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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승 (18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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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낙승은 일제강점기 자본가이자 기업인으로, 188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24년 대창직물 주식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여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를 설립, 인조견 직물 사업을 운영했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국방헌금과 군용 비행기를 헌납했으며, 박흥식이 설립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 대주주로 참여했다. 광복 후 이승만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며 특혜를 받았고, 친일 전력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섬유업 외 사업 확장을 통해 재벌로 평가받았으나, 한국 전쟁 후 자유당 정권과의 유착으로 몰락하여 1956년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아들 백남준은 행위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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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승 (1886년)
기본 정보
백낙승의 사진
백낙승
출생1886년
사망1956년 10월 15일
국적대한민국
학력
학교배재고등학교 졸업
기타미국 남감리교계통의 모교인 테네시대학 수학
경력
직업목사
주요 경력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소속 정당무소속
기타 정보
서훈대통령 표창

2. 생애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자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포목상 백윤수의 막내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대창직물주식회사가 창설될 때 주주로 참여하고 취체역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인조견 직물을 생사하면서 직물 사업을 경영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의 니혼 대학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였다.

1930년대 말부터는 경영권을 이어받아 사업을 확장시켰고,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 관동군사령부헌병대와 교섭하여 태창직물의 제품을 만주로 밀수출하는 방식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이때는 일본의 대형 기업도 태창을 수출 창구로 통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태창의 상표는 벚꽃 무늬에 '泰(태)'자를 넣은 것이었다.

섬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모은 백낙승은 중일 전쟁 이후부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거액의 국방헌금은 물론 1938년1939년에 군용 비행기를 '애국기'라는 이름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박흥식이 설립한 군수 기업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는 대주주로 참여했다.

광복 후에도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정경유착을 계속해 국가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등 여러 특혜를 통해 계속 성장했다. 친일 전력이 있던 백낙승은 여운형박헌영 계열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을 때는 이종형 등이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백낙승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주력 업종인 섬유업 외에도 기업을 계속 확장하여 태창공업주식회사, 해전직물공업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태창직물주식회사 등의 사장을 맡으면서 최초의 '재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백낙승의 사업은 한국 전쟁 후 자유당 정권과의 지나친 유착으로 잦은 스캔들[3]을 양산하다가 몰락했고, 1956년 정릉 경국사에서 사망하였다.[2]

2. 1. 일제 강점기

백윤수의 막내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24년 대창직물주식회사가 창설될 때 주주로 참여하고 취체역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인조견 직물을 생사하면서 직물 사업을 경영했다. 당시 백낙승은 일본의 니혼 대학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였다.

1930년대 말부터는 경영권을 이어받아 사업을 확장시켰고,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 관동군사령부헌병대와 교섭하여 태창직물의 제품을 만주로 밀수출하는 방식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이때는 일본의 대형 기업도 태창을 수출 창구로 통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태창의 상표는 벚꽃 무늬에 '泰(태)'자를 넣은 것이었다.

섬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모은 백낙승은 중일 전쟁 이후부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거액의 국방헌금은 물론 1938년1939년에 군용 비행기를 '애국기'라는 이름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박흥식이 설립한 군수 기업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는 대주주로 참여했다.

2. 2. 광복 이후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자본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포목상 백윤수의 막내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난 백낙승은 광복 후에도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정경유착을 계속해 국가 귀속 재산을 불하받는 등 여러 특혜를 통해 계속 성장했다.[3] 친일 전력이 있던 백낙승은 여운형박헌영 계열에까지 손을 뻗치는 등 해방 정국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을 때는 이종형 등이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3] 백낙승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3]

이후 주력 업종인 섬유업 외에도 기업을 계속 확장하여 태창공업주식회사, 해전직물공업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태창직물주식회사 등의 사장을 맡으면서 최초의 '재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3] 승승장구하던 백낙승의 사업은 한국 전쟁 후 자유당 정권과의 지나친 유착으로 잦은 스캔들[3]을 양산하다가 몰락했고, 1956년 정릉 경국사에서 사망하였다.[2]

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군수산업 관련자 부문에 들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에는 경제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가족 관계


  • 조부 : 백경현(1841년 ~ ? )
  • 부 : 백윤수(1855년 ~ 1921년) 대창무역주식회사 설립자, 초대 사장
  • 형 : 백낙원(1883년 ~ 1939년) 대창무역 2대사장
  • * 조카 : 남정(1903년 ~ ? ), 남흥, 남희, 남숙, 남철, 남극
  • 형 : 백낙중(1889년 ~ ? ) 대창무역 3대사장
  • * 조카 : 남훈, 남국, 남하
  • 형 : 백낙삼(1892년 ~ ? ) 대창무역 중역
  • * 조카 : 남웅(1920년 ~ ), 흥순(1922년 ~ ), 영숙(1924년 ~ ), 남진(1928년 ~ ), 남순(1930년 ~ )
  • 본인 : 백낙승(1896년 ~ 1956년) 태창직물 2대 사장
  • * 아들 : 남일(1925년 ~ ? ) 태창방직 3대 사장, 1962년 일본 귀화.
  • ** 손자 : (1951년 ~ )
  • * 아들 : 남헌
  • * 딸 2명
  • * 아들 : 남준(1932년 ~ 2006년) 행위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4. 1. 조부 및 부

백낙승의 조부는 백경현(1841년 ~ ?)이며, 부친은 백윤수(1855년 ~ 1921년)로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4. 2. 형제 및 조카

백낙승의 조부는 백경현(1841년 ~ ? )이며, 아버지는 백윤수(1855년 ~ 1921년)로 대창무역주식회사의 설립자이자 초대 사장이었다. 백낙승에게는 세 명의 형이 있었다. 첫째 형은 백낙원(1883년 ~ 1939년)으로 대창무역의 2대 사장이었고, 슬하에 남정(1903년 ~ ? ), 남흥, 남희, 남숙, 남철, 남극 등의 조카를 두었다. 둘째 형은 백낙중(1889년 ~ ? )으로 대창무역의 3대 사장을 역임했으며, 조카로는 남훈, 남국, 남하가 있었다. 셋째 형은 백낙삼(1892년 ~ ? )으로 대창무역의 중역이었으며, 남웅(1920년 ~ ), 흥순(1922년 ~ ), 영숙(1924년 ~ ), 남진(1928년 ~ ), 남순(1930년 ~ ) 등의 조카를 두었다. 백낙승 본인(1896년 ~ 1956년)은 태창직물 2대 사장이었으며, 슬하에 남일(1925년 ~ ? ), 남헌, 딸 2명, 그리고 남준(1932년 ~ 2006년)을 두었다. 아들 남일은 태창방직 3대 사장을 지냈고 1962년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손자 (1951년 ~ )을 두었다. 막내 아들 백남준은 행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였다.

4. 3. 자녀 및 손자

백낙승은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장남 남일은 1925년에 태어나 태창방직 3대 사장을 역임했고, 1962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남일의 아들, 즉 백낙승의 손자 1951년생이다. 차남은 남헌이다. 넷째 아들 백남준(1932년~2006년)은 행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였다. 백낙승의 조부 백경현(1841년~?)과, 아버지 백윤수(1855년~1921년)는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을 지냈다. 백낙승에게는 형제가 셋 있었는데, 백낙원(1883년~1939년)은 대창무역 2대 사장, 백낙중(1889년~?)은 대창무역 3대 사장, 백낙삼(1892년~?)은 대창무역 중역을 지냈다. 백낙원의 자녀는 백남정, 백남흥, 백남희, 백남숙, 백남철, 백남극이고, 백낙중의 자녀는 남훈, 백남국, 백남하이다. 백낙삼의 자녀는 백남웅(1920년~), 백흥순(1922년~), 백영숙(1924년~), 백남진(1928년~), 백남순(1930년~)이다.

참조

[1] 간행물 백낙승 국사편찬위원회
[2] 뉴스 알림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6-10-15
[3] 뉴스 연계자금대출 4분의1이 자유당 선거자금으로 - 자유당정권의 권력형 부정대출사건 (하) http://gginews.gg.go[...] 주간경기 200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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