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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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와 작전을 포괄한다. 1941년 일본의 필리핀 점령으로 시작되어, 필리핀은 일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1944년 레이테 만 해전을 기점으로 미국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미군은 레이테 섬을 시작으로 루손 섬, 민다나오 섬 등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보급이 끊기면서 고립되었으며, 필리핀 민간인 역시 전쟁의 참화에 휩싸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필리핀 전역은 종결되었으며, 일본군의 전략적 실패와 미군의 필리핀 탈환, 전쟁 범죄와 민간인 피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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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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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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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명칭 |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
전쟁 | 태평양 전쟁 |
시기 | 1944년 10월 20일 ~ 1945년 8월 15일 |
장소 | 필리핀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일본의 항복 필리핀 해방 필리핀 제2공화국 종식 필리핀 연방 복원 |
관련 전투 | 레이테 전투 (1944년 10월 20일 시작) 루손 전투 비사야 제도 전투 민다나오 전투 |
교전 세력 | |
연합군 | 미국 필리핀 연방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후크발라합 |
일본군 | 일본 제국 필리핀 제2공화국 마카필리 |
지휘관 | |
연합군 | 더글러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 월터 크루거 로버트 아이켈버거 윌리엄 홀시 주니어 토머스 C. 킨케이드 조지 C. 케니 존 콜린스 세르히오 오스메냐 루이스 타루크 |
일본군 | 야마시타 도모유키 무토 아키라 스즈키 소사쿠 요코야마 시즈오 도요다 소에무 구리타 다케오 오자와 지사부로 이와부치 산지 호세 라우렐 |
병력 규모 | |
연합군 | 미국: 1,250,000명 필리핀 게릴라: 30,000+ 명 멕시코: 208명 |
일본군 | 일본: 529,802명 마카필리 민병대: 약 6,000명 |
피해 규모 | |
연합군 | 총합: 220,000+ 명 |
미국 | 전투 사망: 20,712명 부상: 50,954명 포로: 52+ 명 실종: 200+ 명 비전투 사상자: 140,000+ 명 |
필리핀 | 불명 |
멕시코 | 약 10명 (비전투 사망 5명 포함) |
일본군 | 총합: 430,000명 사망 및 실종: 320,795–420,000명 포로: 12,573명 |
부대 | |
연합군 | 제6군 제8군 제5공군 201 전투비행대대 필리핀 게릴라 |
일본군 | 제14방면군 제4항공군 연합함대 |
주요 전투 및 작전 | |
관련 항목 |
2. 배경
2. 1. 필리핀의 식민지 역사와 독립 운동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미국-필리핀 전쟁 이후 1901년부터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나, 마누엘 케손을 비롯한 필리핀 독립파의 노력으로 점차 자치권을 얻게 되었다.1929년 세계 대공황 발생 이후, 미국 내에서는 필리핀산 농산물의 무관세 유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설탕 업계를 중심으로 필리핀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독립 요구가 있었다. 1934년 미국 의회는 타이딩스-맥더피법을 통과시켜 10년 후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했고, 1935년 필리핀 연방 (필리핀 독립 준비 정부)이 수립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마누엘 케손이 취임했다. 1941년 당시 필리핀은 자체적인 헌법, 의회, 행정부, 최고 재판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미국군의 감독 아래 필리핀군 창설이 진행 중이었다.
2. 2. 일본의 필리핀 점령과 저항 운동
1941년 12월 22일,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직후 루손섬에 상륙하여 필리핀 점령을 개시했다. 이듬해 1월 2일에는 수도 마닐라를 점령하고, 1942년 4월부터 5월까지 바탄반도와 코레히도르섬에 고립되어 있던 미국 극동 육군(USAFFE)과 필리핀군을 항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를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 부른다.일본군 점령으로 인해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 군정은 군표를 남발하여 물자 부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과 바탄 죽음의 행진 등의 사건은 필리핀인들의 반일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필리핀 내 대일 무장 저항 세력은 크게 미국 극동 육군의 잔존 병력으로 구성된 '유사페 게릴라'와 후크발라합이라는 농민, 노동 운동가 조직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때때로 협력하지 않고 대립하기도 했지만, 미군의 지원을 받은 유사페 게릴라는 자동 소총과 기관단총 등 우수한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43년 시점에서 일본군은 필리핀의 30% 정도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미군 상륙 전에는 30만 명 이상의 무장 게릴라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해 필리핀인들의 반일 감정을 이용하여 게릴라를 조직하고 무기를 지원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은 유사페 게릴라는 정규군으로 취급되어 미군의 군사 작전에 투입되었고, 공수 부대 강하 시에는 사전에 일본군을 소탕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43년 10월 14일, 일본은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제2공화국을 수립하여 친일파 시민들을 회유하려 했다. 마카필리라는 친일 무장 조직도 만들어졌지만, 모든 필리핀인이 일본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2. 3.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과 방어 계획
일본에게 필리핀은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43] 1944년 7월, 일본 참모본부는 새로운 방위 계획인 '첩호작전'을 수립하고, 필리핀 방면의 방어 작전을 '첩1호 작전'으로 명명했다.[43] 일본은 필리핀을 잃으면 본토와 자원 공급 지역과의 연결이 끊겨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했다.[43]1944년 6월 필리핀해 해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7월 9일에는 사이판을 잃으면서 마리아나 제도의 통제권 상실은 확실해졌다.[43] 이러한 전황 악화는 도조 히데키 내각의 붕괴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나, 참모본부의 영향력만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43] 참모본부는 향후 전쟁 지도 방침으로 4가지 안을 제시했고, 이 중 '결전 중점 양립 안'이 채택되어 '일격 강화'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43]
1944년 8월 4일, 제14방면군이 창설되어 루손섬, 레이테섬 등 필리핀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43] 제14방면군은 루손 섬에 4개 사단, 레이테섬에 1개 사단, 민다나오에 2개 사단, 민도로섬, 사마르섬, 세부섬, 보홀섬에 각 1개 대대, 총 3개 대대를 배치했다.[43] 보르네오섬에는 9월에 제37군 (2개 여단)이 배치되어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43]
8월 19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명칭을 변경한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세계 정세 판단'과 '향후 취해야 할 전쟁 지도 대강'이 결정되었다.[109] 이 회의에서 독일의 패배를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태평양 방면에서의 결전 방침을 재확인하며, 대 소련 및 중국과의 평화 공작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109]
2. 4. 미국의 반격 작전과 필리핀 탈환 계획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은 중부 태평양과 뉴기니-필리핀 방면으로 진격하는 양동 작전을 결정했다.[44] 1944년 중반, 미군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에서 약 556km 떨어진 동남쪽에 있었고, 장거리 폭격기를 사용하여 그곳의 일본군 진지를 공중 폭격할 수 있었다.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에 강한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군사적, 정치적, 개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44] 그는 현지 항일 무장 세력의 원조를 기대할 수 있고,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다는 점을 강조했다.[44] 반면, 미 해군 작전 부장 어니스트 킹은 필리핀을 건너뛰고 대만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44]
1944년 6월 13일, 합참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맥아더와 니미츠에게 대일 진격 재검토를 지시했지만, 양측 모두 급진적인 계획에 반대했다.[44] 맥아더는 1945년 5월 루손섬 진격을 목표로 하는 ‘레노 5호’(''Reno-V'') 계획을 제출했고, 니미츠는 1945년 2월 타이완 남부 진격을 목표로 하는 ‘그래닛 2호’(Granite-2)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의견 충돌 속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7월 26일 오아후섬 호놀룰루에서 맥아더와 회담을 가졌고, 필리핀 우회 불가 방침을 지지했다.[44] 그러나 대만 침공과의 관계는 뒤로 밀려났고, 9월 퀘벡 회담에서 처칠과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8월,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한 미군은 펠렐리우섬, 야프섬, 탈라우드 제도 등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8월 16일, 마셜은 맥아더에게 작전 계획 재제출을 명령했고, 맥아더는 '마스케티아' 작전을 제출, 일부가 채택되어 12월 20일 레이테섬 공략이 결정되었다.[44]
윌리엄 홀시 제독의 제3함대는 9월 12-13일 중부 필리핀을 공습했고, 일본군의 미약한 반격을 확인한 홀시는 중부 필리핀 진격을 앞당기자고 제안했다.[44][45] 합참 본부는 이 제안을 채택, 10월 20일 레이테 섬 침공을 결정했다.[44][45]
미군은 필리핀 침공에 앞서 팔라우 제도(펠렐리우섬과 앙가우르섬)와 모로타이섬을 공략했다.[49] 또한, 10월 20일 레이테 섬 상륙 전, 주변 일본군 기지(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 중국 연안, 타이완, 오키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 필리핀 섬들)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49] 특히 10월 10일 오키나와 공습과 10월 12일 타이완 공습은 큰 규모였다.
2. 5. 한국의 독립운동과 필리핀 전역
3. 주요 전투 및 작전
3. 1.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 23일 ~ 26일)
1944년 10월 17일, 미군 레인저 부대가 레이테섬 동쪽 약 60km 떨어진 술루안섬에 상륙했고, 20일에는 미국 제6군이 비사야 제도의 섬 중 하나인 레이테 섬의 동부 해안에 상륙했다.[25] 미군은 레이테 섬 상륙을 위해 700척의 함선을 투입했다.[110] 이에 맞서 일본군 대본영은 첩1호작전을 하달하고, 구리타 다케오 중장이 이끄는 제1유격 부대를 파견했다.레이테 만 해전은 1944년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본 제국 해군 (IJN)과 미 해군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다. 일본 해군은 4척의 항공모함(비어 있는 비행 중대를 가진 배 – 미끼로만 사용됨), 다수의 전함과 중순양함, 경순양함, 구축함을 잃고 사실상 궤멸되었다.[54]
일본 해군은 크게 네 가지 전략을 사용했다.
- 기지 항공 부대가 미 항공모함 군을 공격하고 공습에 의한 피해를 줄인다.
- 오자와 함대가 미끼가 되어 미 기동 부대를 북쪽으로 유인한다.
- 남쪽에서 니시무라 함대 (제1유격 부대 제3부대)와 시마 함대(제2유격 부대)가 침입하여 미 함대를 끈다.
- 주력 부대가 되는 쿠리타 함대 (제1유격 부대 제1부대)가 〈전함 야마토〉, 〈전함 무사시〉를 중심으로 북쪽에서 레이테 만에 돌입한 미군 상륙 부대와 기동 부대를 격멸한다.
10월 20일, 쿠리타 함대는 미군 상륙부대가 상륙을 시작한 것을 보고 북쪽으로 출동했다. 23일 팔라완섬 앞바다에서 미 잠수함 공격으로 중순양함 2척이 침몰하고 1척이 대파되었다. 24일에는 시부야 해전에서 미군 공습으로 전함 무사시가 침몰하고 중순양함 1척이 대파되었다.
10월 25일 새벽, 수리가오 해협에 진입한 니시무라 함대는 킨케이드 함대에 요격당해 구축함 1척을 남기고 전멸했다. 시마 함대는 약간 교전만 하고 철수했다. 같은 날 오자와 함대는 미군 제38 임무부대의 공습을 받아 항공모함 전함을 잃고 본토로 철수했다.
10월 25일 오전, 쿠리타 함대는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해 필리핀해에 진출, 킨케이드 함대의 호위 항공모함 부대와 교전(사마르 해전)하여 호위 항공모함 1척과 구축함 3척을 격침시켰으나, 쿠리타 함대도 순양함 3척을 잃고 2척이 대파되었다. 이후 쿠리타 함대는 철수를 결의했는데, 이는 미일 양군에게 의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수수께끼의 반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0월 27일, 일본 대본영 해군부는 레이테 만 해전의 전과를 과장 발표하여, 이후 일본군의 상황 판단을 오도하게 만들었다.[55]
3. 2. 레이테 섬 전투 (1944년 10월 20일 ~ 1945년 5월)
1944년 10월 20일, 연합군은 레이테섬에 상륙했다.[60] 일본군은 제35군(사령관: 스즈키 무네사쿠 중장)이 레이테섬을 포함한 동부 필리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레이테섬에는 제16사단만을 배치했다.제6군 소속 약 20만 2,500명으로 구성된 육상 부대가 투입되었다. 항공 지원에는 육상기 약 3,200대 외에, 함재기 약 1,200대도 참가했다. 해상에서도 함대가 화력 지원을 했다. 미군 제24군단(제7사단·제96사단)과 제10군단(제1기병사단·제24사단)은 레이테섬 동해안의 타클로반에서 상륙을 시작했다. 맹렬한 함포 사격으로, 연안의 일본군 진지는 괴멸되었다.[61] 연합군은 급속히 진격하여 제16사단의 연대장 2명을 전사시켰고, 26일까지 6개의 비행장을 확보했다. 제16사단은 산악 지대로 퇴각했다.
대본영 해군부가 발표한 타이완 해전과 레이테 해전의 과장된 전과를 믿은 일본 육군부는 레이테섬 결전으로 전략을 전환하여 레이테섬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다호 작전)[61] 그러나 미군 기동 부대 등의 공습을 받아 제1사단 만이 11월 9일까지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고, 제26사단이나 제68여단 등은 모두 물자의 과반수가 바다에 침몰했다.[61] 제1사단은 1944년 11월 1일 레이테섬 서안의 올모크에 상륙하여 3일 카보칸 방면에서 미 제24사단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미군은 12월 5일부터 총공격을 감행했고, 제1사단은 12월 21일에 서쪽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일본군은 제26사단과 제16사단 잔존 부대에 더해 훈 공정대와 다카치호 공정대를 연합군 비행장에 돌입시켜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연합군은 12월 11일 오르모크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보급이 완전히 끊긴 탓에 12월 말에는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제14방면군은 레이테 결전 중지를 결정하고, 제35군에게 영구 항전을 명령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4척의 항공모함, 다수의 전함과 중순양함, 그리고 다수의 경순양함과 구축함을 잃었다. 일본 제국 해군은 이 이후 주요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레이테 만 해전이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神風特別攻撃隊)가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육군도 '반다대(万朶隊)'나 '후가쿠대(富嶽隊)'를 필리핀으로 진출시켜 제4항공군의 지휘하에 편입시켰다. 필리핀 전에서 해군 항공대는 특공기 333기를 투입하여 420명의 탑승원을 잃었고,[83] 육군 항공대는 210기를 특공에 투입하여 251명의 탑승원을 잃었다.[84] 연합군은 특공으로 인해 필리핀에서만 22척의 함정이 침몰하고 110척이 격파되었다.[85]
3. 3. 민도로 섬 전투 (1944년 12월 15일)
레이테섬에 이어 루손섬 탈환을 목표로 연합군은 레이테 전투 말기인 1944년 12월 15일, 루손섬 상륙에 앞서 민도로섬에 침공했다.[27] 그 목적은 루손섬 남부에 대한 항공 지원 기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미국 제6군이 공격할 두 번째 주요 목표는 민도로섬이었다. 이 큰 섬은 루손섬과 마닐라만 바로 남쪽에 있으며, 맥아더가 민도로섬을 점령하려는 주요 목표는 루손섬 상공을 장악할 수 있는 전투기를 위한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루손섬은 주요 항구와 수도인 마닐라를 가지고 있었다.[27]제7함대의 대규모 민도로섬 상륙 수송대는 가미카제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민도로섬 침공을 지연시키지는 못했다.[28] 일본 제14방면군은 민도로섬 방어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경계 임무를 맡은 2개 중대만 배치했다. 일본 해군에 의한 포격(레이호 작전) 등의 반격도 있었지만, 연합군은 곧 섬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민도로섬은 일본군이 소규모로 점령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필리핀 게릴라가 점령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점령되었다. 미국 육군 공병대는 산호세에 주요 공군 기지를 신속하게 건설하기 시작했다. 루손섬과 가깝다는 점 외에도 민도로섬은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필리핀의 상대적으로 건조한 지역이라 거의 항상 양호한 비행 기상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연중 대부분 폭우가 쏟아져 비행 기상 조건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흙 투성이로 비행장 건설이 어려운 레이테섬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민도로섬은 또한 태평양 전쟁 중 빠른 속도와 장거리 비행 능력을 가진 P-51B 머스탱 전투기를 탑재한 USAAF 비행대가 처음 등장한 곳이기도 했다. 민도로섬은 제6군과 USAAF에게 주요한 승리였으며, 맥아더 제6군의 다음 작전인 루손섬 침공, 특히 서부 해안의 린가옌 만 상륙을 위한 주요 기지를 제공했다.
3. 4. 루손 섬 전투 (1945년 1월 9일 ~ 8월 15일)
1945년 1월 9일, 미군은 3일 이상 이어진 격렬한 사전 폭격에 이어 루손 섬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8] 이 상륙 작전에는 미군 제6군(사령관: 크루거 중장)이 투입되었으며, 이 중 2개 사단은 마닐라 탈환을 목표로 남하했고, 다른 2개 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했다.[8]이에 맞서 일본군 제14방면군(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부대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지구전을 펼치는 전략을 세웠다.[8]
- '''상무집단'''(尚武集団, Shobo Group영어): 야마시타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15만 2천 명 규모로, 바기오를 중심으로 루손 섬 북부에 배치되었다.
- '''진무집단'''(振武集団, Shimbu Group영어): 요코야마 시즈오 중장이 지휘하는 10만 5천 명 규모로, 마닐라를 포함한 남부에 배치되었다.
- '''겐무집단'''(建武集団, Kembu Group영어): 쓰카다 리키치 중장이 이끄는 3만 명 규모로, 클라크 비행장이 있는 마닐라 북동쪽에 배치되었다.
링가옌 만에는 상무집단 소속 제23사단, 전차 제2사단, 독립혼성 제58여단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8] 이들은 북쪽으로 진격하는 미군 2개 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2월 상순까지 미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8]
한편, 남쪽으로 향한 미군 2개 사단은 겐무집단을 격파하고 200km를 전진하여 1월 하순 마닐라 외곽에 도달했다.[8] 겐무집단은 육해군 항공 부대를 모아 지상전에 투입했지만 전력이 부족하여 산속으로 후퇴했고, 점차 통제력을 잃어갔다.[8] 연합군은 바탄 반도와 마닐라 남쪽에도 미 제8군을 상륙시켜 여러 방향에서 마닐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8]
당초 일본군 제14방면군은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로 선언하려 했으나, 해군, 제4항공군, 대본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 마닐라에는 이와부치 산지 소장이 지휘하는 마닐라 해군방위대가 해병대 등을 배치하여 약 1개월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8] 마닐라 전투는 3월 3일에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연합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고, 약 10만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다.[8] 또한,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한 마닐라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바탄 반도에 배치된 일본군 나가요시 지원부대와 코레히도르 지원부대는 각각 1월 30일과 2월 17일에 미군의 공격을 받았다.[8] 코레히도르 섬에는 공수 부대도 투입되었다.[8] 일본군은 저항했지만 코레히도르 요새는 3월에 함락되었고, 생존자 300명만이 나가요시 지원부대에 합류했다.[8]
진무집단은 마닐라 방위대 지원을 위해 2월 8일부터 6개 대대로 1차 총공격을 감행하는 등 마닐라 교외에서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8] 2월 23일, 미 제6사단, 제43사단 등은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전차를 중심으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8] 이에 맞선 일본군은 3월 중순에 제2차 총공격을 실시하여 제6사단장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3월 하순 경에는 철수를 강요받았다.[8] 진무집단은 셋으로 분단되었고, 6월에는 제2선 진지마저 잃어, 더욱 분산되어 지구전에 돌입했다.[8]

루손 섬 북부의 상무집단은 바기오에 방면군 사령부를 두고 미군 제6군 제1군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공격에 맞섰다.[8] 1월 하순, 연합군은 연안의 일본군 제23사단 등에 큰 타격을 입혔고,[8] 2월 하순에는 산악 지대의 일본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바기오를 둘러싸고 일본군 제23사단, 독립 혼성 제58여단과 교전했다.[8] 또한 동부의 곡창 지대인 카가얀 계곡 진입로를 둘러싸고 발레타 고개, 사라크사크 고개에서 일본군 제10사단, 제105사단, 전차 제2사단 등과 격전을 벌였다.[8]
바기오 지역의 일본군은 4월까지 미군의 북진을 저지했지만, 서해안에서 나기리안을 통해 우회 침공을 받으며 4월 하순에 바기오를 함락당했다.[8] 그 직전, 방면군 사령부는 카가얀 계곡으로 탈출했고, 호세 라우렐 대통령 등도 일본 본토로 피신했다.[8]
발레타 고개에서도 일본군은 5월까지 카가얀 계곡으로의 연합군 진입을 막아냈지만, 물자와 식량 부족, 전력 감소로 인해 6월 1일에 퇴각했다.[8] 이후 일본군은 바기오에서 후퇴해 온 제23사단 등과 합류하여 제2선 진지로 향했다.[8] 6월에는 루손 섬 북쪽의 아파리에도 미군이 공수 강하하여 상무집단은 포위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8]
일본군은 유수의 곡창 지대인 카가얀 계곡을 확보하고 중앙 산악 지대에서 지구전을 전개할 예정이었지만, 발레타 고개와 사라크사크 고개를 잃으면서 카가얀 평야 유지가 어려워졌다.[80] 중앙 산악 지대도 대규모 부대 운용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고, 마닐라 등에서 피난 온 민간인들과 함께 늘어난 인원의 식량 조달 문제, 미군의 폭격 회피, 피난 과정에서의 혼란 등으로 인해 일본군 장병과 민간인들은 소규모 부대로 산악 지대 깊숙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80] 이로 인해 친미 성향이 강한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게 되어 각 부대는 더욱 고립되었고, 탄약과 식량 보급도 어려워졌다.[80]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많은 부대는 기아와 질병, 현지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았다.[80] USAFIP(NL) 등은 일본군 진공 초기부터 투항을 거부한 미군 장병과 현지 필리핀 병사들에게 현지 지원자가 더해져 싸움을 계속해 온 게릴라 부대로, 미군으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81] 이들은 마닐라 섬 북부, 서부와 카가얀 계곡 등에서 활동하여 1945년 5월부터 6월경에는 정규 미군의 진격에 앞서 일본군을 패주시켰다.[81]
3. 5. 기타 지역 전투
1944년 9월 15일, 연합군은 필리핀 침공의 거점 확보를 위해 동부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 상륙하여 섬의 중요한 부분을 확보하고 비행장을 건설했다. 일본군은 주변 섬에서 공습을 하거나 방해 부대를 상륙시키는 등 방해를 시도했다.필리핀 전역은 레이테섬과 루손섬 외 다른 섬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30] 맥아더 장군의 강력한 주장으로 연합군은 필리핀 전체를 공략할 방침을 결정하고, 중남부 필리핀을 공략할 ‘빅터 작전’(Operation VICTOR)을 시작했다.[30] 2월 베르데섬, 루방섬, 팔라완섬에 상륙했고,[30] 3월에는 민다나오섬, 플루아스섬, 세부섬을 공략했으며,[30] 4월에 홀로섬, 보홀섬 외에도 상륙을 감행했다.[30] 이 전투에서 연합군 측은 미군 5개 사단 등을 투입해 대규모 공격을 펼쳤다.[30] 5월에는 보르네오섬에 호주군 2개 사단이 침공했다.[30]
일본군은 레이테섬, 루손섬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었지만, 연합군 침공 시점에서 국방 담당 제35군과 제37군 지휘 하에 남아 있던 병력은 전투력이 없는 병참부대나 비행장 부대 등이 많았다.[30] 전투 부대는 액면 상으로는 4개 사단과 3개 여단이 있었지만 모두 레이테 전투에서 소모된 부대와 제2선 급의 치안 부대였다.[30] 그럼에도 터널 등을 활용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각 부대는 비전투 부대도 하나가되어 과감한 저항을 시도했다.[30]
민다나오섬에는 일본군이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30] 제30사단(레이테 전투에서 반감)과 제100사단을 주력으로 다른 독립 혼성 제54여단, 제2비행사단 지상 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30] 연합군은 3월 10일 서쪽 삼보앙가에 상륙하여 독립혼성54여단을 격파했다.[30] 4월에는 남해안에 상륙해 다바오 공략을 목표로 진격했다.[30] 일본군 제100사단은 다바오 서쪽에서 약 2개월 동안 방어전을 펼쳤지만, 6월에는 아포산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산발적 게릴라전을 펼쳤다.[30] 제30사단은 북부 지역에서 전투하고 있었지만, 6월경에 동부로 철수했다.[30]
비사야 제도에는 레이테섬 이외에도 일본군 비행장이 다수 존재했지만,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30] 수비 병력은 제102사단(레이테 전에서 2개 대대와 포병 상실)이 세부섬과 파나이섬, 네그로스섬과 팔라완섬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30] 3월 26일 미군 제23보병사단이 세부섬에 상륙했다.[30] 후방 부대 중심의 약 14,500명으로 구성된 일본군은 상륙 직후에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이후에도 제14방면군 사령부의 지도에 따라 옥쇄를 피하고, 지구전으로 전환했다.[30]
술루 제도의 홀로섬에서는 4월 9일 미군 제41사단 상륙하였고, 일본군은 독립혼성 제55여단 (레이테 전투에서 1개 대대 상실)이 맞서 방어전을 펼쳤다.[30] 독립혼성55여단은 약 절반을 잃고 산으로 철수했지만, 그곳에서도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아 종전까지 거의 전멸을 당했다.[30]
보르네오 지역은 영국군과 호주군 제2군 (제7사단, 제9사단)이 상륙하였고,[30] 일본 측은 독립 혼성 제56, 제71여단으로 저지를 하며 방어전을 펼쳤다.[30] 5월 1일, 타라칸섬 상륙을 시작으로, 7월 1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마지막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인 발릭파판 상륙전이 시행되어 각지에서 종전까지 격전이 계속되었다.[30]

팔라완 섬은 팔라완 침공 (2월 28일)에 제8군 (미국)의 푸에르토 프린세사 상륙으로 시작되었다.[30] 일본군은 팔라완에 직접적인 방어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의 저항 잔당을 소탕하는 작업은 4월 말까지 이어졌다.[30] 일본군은 작은 부대로 흩어져 산과 정글로 후퇴하는 흔한 전술을 사용했다.[30] 필리핀 전역에서 미군은 필리핀 게릴라의 도움을 받아 잔류 일본군을 찾아 처리했고,[30] 마지막 잔류 일본군인 오노다 히로오는 민도로 섬의 루방 섬 산에서 1974년에 항복했다.[30]
민다나오 전투 (4월 17일)에 처음으로 상륙했으며, 이곳은 필리핀에서 마지막으로 점령된 주요 섬이었다.[31] 민다나오에 이어 파나이, 세부, 네그로스 섬과 술루 군도의 여러 섬이 침공 및 점령되었다.[31] 이 섬들은 미 제5 및 제13 공군이 필리핀 전역과 남중국해의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를 제공했다.[31]
6월 말까지 적 잔당은 민다나오와 루손의 고립된 지역으로 압축되었고, 이곳에서 전투는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31] 그러나 일본군의 일부 부대는 도쿄와 무선 연락이 두절되었고, 일부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을 설득하기 어려웠으며, 잔류 일본군이 되었다.[31]
4. 결과 및 영향
레이테 만 전투에서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일본군은 완전히 보급이 끊겼고, 레이테섬에 10만, 루손섬에 25만 병력이 고립되었다. 1945년 6월까지 일본군 주력 부대가 괴멸된 이후에는 정글을 헤매면서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했지만,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굶주림,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 전상 악화로 사망했다. 필리핀 침공 이후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전사 및 병사자 포함)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싸운 모든 전선에서 가장 많았다. 그 과반이 필리핀 방어전에서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극도의 기아로 군의 통제는 붕괴되었고, 밀림이나 주변 민가에서 식량을 찾아 헤매는 처지로 전락했다.
필리핀 방면 일본군에서 처음으로 종전을 알게 된 것은 8월 15일 정보를 얻은 제14방면군 사령부였다. 사령부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장병을 일본 본토로 귀환시키는 것을 마지막 임무로 여기고, 18일에 종전의 조서의 문면을 복사하여 각 부대에 전달하기 시작했으며, 24일에는 위령제를 거행하고, 31일에 하산한 후, 연합군의 군사 시설을 전전하며 바기오 기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9월 3일,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함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하여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비도 공략 작전을 포함한 일련의 捷一호 작전이 막을 내렸다.
루손 섬 북부의 산악 지대로 철수하여 산중에 웅거하는 듯한 전술을 취한 것에 대해, 일본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미군이 대만전 등에서 타격을 입으면 반격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설명했다.[101] 또한, 무토 아키라는 그의 유저에서, 미군을 유인함으로써 미군의 일본 본토 진공을 늦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80] 그러나 그 결과, 일부에서는 미 정규군과의 상당한 전투도 있었지만, 오히려 산중에서의 기아·질병·게릴라 습격으로 어느새 병력이 소멸되어, 당초 20여만 명이나 있었다고 보여지는 전력이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생존자가 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102] 이처럼 대규모 병력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진 것은 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평가도 있다.
다음은 미일 양군의 인적 손실이다.
전장 | 전사・전병사 | 부상 | 합계 | 脚注 |
---|---|---|---|---|
레이테섬 | 80,557 | 828 | 81,385 | [103] |
루손섬 | 205,535 | 9,050 | 214,585 | [104] |
필리핀 중부・남부 | 50,260 | 2,695 | 52,955 | [105] |
합계 | 336,352 | 12,573 | 348,925 | - |
전장 | 전사・전병사 | 부상 | 합계 | 脚注 |
---|---|---|---|---|
레이테섬 | 3,593 | 11,991 | 15,584 | [106] |
루손섬 | 8,310 | 부상 29,560・전병 93,422 | 140,352 | [104][107] |
필리핀 중부・남부 | 2,070 | 6,990 | 9,060 | [105] |
합계 | 13,973 | 부상 48,541・전병 93,422 | 164,996 | - |
연합군은 필리핀 각지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항공기에 의한 통상 파괴를 본격화하여 일본의 남방 항로를 봉쇄했다. 일본은 전함까지 수송 임무에 전용하여 북호 작전이나 남호 작전을 수행하며 자원 수송에 힘썼지만, 1945년 3월을 마지막으로 남방 항로는 폐쇄되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유전 지대 등을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지만, 해상 봉쇄로 인해 연료 공급이 끊겨 함대의 행동은 물론 항공기를 띄우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이 무렵이 되자 사이판 기지에서 발진한 B-29에 의한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어 공업 지대도 도시도 차례차례 불탔고, 국민의 생존마저 어려움에 빠졌다. 대본영은 전쟁의 승패보다는 어떻게 강화로 연결할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45년 초에는 미군이 드디어 본토 침공을 시작했다. (일본 본토의 전투・오키나와 전투)
4. 1. 일본군의 피해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레이테섬에서만 8만 명 이상[113][103], 루손섬에서는 2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병사했다.[114][104] 필리핀 중부 및 남부에서도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112][105]위치 | 전사 | 포로 | 총계 |
---|---|---|---|
레이테섬[113] | 80,557 | 828 | 81,385 |
루손섬[114] | 205,535 | 9,050 | 214,585 |
필리핀 중남부[112] | 50,260 | 2,695 | 52,955 |
총계 | 336,352 | 12,573 | 348,925 |
레이테 해전에서 연합함대가 괴멸되면서 보급이 끊긴 일본군은 레이테섬에서 10만명, 루손섬에서 25만 명이 고립되었다.[37] 이들은 대부분 굶어 죽었고,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과 부상 악화, 현지 게릴라의 습격 등으로 사망했다. 필리핀 전역에서의 일본군 전사자는 태평양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았다.[37]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하고, 남방 항로가 봉쇄되면서 전략적으로 고립되었다. 전함까지 수송 임무에 투입하여 북호작전과 남호작전을 통해 자원 수송을 시도했으나, 1945년 3월 이후 남방 항로는 폐쇄되었다.[104] 인도네시아 유전 지대는 확보하고 있었지만, 해상 교통 차단으로 연료 공급이 중단되어 함대와 항공기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이판에서 발진한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04]
4. 2. 미군의 피해
미군도 필리핀 전역에서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33][34][35][36][37][103][104][105][106][107]지역 | 사망 | 부상 | 총계 |
---|---|---|---|
레이테[33] | 3,504 | 11,991 | 15,495 |
루손[34] | 8,310 | 29,560 | 37,870 |
필리핀 중부 및 남부[34] | 2,070 | 6,990 | 9,060 |
총계 | 13,884 | 48,541 | 62,425 |
연합군은 필리핀 각지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항공기에 의한 통상 파괴를 본격화하여 일본의 남방 항로를 봉쇄했다.[104][105][106][107] 일본은 북호 작전이나 남호 작전을 수행하며 자원 수송에 힘썼지만, 1945년 3월을 마지막으로 남방 항로는 폐쇄되었다. 이 무렵 사이판 기지에서 발진한 B-29에 의한 본토 공습이 본격화되었다.[104][105][106][107]
4. 3. 필리핀의 피해와 전후 상황
레이테 만 전투에서 연합함대가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고, 레이테섬에 10만, 루손섬에 25만 병력이 고립되었다. 1945년 6월까지 일본군 주력 부대가 괴멸된 후,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굶주림, 말라리아 등의 질병, 전상 악화로 사망했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았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굶주림으로 인해 군 통제가 붕괴된 채 밀림이나 민가에서 식량을 찾아 헤매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일본 항복 후, 약 45,000명의 일본군 전쟁 포로가 미군 당국의 보호 하에 필리핀 전역의 수용소에 수용되어 전쟁 배상 노동에 동원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전쟁 범죄 위원회를,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은 국가 전쟁 범죄 사무소를 설립하여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및 필리핀 전쟁 범죄 재판을 지원했다.
미 육군 및 육군 항공대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33][34]
지역 | 사망 | 부상 | 총계 |
---|---|---|---|
레이테 | 3,504 | 11,991 | 15,495 |
루손 | 8,310 | 29,560 | 37,870 |
필리핀 중부 및 남부 | 2,070 | 6,990 | 9,060 |
총계 | 13,884 | 48,541 | 62,425 |
지역 | 사망 | 포로 | 총계 |
---|---|---|---|
레이테 | 65,000 | 828 | 65,828 |
루손 | 205,535 | 9,050 | 214,585 |
필리핀 중부 및 남부 | 50,260 | 2,695 | 52,955 |
총계 | 320,795 | 12,573 | 333,368 |
필리핀 전역에서 100만 명의 필리핀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7] 필리핀 전역은 전쟁터가 되어 약 100만 명 이상의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당시 필리핀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고, 그중 약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여 인구 대비 사망률은 약 7%로, 일본의 약 2배에 달했다. 마닐라 등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종전 후에도 각지에서 잔류 일본군이 전투를 계속했다.
4. 4. 한국에 미친 영향
5. 평가 및 논란
5. 1. 일본군의 전략적 실패
5. 2. 미군의 전략과 맥아더의 역할
5. 3. 전쟁 범죄와 민간인 피해
5. 4. 역사적 의의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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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문서
この電報に関しては艦隊のどの記録にも受電記録がなく、他部隊の発信記録もない事から第一遊撃部隊司令部による捏造説も言われていたが、同時期に似た内容の情報が第二航空艦隊や第六艦隊にも報告されており、不思議なことにそれらも受電記録が存在していない。第一遊撃部隊を含めて連絡を受けた各部隊はその情報を疑いもせずにその内容に則った指令を出しており、捏造であるのなら別地域にいる他部隊も同様な事が起こっている事への説明がつかない。この為発信者は不明ながら無電自体は存在しており、各隊(少なくとも3艦隊)がそれを受電している事は確実と思われる
[54]
문서
この後退は戦後「謎の反転」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が、当時は妥当な判断と見なされており、栗田が反転を決断する要因となったヤキ1カ電にしても発信者等が不明であるが、同時刻に他の部隊でもヤキ1カに近い海域に敵部隊がいるという発信者も受電記録も記載がない情報を得ていて、それに則って行動している記録があるので無線状況の低下による誤受信とされ、誰も問題視していない。謎と言い出したのはどれも戦後になってからであり、それもちゃんと当時の状況を理解せずに半ば感情的に問題視しているものが多く、注意を要する
[55]
서적
戦史叢書 41
[56]
서적
「捷号作戦戦闘詳報(比島方面決戦)(4)」
[57]
서적
連合艦隊サイパン・レイテ海戦記
[58]
문서
戦後の関連書籍の中には栗田が同海戦後に海軍兵学校長に人事異動している点を指して、現場から遠ざける海軍側の遠回しの「左遷」と書くものもあるが、海軍兵学校長は海軍内でも重要なポストであり、海軍士官を養成するという重要な教育機関の代表職が左遷先であるという海軍は何処の国にも存在しない。歴代学校長も[[島村速雄]]、[[山下源太郎]]、[[鈴木貫太郎]]、[[永野修身]]、[[草鹿任一]]、[[井上成美]]などといった著名な提督が名を連ねており、海軍大学校でもエリートコースである甲種ではなく乙種(乙種は海軍兵学校卒業生ならだれでもなれる)出身でしかない栗田が就任するのは前例が少なく、左遷ではなく出世ととらえる方が妥当である(出世という点では乙種卒でしかない栗田が第二艦隊司令長官に抜擢されている時点で『異例の出世』であり、当人もその前職である第三戦隊司令でもって予備役になると思っていた)
[59]
서적
連合艦隊サイパン・レイテ海戦記
[60]
서적
戦史叢書 41
[61]
서적
戦史叢書 41
[62]
서적
(제목 없음)
1985
[63]
서적
(제목 없음)
2013
[64]
서적
(제목 없음)
1975
[65]
서적
(제목 없음)
2010
[66]
서적
(제목 없음)
2022
[67]
서적
(제목 없음)
1985
[68]
서적
(제목 없음)
1960
[69]
서적
(제목 없음)
2022
[70]
서적
(제목 없음)
2014
[71]
서적
昭和史の天皇13
1971
[72]
서적
昭和史の天皇12
1971
[73]
서적
戦史叢書48
1971
[74]
서적
昭和史の天皇12
1971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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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史の天皇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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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yte: Return to the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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