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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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일영은 1923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사장 비서를 거쳐 경영권을 장악한 언론인이다. 한국 전쟁 중 부친 방응모가 납북된 후 조선일보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여, 1954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이후 조선일보를 성장시키며 1980년대 발행 부수 1위 신문으로 만들었으나, 전두환 정권과의 유착 및 족벌 언론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방일영장학회, 방일영국악상,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2003년 사망했으며 언론 문화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권언유착 및 사생활 논란으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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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영은 남경중앙대학 출신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한국번역가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 및 문화계에서 활동했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국토통일원 고문,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제11대 국회의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 박천군 출신 - 현익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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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은 조선일보의 회장으로서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언론 사업 확장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한 언론인이다. - 조선일보사 -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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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은 조선일보의 회장으로서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언론 사업 확장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한 언론인이다.
방일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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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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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방일영 |
출생일 | 1923년 11월 26일 |
사망일 | 2003년 8월 8일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기업인 |
종교 | 불교 |
경력 | |
주요 경력 |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 회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김정희 |
자녀 | 방준오 방용훈 방성훈 방혜성 |
수상 | |
상훈 | 금탑산업훈장 |
기타 | |
관련 정보 |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으로 불림 |
재산 분쟁 | 자녀들 간 재산 다툼이 있었음 한겨레 기사 |
언론 관련 | 오마이뉴스 기사 |
2. 생애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법적인 손자가 되었다.[3][5] 경성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 전신)와 일본 주오 대학 예과를 졸업하고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으나, 당시 신문은 폐간된 상태였다. 1944년 박현숙과 결혼했으며,[6]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의 도움으로 학도병 징집을 면제받았다.[7]
1945년 광복 후 조선일보 복간 작업에 참여했으며, 한국 전쟁 중 방응모가 납북되자 1950년 10월 조선일보 이사로 선임되었다. 1954년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1964년에는 회장에 오르며 동생 방우영에게 사장직을 맡겼다. 이후 1970년 무렵 방우영에게 경영권을 완전히 넘겼다.
1974년 방일영장학회를 설립하여 장학 사업을 시작했고,[8] 1975년 사재와 형제 지분 등을 출연하여 방일영장학재단으로 확대했다.[11] 1980년대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위 신문으로 성장했으나, 이 과정에서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 및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여러 논란이 제기되었다.[9] 또한 강한 정파성으로 인해 '안티조선' 운동을 유발하고 '족벌언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1993년 지병으로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명예회장이 되었고, 이후 1994년 방일영국악상 제정, 1995년 방일영문화재단 설립 등 문화예술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으며, 2003년 8월 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1923년 ~ 1943년)
1923년 11월 26일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동문동에서 태어났다.[3] 호는 우초(愚礎)이다.[4]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본적은 경기도 의정부이고, 출신지는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현 남신리)이다.[5]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곤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던 삼촌 방응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로 인해 방일영은 방응모의 법적인 손자로 출생했다. 이후 할아버지 방응모를 따라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로 이주하였다.경성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 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졸업한 뒤 1943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2. 2. 조선일보 입사와 광복 이전 (1943년 ~ 1945년)
194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그해 사장 비서가 되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경영난 속에서 방응모가 경영권을 확보한 상태였고, 방일영은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방재윤의 장남이었다. 조부인 방응모의 비서로 입사했으나, 이때는 조선일보가 폐간된 시점이어서 사실상 '신문 없는 조선일보사'의 직원이었다. 돈을 아껴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부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944년 11월에는 세 살 아래인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 박순흠과 고영선 사이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결혼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방응모를 찾아온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6]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방일영도 학도병 징집 대상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방응모는 손자가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백병원 설립자인 고향 후배 백인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인제는 방일영의 왼쪽 뺨 귀 밑부터 턱까지 생살을 째는 수술을 집도하여 징집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덕분에 방일영은 징집이 면제되는 면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7]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양주군청 소속 면서기로 일했다.
2. 3. 광복과 조선일보 복간 (1945년 ~ 1950년)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다시 발행을 시작할 때 복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후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7월, 당시 사장이었던 방응모가 납북되자 같은 해 10월 17일에 이사(취체역)로 선임되었다.2. 4. 조선일보 경영권 장악과 성장 (1950년 ~ 1993년)
1950년 7월 한국 전쟁 중 사장 방응모가 납북되자, 같은 해 10월 17일 조선일보 취체역(이사)에 선임되었다. 전쟁 중 피난했다가 휴전 후 귀환하여 1954년, 31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대표 취체역에 취임하며 실질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방응모가 납북된 지 9년이 지난 후까지도 대표로 등재되어 있었고, 1979년 발행분까지 조선일보의 발행인은 방응모 명의로 되어 있었다.방일영은 방응모 사후 어려움에 처했던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켰다. 한독당 당원으로 김구 노선을 따랐던 방응모는 야당 인사로 분류되었고, 그의 납북 이후 조선일보는 위기를 맞았으나 방일영은 내부 갈등을 수습하고 회사를 재건했다.
1964년 11월 15일, 방일영은 조선일보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 방우영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하여 일선 경영을 맡겼다. 하지만 1970년까지는 방일영이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했으며, 이후 방우영이 경영권을 넘겨받아 조선일보의 성장을 주도했다.
1974년에는 방일영장학회를 조직하여[8]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자신의 사재를 출연하고, 형제 소유 지분 15%와 기존 장학회 기금 15억원 가량을 합쳐 비영리 공익법인인 방일영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방일영장학회는 1974년부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매년 10여 명 선발하여 수업료 전액과 생활비를 지원했으며, 이후 대학원생까지 대상을 확대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330여 명에 이르며, 이들은 졸업 후 '서중회'라는 모임을 통해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11]
1980년대에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위 신문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유착 관계가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한 코리아나 호텔 특혜 의혹 등 여러 논란을 낳기도 했다.[9]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 국면마다 강한 정파성을 드러내면서 '안티조선' 운동을 유발하기도 했으며, '족벌언론'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10]
1993년 3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조선일보 이사 고문직에서도 물러나면서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같은 해 회장직을 동생 방우영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이 되었다. 이후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1994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제정하여 우수 국악인을 발굴하고 포상하기도 했다. 또한 온양방씨 중앙종친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2. 5. 은퇴 이후 (1993년 ~ 2003년)
1995년 5월에는 방일영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예술인에 대한 후원사업을 주관했다.1999년에는 일신방직 사외이사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할아버지 방응모의 가묘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3년 조선일보사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같은 해 8월 8일 새벽 2시 5분경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는 만 81세였다.
3. 사후
8월 8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되었다.[3] 같은 날 오후, 이복 숙부인 방재선이 가족과 함께 조문하러 왔으나 상주들로부터 조문을 거부당하고 강제로 쫓겨나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3] 2004년 6월에는 충남 아산시 용화동 '온양방씨(溫陽方氏) 중시조신단묘원'에 방일영 송덕비가 세워졌다.
4. 평가와 비판
언론문화 창달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당시 '밤의 황제'로 군림하며 권언유착에 가담한 인물 중 하나라는 비판이 있다. 그 밖에 안티조선 운동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5. 가족 관계
방일영은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 사후 유산 다툼 과정에서 장남 방상훈 측 변호사가 '잘 아시겠지만, 선대 회장님은 대한민국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올리신 분'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1] 이러한 사생활 문제로 인해 사후 일부 혼외자들이 조선일보와 방일영의 혼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1944년 11월, 세 살 아래인 박현숙과 결혼했다. 박현숙은 한학자 박순흠과 고영선의 넷째 딸로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결혼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의 영어교사였던 이용덕이 박현숙의 흑백 사진 한 장을 들고 조부 방응모를 찾아오면서 성사되었다.[6]
배우자 박현숙과의 사이에 1녀 2남(장남 방상훈, 차남 방용훈)을 두었으며, 그 외 혼외자로 6명(첫 번째 관계에서 3남, 두 번째 관계에서 2녀 1남)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2] 그의 장남 방상훈은 독립운동가 겸 계몽운동가 윤치호의 증손녀이자 철도청 부이사관을 지낸 윤영구의 딸 윤순명과 결혼했다.
- 생조부: 방응곤(方應坤, 방응모의 형)
- 양조부: 방응모(方應謨, 1883년 ~ 1950년)
- 아버지: 방재윤(方在允, 1902년 ~ 1940년)
- 어머니: 이성춘(李成春)
- 본인: '''방일영'''
- 동생: 방필영(方必榮, 1924년 ~ 1926년)
- 여동생: 방숙영(? ~ 1951년 1월)
- 동생: 방우영(方又榮, 1928년 ~ 2016년)
- 조카: 방성훈(方聖勳, 1973년 ~ )
- 배우자 : 박현숙(朴賢淑, 1926년 ~ 1986년, 개신교 집사)
- 장녀
- 장남: 방상훈(方相勳, 1948년 ~ , 조선일보 사장)
- 자부: 윤순명, 윤영구의 장녀 (윤치호의 증손녀)
- 손자: 방준오(方俊吾, 1974년 ~ )
- 손자: 방정오(方政吾, 1978년 ~ )
- 차남: 방용훈(方容勳, 1952년 ~ 2021년, 전 코리아나 호텔 사장)
- 숙부: 방재선(方在善, 1944년 ~ )
- 숙부: 방재효(方在孝, 1946년 ~ )
- 숙부: 방재규(方在奎, 1948년 ~ )
- 사돈: 윤영구(尹英求, 1923년 ~ 1991년, 윤치호의 손자)
6. 기타
wikitext
연도 | 내용 |
---|---|
1945년 | 경기도 양주군청 공무원 |
1963년 | 한국신문협회 이사장 |
1965년 | 국제 언론인 협회 (IPI) 위원 |
1969년 | 아시아신문재단 (PFA) 부이사장 |
1976년 | 국제 언론인 협회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 |
연도 미상 | 아시아신문재단 (PFA) 이사장 |
1993년 | 조선일보 명예회장 |
2003년 | 조선일보 고문 |
7. 수상 경력
참조
[1]
뉴스
'밤의 대통령' 2세들 재산다툼 한매듭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8-21
[2]
뉴스
노친과의 아픈 타협, 그 약속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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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0-01-21
[3]
웹사이트
빈소 표정 노대통령도 조화...방재선씨 조문 거부당해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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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일영문화재단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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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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