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라 다카노부 (15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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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라 다카노부(1529년)는 히라도섬을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펼친 인물로, 마쓰라 씨 가문의 일원이다. 13세에 가문을 이었고, 오우치 요시타카로부터 이름을 받아 히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그는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주변 다이묘들과의 경쟁 속에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준 후에도 실권을 유지했다. 159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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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라 다카노부 (152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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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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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직책 | 히라도 다이묘 |
재임 시작 | 1541년 |
재임 종료 | 1568년 |
이전 | 마쓰라 오키노부 |
이후 | 마쓰라 시게노부 |
출생 | 1529년 |
사망 | 1599년 4월 1일 |
이름 | |
씨 | 마쓰라 |
이름 | 다카노부 (隆信) |
다른 이름 | 인산 (印山, 호), 잇케이사이 (一渓斎), 겐자부로 (源三郎, 통칭) |
법명 | 도카 (道可) |
시호 | 존쇼인 (尊勝院) |
신호 | 해당사항 없음 |
계명 | 해당사항 없음 |
생애 | |
출생 연도 | 교로쿠 2년 (1529년) |
사망 연도 | 게이초 4년 윤3월 6일 (1599년 4월 30일) |
묘소 | 사이쿄지 원내 (원래는 조동종 쇼온인에 안장) |
관직 | |
관위 | 히젠 노카미 |
주군 | 오우치 요시타카 → 오토모 소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가계 | |
씨족 | 마쓰라 씨 |
부모 | 마쓰라 오키노부 |
배우자 | 해당사항 없음 |
자녀 | 시게노부 고토 고레아키 마쓰라 치카시 (마쓰라 무네카네의 양자) 노부자네 시사 스미타케 실 |
2. 생애
마쓰라 다카노부는 히젠 마쓰라 지역을 지배하던 마쓰라 씨의 분가 중 하나인 히라도 마쓰라 씨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쓰라 당은 총령이 없이 가미마쓰라 당의 하타 씨와 시모마쓰라 당의 마쓰라 씨(히라도 마쓰라 씨 및 아이오이우라 마쓰라 씨)가 다투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고신 대에 오우치 씨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어 히라도 마쓰라 씨의 우위가 굳어지고 있었으나, 덴분 10년(1541년) 8월 13일 고신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13세로 원복 전이었던 겐자부로(다카노부)는 실무를 맡을 수 없어 가신들 사이에 혼란이 있었지만, 고테다 야스마사, 하타 모리, 하타 다케[6] 등의 지원을 받아 덴분 12년(1543년)에 가독을 이었다. 오우치 요시타카에게서 편휘를 받아 '''다카노부'''라 이름 짓고 히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다카노부는 후몬지(普門寺)의 전 주지 노호 선사에게 배우고, 신토류의 시다 노부사다와 후지와라 소토에게 병법을, 이세 사다즈미에게 예법[7]을 익혔다. 요코부에 능했으며, 매사냥을 즐겼다.
히라도섬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양 활동을 한 다카노부는 히라노 성 아래에 조선 및 서방과의 교역 창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외부 문물과 천주교의 유입은 종교적 갈등을 일으켰고, 다카노부는 천주교 탄압에 힘썼으나 번번이 실패했다.[2]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다카노부는 영내에서 조총 제조를 지시하고 화약 비축과 조총 부대 훈련에 힘써 군비를 확대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쇠퇴하던 왜구 거점 3곳을 제압하고 기타마쓰라 반도를 제압했다. 주변 아리마 씨나 류조지 씨 등 인근 다이묘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시사 씨나 하타 씨 일부를 공격하고 혼인이나 혈족을 양자로 들여 마쓰라 당 일족을 묶으려 했다.
오토모 가문의 쇠퇴로 류조지 다카노부의 기세가 히젠뿐 아니라 기타큐슈를 석권할 정도였으나, 덴쇼 12년(1584년) 다카노부가 사쓰마 시마즈 씨의 지원을 받은 아리마 씨에게 패배하여 전사하면서(오키타나와테 전투) 마쓰라 가문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참전하여 소령 안도를 허락받았다. 다카노부는 중국 문물과 명기를 소유하고 있어 이듬해 처음 교토에 올라갔을 때 히데요시에게 다도회를 청해 센노 리큐와 3명이 각자 다기를 선보였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에는 당주인 아들이 출전하여 다카노부는 출진하지 않았지만, 분로쿠 2년(1594년) 이키 섬과 고토 열도와 조선 간의 군량미 수송 감독을 히데요시에게 의뢰받아 이를 완수하여 상을 받았다.
게이초 원년(1597년), 나가토국 다이네이 사에서 승려 안소 주요에게 도호를 받아 '인산(印山)'이라 불렀다. 게이초 4년(1599년), 히라도 가쓰오야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4] 향년 72세. 사후 손쇼인(尊勝院)으로 추증되었다. 다카노부는 약소 세력이었던 히라도 마쓰라 씨를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시키고, 근세까지 존속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마쓰라 씨의 기초를 다졌으며, 아들 시게노부에 의해 번영은 더욱 확고해졌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히젠 마쓰라(肥前松浦) 지역을 지배하는 마쓰라 씨의 분가 중 하나인 히라도 마쓰라 씨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쓰라 당에는 총령이 없었고, 가미마쓰라 당의 하타 씨와 시모마쓰라 당의 마쓰라 씨(히라도 마쓰라 씨 및 아이오이우라 마쓰라 씨)가 다투었다. 아버지 고신의 대에 오우치 씨와의 강한 유대 관계를 통해 히라도 마쓰라 씨의 우위가 굳어지고 있었지만, 덴분 10년(1541년) 8월 13일에 고신은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이 때, 겐자부로는 아직 13세의 원복 전이라 실무에 임할 수 없었고, 잠시 동안 가신들의 혼란도 있었지만, 고테다 야스마사나 하타 모리, 하타 다케[6] 등의 지원을 받아 덴분 12년(1543년)이 되어서야 겨우 가독을 이었다. 오우치 요시타카로부터 편휘를 받아 '''다카노부'''라고 이름을 짓고, 히젠노카미에 임명되었다.다카노부는 후몬지(普門寺)의 전 주지 노호 선사에게 사사하고, 신토류의 시다 노부사다와 후지와라 소토에게 병법을, 이세 사다즈미에게 예법[7]을 배웠다. 요코부에 능했고, 매사냥을 좋아했다.
1543년 히라도의 영주가 된 14세의 다카노부는 도요히사 야스마사의 조언을 받았다. 도요히사는 유명한 사무라이이자 전 히라도 영주의 사촌이었으며, 그의 지도 아래 고테다 가문의 영지는 이키쓰키의 대부분, 다쿠시마, 오지카, 노시마 섬과 히라도의 카스가, 시시, 이이라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2. 2. 대외 교역과 종교 갈등
히라도섬을 중심으로 왕성한 해양활동을 펼친 마쓰라 다카노부는 히라노 성하에 조선 및 서방과의 교역 창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외부 문물의 흥성과 천주교 유입은 종교적 갈등을 야기했고, 다카노부는 천주교 탄압에 주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2]1543년 히라도의 영주가 된 14세의 다카노부는 왜구 지도자 왕직과 동맹을 맺고 그를 히라도에 초청했다.[2] 1550년대에는 포르투갈 무역을 놓고 오무라 스미타다와 경쟁하며 후쿠다만 전투를 포함한 무력 충돌을 겪었다. 이 경쟁은 30년 이상 지속되었고, 1580년 나가사키가 예수회에 양도되어 포르투갈의 기항지가 되면서 오무라가 승리했다.
초기 키리시탄 운동에 관대했던 다카노부는 1550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히라도로 환영했고[3], 그의 가신 고테다 야스마사는 1551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1558년, 예수회 추종자들의 선교 활동으로 세 개의 불교 사찰이 파괴되자 영토에서 예수회를 추방했다. 야스만다케의 선승이 가스파르 빌레라 신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불교 신도들이 교회에 돌을 던지고 십자가를 넘어뜨리는 폭동이 발생했고, 다카노부는 빌레라에게 떠날 것을 요청했다.
히라도에는 명의 상인과 중국인 해적(후기 왜구)이 많이 살고 있었고, 해적왕 왕직이 포르투갈 배를 안내하여 히라도에 처음 내항시켰다고 전해진다. 다카노부는 오토모 요시시게에게 보고하여 호시를 얻어 포르투갈 무역(남만 무역)을 시작했다.
1550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히라도에 오자, 다카노부는 선교 활동을 허용했다. 1553년부터 1561년까지 포르투갈 배는 매년 내항했고, 히라도는 중심 무역지로 번성했다. 다카노부는 조총과 대포 등의 무기를 솔선하여 구입했다. 그러나 열렬한 조동종 종도였던 다카노부는 기독교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신자 확대는 지역 갈등을 낳았다. 1558년, 다카노부는 가스파르 비레라에게 히라도 퇴거를 명령했고, 불교도가 교회를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561년에는 상거래 문제로 포르투갈인이 살상되는 사건(미야노마에 사건)도 발생했고, 포르투갈 배는 오무라 스미타다의 요코세우라로 옮겨갔다. 1564년 다카노부의 요청으로 포르투갈 배가 재입항하고 교회가 재건되었지만, 이듬해 루이스 프로이스 등의 주선으로 기리시탄 다이묘가 된 오무라 스미타다의 후쿠다우라로 포르투갈 배가 떠났고, 나가사키 항이 개항되면서 히라도의 포르투갈 무역은 막을 내렸다.
2. 3. 세력 확장과 주변 다이묘와의 관계
마쓰라 다카노부는 히라도섬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양 활동을 펼쳤다. 마쓰라 씨는 히젠 마쓰라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이었으며, 쓰시마의 소씨(宗氏), 히젠 소노키의 오무라씨(大村氏)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2]1543년, 14세의 다카노부는 히라노 영주가 되어 도요히사 야스마사의 조언을 받았다. 도요히사는 전 히라도 영주의 사촌이자 유명한 사무라이였다. 그의 지도 아래 고테다 가문의 영지는 이키쓰키 대부분, 다쿠시마, 오지카, 노시마 섬, 그리고 히라도의 카스가, 시시, 이이라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같은 해, 다카노부는 왜구 지도자 왕직과 동맹을 맺고 그를 히라도에 초청하여 그의 무리가 규슈 외곽 섬을 지배하도록 허용했다.[2]
1550년대, 다카노부는 포르투갈 무역을 두고 오무라 스미타다와 경쟁했다. 오무라 스미타다는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이 경쟁은 후쿠다만 전투를 포함한 여러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다카노부가 은퇴한 후에도 30년 이상 지속된 이 경쟁은, 1580년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양도하여 포르투갈의 기항지로 만들면서 오무라의 승리로 끝났다.
다카노부는 초기에 일본에 들어온 키리시탄 운동에 관대했다. 1550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히라도로 환영했고,[3] 그의 가신 고테다 야스마사는 1551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1558년, 다카노부는 영토에서 예수회를 추방했다. 예수회 추종자들의 선교 활동으로 세 개의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고, 그들은 유물을 바다에 던졌다. 야스만다케의 선승이 가스파르 빌레라 신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불교 신도들이 세 교회에 돌을 던지고 한 교회의 십자가를 넘어뜨리는 등 여러 폭동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다카노부는 빌레라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중에 가토 지역의 영주 가토 사에몬을 형제들의 압력으로 나가사키에서 은퇴하도록 강요했다.
히라도에는 명의 상인과 중국 상인을 보호하는 중국인 해적(후기 왜구)이 많이 살고 있었다. '고호(五峯)'라고 칭했던 해적왕 왕직은 가쓰오야마에 저택을 세웠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가 포르투갈 배를 안내하여 히라도에 처음으로 내항시켰다고 한다. 다카노부는 이를 주군 오토모 요시시게에게 보고하여 호시의 허가를 얻어 포르투갈 무역(남만 무역)을 시작했다.
1550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서 포교를 거절당하고 히라도로 왔다. 다카노부는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허용했고, 1553년부터 1561년까지 포르투갈 배는 매년 히라도에 들어와 중심 무역지로 번성했다. 다카노부는 조총과 대포 등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선교사를 후대했지만, 열렬한 조동종 신자였던 다카노부는 기독교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신자의 확대는 지역 갈등을 야기했다. 1558년, 다카노부는 가스파르 비레라에게 히라도에서 퇴거를 명령했고, 이에 편승한 불교도가 교회를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561년에는 상거래 문제로 포르투갈인이 살상되는 사건(미야노마에 사건)이 발생했고, 포르투갈 배는 오무라 스미타다가 지배하는 요코세우라로 옮겨갔다. 그러나 요코세우라에서도 방화가 발생하자, 1564년 다카노부는 포르투갈 배의 재입항을 요청하고 교회도 재건했다. 그러나 이듬해 루이스 프로이스 등의 주선으로 기리시탄 다이묘가 된 오무라 스미타다의 영토인 후쿠다우라로 포르투갈 배가 떠났고, 나가사키 항이 본격적으로 개항되면서 히라도의 포르투갈 무역은 끝났다.
한편, 다카노부는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영내에서 조총 제조를 명령하고, 화약 비축과 조총 부대 훈련에 힘써 군비를 확대했다.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쇠퇴하던 왜구의 거점 3곳을 제압하고, 기타마쓰라 반도를 제압했다.
다카노부는 아리마 씨나 류조지 씨 등 인근 다이묘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시사 씨나 하타 씨의 일부를 공격하고, 혼인이나 혈족을 양자로 들여 마쓰라 당의 일족을 묶으려 했다.
1563년, 고토 다카아키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위세에 굴복했다. 다케오 고토 씨의 양자로 보낸 차남 고토 코레아키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아들 고토 이에노부에 의해 고토 씨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다카노부는 이모리 성을 공격하여 오랫동안 대립해 온 아이오이우라 마쓰라 가문의 마쓰라 친(宗金)을 굴복시켰다. 강화 결과, 아이오이우라 마쓰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아리마 하루즈미의 아들 마쓰라 모리를 아리타 씨로 내쫓고, 히라도 마쓰라 가문에서 다카노부의 아들 구로를 양자로 삼아 아이오이우라 마쓰라 가문을 히라도 마쓰라 가문에 종속시켰다.[8]
1571년, 이키를 지배하에 두었다.
1581년, 스구타니 성 성주 시사 스미즈미의 동생 시사 스미모토(준겐)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시사 스미즈미의 아들 스미카즈를 공격해 멸망시켜 시사 씨를 산하에 두었다.
2. 4. 중앙 정권과의 관계
오우치 요시타카로부터 편휘를 받아 '''다카노부'''라는 이름을 짓고, 히젠노카미에 임명되었다.[7]히라도에는 명의 상인과 중국인 해적(후기 왜구)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가쓰오야마에 저택을 세운 해적왕 '고호(五峯)' 왕직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인물이 포르투갈 배를 안내하여 처음으로 히라도에 내항시켰다고 한다. 다카노부는 이것을 주군인 오토모 요시시게에게 보고하여 호시 허가를 얻어 포르투갈 무역(남만 무역)이 시작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참전하여 소령 안도를 허락받았다. 다카노부는 중국의 문물, 명기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듬해 처음으로 교토에 올라갔을 때 히데요시에게 다도회를 청해 센노 리큐와 3명이 각자의 다기를 선보였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에는 당주인 아들이 출전하여 다카노부는 출진하지 않았지만, 분로쿠 2년(1594년) 이키 섬과 고토 열도와 조선 간의 군량미 수송 감독을 히데요시에게 의뢰받아 이것을 완수했으므로 상을 받았다.
2. 5. 사망
게이초 4년(1599년), 마쓰라 다카노부는 히라도 가쓰오야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4] 향년 72세. 사후 손쇼인(尊勝院)으로 추증되었다.참조
[1]
서적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서적
Money Economy in Medieval Japan: A Study in the Use of Coins
Yale University Press
[3]
서적
Tanegashima –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Routledge
[4]
서적
The Kakure Kirishitan of Japan: A Study of Their Development, Beliefs and Rituals to the Present Day
Japan Library
[5]
문서
代々の次期当主が名乗った共通の名前。
[6]
문서
弾正忠、波多盛の実弟。
[7]
문서
伊勢流は室町時代の武家礼法の大家。
[8]
문서
天正4年(1576年)に死去した。息子の松浦定が相神浦松浦家を5歳で継い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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