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미카와시마 사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카와시마 사고는 1962년 일본 도쿄 미카와시마역에서 발생한 열차 충돌 사고이다. 도호쿠 지방 지진과 탈선 사고로 인해 조반선 운행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하행 화물 열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탈선하여 상행선으로 돌출되었고, 이로 인해 연이어 발생한 두 차례의 여객 열차 충돌로 총 160명이 사망하고 296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사고의 주요 원인은 기관사의 신호 무시와 열차 방호 조치 미흡으로 밝혀졌으며, 이후 일본 철도 안전 시스템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대한민국에도 자동 열차 정지 장치(ATS) 도입을 앞당기는 등 철도 안전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2년 5월 - 1962년 FIFA 월드컵
    1962년 FIFA 월드컵은 칠레에서 개최되어 16개국이 참가, 브라질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우승했으며 콜롬비아와 불가리아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과 골득실제 도입 등의 기록을 남겼다.
  • 1962년 5월 - 머큐리-아틀라스 7호
    머큐리-아틀라스 7호는 스콧 카펜터 우주비행사를 태운 오로라 7호 우주선을 이용하여 지구 저궤도를 3회 선회한 미국의 유인 우주 비행 미션으로, 연료 과다 소비로 착륙 지점이 계획보다 벗어났지만 무사히 회수되었으며 현재 우주선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닛포리 - 닛포리정
    닛포리정은 1920년에 정으로 승격되어 1932년 도쿄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아라카와구 남부 중앙 지역에 해당하며 공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 닛포리 - 닛포리역
    닛포리역은 도쿄도 아라카와구에 위치한 JR 동일본, 게이세이 전철, 도쿄 도 교통국 운영의 철도역으로, 야마노테선, 게이힌-도호쿠선, 조반선, 게이세이 본선, 닛포리·도네리 라이너가 지나고 게이세이 스카이라이너를 포함한 모든 게이세이 본선 열차가 정차하는 도심 터미널이자 닛포리·도네리 라이너의 기점이다.
미카와시마 사고
사고 개요
명칭미카와시마 열차 충돌 사고
다른 이름미카와시마 사고
날짜1962년 5월 3일
시간21시 37분경 (제1 및 제2 사고), 21시 43분경 (제3 사고) (JST)
위치국철 미카와시마역 구내, 도쿄도 아라카와구 미카와시마마치 3초메 2833번지, 제4호 가도교 부근 (사고 당시)
사고 현장 주소도쿄도 아라카와구 히가시닛포리 3초메 2 부근
노선조반선
운영자일본국유철도 간토 지사 도쿄 철도 감리국
사고 유형다중 충돌 사고
원인신호 오인에 의한 열차의 탈선 및 선로 지장, 승객에 대한 피난 유도 미흡, 병발 사고 저지를 목적으로 하는 열차 방호 조치 및 열차 운행 억제 소홀
열차3 편성 (화물열차 1개, 여객열차 2개)
사망자160명
부상자358명
사고 상세
관련 사고미카와시마 사건 (혼동 주의)
관련 정보출처 명기 필요
이미지
사고 현장
사고 현장

2. 사고 발생 상황

1962년 5월 3일 21시 37분경, 일본국유철도 조반선 미카와시마역 구내에서 열차 3중 충돌 및 탈선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일은 새벽에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도호쿠 본선 고가역에서의 탈선 사고 여파로 조반선의 열차 운행 계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사고는 다바타조차장 발 미토행 하행 제287 화물열차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안전측선으로 진입하여 탈선하면서 시작되었다. 탈선한 기관차와 탱크차가 하행 본선을 가로막았다.[1]

직후, 미카와시마역을 약 4분 늦게 출발한 우에노역도리데행 하행 제2117H 전동차가 하행 본선을 막고 있던 화물열차를 발견하고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이 충돌로 2117H 전동차의 선두차와 2량째 차량이 탈선하며 상행 본선까지 튕겨 나가 선로를 막았다.[3] 일부 승객들은 사쿠라기초 사고의 교훈에 따라 비상 출입문을 열고 선로로 대피하기 시작했다.[3]

약 6분 후, 도리데우에노행 상행 제2000H 전동차가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장으로 접근했다. 미나미센주역 신호소에서 뒤늦게 상행선 지장 연락을 받았으나, 이미 열차는 신호소를 통과한 후였다. 2000H 전동차는 선로 위로 대피하던 2117H 열차의 승객들을 덮치고, 상행선을 막고 있던 2117H 전동차와 충돌했다.

이 연쇄적인 충돌과 탈선으로 인해 총 160명이 사망하고 296명이 부상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3]

2. 1. 1차 사고: 화물열차 탈선

21시 36분[1], 조반선 미카와시마역 구내에서 다바타조차장 발 미토행 하행 287 화물열차(D51 364호 견인, 45량 편성)가 화물선에서 하행 본선으로 진입하던 중이었다.

사고 당일인 5월 3일은 미야기현 북부 지진도호쿠 본선 고가역에서 발생한 탈선 사고의 여파로 조반선의 열차 운행 계획이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본래 287 화물열차는 미카와시마역을 통과한 후 정지 없이 하행 본선으로 합류해야 했으나, 우에노역도리데행 하행 2117H 보통 전동차가 우에노역 출발 시점에서 정각보다 2분 30초 지연되어 미카와시마역 도착 역시 늦어졌다. 이로 인해 287 화물열차는 2117H 열차의 미카와시마역 출발을 우선하기 위해 화물선 출발 신호기 앞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287 화물열차의 기관사는 미카와시마역 장내 신호기의 주의 신호(황색)를 보고 역 구내로 진입했지만, 그 앞의 출발 신호기가 정지 신호(적색)를 표시하고 있는 것을 간과했다.[1] 분기기를 통과하기 직전에야 뒤늦게 정지 신호를 인지하고 급히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제동이 늦어 열차는 안전측선으로 진입했다. 결국 기관차는 안전측선 끝의 차막이에 부딪혀 탈선했으며, 선두 기관차(D51 364호)와 바로 뒤 탱크차(타키 50044)가 하행 본선 쪽으로 기울어져 선로를 가로막았다.[1]

2. 2. 2차 사고: 여객열차 1차 충돌

조반선 미카와시마역 구내에서 하행 287 화물열차가 탈선한 지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우에노역을 출발하여 도리데역으로 향하던 하행 2117H 전동차(6량 편성)가 사고 현장에 접근했다.[3] 이 열차는 예정보다 4분 늦게 미카와시마역을 출발한 상태였다. 운전사는 선로를 가로막고 있는 탈선 화물열차를 발견하고 즉시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열차는 완전히 멈추지 못하고 약 40km/h의 속도로 화물열차 기관차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인해 2117H 열차의 선두차(쿠모하 66005)와 2량째 차량이 탈선하며 상행 본선 쪽으로 튕겨 나가 선로를 막았다. 이 1차 충돌 사고로 2117H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 25명이 경상을 입었다.[3] 탈선한 1량째와 2량째 차량은 팬터그래프가 가선에서 벗어나면서 정전 상태가 되었다.

어두컴컴한 차내에서 승객들은 과거 사쿠라기초 사고(1951년)의 교훈을 떠올리며 비상 출입문 코크를 조작하여 문을 열고 열차 밖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3] 승객들은 안전을 위해 선로를 따라 미카와시마역 방향으로 걸어서 대피했다. 한편, 6량째 칸에 타고 있던 차장은 운전사와 연락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자,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 연락하기 위해 차 밖으로 나와 열차 앞쪽으로 이동하려 했다.[3]

사고 현장 근처의 미카와시마역 신호 취급소 직원은 충돌 사고 발생을 즉시 인지하고 하행 본선의 신호를 정지 신호(적색)로 바꾸었다. 이후 역 부역장에게 사고 사실을 보고했고, 부역장은 조반선 운전 지령실에 사고 발생을 통보하여 즉시 하행선 후속 열차들의 운행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상행 본선의 선로 지장 여부는 즉각 확인되지 않아, 상행선 운행 열차들에 대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2. 3. 3차 사고: 여객열차 2차 충돌 및 승객 참사

앞선 충돌로 하행 2117H 전동차의 선두차(쿠모하 66005)와 2번째 차량이 탈선하여 상행 본선으로 돌출된 상태였다. 사쿠라기초 사고의 교훈에 따라, 정전된 1, 2호차 승객들은 비상 출입문 코크를 조작하여 선로로 대피하고 있었다.

첫 충돌 약 6분 후, 도리데를 출발해 우에노로 향하던 상행 제 2000H 전동차(9량 편성)가 사고 현장으로 접근했다. 당시 조반선은 새벽에 발생한 지진과 다른 탈선 사고의 여파로 운행 시각표가 혼란스러웠고, 2000H 열차도 미나미센주역을 정시보다 약 2분 늦게 출발한 상태였다. 미카와시마 역 신호소에서 "상행선 지장" 사실을 미나미센주역 신호소에 전화로 알렸으나, 해당 신호소 담당자가 출발 신호기를 정지 신호(적색)로 바꾸려 했을 때는 이미 2000H 열차가 신호소 앞을 통과한 뒤여서 열차를 멈출 수 없었다.

2000H의 기관사는 사고 발생 사실을 모른 채 운행하다가, 사고 현장에 접근하면서 상행선을 막고 있는 2117H 열차와 선로 위를 걷던 승객들을 발견하고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너무 늦었다. 열차는 선로 위의 승객들을 들이받은 후, 상행선에 걸쳐있던 2117H의 선두 차량과 2번째 차량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 2차 충돌로 2117H의 선두차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쇄되었고, 2번째 차량은 앞부분 절반이 파괴되었다. 2000H 역시 선두차(쿠하니 67007)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파손되었고, 뒤따르던 2번째, 3번째, 4번째 차량이 탈선하여 선로 옆 둑 아래로 추락했다. 특히 2번째 차량은 둑 아래 창고 건물과 충돌했다.

이 2차 충돌 및 열차 외부로 대피했던 승객들의 참사로 인해 2117H 및 2000H의 승객과 기관사를 포함하여 총 160명이 사망하고 296명이 부상당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사상자 중에는 탈선한 2000H에서 탈출하려다 둑 아래로 추락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3. 원인

사고 당일 조반선의 열차 운행 시각표는 도호쿠 지방 지진과 다른 노선의 탈선 사고 여파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사고의 시작은 미카와시마역을 통과하려던 287 화물 열차가 정지 신호기를 뒤늦게 발견하고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안전측선에 탈선하면서 하행 본선을 일부 막게 된 것이었다. 이 기관사의 신호 확인 오류 또는 무시가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된다. 당시 증기기관차 운전석의 시야 제한, 오르막 구배에서의 재출발 어려움 등이 신호 준수를 망설이게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직후, 미카와시마역을 출발한 하행 2117H 전동차가 탈선한 화물 열차를 발견하고 비상제동을 걸었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탈선하며 상행 본선까지 지장하게 되었다. 이 1차 충돌 후 약 6분 동안, 탈선한 열차의 승무원이나 미카와시마역 직원 누구도 상행선 열차에 대한 방호 조치(사고 발생을 알리고 운행을 중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야간인데다 사고 현장이 역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상황 파악이 늦어진 점, 운전 지령이 상행선 운행 중단 지시를 즉각 내리지 않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사고 발생 사실을 모른 채 미나미센주역 방면에서 달려오던 상행 2000H 전동차가 선로로 대피했던 2117H 열차 승객들을 치고, 탈선해 있던 2117H 열차와 충돌하면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따라서 사고의 근본 원인은 화물 열차 기관사의 신호 무시였으나, 연쇄적인 충돌과 대규모 인명 피해는 첫 사고 이후 상행선에 대한 방호 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데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3. 1. 직접적 원인

사고 당일 조반선의 열차 운행 계획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는 며칠 전 발생한 미야기현 북부 지진도호쿠 본선 고가역의 탈선 사고 여파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미토행 287 화물 열차는 선행 열차인 우에노역도리데역행 2117H 보통 열차의 지연 출발로 인해 미카와시마역 화물선 출발 신호기 앞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첫 번째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287 화물 열차 기관사의 신호기 오인이었다. 기관사는 미카와시마역 장내 신호기의 주의 신호(황색)를 보고 역 구내로 진입했으나, 이후 출발 신호기의 정지 신호(적색)를 뒤늦게 확인하고 비상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제동이 늦어 열차는 안전 측선으로 진입했고,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차막이를 넘어 탈선하면서 D51형 증기 기관차와 선두 유조차가 하행 본선을 가로막는 형태로 정지했다.[1]

기관사의 신호 오인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확인 오류: 기관사가 신호 현시를 잘못 본 확인 오류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가현 운동과 같은 착시 현상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 구조적 문제: 사고 지점은 하행 본선에 합류하기 위한 12‰ 오르막 우측 곡선 구간이었다. 증기기관차 기관사석에서의 시야 제한, 많은 화차 견인으로 인한 오르막 재출발의 어려움 등이 정차를 주저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 착각 가능성: 선행 열차(2117H)용 본선 출발 신호기(진행/청색)를 자신의 신호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신호기 자체 고장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기기 결함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첫 사고 이후의 미흡한 대처가 피해를 키웠다. 287 화물 열차 탈선 및 2117H 열차와의 1차 충돌 후 약 6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상행선에 대한 열차 방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관련 승무원 및 미카와시마역 직원의 책임으로 지적되었다. 방호 조치 지연의 원인으로는 다음이 지목된다.

  • 현장 확인의 어려움: 사고 현장은 미카와시마역에서 약 475m, 신호소에서 약 250m 떨어져 있었다. 사고 시각이 야간이었고, 그믐 전날[4]이라 달빛이 거의 없어 육안으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 열차 지령의 판단: 열차 지령이 사고 발생 인지 후 하행선 운행만 중단하고 상행선 운행을 즉시 중단하지 않은 것도 3차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사고 당시 287 화물 열차 기관사는 역에 사고 발생을 알리러 갔으며, 기관조사는 다리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2117H 열차 기관사는 충돌 시 머리 부상으로 잠시 실신했으나, 의식을 회복하고 운전실에서 탈출해 승객 구조를 도왔다. 재판에서는 그가 3차 충돌 방지를 위한 방호 조치를 하지 않은 점에 대해 과실이 추궁되었으나[5], 사고를 알리려 한 행동이 인정되어 과실 불문 처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8]

3. 2. 간접적 원인

최초의 하행 제287 화물열차 탈선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관사의 신호 현시 오인으로 밝혀졌지만, 사고를 대형 참사로 확대한 간접적인 원인들도 존재한다.

우선, 첫 번째 충돌(287 화물열차와 하행 2117H 전동차) 발생 직후 약 6분 동안 상행선에 대한 열차 방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열차의 승무원과 미카와시마역 직원 모두 상행선 운행 열차에 사고 발생 사실을 알리고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상행 2000H 전동차가 사고 현장으로 돌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고 현장은 미카와시마역 동쪽 끝에서 미나미센주역 방향으로 약 475m 떨어진 지점이었기 때문에 역 직원이 즉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현장과 비교적 가까운(약 250m 거리) 신호소 직원 역시 사고 당일 밤이 그믐 전날[4]이라 매우 어두워 육안으로 상황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현장 확인이 늦어지면서 상행선 선로 지장에 대한 보고 역시 지연되었다.

또한, 국철 운전 지령실의 대응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행선과 달리 상행선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운행 중단 조치를 내리지 않아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승무원들의 대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287 화물열차의 기관사는 사고 발생을 알리러 역으로 향했고, 기관조수는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2117H 전동차의 운전사는 충돌 충격으로 잠시 실신했다가 깨어나 승객 구조 활동을 했으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는 운전실을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상행 2000H 열차에 위험을 알리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실이 지적되기도 했다.[5]

이러한 방호 조치 미흡, 상황 파악 및 보고 지연, 운전 지령의 소극적 대처 등은 당시 국철 시스템의 안전 의식 부족과 비상 상황 대응 체계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고 당일 도호쿠 지방 지진과 다른 탈선 사고 여파로 조반선 운행 시각표가 혼란스러웠던 점도 사고 발생의 간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4. 사고의 여파

게시된 희생자 목록


사고 발생 직후인 1962년 5월 8일, 당시 운수대신이었던 사이토 노보루는 국철에 운전 사고 방지에 대한 경고를 내렸다. 이 사고는 국철 시스템 전반에 걸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안전 대책 강화'''

국철은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미카와시마사고특별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여러 안전 강화 조치를 시행했다.

  • 자동 열차 정지 장치(ATS) 도입 가속화: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신호 오인이었기 때문에, 열차를 자동으로 정지시키는 기능이 없는 기존의 차량경보장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자동 열차 정지 장치(ATS)의 전 구간 설치를 서둘렀다. 1966년까지 1차적인 정비를 완료했다.[2] ATS는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열차가 통과할 경우 자동으로 열차를 멈추게 하는 시스템이다.
  • 선로 조명 및 방호 장치 정비: 모든 구간에 열차궤도단락장치와 같은 방호 장치를 정비하고, 특히 사고가 발생한 조반선에 진입하는 모든 열차를 대상으로 신호 조명을 설치했다. 이후 열차 방호 무선장치도 개발되었다.
  • 운행 방침 변경: 기존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열차를 정지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규모에 관계없이 즉시 열차를 정지시킨다"로 운행 지침을 변경했다.[2]
  • 철도노동과학연구소 설립: 인적 오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인간공학, 심리학, 정신과학적 관점에서 직원의 노동 관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63년 6월, 중앙철도학원의 관리연구소와 후생국을 통합하여 철도노동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사법 처리'''

사고 발생 후 첫 충돌부터 상행 2000H 전동열차의 진입까지 약 6분 동안 열차 방호 조치를 소홀히 한 점이 중대한 과실로 지적되었다. 도쿄 지방 검찰청은 관련 책임자 9명을 업무상 과실 왕래 방해죄, 업무상 과실 치사상죄 등으로 기소했다. 기소된 인원은 다음과 같다.

  • 287 화물 열차: 기관사, 기관 조수, 차장
  • 2117H 열차: 운전사, 차장
  • 미카와시마역: 수석 담당 부역, 신호 취급 겸 운전 담당, 신호 취급
  • 스미다가와역·미노와 신호 취급소: 스미다가와역 운전 담당


재판 결과,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 미카와시마역 부역장과 신호 취급 겸 운전 담당: 금고 1년, 집행 유예 3년
  • 미카와시마역 신호 취급 담당: 금고 8개월, 집행 유예 2년
  • 287 화물 열차 기관사: 금고 3년 (실형)
  • 287 화물 열차 기관 조수: 금고 1년 3개월 (실형)
  • 2117H 열차 운전사 및 차장: 금고 1년 6개월 (실형)


반면, 287 화물 열차 차장과 스미다가와역 운전 담당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고 재판소에서 판결이 확정된 후인 1973년 6월, 실형을 선고받은 4명은 국철에서 징계 면직 처분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열차 지령 담당자가 정지 지령을 내렸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인정되었으나, 해당 담당자는 기소되지 않아 형사 책임은 묻지 않았다.

'''희생자 및 추모'''

사고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그중에는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 1명이 있다. 이 희생자는 선로를 걷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의 남성으로, 키는 약 163cm이고 둥근 얼굴에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몽타주 사진을 만들어 공개했지만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행려 사망자로 역 근처 사찰에 안치되었다.

또한, 희생자 중에는 당시 인기 만담 콤비였던 구리토모 잇큐·산큐의 멤버 구리토모 잇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파트너였던 구리토모 산큐는 이후 아내 카스가 테루요와 함께 '카스가 산큐·테루요'라는 이름의 부부 만담 콤비로 재기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사고 발생 1년 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역 북동쪽에 위치한 조쇼지에 위령 성관음상이 건립되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헌화하며 당시의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5. 후일담

국철은 이 사고를 계기로 보유하고 있던 프로야구 구단 국철 스왈로스후지산케이 그룹에 매각했다.

또한, 이 사고는 철도 및 궤도 운전에 필요한 동력차 조종자 면허 취득을 위한 학과 시험의 '운전 이론' 과목에서 "중대 사고와 안전 대책" 관련 문제로 자주 출제되고 있다.

5. 1. 기록 영화 '어떤 기관사'

국철은 안전 의식을 높이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사고가 발생한 조반선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어느 기관조사'를 기획했다.

또한, TV 아사히와 토에이가 제작한 TV 영화 특별 최전선에서는 미카와시마 사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제163화, '아 미카와시마 환상의 잉어!')이 방영되기도 했다.

5. 2. '미카와시마' 지명 소멸 논란

이마오 케이스케는 2008년 저서에서 미카와시마 사고로 인해 '미카와시마'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어 기피되었고, 이 때문에 1968년 주거 표시 시행을 계기로 '미카와시마정'이라는 지명이 사라졌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마오는 2019년 저서에서 자신의 이전 주장을 정정했다. '미카와시마정'의 대부분은 사고가 발생하기 약 반년 전인 1961년 10월 31일에 이미 아라카와로 이름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명 소멸과 사고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속설" 또는 "도시 전설"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일부 지역에 '미카와시마정'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으나, 이는 도로에서 벗어난 제한적인 구역이었으며 원래 다른 지명으로 편입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남은 지역은 1964년 7월 1일 히가시오구로 일부 편입되었고, 최종적으로 1966년 3월 1일 히가시닛포리와 니시닛포리에 편입되면서 '미카와시마'라는 지명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마오는 과거 저서에서 확인되지 않은 속설을 쉽게 인용한 점에 대해 반성한다고 덧붙였다.

5. 3. TV 드라마 모티프

TV 아사히 계열에서 토에이가 제작한 텔레비전 드라마 '특수 수사 최전선' 제163화 "아아 미카와시마·환상의 잉어 깃발!"(1980년 5월 21일 방영)은 이 사고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는 사고 희생자 중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남성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드라마 설정상 이 남성은 당시 미국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밀입국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고 당시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 반환 이전까지 미국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의 여행에는 여권이 필요했다. 드라마에서는 전국 신문에 신원 확인 광고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던 이유를 오키나와에는 이 사고에 대한 보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지갑 등 신원을 알 수 있는 소지품이 없었던 것은 사고 현장에서 도난당했기 때문으로 설정되었다. 극중에서는 범인이 발견되지만, 사건 발생 시점(방송 당시 기준 18년 전)으로부터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처벌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6. 한국에 미친 영향

미카와시마 사고 이후 일본 국철(JNR)은 중대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운행 방침을 변경하고 안전 시스템을 강화했다. 사고 발생 시 규모에 관계없이 즉시 열차를 정지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며, 특히 자동 열차 정지 장치(ATS) 시스템을 1966년 4월까지 모든 JNR 노선에 도입하여 신호 위반 시 열차가 자동으로 멈추도록 조치했다.[2] 이러한 일본에서의 대규모 철도 사고와 후속 조치는 이후 대한민국의 철도 안전 정책 수립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ATS 전면 도입 사례는 대한민국 내에서도 ATS 도입 논의를 촉진하고 철도 안전 시스템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1] 뉴스 102 dead in triple Tokyo train crash The Japan Times 1962-05-04
[2] 웹사이트 Learning from Past Railway Accidents—Progress of Train Control http://www.jrtr.net/[...] 2010-05-22
[3] 간행물 運転事故通報(昭和37年5月) 日本国有鉄道運転局保安課 1962
[4] 웹사이트 昭和37年暦要項(東京天文台)-「朔弦望・昭和37年」(出典部分は3ページ) https://eco.mtk.nao.[...] 2021-07-27
[5] 서적 空白の5分間 三河島事故 ある運転士の受難 講談社
[6] 웹사이트 サステナブルな JR東日本グループを創るための組織の改正について https://www.jreast.c[...] 2022-12-25
[7] 뉴스 JR東京支社 三河島、東中野駅に「事故展示室」開設 https://news.kotsu.c[...] 交通新聞・電子版 2021-09-20
[8] 서적 공백 5분간의 미카와시마 사고, 운전사의 수난 코단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