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로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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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도로섬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12월, 미국이 필리핀 민도로섬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군사 작전이다. 미국은 루손섬 공략을 위한 발판으로 민도로섬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일본군은 이에 맞서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초반,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미군 함대가 피해를 입었으나, 미군은 12월 15일 상륙에 성공하여 섬의 주요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미군이 승리하여 루손섬 공격을 위한 항공 기지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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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전투는 1944년 10월 20일부터 12월 26일까지 필리핀 레이테섬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이 일본 점령지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하여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하고 일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일본 본토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 1944년 필리핀 -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일본 간의 전투와 작전을 포괄하며, 일본의 필리핀 점령으로 시작되어 미군의 반격으로 레이테 만 해전을 거쳐 필리핀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민도로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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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민도로섬 전투 |
부분전 |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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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44년 12월 13일 - 2월 하순 |
장소 | 민도로섬 (필리핀) |
결과 | 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2 | 일본 제국 |
지휘관 1 | 조지 M. 존스 |
지휘관 2 | 요코야마 시즈오 |
병력 1 | 27,000명 |
병력 2 | 1,100명 + 200명 (비전투원) |
사상자 1 | 전사 148명 |
사상자 2 | 전사 200명 |
관련 항목 |
2. 배경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 작전의 다음 단계인 루손섬 공략을 위해 새로운 항공 기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기존에 확보한 레이테섬의 비행장은 레이테 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불안정했고, 루손섬과의 거리도 멀어 효과적인 항공 지원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맥아더는 루손섬 바로 남쪽에 위치한 민도로섬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으로 주목했다.[1]
민도로섬은 대부분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평야는 적었지만,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가 있었으며 전쟁 이전부터 비상 착륙용 활주로가 존재했다. 이는 루손섬 작전을 위한 전진 항공 기지 확보를 시급히 여기던 맥아더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다.[1]
한편, 태평양 전쟁 초기에 민도로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섬 남단의 산호세 인근에 거점을 마련하고 주로 해군의 수상기 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섬 방어를 위한 지상 병력은 매우 취약했다. 제105사단에서 파견된 임시 보병 2개 중대와 후방 부대를 합쳐 약 1,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고, 레이테섬 등으로 향하다 격침된 수송선 선원 약 200명이 추가로 체류하는 수준이었다. 이들 병력마저도 소대 단위로 분산 배치되어 있어 조직적인 방어가 어려운 상태였으며, 간헐적으로 미군에 우호적인 필리핀 게릴라와 교전을 벌이는 정도였다.[1]
미군은 일본군의 이러한 방어 태세가 허술하다고 판단하여 비교적 쉽게 섬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 상륙 작전 계획 수립 과정에서는 어려움이 따랐다. 당초 상륙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졌던 섬 북동쪽 해안은 루손섬에 남아있는 일본 항공 부대의 반격에 노출될 위험이 커서 기각되었다. 결국, 산호세 남서쪽에 위치하며 섬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항구인 망가린만이 최종 상륙 지점으로 선정되었다.[1] 미국 제6군 사령관 월터 크루거 중장의 지휘 아래 상륙 작전이 준비되었으며, 침공일은 1944년 12월 15일로 결정되었다.[2]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은 상륙 부대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부상했다.
2. 1. 작전 계획
연합군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루손섬 공략을 위한 중요 거점으로, 기존에 확보한 레이테섬의 비행장보다 루손섬에 더 가까운 필리핀 북부 섬 확보를 우선시했다. 특히 루손섬 바로 남쪽에 위치한 민도로섬은 레이테섬 비행장의 신뢰성 문제 때문에 루손 작전의 필수적인 항공 지원 기지로 여겨졌다. 민도로섬은 산악 지형이 많고 평원은 적었지만, 비행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가 있었고 전쟁 전부터 비상 착륙 활주로도 존재했다.[1]태평양 전쟁 초기에 민도로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섬 남단의 산호세 인근에 거점을 두고 주로 해군의 수상기 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지상 방어 병력은 제105사단 독립 보병 제359대대에서 파견된 임시 보병 2개 중대에 불과했다. 후방 부대를 포함해도 약 1,000명 수준이었고, 레이테섬 등으로 향하다 격침된 수송선 선원 약 200명이 추가로 체류 중이었다. 이들 주력 보병 2개 중대는 루손섬의 제8사단(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 중장) 소속 보병 제17연대의 지휘 아래 산호세와 섬 북단 칼라판에 각각 1개 중대씩 배치되었고, 다시 소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군에 우호적인 필리핀 게릴라와 간헐적인 교전을 벌였다.[1]
미군은 일본군의 방어 태세가 허술하다고 판단하여 상륙이 용이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작전 계획 수립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섬 북동쪽 해안에서의 상륙이 검토되었지만, 루손섬에 잔존한 일본 항공 부대의 반격 위험 때문에 기각되었다. 최종적으로 산호세 남서쪽에 위치하며 민도로섬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항구인 망가린만이 상륙 지점으로 선정되었다.[1]
미국 육군 제6군 사령관 월터 크루거 중장의 지휘 아래 민도로섬 침공일은 1944년 12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12월 5일 침공을 희망했지만, 크루거는 레이테섬 전황의 불안정성과 항공 지원 부족을 이유로 연기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작전명 'The Warden'(파수꾼)으로 명명된 이 침공에는 소장 로스코 B. 우드러프가 지휘하는 제24보병사단 예하 제19보병연대와 중령 조지 M. 존스가 지휘하는 제503공수연대 전투단 등 약 12,000명의 지상 전투 병력이 투입될 예정이었다.[2]
상륙 부대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군의 가미카제 공격이었다. 레이테만 해전 이후 본격화된 가미카제 공격은 1944년 12월 들어 더욱 빈번해졌다. 미군은 이에 대비하여 12월 초부터 일본군 항공 기지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여 7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지상에서 파괴했다고 보고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 항공 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상륙 선단은 고속수송함 8척, 전차상륙함(LST) 30척, 중형상륙함(LSM) 12척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순양함 내슈빌(기함)과 구축함 8척이 직접 호위했다. 또한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2척의 직접 엄호 함대와 호위항공모함 6척, 전함 3척, 중순양함 2척 등의 지원 함대가 동원되었다. 제503공수연대 전투단은 레이테섬 활주로 문제로 공수 작전 대신 해상으로 망가린만에 상륙하기로 변경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부대를 포함한 기지 건설 요원 등 총 상륙 부대 병력은 약 27,500명이었고, 점령 후 활동할 어뢰정 23척도 동행했다.
상륙 예정일 이틀 전인 12월 13일, 네그로스섬에서 발진한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소속 항공기 26기를 포함한 일본 해군기 36기와 육군 특공기 소수가 민도로섬으로 향하던 미군 함대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기함 경순양함 내슈빌이 가미카제에 피격되어 대파되었고, 130명 이상이 전사하고 190명 이상이 부상했다. 상륙 부대 지휘관인 준장 윌리엄 C. 덩켈도 중상을 입었으며, 사상자 중 다수의 고급 참모가 포함되어 지휘 체계에 혼란이 발생했다. 내슈빌의 지휘 기능 상실로 사령부는 구축함 대실(Dashiell)로 이전되었다. 이외에도 구축함 할라덴(Haraden)이 대파되고 2척의 전차 상륙함(LST)이 손상되는 등 여러 함선이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 목표가 민도로섬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13일에는 네그로스섬, 14일에는 루손섬 남부 상륙을 예상하는 등 오판을 거듭했으며, 이는 일본군의 후속 작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3. 전투 경과
1944년 12월 13일, 네그로스섬에서 발진한 카미카제 특공대 26기를 포함한 일본 해군 항공기 36기와 육군 특공기 약간이 민도로섬으로 향하던 미군 상륙 함대를 공격했다. 상륙 함대는 고속수송함(APD) 8척, 전차상륙함(LST) 30척, 중형상륙함(LSM) 12척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순양함 내쉬빌(기함)과 구축함 8척이 호위했다. 또한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직접 엄호 함대와 호위 항공모함 6척, 전함 3척, 중순양함 2척 등의 추가 지원 함대가 뒤따랐다. 상륙 부대는 제19 보병연대와 제503 공수 보병연대(레이테섬 활주로 미확보로 해상 상륙)를 주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부대를 포함한 기지 건설 요원 등 약 27,500명에 달했으며, 점령 후 주둔할 어뢰정 23척도 동행했다.
카미카제 공격으로 기함 내쉬빌이 크게 파손되어 130명 이상이 전사하고 190명 이상이 부상했으며, 상륙 부대 지휘관 윌리엄 C. 덩켈 준장도 중상을 입었다. 지휘 기능을 상실한 내쉬빌 대신 사령부는 구축함으로 옮겨졌다. 이 외에도 구축함 할라덴이 대파되고 전차상륙함(LST) 2척이 공격을 받았다. 미군은 12월 초부터 카미카제 특공대 무력화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 항공 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편,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 목표가 민도로섬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루손섬 남부 등으로 오판하여 다호 작전을 중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12월 15일, 미군의 민도로섬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날씨가 맑아 해상 및 공중 지원에 유리했다.
미군의 상륙을 확인한 일본 해군은 특공기 13대와 호위기 12대로 구성된 공격대를 파견하여 15일 아침, 전차상륙함 LST-738과 LST-472를 격침시켰다.[5] 피격되어 화염에 휩싸인 LST-738의 승무원들은 구축함 USS Moale(DD-693)의 과감한 구조 활동 덕분에 구조되었다. 모알은 LST-738에서 발생한 상륙 물자의 연쇄 폭발로 인해 선체에 60cm 크기의 파편 구멍이 4개나 뚫리는 피해를 입었지만, LST-738의 승무원 88명을 성공적으로 구조했다. 이 과정에서 모알의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했다. 이 공격으로 호위 항공모함 마커스 아일랜드와 다른 구축함들도 손상을 입었다.[5] 12월 16일 아침에도 후속 저속 선단이 일본군기의 특공 공격을 받아 육군 소속 소형 유조선 1척이 격침되고 구축함 1척이 손상되었다.[6] 일본 해군은 제31전대 소속 구축함 부대를 동원한 반격도 검토했으나, 미군의 공습과 함선 고장 문제로 실행하지 못했다.
해안선에서 일본 지상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미군은 상륙 당일인 12월 15일 안에 산호세 비행장을 포함하여 내륙 약 11km 지점까지 교두보를 확보했다.[7] 상륙 개시 48시간 이내에 섬의 주요 지역은 미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민도로섬에 주둔하고 있던 약 1,000명의 일본군과 침몰 선박에서 구조된 200여 명의 생존자들은 압도적인 미군 전력 앞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섬 북부의 방공 감시소에 있던 약 300명의 일본군만이 제503 공수 보병연대의 1개 중대와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12월 19일부터는 필리핀 게릴라의 협력을 얻어 소탕 작전이 계속되었다.[8]
미군은 상륙 직후 즉시 비행장 건설 및 정비 작업에 착수하여 12월 28일까지 2곳의 비행장을 완공했다.[9] 12월 26일경에는 이미 약 120대의 항공기가 민도로섬에 전개되어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3. 1. 일본군의 반격
일본 제국 해군은 미군의 민도로섬 점령과 비행장 활용을 저지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1944년 12월 26일, 중순양함 아시가라, 경순양함 오요도, 그리고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망가린만에 파견하여 미군 비행장과 정박 중인 선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레이호 작전). 이 작전을 통해 일본 해군은 미군 수송선 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미군 기지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의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는 데는 실패했다.[9]
일본 육군과 해군 항공대 역시 민도로섬에 대한 공습을 반복했다. 12월 21일에는 미군 증원 선단의 전차상륙함 LST-460과 LST-749를 공격하여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혔다.[9] 이후 12월 28일부터 1945년 1월 4일까지 이어진 공습에서는 탄약 수송선 존 버크를 포함한 자유선 3척, 전차상륙함 2척, 급유함 포큐파인, 구축함 1척, 중형 상륙함 2척을 격침시켰고, 자유선 3척을 대파시켜 좌초시켰다. 또한 1월 2일과 3일 밤에는 비행장을 공격하여 항공기 22대를 파괴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8]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비행장 운영과 섬 내 잔존 일본군 소탕 작전을 계속 이어갔다.[8]
한편, 민도로섬 비행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필리핀 주변의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할 것을 우려한 대본영, 연합 함대, 제4 항공군은 제14 방면군에게 민도로섬을 탈환하기 위한 역상륙 작전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루손섬에서의 지구전을 준비하고 있던 제14 방면군은 전력 분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역상륙 작전 실시에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 논의 끝에, 결국 제8사단 보병 제17연대에서 차출된 113명의 소규모 병력만이 특공대로서 비행장 방해 공격 임무를 띠고 파견되게 되었다.[10]
하타야 중위가 지휘하는 이 특공대는 선박 공병 제24연대의 대발동정(상륙주정)을 이용하여 12월 28일 루손섬을 출발했다. 1945년 1월 5일, 특공대는 민도로섬 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인근의 미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곧바로 배를 타고 철수했다. 이후 1월 18일, 특공대는 민도로섬 남부에 다시 상륙하여 산호세 비행장 방면으로 이동했다. 2월 23일경 비행장 부근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어진 미군과의 전투에서 특공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사실상 괴멸되었다.
4. 결과
민도로섬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군은 민도로섬을 장악하여 루손섬 공격을 위한 중요한 항공 기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상륙 작전 첫날부터 육군 공병대가 비행장 건설에 착수하여 13일 만에 2개의 비행장을 완공했다. 이 비행장들은 루손섬 침공을 직접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B-24 리버레이터와 같은 장거리 폭격기가 이 비행장들을 이용하여 타이완에서 루손섬으로 향하는 일본 선박을 공격하고, 남중국해 상공에서의 작전을 통해 일본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중폭격기용 비행장 2곳이 추가로 건설되면서[11] 연합군은 루손섬 주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효과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미군의 인적 손실은 해상에서의 해군 피해를 포함하여 전사 475명, 부상 385명이었다. 이 중 지상 전투로 인한 손실은 전사 및 실종 20명, 부상 71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12]. 반면, 일본군은 초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소탕전과 기아, 질병 등으로 추가적인 손실을 겪었다[12]. 민도로섬 확보는 연합군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공이었으며, 이는 이후 필리핀 탈환 작전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1. 전후 생존 일본군
민도로섬 상륙 후 벌어진 짧은 교전으로 일본군 수비대는 전사 200명, 부상 375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어진 소탕 작전과 기아, 질병 등으로 일본군은 추가적인 손실을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민도로섬에서 투항한 일본군은 26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부 일본군 병사들은 산 속에 숨어 버티고 있었으며, 1956년에 이르러 2명의 생존자가 추가로 발견되어 투항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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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海軍捷号作戦(2)フィリピン沖海戦
朝雲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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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fficial Chronology of the U.S. Navy in World War II
http://www.ibiblio.o[...]
Naval Institute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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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ぐり込み艦隊
朝日ソノラ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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