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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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원철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해방 후에는 북한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했다가 귀순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활동한 인물이다.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 박정희의 선배였으며,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장을 역임했다. 이후 '군일부 쿠데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으며,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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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일은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기업인이며, 박정희 정권에서 서울특별시장과 대한주택공사 총재,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 만주국의 군인 - 정일권
정일권은 러시아 출생으로 만주군 장교, 육군 참모총장,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며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친일 행적과 정인숙 사건 관련 의혹을 받았다.
방원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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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방원철 |
한자 표기 | 方圓哲 |
출생지 |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 옌지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생애 | 1920년 ~ 1998년 (80세) |
본관 | 온양(溫陽)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제1묘역 207번 2840호 |
최종 계급 | 만주국군 중위/조선인민군 육군 대위/대한민국 육군 대령 |
소속 조직 | 만주국군 조선인민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63년 |
정당 | 무소속 |
근무 | 대한민국 내무부 |
지휘 |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과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민주당 행정특보위원 |
군 경력 | |
최종 계급 | 만주국군 중위 대한민국 육군 대령 |
기타 |
2. 생애
1920년 길림성 옌지현에서 태어났다. 1926년 용룡산 뤄 용암촌뤄중국어에서 조선인들이 세운 6년제 동진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가 운영비를 보조하던 연길현 용지향 용정촌의 영신소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34년에는 5년제 영신중학교에 입학했다. 5학년 때 정일권의 연설을 듣고 군관학교 진학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군관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담임교사의 권유로 군관학교 시험을 보게 되었고, 1938년 영신중학교 졸업 후 군관학교 합격 통지를 받았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1939년 4월,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용암촌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북한,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을 참고하기 바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4]
2. 1. 일제강점기 만주군 복무
옌지 출신으로 간도의 룽징에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1941년에 제1기로 졸업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에게는 신경군관학교 1기 선배가 된다.[5]1939년 4월,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생도대 예과 제1연 제2구대 보병과), 1942년 12월에 제1기로 졸업하였다. 1943년, 제6군관구 보병 제8단 제7연에서 연습군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하였고, 1944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제8단 직속 중화기중대 선임장교로 복무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만주군 제8단에서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다. 전쟁 종전 시점에 신현준은 상위, 신경군관학교 동기생인 이주일과 방원철은 중위, 박정희는 소위였다. 방원철은 후배 조선인 생도들을 자주 구타했는데, 특히 박정희는 자기보다 나이가 3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기 선배라는 이유로 다른 후배들과 똑같이 구타하였다. 박정희가 건방지게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6]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들은 모두 베이징을 거쳐 광복군에 일시 편성됐다가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2. 2. 북한 조선인민군 창군 가담
옌지 출신으로 간도의 룽징에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1941년에 제1기로 졸업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에게는 신경군관학교 1기 선배가 된다.[5]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만주군 제8단에서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다. 전쟁 종전 시점에 신현준은 상위, 신경군관학교 동기생인 이주일과 방원철은 중위, 박정희는 소위였다. 후배 조선인 생도들을 자주 구타했는데, 특히 박정희는 자기보다 나이가 3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기 선배라는 이유로 다른 후배들과 똑같이 구타하였다. 박정희가 건방지게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6]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들은 모두 베이징을 거쳐 광복군에 일시 편성됐다가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방원철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한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연계를 갖고 1946년에 소군정 지역으로 올라가 조선인민군 창군 과정에 참여하였다.[7] 보안간부훈련대대 부대 창설에 참여하고 중앙경비대 대대장을 역임했다.[7] 1946년 12월 말까지 김책, 무정 등과 함께 2개 사단과 인민군 총사령부 조직에 참여하여 명령, 무기, 무기 부속품 명칭, 군복, 계급장 등을 만들고 새로 사관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결재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2. 3. 대한민국 귀순 및 육군 장교 복무
1946년 2월 초, 혼자 서울로 가 조선건국동맹 소속 박승환과 최창륜을 만나고 여운형을 방문했다.[7] 같은 시기에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 2일 전에 중퇴하고 2월 20일에 월북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했다.[7] 진남포학원에서 밀정 교육을 하는 교수로 일하다가 평양사범학교에 배치되었다. 보안간부훈련대대 부대 창설에 참여하고 중앙경비대 대대장을 역임했다. 1946년 12월 말까지 김책, 무정 등과 함께 2개 사단과 인민군 총사령부 조직에 참여하여 명령, 무기, 무기 부속품 명칭, 군복, 계급장 등을 만들고 새로 사관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결재까지 진행했다고 한다.1946년 12월 말부터 1947년 1월 초에 김책의 부름을 받고 직업 전환을 하게 되어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기숙사 감독, 생활 규칙 작성, 인민 체육 담당 및 교재 제작 등을 하다가 1947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5월 1일 준비 위원장이 되었으나, 4월 3일에 권총을 든 보안대원 2명이 와서 구금되었다. 그 후 1년 3개월 동안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5월에 석방되어 한 달 정도 집에 있다가 그 후 3개월간 철도 노선에서 노역을 했다. 강제 노역을 하면서도 월남 계획을 세우다가 1948년 9월 23일에 박준호, 이재기, 최창륜, 박창암과 함께 월남했다. 나중에 월남한 아내와 그의 부모를 맞이하고 생활 기반이 갖춰진 1949년 12월에 추천을 받아 한국군에 입대했다. 임예비역 육군 소좌(군번 20039번), 육군보국대대장을 역임했다.[1]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귀순했다. 국방부는 북한인민군 장교 5명의 귀순을 발표했다. 이때 직위는 조선인민군 중앙경위대 대대장이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폭정을 피해 왔으며 이를 반대하기 위해 철저히 투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8] 방원철은 곧 대한민국 육군 소령으로 임관하고 육군본부 초대 전사감을 지냈으며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950년 7월 12일, 대전에서 현역으로 편입(군번 116982번)되었고,[2]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 정보참모보좌관 겸 정보대장을 역임했다.[3]
육군본부 전사감(초대), 국방부 제3국 행정과장, 제2사단 제17연대 부연대장, 제33사단 제102연대장, 육군본부 군사발전국 전투과장 등을 역임했다.
2. 4. 5.16 군사정변 가담 및 이후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육군 대령으로서 핵심 세력으로 참가했다. 정변 성공 후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설립되기 전이라 정보 계통의 업무를 전담하는 요직이었다. 미국육군 제8군과 정변 세력 간의 불화를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9] 그러나 1963년에 '군일부 쿠데타음모 사건'이 적발되어 김동하를 중심으로 함경도 출신 정변 가담 인맥이 대거 숙청되었을 때 주모자로 몰려 수감되면서 권력에서 밀려났다.[10]방원철은 논란이 많은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경력을 자세히 증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조선인민군 창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라 현대사 연구를 위한 증언을 많이 남겼다.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가 김종필 계열에게 숙청당한 뒤 김종필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으며, 민간인이었던 김종필의 정변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내용 등 김종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김종필에게 고함》(1987), 《김종필 정체》(1995)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3.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논란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 장교들은 베이징을 거쳐 광복군에 일시 편성됐다가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때 신현준과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광복군 3지대 1대대장과 2중대장을 각각 맡았다.[12]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12]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사학)가 쓴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을 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여명, 상하이 1300여명 등’인 것으로 나타난다.[13]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아마도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 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14]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가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기술되면서 이러한 주장이 확산되었다.[15]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날조된 것이다. 부대장의 이름을 따 일명 '철석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로 박정희는 이 부대에 간 적이 없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씨, 송석하씨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16] 박정희와 만주군 8단에 같이 근무했던 방원철은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온 적이 없었다"며 "박정희는 8단 부임 이후 반벽산(단 본부 소재지)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16]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했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일일이 기록했다.[17]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18]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만)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책을 수거해 본 결과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해당 내용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19]
박정희가 '해방 후 광복군'이기는커녕 길거리를 배회하던 그를 체포해서 국내로 송환했다는 자료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박정희 광복군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의 항일투사 이재현(이형진의 부친)은 북평 판사처 주임(광복군 소령/지역 사령관)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8단이 해체되고 베이징으로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던 박정희를 잡아 들여 한국으로 송환한 책임자가 이재현이라고 한다. 당시 북평 판사처의 임무는 재중국동포와 한국 국적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출신이 너무 많아 군의 편제가 필요하여 신현준 일본군 대위를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 일본군 중위를 중대장으로 하여 통솔케 하고 본국으로 송환하였던 것뿐이다. 박정희가 광복군 3지대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20]
4. 학력
학교 | 졸업년도 |
---|---|
만주 지린성 룽징 간도 광명중학교 | |
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 |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9기) | 1950년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 1951년 |
대한민국 육군공병학교 | 1952년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 1953년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 1956년 |
5. 평가
방원철은 옌지 출신으로 간도의 룽징에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1941년에 1기로 졸업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에게는 신경군관학교 1기 선배가 된다.[5]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만주군 제8단에서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다. 방원철은 후배 조선인 생도들을 자주 구타했는데, 특히 박정희는 자신보다 나이가 3살이나 많았음에도 1기 선배라는 이유로 다른 후배들과 똑같이 구타했다. 박정희가 건방지게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6]
일본 제국 패망 후, 이들은 베이징을 거쳐 광복군에 일시 편성됐다가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방원철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한 다른 장교들과 달리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연계하여 1946년 소군정 지역으로 넘어가 조선인민군 창군 과정에 참여했다.[7] 그러나 1948년 10월,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귀순했다. 국방부는 북한인민군 장교 5명의 귀순을 발표하며, 방원철의 당시 직위가 조선인민군 중앙경위대 대대장이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폭정을 피해 왔으며 이를 반대하기 위해 철저히 투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8]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육군 대령으로 핵심 세력에 참가했다. 정변 성공 후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장에 임명되었고, 미국육군 제8군과 정변 세력 간의 불화를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9] 그러나 1963년 '군일부 쿠데타음모 사건'이 적발되어 김동하를 중심으로 함경도 출신 정변 가담 인맥이 대거 숙청될 때 주모자로 몰려 수감되면서 권력에서 밀려났다.[10]
방원철은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경력과 조선인민군 창군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현대사 연구를 위한 증언을 많이 남겼다.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가 김종필 계열에게 숙청당한 뒤 김종필과 대립했으며, 김종필의 정변 과정 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등 비판을 담은 《김종필에게 고함》(1987), 《김종필 정체》(1995) 등을 집필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6. 훈장
- 충무무공훈장
- 보국훈장 광복장
참조
[1]
서적
제주43사건자료집5[군경자료편1]
http://43archives.or[...]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
간행물
韓國戰爭史第1巻 北傀의 南侵과 緒戰期(1950.6.25~1950.7.4)
http://www.imhc.mil.[...]
한국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2018-10-20
[3]
서적
韓國戰爭戰鬪史 鎭川-化寧場戰鬪
https://www.imhc.mil[...]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4]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5]
뉴스
"목표 위해 죽음 불사할만큼 성실" 우등 성적으로 4년만에 '황군' 소위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8-19
[6]
서적
인간 박정희 1
시대의창
2005-05-10
[7]
서적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
조선일보사
1998-10-01
[8]
뉴스
국방부, 북한인민군 장교 5명의 귀순을 발표
동아일보
1948-10-28
[9]
서적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아이필드
2004-02-25
[10]
뉴스
「쿠데타」음모사건 金東河-朴蒼岩-朴浚鎬 세피고에 징역12년 구형, 金寧柱-李鍾民-方圓哲엔 10년
조선일보
1963-07-27
[11]
뉴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 만주군관학교-광복군-남로당-숙군 협조, 양지만을 좇은 그의 끝없는 변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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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2-10-23
[12]
저널
[정정당담]잘못된 독립유공 포상 사례 셋
http://www.idomin.co[...]
경남도민일보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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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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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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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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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비밀광복군?…허무맹랑한 소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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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2015-10-2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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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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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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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광복군편입은 허위날조
https://web.archive.[...]
김홍신 홈페이지
200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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