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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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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1982년 3월 18일, 전두환 정권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반발로 부산 미국문화원에 발생한 방화 사건이다. 사건 관련자로는 문부식, 김현장, 김은숙, 최인순 등이 있으며, 이들은 방화 및 유인물 살포를 주도했다. 사건으로 동아대학교 학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등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건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었으며, 가톨릭 신부 최기식은 관련자들을 은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주동자들은 사형, 공범들은 무기징역 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반미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한국 사회에 반미주의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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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사건명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한글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한자釜山美國文化院放火事件
일본어 히라가나ぷさん あめりかぶんかいん ほうかじけん
일본어 가타카나プサン ミグンムヌァウォン パンファ サコン
로마자 표기Busan Miguk Munhwawon Banghwa Sageon
사건 배경
발생 시기1982년
장소부산 미국문화원
당시 건물현 부산근대역사관
사건 경과
방화1982년 방화 발생
범인2명 사형 선고
관련 정보
언론 보도뉴욕 타임스 기사

2. 사건 관련자 명단

이름역할비고
문부식휘발유 운반, 사건 최종 지휘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과 관련된 미국이 전두환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을 항의하는 행위였다고 진술[2]
김은숙미국문화원 문 절단, 방화
최인순휘발유 운반, 방화김은숙과 함께 미국문화원 문 절단
류승렬휘발유 운반
김지희휘발유 운반, 방화
김현장배후 조종
허진수사건 가담노무현 변호사 변호
김화석사건 가담노무현 변호사 변호
박정미방화예비음모
최기식범인은닉, 국가보안법 위반원주 천주교 교육원 원장[2]
홍성우피의자 담당 변호사
장덕술사건 피해자, 동아대학교 재학생사망
김미숙사건 피해자경상
허길숙 외 3명사건 피해자들전치 3주 부상
노무현변호사허진수, 김화석 담당
이회창판사사건 담당


2. 1. 주요 가담자


  • 문부식: 휘발유 운반 및 사건 최종 지휘를 맡았으며, 고신대학교 신학과 학생이었다.[2] 1982년 8월 방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1] 1983년 3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3] 1988년에는 20년으로 감형되었다.[4][5] 6년 9개월 후 1988년에 출소했다.
  • 김은숙: 미국문화원 문 절단 및 방화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고신대학교 신학과 학생이자 문부식의 아내이다.[1] 1982년 8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
  • 최인순: 김은숙과 함께 미국문화원 문 절단 및 방화, 휘발유 운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산대학교 약대생이었다.
  • 김현장: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지명 수배 중이었다.[2] 1982년 8월 방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1] 1983년 3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3]
  • 이미옥: 방화에 가담했으며,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생이었다. 1982년 8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
  • 김지희: 휘발유 운반 및 방화에 가담했다. 부산여대 재학생이었다.
  • 류승렬: 휘발유를 운반했다.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다.
  • 허진수: 사건에 가담했으며, 노무현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
  • 김화석: 사건에 가담했으며, 노무현 변호사가 허진수와 함께 변호를 맡았다.

2. 2. 변호인 및 관련 인물

최기식 신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기소되었다.[2] 홍성우 신부(가톨릭 원주교구)가 피의자 담당 변호사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허진수, 김화석의 변호를 맡았다. 이회창 판사가 사건을 담당했다.

2. 3. 피해자

이름피해 내용
장덕술동아대학교 재학생, 사망
김미숙경상
허길숙 외 3명전치 3주 부상


3. 사건 진행 과정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사건 당일 정오 12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부산대학교고신대학교 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에 잠입하여 방화 및 유인물을 살포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부산 미국문화원이 불타자 인근 주민들은 소방서에 신고했고, 오후 4시경 소방차가 도착했다. 경찰 병력과 검찰, 대공부대도 출동했다. 초기 언론 보도는 북한이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 소행으로 추정했으나, 이후 검은 화염에 휩싸인 건물에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는 장면이 한 달 이상 주요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국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톱뉴스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화재를 반정부 운동을 벌이던 일부 좌익 학생들의 방화 사건으로 보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3. 1. 방화 및 유인물 살포

1982년 3월 18일 정오 12시에서 오후 2시경, 부산대학교 약대생 최인순과 부산여대 재학생 김지희는 부산시 대청동 부산미국문화원 건물 담장을 넘어 잠입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자 고신대학교 학생 문부식과 부산대학교 학생 류승렬은 택시로 휘발유를 현장 근처까지 운반했다. 고신대학교 학생 김은숙과 이미옥은 승용차에서 내려 휘발유 통 4개를 들고 문화원 정문 앞으로 갔다.[6]

최인순과 김지희는 미리 준비한 공구로 강재 대사관 문을 절단했고, 김은숙과 이미옥은 휘발유통을 들고 문화원으로 들어갔다. 4명은 문화원 문을 깨고 복도 바닥에 휘발유를 쏟은 뒤, 최인순과 김지희는 가스 라이터와 성냥, 솜뭉치를 매단 '방화봉'으로 불을 붙여 건물 안으로 던졌다. 잠시 후 폭발음과 함께 미국 문화원은 불길에 휩싸였다.[6]

건물 밖에서 화재를 지켜보던 김은숙, 이미옥, 최인순, 김지희는 유인물을 들고 대신동 방향으로 사라졌다. 문부식은 미국문화원 건너편 건물 2층에서 발화 장면을 촬영했다.[6]

미국문화원에 불길이 치솟은 직후, 800미터 떨어진 부산 국도극장 3층에서 류승렬은 최충언, 박원식 등 대학생들과 함께 유인물을 뿌렸다. 유인물에는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등 10여 개의 구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문화원 인접 유나백화점 6층에서도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소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 등의 제목이 실린 유인물이 살포되었다.[6]

3. 2. 초기 대응 및 언론 보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이 나자, 인근 주민들의 신고로 소방차가 오후 4시경에 도착했다.[6] 소방, 경찰 병력과 검찰, 대공부대가 현장에 출동했으나, 미국문화원은 이미 완전히 전소된 뒤였다.

초기 언론 보도는 발화자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북한이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이후 검은 화염에 휩싸인 건물에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는 장면이 한 달 이상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으며, 한국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불타는 미문화원 모습이 톱뉴스로 보도되었다.

경찰은 이 화재를 반정부 운동을 벌이던 일부 좌익 학생들의 방화 사건으로 보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사건 발생 14일째인 같은 해 4월 18일, 주범인 문부식과 여대생 1명이 경찰에 자수했다. 이들의 자수로 방화 공범 3명과 유인물 살포자 3명, 반미 및 반정부 목적의 학습회 참가자 3명이 체포되었다.[6]

4. 원인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묵인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지지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이 사건의 주된 동기였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던 부산 지역 기독교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이들은 개신교가톨릭이 함께 참여한 부산양서협동조합 회원이었다.[2]

방화로 인해 미국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 1명이 연기에 질식되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인물이 살포되었다.[6]



이 유인물들은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규정하고, 전두환 정권의 대북 정책과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전두환의 북침 기도설을 주장하며, 미국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5. 경과

불은 출동한 의용소방대원과 주민들의 협조로 약 2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학교 학생 장덕술(22세, 동아대학교 상대경영학과 3학년 재학)이 사망했고, 김미숙(당 24세, 동아대학교 회화학과 4학년), 허길숙(당 24세 동대학 회화학과 4학년)과 그 외 3명이 화상으로 인한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7][8]

당시 학생들은 방화만 한 게 아니라, 대사관 방화를 확인한 뒤 근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유인물을 뿌린 뒤, 현장을 출발하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유인물을 부산 시내에 뿌리고 다녔다. 연일 수사 속보가 보도되었고,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목격자들은 두 명의 여학생이 승용차로부터 물통을 건네받은 장면, 두 명의 여학생이 정오부터 2시 사이에 미국문화원 주변을 배회한 것, 장발에 얼굴을 가리고 금테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미국문화원 주변을 배회하였다는 진술, 동일한 인상착의의 남녀 학생들을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봤다는 시민들의 진술이 속속들이 나타나면서 범인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문화원 방화 현장에 있던 범인들이 여학생들이고 이들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남성의 존재가 윤곽이 드러났다.

수배령이 떨어진 김은숙과 문부식은 원주교구청의 최기식 신부를 찾아왔고, 교회의 주선으로 사건 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하게 된다.[9] 이어 공범 3명과 전단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이 뿌린 삐라는 해운대 해수욕장, 양산, 울산, 제주도, 일본 쓰시마섬 등에까지 날아갔다.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북한을 폭격할 것이라는 기사가 일본 뉴스에도 보도되었지만 오보로 밝혀지면서 삭제되었다.

4월 2일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한 김현장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주동자인 문부식과 총 16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김현장을 숨겨주어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되었다.

6. 재판

1982년 6월, 부산에서 16명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고신대학교 신학생 문부식(23세)은 방화 혐의를 인정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과 관련된 미국이 전두환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항의하는 행위였다고 진술했다. 다른 피고인 중에는 원주 천주교 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39세)가 포함되었는데, 최기식 신부는 공격자들을 은닉한 혐의를 받았다.[2]

이 사건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15명에 달했고, 이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법,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8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 판결 공판에서 문부식 등 2명에게 사형이, 2명에게 무기징역이, 나머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5년의 징역이 선고되었다. 또한 지명 수배범을 은닉한 신부에게는 징역 3년, 자격 정지 3년이 선고되었다.

이후 대구고등법원을 거쳐, 1983년 3월 8일 대법원 상고심 판결 공판에서 피고인 전원의 상고를 기각하고, 피고인 전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판결 확정 일주일 후인 3월 15일,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문부식 등 2명의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6. 1. 1심

1982년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안문태, 신우철, 홍광식 판사)는 11차례 공판 끝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일부 피고인이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에서 자백했다고 하나 녹음 테이프 등 제반 증거를 볼 때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설령 의식화 학습을 하여 북을 이롭게 한 것은 차치 하더라도 사람이 있는 곳에 불을 지른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6]

피고인선고 형량구형 형량
김현장(32세)사형사형
문부식(23세)사형사형
최기식(39세) 신부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김은숙(24세)무기징역무기징역
이미옥(20세)무기징역무기징역
유승렬(20세)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무기징역
최인순(20세)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무기징역
김지희(21세)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무기징역
박원식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박정미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김화석징역 3년-
허진수징역 2년-
문길환(36세)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 (석방)-
이창복(43세)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 (불구속 기소)-



이 외에도 박원식은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박정미는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 김화석은 징역 3년, 허진수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문길환 등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고, 불구속 기소된 이창복도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10명에게는 징역형 외에 자격정지가 병과되었다.[6]

6. 2. 2심

대구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노승두 부장판사)는 1982년 12월 13일에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10]

피고인형량
김현장, 문부식사형
김은숙, 유승렬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이미옥, 김지희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박원식, 최인순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박정미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
이창복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최기식징역 3년, 자격정지 2년
김화석징역 3년
허진수징역 2년
문길환, 김영애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


6. 3. 3심

1983년 대법원 확정 판결에서 주동자 문부식김현장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판결 확정 일주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6] 나머지 피의자들은 국가보안법, 계엄령,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최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등으로 차등 선고되었다. 최기식 신부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되었다.

7. 영향 및 파장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다양한 영향과 파장을 일으켰다.

우선, 반미주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반미 운동 확산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1982년 6월, 부산에서는 16명이 방화 사건 가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학생 문부식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과 관련된 미국이 전두환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항의하는 행위였다고 진술했다. 원주 천주교 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는 공격자들을 은닉한 혐의를 받았다.[2] 1982년 8월, 김형장과 문부식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문부식의 아내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 미국 측의 사면 요청과 천주교 및 개신교 단체들의 항의로 1983년 3월 김형장과 문부식의 사형은 감형되어 무기징역으로 바뀌었다.[3] 1988년 형기는 20년으로 감형되었으며,[4][5] 문부식은 6년 9개월 만에 출소했다.

이 사건은 종교계와 국가 권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종교계와의 갈등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미국 내에서는 반한 감정이, 한국 내에서는 반미 감정이 확산되어 양국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위험지역에 주한미군을 주둔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이 높아졌고,[1] 한국에서는 미국을 절대적인 우방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1]

운동권 내부에서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방화라는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일반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1] 그러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의 학생 운동은 반정부, 민주화 운동에서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변혁하려는 운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1]

현재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부산 근현대사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7. 1. 반미 운동 확산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1982년 4월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사건, 1983년 9월 대구 미 문화원 폭발사건, 1985년 4월 부산 미 문화원 투석사건, 미국 대사관 방화미수, 1985년 5월 서울 미 문화원이 73명의 대학생에 의해 점거되는 사건, 1986년 5월 부산미문화원이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 자민투 소속 대학생 23명에 의해 점거되는 사건 등 전국 각지에서 반미주의 학생운동이 일어났다.[1]

1982년 4월 15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사건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반미적 내용으로 극우 단체의 반발을 샀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관계자들은 경찰에 소환되었고,[1] 종교인 구속으로 가톨릭계는 국가권력과 갈등을 빚었다. 종교계는 정권의 종교탄압이라는 여론을 제기하며 반발했고, 전두환은 종단 지도자들을 긴급 소집해 진압에 나섰다.[1]

미국 내에서는 위험지역에 주한미군을 주둔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과 함께 반한 감정이 확산되었다.[1] 반면 한국에서는 미국을 절대적인 우방으로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미국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1]

일부 운동권(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급진파)은 방화라는 운동 수법에 대해 비판했고, 일반 시민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1]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학생 운동은 반정부·민주화 운동에서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1]

7. 2. 종교계와의 갈등

1982년 4월 15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반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문제가 되었고, 극우 단체의 반발성 집회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관계자들이 경찰에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1]

사건 재판 과정에서 종교인이 구속되면서 교회와 국가 권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가톨릭계는 이를 종교 탄압으로 규정하며 반발했고, 다른 종교계에서도 정권의 종교 탄압이라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교계의 반발에 직면한 전두환은 종단 지도자들을 긴급 소집하여 사태 진압에 나섰다.[1]

8. 전두환과 민주정의당의 주장

전두환 정권은 사건을 주도한 대학생들을 성격 이상자, 정신이상자, 북한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정의당도 전두환의 주장을 옹호하며 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을 간첩이라고 규정하였다.[2]

9. 평가와 비판

이 사건은 일반 시민을 끌어들인 방화라는 운동 방식 때문에 운동권(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급진파) 일부에서도 비판을 받았고, 일반 시민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3]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한국의 학생 운동은 반정부·민주화 운동에서 체제 자체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3]

9. 1. 긍정적 평가

1980년 12월 9일 광주시에서 발생한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 이전에도 여러 차례 대학생, 고등학생, 학생운동가, 농민운동가 등이 주한미군이나 미국 대사관 등 미국 관련 시설을 공격하거나 주한미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 파급효과가 커서 이후 대한민국 내 각종 반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반미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1]

이 사건은 반미운동이 어려울 것이라 여겨지던 대한민국에서 발생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과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대사관, 전국의 미국 문화원, 주한미군 주둔지 등 미군 관련 시설들이 대학생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면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한국 반미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11]

9. 2. 부정적 평가

시위의 과격성과 시위 도중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1명이 억울하게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았다.[2] 투쟁의 성격이 격렬하고 대담했으며, 무고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 또한 지적되었다.[2] 일반인뿐만 아니라 재야운동권에서도 모험주의적·폭력적 투쟁 방식이 지적되어 성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2]

일반 시민을 끌어들인 방화라는 형태의 운동 수법에 대해서는 운동권(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급진파를 가리키는 말) 일부에서도 비판이 있었고, 일반 시민으로부터 폭넓은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3] 그러나 이 방화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학생 운동은 종래의 반정부·민주화 운동에서 성격을 바꾸어 체제 그 자체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3]

10. 기타

이들이 뿌린 피켓과 삐라가 일본까지 날아가서 전두환 정권이 북한 폭격을 준비한다는 기사가 오보로 보도됐다가 삭제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를 숨겨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하고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다.[12][13]

11. 관련 자료

참조

[1] 웹사이트 2 Sentenced to Death In Korean Arson Case https://www.nytimes.[...] 1982-08-11
[2] 웹사이트 Political trial under way in Korea https://www.nytimes.[...] 1982-06-15
[3] 웹사이트 Chun spares 2 doomed in Korean arson case https://www.nytimes.[...] 1983-03-18
[4] 서적 Freedom of Expression in the Republic of Korea Human Rights Watch 1988
[5] 웹사이트 Seoul declares an amnesty but not for everyone https://www.nytimes.[...] 1988-02-27
[6] 뉴스 昼 釜山アメリカ文化院に放火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1982-03-19
[7] 뉴스 경향신문 1982-04-30
[8] 기타
[9] 뉴스인용 최기식 신부 구속사건 http://www.catholicn[...]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0-12-08
[10] 뉴스 동아일보 1982-12-13
[11] 뉴스인용 25년 전, 부산 미 문화원에서는...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7-03-18
[12] 판결문 대법원 1983.3.8. 선고 82도3248 판결 http://glaw.scourt.g[...] 1983-03-08
[13] 웹사이트 이회창 총재가 참여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대법원 상고심 판결문(요약) http://www.donga.com[...]
[14] 서적 한미관계의 재조명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198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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