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 (1789년~18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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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89년부터 1849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는 연방주의 시대를 시작으로 서부 개척, 잭슨 민주주의,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거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시기이다. 조지 워싱턴의 초대 대통령 당선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금융 정책 추진은 연방 정부의 기틀을 다졌지만, 위스키 반란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존 애덤스 행정부에서는 프랑스와의 유사 전쟁, 외국인 및 치안법 논란이 있었으며, 토머스 제퍼슨 시기에는 루이지애나 매입과 탐험을 통해 서부로의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 하에서는 미영 전쟁을 치르며 국가적 위상을 높였으며, 제임스 먼로 시대에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며 미국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앤드루 잭슨 행정부에서는 잭슨 민주주의가 대두되었고, 인디언 이주법과 은행 재인가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이 시기 미국은 서부로의 확장을 지속하며 '명백한 운명' 사상을 내세웠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을 획득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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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 (1789년~1849년) | |
---|---|
시대 정보 | |
이름 | 미국 |
위치 | 미국 |
시작 | 1789년 |
종료 | 1815년 |
이전 | 미국의 역사 (1776-1789) |
포함 | 연방주의 시대 제퍼슨 시대 미국 개척 시대 |
이후 | 미국의 역사 (1815-1849) |
지도자 |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
주요 사건 | 헌법 비준 위스키 반란 유사 전쟁 루이지애나 매입 1812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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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방주의 시대의 개막 (1789-1801)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0] 1790년에는 미국 헌법 제1조 제2절에 따라 제1차 미국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각 주의 하원 의원 수가 결정되었다.[40] 같은 해, 1789년 사법제도법을 통해 연방대법원 판사 6명, 3개의 순회 법원, 13개의 지방법원이 설치되었고, 연방 보안관, 보안관보, 지방 검사가 임명되었다.[40] 또한 1790년 타협에 의해 국가 수도를 남부 메릴랜드(현재 컬럼비아 특별구)에 건설하고, 주의 부채를 연방 정부가 인수하도록 하였다.[40]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은 미국 독립 전쟁의 부채를 해결하고 국립 은행을 설립하며 관세 및 세금 제도를 마련하는 등 광범위한 금융 프로그램을 추진했다.[6] 이는 주와 부유한 미국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국가 정부와 연결시키고 신생 국가의 국제적 재정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6] 그러나 미국 남부 대표들은 이미 부채를 탕감했기 때문에 해밀턴의 계획에 반대했고, 이는 70년 후 남북 간 경제적, 문화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초기 징후였다.[6] 토머스 제퍼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최초 은행이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해밀턴은 연방 정부의 권한 내에 있다고 주장했다.[6]
1794년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서 발생한 위스키 반란은 연방 정부에 대한 최초의 시험이었다.[7] 워싱턴은 1792년 민병대법을 적용하여 민병대를 소집하고 반란을 진압했다.[7] 이 사건은 연방 정부가 군사력을 사용하여 권력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위스키세는 1802년에 철폐되었다.[7]
워싱턴 행정부는 외교적으로 중립 정책을 추구했으나,[8]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8] 제이 조약으로 영국과의 긴장이 완화되었지만, 제퍼슨주의자들은 이를 영국에 대한 굴복으로 간주했다.[8][9] 이러한 외교 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다.[10] 워싱턴은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에서 정당 정치를 경고했지만, 대체로 해밀턴의 정책을 지지했다.[10]
조지 워싱턴은 국가 원수로서 8년 이상 재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1797년에 사임했다.[13]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토머스 제퍼슨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3] 애덤스는 취임 전부터 알렉산더 해밀턴과 불화했고, 분열된 연방당의 내분이라는 짐을 지게 되었다.[13]
제2대 미국 대통령
1794년 존 제이가 영국과 맺은 제이 조약은 프랑스를 자극하였고,[13] 프랑스는 “적의 항구로 향하는 식량과 군수품은 압수의 대상이 된다”는 영국식 논리를 주장했다. 1797년 경 프랑스는 300척의 미국 선박을 압수하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파기하려고 했다.[13]
애덤스는 협상을 위해 3명의 대표를 파리에 보냈으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애덤스는 의회에 대한 보고에서 탈레랑을 "X, Y and Z"로 지칭했다)의 대리인은 미국이 12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줄 것과 프랑스 정부 관리들에게 25만 달러의 뇌물을 주면 교섭에 응하겠다고 전했다. 대표단은 대노해서 귀국했고,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적의가 고조되었다. 이른바 ‘XYZ 사건’은 군대 징병과 이제 막 자립한 미국 해군의 강화로 이어졌다.[13]
1799년, 유사전쟁으로 알려진 프랑스와의 일련의 해전 후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애덤스는 전쟁을 하자는 해밀턴의 충고를 무시하고 세 명의 대표를 다시 프랑스로 파견했다. 새로 권력을 획득한 나폴레옹은 대표단을 정중하게 맞았고, 1800년 협약의 체결을 통해 분쟁의 위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약은 공식적으로 1778년의 프랑스와 맺은 군사 동맹을 파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약점을 틈타 해군이 포획한 미국 선박에 대한 위자료 2천만 달러의 지불을 거부했다.[15]
초대 미국 재무장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과 국내에서는 연방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 대처하기 위해, 애덤스는 미국 시민의 자유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외국인 및 치안법에 서명했다. 시민권 취득을 위해 필요한 거주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연장했지만, 이것은 민주공화당 지지자가 될 것 같지 않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이민을 목표로 한 책략이었다. 외국인법은 2년동안 유효했었지만, 대통령이 전시에 외국인을 제거하거나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치안법은 대통령 또는 의회에 대해 ‘거짓, 명예훼손 및 악의적인’ 글, 연설 또는 출판을 금지했다. 치안법에 근거한 유죄 판결로 시민의 자유에 대해 피해자가 나왔지만 민주공화당에 대한 지지율은 올라갔다.[13]
이 법은 저항을 받았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은 1798년 11월 12일에 켄터키 주와 버지니아 주의 의원으로부터 제안된 켄터키 및 버지니아 결의안 통과를 도왔다.[14] 이것은 주가 연방정부의 조치에 대해 이의제기를 무효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효화의 원리는 이후 관세 및 노예제도의 문제로 북부와 갈등을 빚게 된 남부 여러 주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게 되었다.[14]
애덤스는 임기 마지막 순간에 존 마셜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1835년에 사망할 때까지 마셜은 미국 대법원의 권한을 극적으로 확대했고, 강력한 국가 정부를 위한 연방주의적 헌법 해석을 제공했다.[16]
당시 조선은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서구 열강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방 정부 수립과 초기 발전은 훗날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1. 조지 워싱턴 행정부 (1789-1797)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0] 1790년에는 미국 헌법 제1조 제2절에 따라 제1차 미국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에 따라 각 주의 하원 의원 수가 결정되었다.[40] 같은 해, 1789년 사법제도법을 통해 연방대법원 판사 6명, 3개의 순회 법원, 13개의 지방법원이 설치되었고, 연방 보안관, 보안관보, 지방 검사가 임명되었다.[40] 또한 1790년 타협에 의해 국가 수도를 남부 메릴랜드(현재 컬럼비아 특별구)에 건설하고, 주의 부채를 연방 정부가 인수하도록 하였다.[40]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은 미국 독립 전쟁의 부채를 해결하고 국립 은행을 설립하며 관세 및 세금 제도를 마련하는 등 광범위한 금융 프로그램을 추진했다.[6] 이는 주와 부유한 미국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국가 정부와 연결시키고 신생 국가의 국제적 재정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6] 그러나 미국 남부 대표들은 이미 부채를 탕감했기 때문에 해밀턴의 계획에 반대했고, 이는 70년 후 남북 간 경제적, 문화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초기 징후였다.[6] 토머스 제퍼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미국 최초 은행이 위헌이라고 주장했지만, 해밀턴은 연방 정부의 권한 내에 있다고 주장했다.[6]
1794년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서 발생한 위스키 반란은 연방 정부에 대한 최초의 시험이었다.[7] 워싱턴은 1792년 민병대법을 적용하여 민병대를 소집하고 반란을 진압했다.[7] 이 사건은 연방 정부가 군사력을 사용하여 권력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위스키세는 1802년에 철폐되었다.[7]
워싱턴 행정부는 외교적으로 중립 정책을 추구했으나,[8]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8] 제이 조약으로 영국과의 긴장이 완화되었지만, 제퍼슨주의자들은 이를 영국에 대한 굴복으로 간주했다.[8][9] 이러한 외교 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다.[10] 워싱턴은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에서 정당 정치를 경고했지만, 대체로 해밀턴의 정책을 지지했다.[10]
당시 조선은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서구 열강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방 정부 수립과 초기 발전은 훗날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2. 존 애덤스 행정부 (1797-1801)
조지 워싱턴은 국가 원수로서 8년 이상 재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1797년에 사임했다.[13] 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가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토머스 제퍼슨을 누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3] 애덤스는 취임 전부터 알렉산더 해밀턴과 불화했고, 분열된 연방당의 내분이라는 짐을 지게 되었다.[13]1794년 존 제이가 영국과 맺은 제이 조약은 프랑스를 자극하였고,[13] 프랑스는 “적의 항구로 향하는 식량과 군수품은 압수의 대상이 된다”는 영국식 논리를 주장했다. 1797년 경 프랑스는 300척의 미국 선박을 압수하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파기하려고 했다.[13]
애덤스는 협상을 위해 3명의 대표를 파리에 보냈으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애덤스는 의회에 대한 보고에서 탈레랑을 "X, Y and Z"로 지칭했다)의 대리인은 미국이 12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줄 것과 프랑스 정부 관리들에게 25만 달러의 뇌물을 주면 교섭에 응하겠다고 전했다. 대표단은 대노해서 귀국했고,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적의가 고조되었다. 이른바 ‘XYZ 사건’은 군대 징병과 이제 막 자립한 미국 해군의 강화로 이어졌다.[13]
1799년, 유사전쟁으로 알려진 프랑스와의 일련의 해전 후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애덤스는 전쟁을 하자는 해밀턴의 충고를 무시하고 세 명의 대표를 다시 프랑스로 파견했다. 새로 권력을 획득한 나폴레옹은 대표단을 정중하게 맞았고, 1800년 협약의 체결을 통해 분쟁의 위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약은 공식적으로 1778년의 프랑스와 맺은 군사 동맹을 파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약점을 틈타 해군이 포획한 미국 선박에 대한 위자료 2천만 달러의 지불을 거부했다.[15]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과 국내에서는 연방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 대처하기 위해, 애덤스는 미국 시민의 자유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외국인 및 치안법에 서명했다. 시민권 취득을 위해 필요한 거주 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연장했지만, 이것은 민주공화당 지지자가 될 것 같지 않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이민을 목표로 한 책략이었다. 외국인법은 2년동안 유효했었지만, 대통령이 전시에 외국인을 제거하거나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치안법은 대통령 또는 의회에 대해 ‘거짓, 명예훼손 및 악의적인’ 글, 연설 또는 출판을 금지했다. 치안법에 근거한 유죄 판결로 시민의 자유에 대해 피해자가 나왔지만 민주공화당에 대한 지지율은 올라갔다.[13]
이 법은 저항을 받았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은 1798년 11월 12일에 켄터키 주와 버지니아 주의 의원으로부터 제안된 켄터키 및 버지니아 결의안 통과를 도왔다.[14] 이것은 주가 연방정부의 조치에 대해 이의제기를 무효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효화의 원리는 이후 관세 및 노예제도의 문제로 북부와 갈등을 빚게 된 남부 여러 주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게 되었다.[14]
애덤스는 임기 마지막 순간에 존 마셜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1835년에 사망할 때까지 마셜은 미국 대법원의 권한을 극적으로 확대했고, 강력한 국가 정부를 위한 연방주의적 헌법 해석을 제공했다.[16]
3. 민주공화당의 집권과 서부 확장 (1801-1829)
토머스 제퍼슨은 초기 미국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그의 정치적 리더십은 높게 평가받았지만, 노예제에 대한 그의 역할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평등,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옹호했으며, 귀족적이고 군주적인 경향을 공격했다.[17][18] 미국 독립 혁명을 이끌고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옹호했으며, 도시 금융 엘리트의 중앙 집권적인 경향에 반대했다. 제퍼슨은 1800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주공화당을 이끌고, 서부 개척과 탐험을 장려했다.
워싱턴과 애덤스 시대에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정부를 수립했지만, 때로는 시민들을 소외시키는 정책을 따랐다. 1798년, 연방주의자들은 육군과 해군 유지를 위해 집, 토지, 노예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여 전국의 재산 소유주에게 영향을 미쳤다. 프라이스 반란에서 펜실베이니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연방주의자들은 시민 사회의 붕괴를 보았다. 공화당은 이 행동을 연방주의적 폭정의 예시로 비난했다.[19]
제퍼슨은 농부, 상점 주인 및 기타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1800년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원으로 자처하게 만들었다. 제퍼슨의 첫 취임 연설은 1801년 3월 4일, 워싱턴 D.C.에서 행해졌으며, 제퍼슨은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를 약속했다.
제퍼슨은 농업과 서부 확장을 장려했는데, 특히 루이지애나 매입과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가 두드러진다. 미국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안식처라고 믿었던 제퍼슨은 귀화 요건을 5년으로 단축했다.
제퍼슨과 재무부 장관 앨버트 갤러틴은 정부 및 군사 지출을 삭감하여 국가 부채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제퍼슨 행정부는 주로 외교 문제와 영토 확장에 관심을 가졌다. 존 마셜 대법원장 하의 대법원은 마버리 대 매디슨 (1803)에서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검토하고 뒤집는 선례를 확립했다. 제퍼슨은 판사들에 대한 탄핵 심리를 시작했고, 새뮤얼 체이스 대법관의 재판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체이스가 상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제퍼슨은 이 캠페인을 포기했다.[20]
1807년, 제퍼슨은 의회에 국제 노예 무역을 범죄화할 것을 요구하여, 이를 "인권 침해"라고 말했다.[21]
3. 1.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 (1801-1809)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승리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41] 제퍼슨은 소농과 상인 등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의 이상주의에 호소하여 워싱턴 DC에서 최초로 취임 연설을 통해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를 약속했다.[42]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 행정부 하에서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정부를 추구했지만, 때로는 국민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41] 예를 들어, 1798년에는 국채와 국방비 충당을 위해 주택, 토지, 노예에 대한 세금을 법제화하여 재산 소유자들에게 부담을 주었고, 이는 프라이스의 반란과 같은 조세 저항 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을 비판하며 제퍼슨을 지지했다.[41]
제퍼슨 행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고 서부 확장을 추진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미시시피강 수로를 확보하고, 프랑스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광대한 농지 확장이 가능해졌다. 이는 서부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제퍼슨은 루이스 클라크 원정을 통해 서부 지역 탐사를 지원했다.
|섬네일|300px|1770년에서 1840년 사이 미국 경제의 성장]]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발발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의 이익에 따라 미국의 해상 무역을 제한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패배한 후, 영국은 프랑스 해상 무역 봉쇄를 강화하고 미국에 대한 해상 봉쇄도 실시했다. 이에 제퍼슨 행정부는 1807년 대외 무역 금지법을 시행하여 영국에 압력을 가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의 농업 수출이 타격을 입고 항구 도시들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퍼슨 행정부는 국내 정책보다는 외교와 영토 확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앨버트 갤러틴의 재정 개혁을 통해 부채를 감소시키고, 정부와 군대 지출을 줄였다. 또한, 1801년 사법부법을 통해 임명된 연방주의자 판사들을 불신하여,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에서 대법원이 의회 법률을 검토하고 부결할 수 있는 권한을 확립하자, 판사 탄핵 청문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사법부 견제 시도는 새뮤얼 채이스 재판에서 채이스가 석방되면서 중단되었다.
제퍼슨 행정부는 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1805)과 제2차 바르바리 전쟁(1815)을 통해 북아프리카 해적으로부터 미국의 해운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제퍼슨주의자들은 "자유의 제국"을 세계에 확산시킬 의무를 강조했지만, "얽매이는 동맹"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군주제, 귀족주의, 부패, 그리고 사업 방식 때문에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제이 조약은 영국에 너무 유리하여 미국의 가치를 위협한다고 비판받았다. 반면,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은 프랑스를 이상적인 유럽 국가로 만들었지만,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의 정반대였으므로 지지할 수 없었다.
3. 2.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 (1809-1817)
제임스 매디슨은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외교적 수완을 바탕으로 승리하여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35] 취임 후, 매디슨은 즉시 금수 조치법을 폐지하여 미국의 해상 무역을 활성화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여전히 악화되어 있었고, 특히 영국의 해상 주권 침해와 미국 원주민에 대한 지원은 미국의 분노를 샀다.[35]1812년, 제12대 의회는 남부와 서부의 지지를 받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영 전쟁이 발발했다.[35] 서부와 남부 주민들은 국가의 명예를 지키고 영토를 확장하며, 농산물 수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35] 반면, 뉴잉글랜드의 연방주의자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분리주의 움직임까지 보였으나, 전쟁 이후 명성이 실추되어 당세가 약화되었다.[35]

전쟁 초기, 미국은 강제 징발 문제와 테쿰세가 이끄는 인디언 저항에 직면하며 고전했다. 그러나 1813년 이리호 전투에서의 승리는 북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5] 1814년 8월에는 워싱턴 D.C. 소각 사건이 발생했지만, 1815년 1월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앤드류 잭슨이 이끄는 미군이 영국군을 격파하면서 미국의 자신감을 회복했다.[35][36]
1815년 2월, 헨트 조약이 비준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영토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했다. 그러나 영국과 인디언 간의 동맹은 소멸되었고, 이는 인디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35] 뉴올리언스 전투 승리 소식은 평화 소식과 함께 전해져 미국인들에게 심리적 승리를 안겨주었고, 선린 시대를 열었다.[36]
미영 전쟁은 반전 연방주의 정당을 몰락시키고, 앤드류 잭슨과 윌리엄 헨리 해리슨 같은 군인들과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헨리 클레이 같은 정치인들이 국가 지도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37] 또한, 전쟁의 여파로 파괴된 의회 도서관 소장품을 재건하는 등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36]
(한국의 관점) 미영 전쟁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3. 3. 제임스 먼로 행정부 (1817-1825)와 호감의 시대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임기: 1817년 - 1825년)의 시대는 당파 분쟁이 줄어들어 "호감의 시대"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말은 활발한 파벌이나 지역 갈등의 시기를 은폐한 측면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붕괴된 연방당을 대신하여 민주공화당이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을 보여주었다.먼로는 1823년 12월 2일 의회 연설에서 '''먼로주의'''를 발표했다. 미국은 향후 유럽의 식민지화와 주권 국가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미국은 유럽 열강과 식민지 전쟁에 간섭하지 않고, 미국 주와 독립 국가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거나 간섭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의 관점): 먼로 독트린은 미국의 세력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으며, 이는 훗날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
연방주의자의 퇴조는 대통령 선출 방식에도 왜곡을 초래하여 짧은 ‘시대’의 결말을 가져왔다. 당시 각 주의 대의원들이 후보자를 지명할 수 있었다.
3. 4. 존 퀸시 애덤스 행정부 (1825-1829)
존 퀸시 애덤스는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헨리 클레이의 지지를 통해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이는 '뒷거래' 논란을 야기했다. 이 선거에서는 앤드류 잭슨, 헨리 클레이, 존 퀸시 애덤스, 윌리엄 크로퍼드 등이 주요 후보로 나섰으며, 인물과 파벌의 연합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애덤스는 뉴잉글랜드와 뉴욕 대부분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클레이는 켄터키, 오하이오, 미주리에서, 잭슨은 남동부와 일리노이, 인디애나 등에서, 크로퍼드는 버지니아, 조지아 등에서 지지를 얻었다. 선거인단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하원에서 대통령이 결정되었고, 클레이의 지지를 받은 애덤스가 대통령이 되고 클레이는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애덤스 행정부 기간 동안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했다. 애덤스의 지지자들은 국민공화당을 결성했고, 이는 후에 휘그당으로 발전했다. 반면, 앤드류 잭슨은 민주당을 이끌며 제퍼슨, 매디슨, 먼로의 노선을 계승했다. 애덤스는 미국 시스템이라는 도로 및 운하 건설 계획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4. 잭슨 민주주의와 격변의 시대 (1829-1848)
앤드루 잭슨은 잭슨 민주주의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민주당의 창당 멤버였다.[43] 잭슨의 두 번의 임기는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전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43]
잭슨은 서부 농부와 동부의 노동자, 숙련공, 소규모 상인에게서 지지를 받았다.[43] 이들은 산업혁명으로 상업이나 산업 구조가 바뀌려는 시대에 저항하기 위하여 선거권을 행사했다.[43]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선거권 확대 흐름 속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43] 버몬트주는 미국에 편입되었을 때부터 남성의 보통선거를 실시했고, 테네시주는 거의 모든 납세자가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43] 뉴저지주, 메릴랜드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1807년부터 1810년 사이에 재산이나 소득 조건을 폐지했다.[43] 1815년 이후 미국에 편입된 각 주는 백인 남성 보통선거를 실시하거나, 납세 의무 하한이 낮은 선거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43] 1815년에서 1821년에는 코네티컷주, 매사추세츠주, 뉴욕주가 재산 제한을 철폐했다.[43] 1824년, 선거인단 선거의 구성원은 아직 6개 주에서 대의원이 선출하고 있었다.[43] 1828년 대통령 선거인은 델라웨어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하고 일반적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43]
1830년, 의회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켰다.[43] 이 법은 동부 지방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의 땅을 미시시피강 서쪽의 땅과 교환하는 조약에 대해 대통령에게 협상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43] 1834년 특별한 인디언 준주가 오클라호마주의 동부에 만들어졌다.[43] 잭슨의 임기 중 마지막으로, 미국 원주민은 94 조약을 체결하여 수천 평방 마일의 땅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43]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부와 조지아주에 있던 체로키 족은 1791년 이후 조약에 의해 그 땅을 보장받고 있었지만, 1835년에 체로키 족의 일파가 맺은 《뉴에코타 조약》으로 그 영지에서 쫓겨났다.[43]
미국 제2은행 재인가 문제는 잭슨 행정부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43] 미국 제1은행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도로 1791년에 설립되어 20년 이상 국가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43] 정부는 그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부 은행은 아니었고, 이익이 주주에게 배당되는 민간 회사였다.[43] 통화를 안정시키고, 무역을 촉진할 의도였지만, 서부 시민과 노동자는 소수의 유력자들에게 특정한 혜택을 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43] 결국 미국 제1은행은 1811년에 민영화되었다.[43] 이후 몇 년 동안 은행 업무는 주가 관할하는 여러 은행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과도한 통화를 발행해 큰 혼란을 낳고 있었다.[43] 1816년, 미국 제1은행과 비슷한 ‘미국 제2은행’이 설립되어 20년동안 국유화되었다.[43]
미국 제2 은행은 시작부터 새로운 주나 준주에서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43] 잭슨은 은행의 재국유화 법안에 거부권을 발동했다.[43] 잭슨은 의회 연설에서 독점과 특별한 권익을 비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43] “우리의 부자들은 평등한 보호와 평등한 이익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의회 입법을 통해 더욱 부를 늘리고 싶어 한다.”[43]
잭슨의 제1기 임기 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보호관세 문제에 직면했다. 1832년에 의회를 통과하고 잭슨이 서명하여 법제화된 보호 관세는 1828년의 조치보다 완화되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몇몇 사우스캐롤라이나 시민은 이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무효화’의 ‘주의 권한’ 원칙을 행사했다. 이 원칙은 1832년까지 잭슨의 부통령이었던 존 칼훈이 1828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해명과 항의》(''South Carolina Exposition and Protest'')에서 공표한 것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무효화 조례’를 채택하고 주 내에서 1828년과 1832년 관세법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무효화는 연방 정부의 권위에 대한 일련의 주 반대 운동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것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위협에 대해 잭슨은 1832년 11월에 해군 소형 함선 7척과 대형 함선 1척을 찰스턴에 파견했다. 12월 10일, 잭슨은 무효화주의자에 대한 분명한 선언을 발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폭동과 반역의 경계’에 있고 주의 시민은 그 조상들이 싸워 쟁취한 미합중국과의 동맹을 회복해야한다고 호소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옹호하는 잭슨의 정적이기도 한 헨리 클레이 상원 의원은 의회에서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관세에 관한 〈1833년 클레이 타협안〉은 수입되는 상품 가격의 20%를 넘는 세금은 적절한 시기에, 예를 들어 1842년까지 줄이고, 모든 상품의 관세는 1816년 중용적인 관세 수준까지 되돌리게 하였다.
남부의 다른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방식을 현명하지도 않고,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잭슨은 연방의 지배권 원칙에 따라 연방 정부를 이용했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요구의 대부분을 통해 하나의 주가 연방 의회에 그 의사를 표명할 수 있음을 나타냈다.
4. 1. 앤드루 잭슨 행정부 (1829-1837)
앤드루 잭슨은 잭슨 민주주의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민주당의 창당 멤버였다.[43] 잭슨의 두 번의 임기는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전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43]
잭슨은 서부 농부와 동부의 노동자, 숙련공, 소규모 상인에게서 지지를 받았다.[43] 이들은 산업혁명으로 상업이나 산업 구조가 바뀌려는 시대에 저항하기 위하여 선거권을 행사했다.[43]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선거권 확대 흐름 속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43] 버몬트주는 미국에 편입되었을 때부터 남성의 보통선거를 실시했고, 테네시주는 거의 모든 납세자가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43] 뉴저지주, 메릴랜드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1807년부터 1810년 사이에 재산이나 소득 조건을 폐지했다.[43] 1815년 이후 미국에 편입된 각 주는 백인 남성 보통선거를 실시하거나, 납세 의무 하한이 낮은 선거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43] 1815년에서 1821년에는 코네티컷주, 매사추세츠주, 뉴욕주가 재산 제한을 철폐했다.[43] 1824년, 선거인단 선거의 구성원은 아직 6개 주에서 대의원이 선출하고 있었다.[43] 1828년 대통령 선거인은 델라웨어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하고 일반적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43]
1830년, 의회는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켰다.[43] 이 법은 동부 지방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의 땅을 미시시피강 서쪽의 땅과 교환하는 조약에 대해 대통령에게 협상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43] 1834년 특별한 인디언 준주가 오클라호마주의 동부에 만들어졌다.[43] 잭슨의 임기 중 마지막으로, 미국 원주민은 94 조약을 체결하여 수천 평방 마일의 땅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43]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부와 조지아주에 있던 체로키 족은 1791년 이후 조약에 의해 그 땅을 보장받고 있었지만, 1835년에 체로키 족의 일파가 맺은 《뉴에코타 조약》으로 그 영지에서 쫓겨났다.[43]
미국 제2은행 재인가 문제는 잭슨 행정부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43] 미국 제1은행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주도로 1791년에 설립되어 20년 이상 국가가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43] 정부는 그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부 은행은 아니었고, 이익이 주주에게 배당되는 민간 회사였다.[43] 통화를 안정시키고, 무역을 촉진할 의도였지만, 서부 시민과 노동자는 소수의 유력자들에게 특정한 혜택을 주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43] 결국 미국 제1은행은 1811년에 민영화되었다.[43] 이후 몇 년 동안 은행 업무는 주가 관할하는 여러 은행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과도한 통화를 발행해 큰 혼란을 낳고 있었다.[43] 1816년, 미국 제1은행과 비슷한 ‘미국 제2은행’이 설립되어 20년동안 국유화되었다.[43]
미국 제2 은행은 시작부터 새로운 주나 준주에서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43] 잭슨은 은행의 재국유화 법안에 거부권을 발동했다.[43] 잭슨은 의회 연설에서 독점과 특별한 권익을 비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43] “우리의 부자들은 평등한 보호와 평등한 이익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의회 입법을 통해 더욱 부를 늘리고 싶어 한다.”[43]
4. 2. 무효화 위기 (1832)
잭슨의 제1기 임기 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보호관세 문제에 직면했다. 1832년에 의회를 통과하고 잭슨이 서명하여 법제화된 보호 관세는 1828년의 조치보다 완화되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몇몇 사우스캐롤라이나 시민은 이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무효화’의 ‘주의 권한’ 원칙을 행사했다. 이 원칙은 1832년까지 잭슨의 부통령이었던 존 칼훈이 1828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해명과 항의》(''South Carolina Exposition and Protest'')에서 공표한 것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무효화 조례’를 채택하고 주 내에서 1828년과 1832년 관세법은 무효라고 선언했다.무효화는 연방 정부의 권위에 대한 일련의 주 반대 운동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것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위협에 대해 잭슨은 1832년 11월에 해군 소형 함선 7척과 대형 함선 1척을 찰스턴에 파견했다. 12월 10일, 잭슨은 무효화주의자에 대한 분명한 선언을 발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폭동과 반역의 경계’에 있고 주의 시민은 그 조상들이 싸워 쟁취한 미합중국과의 동맹을 회복해야한다고 호소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옹호하는 잭슨의 정적이기도 한 헨리 클레이 상원 의원은 의회에서 타협안을 통과시켰다. 관세에 관한 〈1833년 클레이 타협안〉은 수입되는 상품 가격의 20%를 넘는 세금은 적절한 시기에, 예를 들어 1842년까지 줄이고, 모든 상품의 관세는 1816년 중용적인 관세 수준까지 되돌리게 하였다.
남부의 다른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방식을 현명하지도 않고,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잭슨은 연방의 지배권 원칙에 따라 연방 정부를 이용했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요구의 대부분을 통해 하나의 주가 연방 의회에 그 의사를 표명할 수 있음을 나타냈다.
4. 3. 마틴 밴 뷰런,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행정부 (1837-1845)
4. 4. 서부 개척과 명백한 운명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빈 회의 이후, 미국은 유럽과의 무역보다는 북아메리카 대륙 내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영 전쟁 이후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의 동맹이 약화되자, 백인 정착민들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원주민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30년대 연방 정부는 남동부 인디언 부족들을 서부의 척박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미국 정부는 법률을 통해 서부(뉴잉글랜드에서는 북부) 변경 지역과 그 너머로의 개척민 이주를 장려했다. 대니얼 분은 켄터키 정착을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미국의 사냥꾼과 덫 사냥꾼들은 인디언과 교역하며 땅을 탐험했고, 서부 전역에 개척의 물결이 일었다. 숙련된 전사이자 사냥꾼인 산악인들은 소규모 그룹으로 로키 산맥에 들어가 비버를 사냥했다. 모피 무역이 쇠퇴한 후, 서부에는 교역소가 설치되어 인디언과의 교역을 계속하거나 유타주, 오리건주, 캘리포니아주로 가는 개척자들을 안내하고 사냥꾼 역할을 맡았다.
미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북아메리카, 특히 오리건주,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로 확장할 권리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1840년대 중반, 미국의 팽창주의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1846년 5월, 의회는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멕시코는 미군의 포격에 버티지 못하고 물자 부족과 지휘 체계 분열로 패배했다.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리우그란데강을 경계로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주를 획득했다. 이후 13년 동안 멕시코에서 획득한 영토는 노예 제도 확장을 둘러싼 북부와 남부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의 서부 확장을 이끈 주요 사건으로는 홈스테드법(개척자들이 160에이커(65ha)의 농지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 가능), 오리건 준주 개척, 텍사스 혁명, 오리건 트레일 개설, 1846년부터 1847년까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신자들의 유타 이주,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이 시기 이주민은 포티나이너스라고 불림), 1859년 콜로라도주 골드 러시, 1869년 5월 10일 대륙 횡단 철도 개통 등이 있다.

4. 5. 미국-멕시코 전쟁 (1846-1848)
184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팽창주의는 ‘명백한 운명’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1846년 5월 의회는 멕시코에 선전 포고했다. 멕시코는 미군의 대포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보급품의 고갈뿐 아니라 지휘 계통의 분열로 패배를 당했다.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리오그란데강을 경계로 하는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와 뉴멕시코주를 받았다. 이후 13년간 멕시코에서 획득한 영토는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의 확장을 둘러싼 당파적 긴장 관계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정쟁의 초점이 되었다.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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