경로는 대서양에 있었다.[1] 1851년, 미국 정부는 볼리비아산 제품 (특히 고무)에 대한 접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리어드너 기번 중위와 계약을 맺어 항해 가능한 아마존 강과 볼리비아 생산 중심지 사이의 철도 연결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했다. 기번의 연구는 마데이라 강 급류를 따라 철도를 건설하면 라 파스 볼리비아 수도에서 미국 시장으로 효율적인 상품 운송이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1]

1867년, 브라질과 볼리비아 사이에 이 체결되었다.[13] 이 조약으로 아크레 지방의 볼리비아 귀속과 브라질과 볼리비아 간의 무역 및 아마존 유역의 항행에 대한 합의가 양국 간에 이루어졌다.[13]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인 토목 기술자이자 저명한 탐험가였던 를 초청하여 천연 고무 운송 수단 구축에 대한 현지 조사를 의뢰했다.[13] 또한 브라질 정부도 마데이라 강, 마모레 강의 운송 수단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했다.[13]

3. 건설 과정

1870년대에 미국인 조지 얼 처치는 볼리비아의 고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마데이라강 급류를 극복하려는 두 차례의 시도를 했다. 두 번의 시도 모두 험난한 지형과 말라리아, 사고, 폭력으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로 실패했다. 철도 건설에 성공하기 위한 입찰은 볼리비아가 브라질에 아크리 주 영토를 양도하고, 그 대가로 브라질 영토, 금전 지불, 그리고 브라질이 마데이라강의 급류를 우회하는 철도 연결을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페트로폴리스 조약(1903)으로 시작되었다. 190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12년 4월 30일, 마데이라-마모레 철도의 마지막 구간이 개통되었다. 1911년 10월부터 1913년 9월까지의 수석 회계사는 마크 E. 스미스였다.

3. 1. 아야쿠초 조약과 처치 대령의 탐사

1870년대에 미국인 조지 얼 처치(George Earl Church)는 볼리비아의 고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마데이라강 급류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두 차례 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말라리아, 사고, 폭력으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로 실패했다. 철도 건설은 볼리비아가 브라질에 아크리 주(Acre) 영토를 양도하고, 브라질 영토, 금전 지불, 그리고 브라질이 마데이라강의 급류를 우회하는 철도 연결을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페트로폴리스 조약(1903)으로 이어졌다.

1867년 브라질과 볼리비아 사이에 아야쿠초 조약/Treaty of Ayacucho영어이 체결되어 아크레 지방의 볼리비아 귀속과 브라질과 볼리비아 간의 무역 및 아마존 유역의 항행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인 토목 기술자이자 탐험가였던 조지 얼 처치(George Earl Church)를 초청하여 천연 고무 운송 수단 구축에 대한 현지 조사를 의뢰했다.처치 대령/Colonel Church영어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브라질 정부도 마데이라 강, 마모레 강의 운송 수단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했다.

3. 2. 초기 건설 시도와 좌절

1870년대, 미국인 조지 얼 처치는 볼리비아의 고무 시장 진출을 위해 마데이라강 급류를 우회하는 철도 건설을 두 차례 시도했다.[13] 그러나 험난한 지형과 질병, 사고, 폭력 등으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며 실패했다.

처치는 현지 조사 후 사업화를 결정, 볼리비아에서 자금을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운하 건설을 고려했으나, 1870년 브라질 정부로부터 철도 영업권을 획득했다.[13] 1872년, 영국의 퍼블릭 워크스 컨스트럭션사와 계약을 맺고 공사를 시작했지만,[14][15] 노동자들 사이에 말라리아, 각기병이 만연하여 1년여 만에 철수했다.[14][15] 처치는 출자자와의 재판에 휘말렸다.[13]

1878년, 처치는 미국의 필립 앤드 토머스 콜린스사와 계약을 맺고 공사를 재개했다.[16][15] 열대 지방 건설 경험이 있는 기술진과 전 세계에서 모은 노동자들을 투입했지만,[15] 5,000명이 넘는 노동자 중 말라리아, 황열병, 각기병, 아메바성 이질 등으로 1,000명이 사망하고, 도망자도 많았다.[17] 난공사로 인한 건설 비용 증가와 자금난으로 1879년 콜린스 사는 파산했고, 공사는 중단되었다.[16][17] 많은 건설 자재와 증기 기관차가 정글에 방치되었고,[16] 브라질 정부는 처치와의 계약을 파기했다.

3. 3.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와 페트로폴리스 조약

1870년대, 미국인 조지 얼 처치는 볼리비아의 고무 시장 진출을 위해 마데이라강 급류를 우회하는 철도 건설을 두 차례 시도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질병, 사고, 폭력 등으로 실패했다.[18] 1903년 아크리 분쟁의 해결을 위해 체결된 페트로폴리스 조약에 따라, 볼리비아는 아크리 주를 브라질에 할양하고, 브라질은 볼리비아에 배상금 지급과 함께 포르투 벨류에서 볼리비아 국경의 과자라미린까지 철도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11]

1906년, 브라질 회사가 공사를 수주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포기했고,[19] 1907년 미국 자본의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MADEIRA-MAMORE RAILWAY CO.)가 60년간의 영업권을 조건으로 공사를 수주했다.[20][19] 사장은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 기술자인 퍼시벌 파쿼가 맡았고, 자본금은 1,100만 달러였다.[19]

1910년 5월 31일, 포르투 벨류에서 자시 파라나까지 86km 구간이 개통되었다.[14] 칸델라리아에 병원을 설치하고, 공사 구간에 4개의 의료 캠프와 7개의 건설 캠프를 설치했다.[20] 오스왈두 크루스는 공사 현장에 석회를 뿌려 말라리아 모기의 발생을 막고, 노동자들에게 키니네 복용을 의무화하여 말라리아 피해를 최소화했다.[8]

1911년 9월, 포르투 벨류에서 220km 지점까지 개통되었고,[21] 1912년 8월 1일 포르투 벨류-과자라미린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21] 1911년 10월부터 1913년 9월까지 마크 E. 스미스가 수석 회계사로 재직했다.

개통 초기 2년간은 수익을 냈으나, 동남아시아 고무 플랜테이션과의 경쟁으로 아마존산 천연 고무 가격이 하락하면서 경영이 악화되었다.[11] 1929년 대공황으로 수송량이 더욱 감소하자, 철도 회사는 1931년 브라질 정부에 30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11] 이후에도 수송량은 회복되지 않았고, 브라질 정부는 1972년 철도를 폐선하고 대체 도로를 건설했다.[22]

3. 4. 건설 재개와 완공

1870년대에 미국인 조지 얼 처치는 볼리비아의 고무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마데이라강 급류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두 차례 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말라리아, 사고, 폭력으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로 실패했다. 철도 건설은 페트로폴리스 조약(1903)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조약에는 볼리비아가 브라질에 아크리 주 영토를 양도하고, 그 대가로 브라질 영토, 금전 지불, 그리고 브라질이 마데이라강의 급류를 우회하는 철도 연결을 건설하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 1907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12년 4월 30일, 마데이라-마모레 철도의 마지막 구간이 개통되었다. 1911년 10월부터 1913년 9월까지의 수석 회계사는 마크 E. 스미스였다.

4. 노선 정보

포르투 벨류에서 볼리비아 국경의 과자라미린까지 366km이다.[8] 궤간(레일 폭)은 1,000mm(미터 궤간)이다.[8] 곡선 최소 반경은 185m이며,[8] 최대 구배는 12퍼밀이다.[8]

5. 투입 자원 및 인력

공사비 총액은 3,000만 달러로, 당시 순금 32톤에 해당하는 액수였다.[8]

공사에 사용된 침목은 약 50만 개였다.[8] 원시림에는 침목에 적합한 경목이 있었지만, 인력 부족으로 인해 벌채와 가공을 포기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칼립투스 침목을 운반해왔다.[19]

6. 인명 피해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건설 중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소설가 에롤 링컨 유이스는 《브라질》에서 사망자 수를 7,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추정했고,[2] 브라질 정부는 6,000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추산한다.[3] 피오렐로 피콜리는 《자본과 아마존 파괴》에서 30,000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4] 파나마 운하 건설 중에는 황열병으로 인해 30,609명이 사망했는데,[5] "악마의 철도"라는 별명은 조지 처치의 실패한 시도와 브라질 고무 호황으로 인한 수만 명의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데이라-마모레 철도를 따라 운송을 기다리는 고무 묶음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는 6년 동안 21,817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으나,[20] 비정규직 등을 포함하면 약 30,000명이 공사 현장에서 일한 것으로 추정된다.[20] 칸델라리아 병원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1,152명이며,[20] 주된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였다.[20] 공사 현장에서 도망친 사람도 많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20] 도망친 노동자를 포함한 사망자 수는 최소 6,000명 정도로 추정되며,[20] 이 수치에는 1907년 이전 공사에서의 사망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7. 일본계 이민의 참여

1899년 페루로 이민한 일본인 중 일부가 볼리비아를 거쳐 브라질 아마존 지역으로 재이주했다.[23] 이들은 고무 채취, 농장 개척, 상점 경영 등에 종사했다.[23]

호리우치 덴쥬의 자서전 『성모 강변의 16년』에는 1914년 10월 16일 볼리비아 마모레 강과 베니 강의 합류 지점인 비야 베야(Villa Bella)에서 "마모레-철도회사 노무자 7명"(원문 그대로)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24]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건설을 기록한 "A FERROVIA DO DIABO"의 312~318페이지에는 공사에 종사했던 일본계 이민으로 보이는 4명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25] 볼리비아 국내 철도 연장 공사의 일부를 하청받은 경우도 있었다.[26]

8. 볼리비아 국내 연장 계획

볼리비아 정부는 마데이라 강을 사이에 두고 종착역이 있는 구아자라미린/Guajará-Mirim영어의 맞은편에 위치한 볼리비아 측의 도시 구아야라메린에서 리베랄타까지의 철도를 계획했다.[26][27] 볼리비아 정부는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에 건설을 요청했으며, 계획 구간은 약 45km로 짧았고, 철도 회사의 조사에서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볼리비아 측의 연장선 건설을 시작했다.[27]

연장 공사는 1914년 1월 구아야라메린과 리베랄타 양쪽에서 시작되었다.[27] 이 때, 리베랄타 측의 공사를 맡은 것은 일본계 이민자 야기 노리사다였다.[26][27] 야기 노리사다는 일본계 이민 30명, 볼리비아인 30명을 고용하여 원시림 벌채를 시작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하락이 멈추지 않는 천연 고무 가격을 받아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회사는 연장선 공사 중단을 결정했다.[27]

9. 운영 및 폐선

남아메리카 고무 붐은 아시아 생산자 및 합성 고무와의 경쟁으로 인해 종식되었고, 철도는 쓸모없게 되었다.[6] 초기 브라질 정부는 페트로폴리스 조약에 따른 의무로 인해 불필요한 시설을 유지해야 했다.[6] 그러나 1972년 브라질은 볼리비아를 아마존의 항해 가능한 지역과 연결하는 BR-364를 완공했고, 철도는 폐기되었다.[6]

개업 후 2년간은 이익이 나는 수송량이 확보되었다.[11] 그러나 그 후 동남아시아의 고무 플랜테이션과의 경쟁에 노출되어 아마존산 천연 고무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고, 아마존으로부터의 고무 수송량이 감소하여 경영이 악화되었다.[11]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더욱 수송량이 저조해진 철도 회사는 1931년에 브라질 정부에 300만 달러로 매각하고 철수했다.[11] 그 후에도 수송량이 오르지 않아 브라질 정부는 1972년 폐선했다.[22] 대체 교통 수단으로 거의 철도 노선에 따라 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다.

IIRSA 남미 통합 프로젝트에는 마데이라 강 급류를 항해 가능한 호수로 바꾸어 기번의 볼리비아 시장에 대한 빠르고 효율적인 접근에 대한 비전을 실현할 일련의 수력 발전 댐이 포함되어 있다(4개의 댐 중 2개, 산토 안토니오 댐과 지라우 댐이 이미 존재한다).[6]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브라질, 볼리비아 및 페루의 댐 상류 4,000km 이상의 수로가 항해 가능하게 될 것"이다.[6]

10. 관광 철도 및 유산

1981년에 포르투 벨류에서 상안토니우 폭포까지 7km 구간을 관광 철도로 부활시켰다. 이후 운행 범위를 변경하면서 주 1회 정도 운행했다. 그러나 관광 철도 운행도 2000년에 폐지되었다.

포르투 벨류의 마데이라 강변에 있는 철도 박물관의 외관


포르투 벨류 시의 마데이라 강변에는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박물관(Museu da Estrada de Ferro Madeira-Mamoré)이 있다.[28] 박물관은 철도역 터미널의 유구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28], 턴테이블이나 차고 등이 남아 있다. 철도 건설 초기에 관여했던 조지 얼 처치(George Earl Church)의 이름을 딴 증기 기관차 "Colonel Church호"를 보존・전시하고 있다.[28]

자시 파라나(Jaci-Paraná) 근처 자시 파라나 강과 무퉁 파라나(Mutum-Paraná) 근처에도 철교의 일부가 남아있다.

마데이라-마모레 철도의 종착역이었던 구아자라미림에 있는 구아자라미림 역사 박물관(Museu Histórico Municipal de Guajará-Mirim) 건물은 철도 역사를 재활용하고 있다.[29] 또한 이 박물관 부지 내에는 증기 기관차 2대가 실외 보존되어 있다.[29]

10. 1. 관광 철도

1981년에 포르투 벨류에서 상안토니우 폭포까지 7km 구간을 관광 철도로 부활시켰다. 이후 운행 범위를 변경하면서 주 1회 정도 운행했다. 그러나 관광 철도 운행도 2000년에 폐지되었다.

10. 2. 유산



포르투 벨류 시의 마데이라 강변에는 마데이라-마모레 철도 박물관(Museu da Estrada de Ferro Madeira-Mamoré)이 있다.[28] 박물관은 철도역 터미널의 유구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28], 턴테이블이나 차고 등이 남아 있다. 철도 건설 초기에 관여했던 조지 얼 처치(George Earl Church)의 이름을 딴 증기 기관차 "Colonel Church호"를 보존・전시하고 있다.[28]

자시 파라나(Jaci-Paraná) 근처 자시 파라나 강과 무퉁 파라나(Mutum-Paraná) 근처에도 철교의 일부가 남아있다.

마데이라-마모레 철도의 종착역이었던 구아자라미림에 있는 구아자라미림 역사 박물관(Museu Histórico Municipal de Guajará-Mirim) 건물은 철도 역사를 재활용하고 있다.[29] 또한 이 박물관 부지 내에는 증기 기관차 2대가 실외 보존되어 있다.[29]

11. 현대적 의의

참조

[1] 간행물 Dossiê Madeira-Mamoré Editora Duetto
[2] 서적 Brazil
[3] 웹사이트 Brazil's Devil's Railway gets new lease of life http://www.internati[...]
[4] 서적 O Capital e a Devastação da Amazônica Editora Expressão Popular
[5] 간행물 Construction Facts: The Sourcebook of Statistics, Records and Resources McGraw Hill 2003-11
[6] 보고서 Effects of Energy and Transportation Projects on Soybean Expansion in the Madeira River Basin http://conservation-[...] Conservation Strategy Fund 2011-07-07
[7] Harvtxt
[8] Harvtxt
[9] Harvtxt
[10] Harvtxt
[11] Harvtxt
[12] Harvtxt
[13] Harvtxt
[14] Harvtxt
[15] Harvtxt
[16] Harvtxt
[17] Harvtxt
[18] Harvtxt
[19] Harvtxt
[20] Harvtxt
[21] Harvtxt
[22] Harvtxt
[23] Harvtxt
[24] Harvtxt
[25] Harvtxt
[26] Harvtxt
[27] Harvtxt
[28] Harvtxt
[29] Harv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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