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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조약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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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 조약 (1970년)은 1970년 8월 서독과 소련이 체결한 조약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의 동방 정책의 일환으로,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쪽 국경선으로 인정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 조약은 양국 간의 무력 사용 포기, 국경선 인정, 국제 평화 노력 등을 담고 있으며, 서독과 동유럽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조약 체결 후 빌리 브란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동서독 기본 조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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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조약 (1970년)
조약 개요
명칭모스크바 조약
종류양자 조약
서명일1970년 8월 12일
서명 장소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효력 발생정보 없음
관련정보 없음
당사국
서명국알렉세이 코시긴, 안드레이 그로미코
빌리 브란트, 발터 셸
비준국소비에트 연방
서독
조약 내용
내용무력 불사용 조약
추가 정보
원어 명칭러시아어:
독일어: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동독으로 분단된 독일에서, 서독은 1955년 콘라트 아데나우어 총리 주도로 소련국교를 회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할슈타인 원칙을 발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승인한 국가와는 소련을 제외하고 국교를 단절하는 외교 방침을 채택하여 동서독 간 대립이 지속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이후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대부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침공은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련과 서독 간 경제 협력은 진전되고 있었다. 조약 체결 전부터 서독은 소련 내 대규모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분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국 나치 독일서독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서독은 1955년 소련과 수교했다. 하지만 같은 해 할슈타인 독트린을 발표해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는 소련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교를 단절하겠다는 외교 방침을 채택했으며, 서독 정부도 동독을 법률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3]

한편 나치 독일의 영토 일부가 폴란드에 할양되어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이 오데르-나이세선으로 조정되었는데, 동독은 이를 인정했으나 서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서독과 동유럽 사이에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3]

2. 2.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1969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하여 빌리 브란트가 연방총리로 취임하면서 독일 외교 정책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브란트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포기하고 동방 정책을 추진했다.[3] 특히 전쟁 주요 피해국인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2. 3. 소련의 대외 정책 변화

1960년대 중소 분쟁이 심화되면서, 소련은 서방에 대한 강경 노선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은 소련의 대외 정책 변화를 가속화했다.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과 서방과의 경제 격차 심화는 소련이 서독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받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3. 체결 과정

1969년 서독에서 사민당 중심의 브란트 정권이 탄생하면서 "동방 외교"가 제창되었고, 할슈타인 원칙이 폐기되었다. 이를 통해 동유럽 국가와의 외교 관계 수립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으로부터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독이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여 현 국경을 받아들여야 했다.[1]

한편, 소련은 중소 분쟁이 1969년 대규모 중소 국경 분쟁으로 발전하면서 서방에 대한 강경책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과 서방과의 경제 격차 확대로 인해 서독과의 화해 및 경제 관계 강화가 중요해졌다.[1]

이러한 동서 화해 분위기 속에 소련과 서독 간의 경제 협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조약 체결 전부터 서독은 소련 내 대규모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1]

3. 1. 초기 협상

소련은 서독에서 첫 사민당 정부가 출범한 것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브란트가 1969년 11월 28일 핵확산방지조약에 서명한 것도 서독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던 소련을 배려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69년 12월부터 소련과 서독은 무력 행사 포기와 관계 개선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지만, 서독의 동독 승인 문제로 평행선만 달리다 끝났다.[1]

브란트는 독일 연방의회에서 가까스로 과반수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소련과의 외교 관계에서 빨리 성과를 내고자 했고, 자신의 비서인 에곤 바르를 소련에 보내 회담을 이어가게 했다. 바르는 동독을 법률적으로 승인하는 문제와 오데르-나이세선을 인정하는 것은 서베를린의 안전을 보장하는 베를린 4국 협정 체결 없이는 지금의 서독 의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소련에 설명했다.[1]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은 서독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1970년 5월까지 두 나라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 정리된 문서를 바르 문서라 하는데, 이는 1970년 6~7월 서독 언론에 누설되면서 약간의 잡음도 있었으나 조약 체결은 순풍을 타고 진행되었다.[1]

3. 2. 에곤 바르의 중재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비서였던 에곤 바르서베를린의 안전을 보장하는 베를린 4국 협정 체결 없이는 동독의 법률적 승인과 오데르-나이세 선 인정을 서독 의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소련 측에 설명했다.[1]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은 서독의 입장을 이해했고, 1970년 5월까지 양측의 입장을 정리한 '바르 문서'를 작성했다.[1]

3. 3. 조약 체결

바르 문서 유출로 인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약 체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1] 1970년 8월 발터 셸 서독 외무장관이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하면서 조약이 체결되었다.[1]

4. 내용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고, 이 중 자본주의 국가가 된 서독은 1955년 국가 주권을 회복했다. 콘라트 아데나우어 총리는 소련을 방문하여 국교를 회복했지만, 같은 해 할슈타인 원칙을 발표하여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승인한 국가(소련 제외)와는 자동적으로 국교를 단절하는 외교 방침을 채택했다. 이로 인해 동서독 간 대립은 개선되지 않았다.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이라 불리는 동독·폴란드 간의 국경선을 승인하지 않아 동유럽 국가와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고, 이는 동서 냉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바르샤바 조약 기구군(대부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침공은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1969년 서독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의 브란트 정권이 탄생하면서 "동방 외교"가 제창되었고, 할슈타인 원칙이 폐기되었다. 동유럽 국가와 외교 관계 수립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으로부터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여 현 국경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소련은 중소 분쟁중소 국경 분쟁으로 발전하여 서방에 대한 강경책 유지가 어려워졌다.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 심화와 서방과의 경제 격차 확대 속에서, 서독과의 화해 및 경제 관계 강화가 중요해졌다.

이러한 동서 화해를 배경으로 소련과 서독 간 경제 협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조약 체결 전 이미 서독은 소련 내 대규모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4. 1. 주요 내용

Vertrag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 Union der Sozialistischen Sowjetrepubliken|모스크바 조약de은 국제 평화와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 무력 행사 포기 원칙, 그리고 현재의 국경선 존중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3] 특히,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쪽 국경선으로 인정하고, 그 동쪽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3] 그러나 훗날 독일 통일 시에는 국민의 자유로운 자결권에 따라 국경선을 새롭게 논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양측은 국제 평화를 유지하고 유럽 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며, UN 헌장 제2조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조약 서명국들은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전후 국경, 특히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했다. 이 선은 역사적인 동부 독일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Vertrag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 Union der Sozialistischen Sowjetrepubliken|모스크바 조약de동독과 서독의 분단을 확정하여 양국 관계에 안정적인 요소를 제공했다.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방 국경선으로 승인하고, 구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소련령 칼리닌그라드주, 폴란드의 포모제주 등)과 구 실롱스크(폴란드령 실롱스크주 등)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소련과 서독 양국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상호 영토에 대한 무력 불행사를 선언했다.

4. 2. 독일 통일 이후 국경선 재논의 가능성

서독은 훗날 독일이 통일될 경우, 독일 국민의 자유로운 자결권에 따라 국경선을 새롭게 논의할 수 있다는 단서를 추가하여 국내 보수 야당인 기민련, 기사련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했다.

5. 비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은 모스크바 조약이 서독 의회에서 빨리 비준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브란트서베를린의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유럽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며, 서베를린을 오가는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베를린 4국 협정 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71년 9월 베를린 협정이, 12월에 독서독 통과 협정이 차례차례 체결되었지만, 기민련·기사련사민당이 독일 영토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모스크바 조약 비준에 반대했고, 소련은 모스크바 조약이 서독에서 비준되지 않으면 베를린 협정도 발효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2]

그러나 긴장 완화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열망이 컸고, 사민당이 연방의회를 해산할 뜻까지 보이자 기민련·기사련은 협의에 나섰다. 1972년 5월 연방의회 표결에서 기민련은 기권, 기사련은 반대했지만, 연립 여당인 사민당과 자민당이 찬성하여 비준에 성공했다. 같은 달 말 소련이 모스크바 조약을 비준했고, 다음 달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하면서 베를린 협정과 모스크바 조약이 모두 발효되었다.[3]

5. 1. 서독 의회의 비준 과정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은 모스크바 조약이 서독 의회에서 빨리 비준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브란트서베를린을 오가는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베를린 4국 협정 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71년 9월 베를린 협정이, 12월에 독서독 통과 협정이 차례차례 체결되었지만 모스크바 조약은 브란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민련·기사련사민당이 독일 영토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모스크바 조약 비준에 여전히 반대했고, 소련은 모스크바 조약이 서독에서 비준되지 않으면 베를린 협정도 발효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2]

그러나 긴장 완화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열망이 컸기에 기민련·기사련은 계속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사민당이 연방의회를 해산할 뜻까지 보이자 결국 기민련·기사련은 사민당과 협의에 나섰다. 1972년 5월 연방의회 표결에서 기민련은 기권, 기사련은 반대했지만, 연립 여당인 사민당과 자민당이 찬성하여 비준에 성공했다. 그 달 말 소련이 모스크바 조약을 비준했으며, 다음 달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하면서 베를린 협정이 발효되었고, 이와 함께 자동적으로 모스크바 조약도 발효되었다.[3]

5. 2. 조약 발효

1972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 연방의회에서 모스크바 조약 비준안 표결이 진행되었다. 야당인 기민련은 기권, 기사련은 반대했지만, 연립 여당인 사민당자민당의 찬성으로 비준안이 통과되었다.[2] 같은 달 말에는 소련이 모스크바 조약을 비준했다.[2]

이후 6월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하면서 베를린 협정이 발효되었고, 이와 함께 모스크바 조약도 자동적으로 발효되었다.[2]

6. 영향

1969년 서독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의 브란트 정권이 탄생하면서 "동방 외교"가 제창되었고, 할슈타인 원칙이 폐기되었다.[3] 소련에서는 중소 분쟁중소 국경 분쟁으로 발전하여 서방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기 어려웠고, 서독과의 경제 관계 강화가 중요해졌다.

이러한 동서 화해를 배경으로, 소련과 서독 간의 경제 협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서독 국내에서는 이 조약에 대한 저항이 있었지만, 브란트 정권의 동방 외교는 계속되었고, 1972년동서독 기본 조약에 따른 양독의 상호 국가 승인과 1973년의 국제 연합 동시 가입으로 이어졌다.[3]

한편, 소련에게는 "독일의 복수"라는 역사적 위협으로부터의 해방과, 서유럽 국가와의 협력 관계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서독을 포함한 유럽 공동체(EC)와의 경제 관계는 크게 확대되었다.

6. 1. 서독과 동유럽 관계 개선

1969년 서독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의 브란트 정권이 탄생하면서 "동방 외교"가 제창되었고, 할슈타인 원칙이 폐기되었다.[3] 이로 인해 동유럽 국가와의 외교 관계 수립이 시작되었지만, 이를 본격화하고 전쟁으로부터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현 국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했다. 서독 정부가 오데르-나이세선을 승인하면서 서독과 폴란드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70년 9월 양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3]

소련과도 무역 협정·가스관 협정 등이 체결되었고, 소련이 더 이상 서독의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 않기로 하자 1973년 동서독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3] 이러한 동서 화해를 배경으로 소련과 서독 간의 경제 협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이 조약 체결 전에 이미 서독에 의해 소련 내에서의 대규모 자원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독 국내에서는 동방 영토의 정식 포기를 포함하는 이 조약에 대한 저항이 강했지만, 브란트 정권의 동방 외교는 계속되었다. 동부 국경의 승인은 영토를 둘러싼 오랜 분쟁에서 서독을 해방시키고 평화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후, 같은 해에 서독과 폴란드 간의 조약도 체결되었고, 1972년동서독 기본 조약에 따른 양독의 상호 국가 승인과, 1973년의 국제 연합 동시 가입으로 이어졌다.[3]

6. 2. 유럽 안보 협력 증진

소련은 서독과의 긴장 완화를 통해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냉각되었던 서방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참여와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지게 된다.[3] 이 동서 공존 흐름은 서독뿐만 아니라, 1972년 전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 설치, 1975년 헬싱키 선언에서 전후 확정된 국경의 상호 승인과 불가침, 각국 주권 존중, 동서 양 진영의 기본적 인권 보호 등으로 이어졌다.

6. 3. 빌리 브란트의 업적

빌리 브란트모스크바 조약 체결의 공로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3] 조약 비준 이후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6. 4. 1972년 서독 총선

브란트는 의회 과반수가 아슬아슬하여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 의회를 해산하고 1972년 총선을 실시했다. 사민당과 자민당은 다시 국민의 신임을 얻어 연립 내각을 유지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Moscow Treaty (12 August 1970) https://www.cvce.eu/[...] University of Luxembourg 2021-06-19
[2] 서적 Deutsche Geschichte von 1945 bis zur Gegenwart OLZOG 2006
[3] 웹사이트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s ''Ostpolitik'' http://www.cvce.e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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