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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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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회창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법관, 국무총리를 역임한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장으로 부정부패 척결에 기여했으며, 국무총리 재직 중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이후 신한국당 대표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를 거쳐 15대,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07년에는 무소속으로, 2008년에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선진당 대표를 사임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으며, 바른정당을 거쳐 회고록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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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회창 (2010년)
이회창 (2010년)
이름이회창
로마자 표기I Hoe-chang
한자 표기李會昌
출생일1935년 6월 2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황해도 서흥군
종교천주교
배우자한인옥
자녀2남
학력서울대학교
서명Lee Hoi-chang signature.svg
정치 경력
직책대한민국 국무총리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대표
한나라당 총재
신한국당 총재
국무총리대통령: 김영삼
임기 시작: 1993년 12월 17일
임기 종료: 1994년 4월 21일
이전: 황인성
다음: 이영덕
국회의원임기 시작: 2008년 5월 30일
임기 종료: 2012년 5월 29일
이전: 홍문표
다음: 홍문표
선거구: 홍성군예산군
임기 시작: 2000년 5월 30일
임기 종료: 2002년 12월 10일
선거구: 비례대표
임기 시작: 1999년 6월 4일
임기 종료: 2000년 5월 29일
이전: 홍준표
다음: 맹형규
선거구: 서울특별시 송파구
정당무소속
신한국당 (1996–1997)
한나라당 (1997–2007)
무소속 (2007–2008)
자유선진당 (2008–2012)
새누리당 (2012–2017)
자유선진당 대표임기 시작: 2008년 2월 1일
임기 종료: 2011년 5월 9일
이전: 신설
다음: 변웅전
한나라당 총재임기 시작: 1998년 8월 30일
임기 종료: 2002년 4월 1일
이전: 조순
다음: 박관용 (직무대행)
신한국당 총재임기 시작: 1997년 9월 30일
임기 종료: 1997년 11월 21일
이전: 김영삼
다음: 직책 폐지
기타 정보
별칭경사

2. 생애

황해도 서흥의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나 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남한에서 성장했다.[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1960년 판사로 임용되어 법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군사정권 하에서도 소신 있는 판결을 내려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39] 1981년 최연소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1986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연임에 실패하고 잠시 변호사로 활동했다.[53]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공직에 복귀했고,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감사원 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직 사회 개혁을 주도하며 다시 한번 '대쪽' 이미지를 굳혔다.[5] 같은 해 말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소외 등을 이유로 1994년 사임했다.[4]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고,[63] 1997년, 2002년, 2007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에게,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했으며,[5][8] 특히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른바 '차떼기', '병풍') 등이 선거 과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7][105][24]

한나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2007년 대선 낙선 후에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이끌었다.[108] 2012년 총선 불출마 선언 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새누리당, 바른정당 등에 잠시 몸담았으며, 2017년에는 회고록을 출간했다.[124][125]

2. 1. 생애 초기

황해도 서흥(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남한에서 성장했다.[5] 서울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1935년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 출신인 이홍규(李弘圭)와 김사순(金四純) 사이에서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9]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조선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의 넷째 동생 이영습(李英襲)의 23대손이다.[40] 이영습은 고려 말 위위시주부동정(尉衛侍主簿同正)을 지냈으며, 고려 대장군 이양무의 넷째 아들이자 이준의·이의방 형제의 종손(從孫)이었다. 이영습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에 조선 건국 이후 왕족 대우는 받지 못했다.

이영습의 증손자인 이세분(李世芬)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이회창의 17대조인 우계당(牛溪堂) 이소생(李紹生)은 단종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현 교촌리)에 은거했다. 이로 인해 이회창 가문은 충청남도 예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41]

가문은 한때 몰락했으나 구한말에 다시 부유해졌으며, 예산 금오산 일대의 상당 부분이 집안 재산이었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 이용균(李容均)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이름난 한학자였다. 작은 큰아버지(중부, 仲父)인 이태규는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이학박사로,[41] 1992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41]

아버지 이홍규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후반 검찰서기로 임용되어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8·15 광복 이후 검사로 임용되어 법관으로 활동했다. 퇴직 후에는 공증인과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고향이자 선대의 원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어머니 김사순의 언니는 균류학자 김삼순이며, 외삼촌인 김홍용(金洪鏞)과 김문용(金汶鏞)은 제2대 국회의원을, 김성용(金星鏞)은 제6대, 제7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모부인 강세형(姜世馨) 역시 제3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16][17][18]

이회창은 아버지의 발령지를 따라 이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서너 살 때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살았고,[39] 이후 외가가 있는 광주로 이주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청주로 발령받으면서 충청북도 청주중학교로 전학했고, 이후 다시 경기중학교로 옮겼다.[42] 17세 때는 아버지가 모함으로 구속되자 잠시 소년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다.[39]

'''이회창 가계도'''
구분관계이름생몰년비고
친가할아버지이용균(李容均)한학자, 500석꾼
할머니밀양 박씨
작은큰아버지이태규(李泰圭)1902년 1월 26일 ~ 1992년 10월 26일한국 최초 이학박사 (화학), 액체/양자화학 연구자
작은큰어머니박인근
사촌이회인(李會仁)학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 연구원
아버지이홍규(李弘圭)1905년 6월 12일 ~ 2002년 10월 31일[156][157]검사, 법관, 변호사
어머니김사순(金四純)1911년 5월 7일 ~ 2005년 10월 24일[158]
누나이회영(李會英)1929년 7월 9일 ~
이회정(李會正)1932년 4월 11일 ~
본인이회창(李會昌)1935년 6월 2일 ~
남동생이회성(李會晟)1945년 12월 31일 ~경제학자, IPCC 의장 (2015년 선출)[20]
남동생이회경(李會京)1947년 9월 18일 ~
숙부이완규(李完圭)1913년 ~ ?[159]외 3명
외가외증조부김용현(金庸炫)
외할아버지김재희(金在晞)천석꾼
이모김삼순균류학자
이모부강세형(姜世馨)제3대 국회의원
외숙부김홍용(金洪鏞)1902년 10월 3일 ~ 1950년 8월 15일제2대 국회의원[16]
외숙부김문용(金汶鏞)1916년 6월 23일 ~ 1995년 2월 7일제2대 국회의원[17]
외숙부김성용(金星鏞)1918년 1월 9일 ~ 1999년 1월 7일제6, 7, 9대 국회의원[18]
처가장증조부한정규(韓正奎)
장조부한일현(韓一賢)
장인한성수(韓聖壽)1910년 7월 7일 ~ 1988년 5월 6일대법관 (1964~1968)[21]
장모김분남(金粉南)
배우자한인옥(韓仁玉)1937년 1월 12일 ~[160]
장남이정연(李正淵)1962년 7월 20일 ~사돈: 이봉서(李鳳瑞), 전 상공부/동력자원부 장관[23]
장녀이연희(李淵姬)1964년 4월 2일 ~
차남이수연(李秀淵)1966년 10월 21일 ~
처남한대현(韓大鉉)서울고등법원장, 헌법재판관 역임[22]


2. 1. 2. 유소년기

1935년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였던 이홍규(李弘圭)와 김사순(金四純) 사이에서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9]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의 넷째 동생 이영습(李英襲)의 23대손이다.[40] 이영습은 고려 말 위위시주부동정(尉衛侍主簿同正)을 지냈으며, 고려 대장군 이양무의 넷째 아들이자 이준의·이의방 형제의 종손(從孫)이었다. 이 때문에 이회창의 가문은 왕실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고, 조선 건국 이후 왕족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이영습의 증손자인 이세분(李世芬)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17대조인 소생(紹生)은 단종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예산군 대흥면에 은거했다. 이로 인해 이회창의 가문은 충남 예산에 자리 잡게 되었다.[41] 이후 가세가 기울기도 했으나, 구한 말에 다시 부유해져 예산 금오산 일대의 상당 부분이 집안 재산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이용균은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이름난 한학자였고, 둘째 큰아버지 이태규는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이학박사이다.[41]

아버지 이홍규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후반 검찰서기로 일하다 8·15 광복 후 검사로 임용되어 법관으로 활동했다.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남한에서 성장했다.[5] 선대의 고향이자 원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장면 전 국무총리
(6.25 전쟁 당시 자유당 간부에게 밉보인 아버지 이홍규를 도왔다.)


6·25전쟁 직전, 경기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회창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였던 아버지가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 줬다'는 이유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43] 다행히 아버지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의 도움으로 곧 풀려날 수 있었다.[43]

이후에도 아버지 이홍규는 한 자유당 간부의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 간부에게 좌경, 용공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이때도 장면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아버지 이홍규는 장면의 인도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교하였고, 집안 전체가 가톨릭 가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내사를 받는 동안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청소년기의 이회창은 방황하기도 했다.

경기중학교 졸업 후 이회창은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중·고교 시절에는 주로 독서에 몰두했다. 아버지 이홍규는 이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복귀하여 1956년 부통령 장면 피격 사건을 적극적으로 수사하고 배후를 밝혀내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척결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1]

2. 1. 3. 대학 시절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이던 1956년 12월 14일 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의 전신)에 1차로 합격하였고[44], 이듬해인 1957년 1월 23일에는 47위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종 합격하였다.[45][46] 1957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장교후보생 시절 논산 제2훈련소에서 훈련 중


대학 졸업 후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1957년 6월 공군 장교로 임관하였으며[47], 공군본부 법무감사관실에서 법무관으로 복무하였다. 1960년 공군 예비역 대위로 예편하였다.

2. 2. 법관과 공직 활동

1960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47] 초기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 논란이 된 민족일보 사건 1심 재판부에 배석판사로 참여하기도 했다.[48] 이후 여러 법원에서 판사와 부장판사를 거쳤으며, 사법연수원 교수를 겸임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시기에는 명확한 찬반 입장을 보이지 않아 정권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으나, 군사정권 하에서도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리려는 모습을 보여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39] 이러한 성향 때문에 정권의 기피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81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46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대법관 시절에는 사법적극주의를 강조하며 정권의 입장과 다른 소수의견을 자주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불온 유인물 소지 혐의자에 대한 위법한 수사를 지적하는 등[52]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청렴한 생활 태도로 동료 법관들의 신망을 얻었으나, 1986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대법관 연임에 실패하고 법복을 벗었다.[53]

퇴임 후에는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했으며[54], 당시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개인과외 단속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55] 1988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다시 공직에 나서게 된다.

2. 2. 1. 판사 임용 초기

1960년 초,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법관 생활을 시작하였다.[47] 같은 해 3월 10일 판사로 정식 임용되었고, 10월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서 사립학교 재단의 방침에 반발하여 퇴학당한 학생 4명의 퇴학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1심 재판부에 배석판사로 참여하였다.[48] 이 사건은 군사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법관 시절 이회창은 개인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쓴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실력과 바른 자세로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얻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선배 판사의 소개로 한인옥과 결혼했는데, 장인 한성수는 1960년대 대법관을 지낸 법조계 인물이었다.

이후 여러 법원에서 판사직을 역임했다. 1961년 인천지원 판사를 거쳐 1962년 다시 서울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1963년 6월 25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64년 5월 19일과 12월 31일에 같은 법원 판사로 재임명되었다. 1965년에는 서울형사지방법원 단독 판사 겸 재판장을 맡았고, 같은 해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1970년 12월 29일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였고, 바로 다음 날인 12월 30일에는 사법연수원 교수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2. 2. 2. 유신 시대 활동

1972년 박정희 대통령10월 유신을 선포했을 때, 이회창은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찬성하지도 않았다. 당시 판사와 대법관들은 유신에 대한 찬반으로 나뉘었는데,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다. 1973년 3월 28일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법관 시절, 군사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정부의 압력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39] 소신 있는 판결 때문에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기피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는 주류 판결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 시기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직책
1965년 ~ 1970년서울고등법원 판사
1971년 ~ 1973년사법연수원 교수
1973년 ~ 1975년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년 ~ 1981년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47]



또한 이 시기에 판사로 임용된 노무현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훗날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로 맞붙게 된다.

2. 2. 3. 군사정권에서의 법관 활동

1972년 박정희 대통령10월 유신을 선포했을 때, 이회창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찬성하지도 않았다. 당시 법관 사회는 유신 찬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기도 했다. 1973년 3월 28일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1974년에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군사정권 하에서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 여러 사건에서 정부 측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39] 그는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고등법원 판사,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사법연수원 교수,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47] 군사정권의 부당한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리는 모습으로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기피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주류 의견과 다른 판결을 내리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판사로 임용된 노무현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훗날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로 만나게 된다.

1980년에는 법원행정처 조사국 국장을 맡았고, 같은 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복귀하면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겸임했다. 1981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46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대법관 시절 그는 사법적극주의와 법관에 의한 법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정권의 입장과 배치되는 소수의견을 자주 제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는 '대쪽판사'라는 별칭을 더욱 굳혔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학술지 《인권과 정의》가 선정한 "20세기를 대표하는 각 분야별 판례 20선" 중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그가 참여한 판례가 포함되기도 했다.[49]

대표적인 예로 1993년 선고된 '교회분열 사건'(대법원 1993.1.19. 선고, 91다1226 전원합의체판결)이 있다. 이 사건은 일부 교인이 종전 교단에 남고 나머지 교인이 다른 교단으로 옮기면서 발생한 재산 분쟁이었다. 당시 다수의견은 교단 변경을 주장한 교인들의 교회 탈퇴로 보아 종전 교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회창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통해 교회 분열을 인정하고, 분열 후 두 개의 교회는 종전 교회의 재산을 분열 당시 각 교회의 세례교인 수 비율에 따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0][51]

이처럼 그는 주류 법관들과 달리 소수의견을 자주 냈으며, 군사정권의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하여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관 재직 중 사적인 청탁이나 뇌물을 거절하고 유흥업소 출입을 일절 하지 않는 등 청렴한 생활 태도를 유지하여 동료 법관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얻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박정희, 전두환 정권도 그를 함부로 해임할 수 없었다.

1986년에는 불온 유인물 소지 혐의로 신고된 사람에 대해 영장 없이 압수수색하고 불법 구금한 진주경찰서 정보계장 등 경찰관 3명에 대한 고발 사건에서 재정신청 항고심 주심을 맡았다. 그는 "적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구금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이며 영장 없이 6일간 구금한 것은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하여 사건을 대구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후 대구고등법원과 대법원 재항고심에서 그의 판단과 달리 기각되었다.[52]

2. 2. 4. 사퇴와 변호사 개업

법관 재직 중 사사로운 청탁이나 뇌물을 거절하고 유흥업소 출입을 삼가는 등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소신을 지켜 동료 법관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대쪽판사'라는 별칭을 얻었다.[49] 군사정권의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하여 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불온 유인물 소지 혐의자에 대한 영장 없는 압수수색 및 불법 구금 사건과 관련하여 진주경찰서 경찰관들에 대한 재정신청 항고심 주심을 맡았다. 당시 이회창은 "적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구금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이며 영장 없이 6일간 구금한 것은 직권남용"이라며 사건을 대구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으나, 이후 과정에서 그의 판단과 다르게 기각되었다.[52]

이러한 소신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1986년 4월 17일 대법관 연임에 실패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동아일보 등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으며, '재임명 탈락'이라는 표현 대신 다른 표현을 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53]

1986년 4월 24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서울 상공회의소 빌딩 622호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변호사로 개업했다.[54] 변호사로 활동하던 1986년 6월에는 개인과외 단속으로 고려대학교 학생이 구속되자, 과외 단속의 법적 무리함을 지적하며 "시행 6년이 지난 지금, 재검토를 거쳐 합리적이고 타당성 있는 평상시의 규제 방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55] 변호사 활동은 1988년 6월까지 이어졌다.

2. 2. 5. 노태우 정부 시절

1988년 6월까지 개인 변호사로 활동했다.[54]

2. 2. 6. 문민 정부 시절

(내용 없음)

2. 3. 정치 활동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93년에는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 원장으로 활동하며 부정부패 척결에 힘써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5] 같은 해 말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북한 관련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소외 등에 불만을 품고 1994년 사임했다.[4]

1996년에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한국당은 이듬해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었다.[6] 이회창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다. 선거 초반에는 유력 후보로 꼽혔으나,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7] 결국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당시 한국은 아시아 금융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맞붙었다. 당시 반미 감정과 양주 고속도로 사건 등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고, 이회창은 노무현 후보에게 약 2%p 차이로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5][8]

그러나 2007년 11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보수 성향을 표방하며 이명박, 정동영 등과 경쟁했으나, 보수 진영 내 표 분산 우려 속에서 약 15%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9][10][11][12][13] 대선 이후에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였다.

2. 3. 1. 정계 입문

1996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63]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7년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63] 이후 이회창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내 민주계가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다.[63] 신한국당은 1997년 자유민주연합과 합쳐 한나라당이 되었다.[6]

2. 3. 2.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996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을 신한국당에 영입했고, 1997년 3월에는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했다.[63] 이후 이회창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이는 당내 민주계가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신한국당 내 경선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64] 선거 초반 유력 후보로 여겨졌으나,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불거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제기한 이 의혹은 이회창의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65][7]

지지율 하락과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노태우 사면론에 대응하기 위해, 이회창은 보수 세력 결집을 목표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두 전직 대통령의 추석 전 사면을 요구했다.[66][67][68][134] 이미 1997년 4월부터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김윤환 고문 등을 중심으로 사면 논의가 있었고,[130][131][132] 7월에는 법무부가 사면 실무 검토를 마친 상태였다.[133]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에는 "국민적 공감대"를 이유로 이회창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69] 9월 12일 입장을 바꿔 대선 전 사면 가능성을 시사했다.[71] 이회창의 사면 추진에 대해 수감 중이던 전두환은 측근을 통해 "고맙다"는 뜻을 전했고,[72][73] 이회창 역시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화답하며 사면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74][135][136] 그는 9월 24일 간담회에서도 "전직 대통령이 구금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통합' 차원에서 사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76] 이는 경쟁자인 김대중 후보의 사면론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9월 30일, 이회창은 신한국당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다.[77]

그러나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등 악화된 경제 상황과 흉흉한 민심으로 신한국당과 이회창의 지지율은 김대중 후보에게 크게 뒤처졌다.[78][79] 게다가 경선 경쟁자였던 이인제가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 독자 출마를 강행하면서 여권 표 분산 우려가 커졌다.[80]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서석재 등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이인제 지지에 가담했다.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신한국당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20억 원 외에 추가 자금을 수수했다고 주장하며 공세를 펼쳤다.[81][82] 신한국당은 계좌 내역과 수표 번호 등을 공개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고,[85] 김대중 후보를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88][89] 이 과정에서 강삼재 의원의 자택과 신한국당 당사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등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90][91] 김대중 후보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정치 공세라고 반박했다.[92] 검찰은 10월 20일 비자금 수사에 착수했으나,[93] 호남 지역의 반발과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여 다음 날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했다.[94][95] 당시 검찰총장이 호남 출신인 김태정이었다는 점도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96] 이회창은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에 반발하며 재수사를 요구하고,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97]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7일 신한국당을 탈당했다.[98]

이후 이회창은 소수 야당이던 민주당과의 합당 및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여, 11월 21일 한나라당을 창당하고 조순을 명예총재로,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99] 그러나 김대중 후보가 자유민주연합김종필과 DJP 연대를 결성하고, IMF 외환 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책임론이 커졌다.[100][101] 특히 김영삼 정부 말기의 경제 위기는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에게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은 김대중 후보에게 약 39만 표 차이로 패배하여 2위에 머물렀다. 선거 직후인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를 거쳐 전두환노태우를 특별 사면했다.[137]

2. 3. 3. 국민의 정부 초기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한 이후, 이회창은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과 함께 수십 년 만에 야당이 된 당을 이끌었다. 외환 위기의 여파와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 속에서 신한국당은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음에도 대선에서 패배했다. 이회창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외환 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노태우, 전두환 등 과거 군사정권 관련 인사들과 거리를 둘 것을 주장하며,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당시, 한나라당은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제1야당이었다. 한나라당은 원내 다수당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하려던 햇볕정책,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3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이 높은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이러한 강경 노선은 점차 부정적인 여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패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위기 상황 속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를 넘어 19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되어 당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2. 3. 4. 야당 총재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에게 패배한 후, 한나라당은 수십 년 만에 야당이 되었다. 이회창은 당시 총재였던 조순과 함께 당을 이끌었다. IMF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서 그는 대선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등 과거 군사 정권과 연관된 인사들과 거리를 두려 했고,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갇힌 당 지도부를 비판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의 지위를 이용하여 햇볕정책, 김종필 총리 인준 등 주요 정책에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적 반감을 샀고,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회창은 19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되어 당권을 장악했다.

총재 취임 전후로 김대중 정부는 세풍·총풍 사건 등을 통해 한나라당을 압박했고, 소속 국회의원 40여 명이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는 등 위기를 맞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상도동계와의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 문제로 김대중-김종필 공조가 흔들리고 여권 내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이회창은 조순 전 총재 등 당내 비주류 세력의 입지를 좁혔으며[102], 김대중 정부의 부패 및 비리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며 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수도권에서는 부진했지만,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2000년 이후에는 상도동계를 견제하기 위해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영입하기도 했다.[103]

2001년 2월 6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는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며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조사 중단을 촉구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통해 해당 인용문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므로, 한나라당이 옹호해 온 국가보안법과는 배치된다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기 동안 장관 해임건의안을 빈번하게 제출했으며, 과거 군사정권 시절 유포된 반김대중 정서에 기대어 지역 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3. 5.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초반, 새천년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의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았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지지와 개성 있는 정치 행보, 서민 중심 정책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쌓아간 반면, 이회창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경력과 한나라당이라는 거대 보수 정당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다소 귀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개선하려 여러 서민 친화적 행보를 보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만큼의 활동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회창은 노무현에 비해 풍부한 경력과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김대중 정부 말기에 터진 대형 측근 비리 사건들은 이회창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호남, 충청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승리했다. 또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고, 9월에는 월드컵 열기를 바탕으로 정몽준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며 이회창은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지지율에서 근소하게 앞서나갔다.

그러나 이회창 역시 여러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02년에만 약 8230억에 달하는 불법 정치자금을 트럭으로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차떼기' 사건[105], 115평에 달하는 초호화 빌라에 무상으로 거주했다는 의혹, 그리고 1997년 대선 당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 등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여당의 악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특히 아들들의 병역 문제는 2001년부터 대선 직후까지 김대업, 설훈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는 '김대업 병풍 사건'으로 비화하며 이회창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검찰 수사 결과 김대업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으나, 이미 대선 과정에서 병역 비리 의혹은 큰 쟁점이 되어 이회창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24][25][26][27][28][29] 법정에서는 최종적으로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한편, 2002년 6월 발생한 제2연평해전은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수도 있었으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면서 안보 이슈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11월 정몽준노무현 후보 간의 단일화가 성사되면서 판세는 다시 노무현에게 유리하게 돌아섰고, 이후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이회창을 2~3%p 앞서기 시작했다. 대선 하루 전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106]

결국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대선에서 이회창은 노무현 후보에게 2.3%p(약 57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대선 이틀 후인 12월 21일, 이회창은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패배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병역 비리 의혹, 이른바 '병풍' 사건이 1년 넘게 명확한 결론 없이 이어지며 이미지에 타격을 준 점, 제대로 된 당내 경선 없이 대선 후보로 추대되어 당내 비판과 자정 작용의 기회가 없었던 점 등이 지적된다. 또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공천 거부로 인한 상도동계의 지지 철회,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탈당, 김윤환 등 구 군사 정권 계열 인사의 이탈 역시 지지층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선거 막판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을 주장한 것도 민주화 운동 세력의 위기감을 자극하여 오히려 노무현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다.[107]

대선 약 한 달 후인 2003년 1월, 이회창은 연수차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이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축하 난만 보냈다. 그는 불법 대선 자금 관련 기자회견을 위해 2003년 10월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출국하여 2004년 중반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2. 3. 6. 정치계 은퇴와 복귀

2002년 대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에게 2%p 차이로 패배한 후, 이회창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5][8]

이회창이 정계를 떠난 이후 그의 자리였던 한나라당 총재 자리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에서부터 활동해온 서청원최병렬, 그리고 박정희의 딸이자 정치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박근혜에게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여러 정책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 원내 제2당으로 내려앉았다. 박근혜 대표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기존 한나라당의 당권은 김영삼과 이회창의 민주계에서 민정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실정과 여러 가지 측근 비리 사건을 틈타 지방선거에서 대승했을 때에도 어느 지역구에 출마한다거나,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일체 삼갔다. 그가 정치적인 활동을 보인 것은 2005년 10월 열린 재보궐선거에서 당시 대구에 출마한 유승민의 유세에 참석했던 것이 유일했는데, 유승민이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캠프 하에서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지낸 인연으로 유세를 도와준 것이었다.

2007년 들어 박근혜이명박제17대 대선 행보를 시작했었을 때, 이회창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후보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고, 특정인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가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면서 번복한 것은 국민을 기망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이 있자,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김대중의 정계은퇴 선언과 2년만의 복귀를 예로 들어 반론하였다. 논란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 공식 입후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7년 대선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 이회창


결국 2007년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 번째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우파 성향을 표방하며 북한에 대한 대북 지원을 비판하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재정적으로 부담스럽고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9][10] 10년 만에 보수 정권 재창출을 원하는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의 출마가 보수 표 분산을 야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승리했고, 이회창은 약 15%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11][12][13] 2007년 대선 출마 이후 이회창은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였다.

2. 3. 7.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선출된 후, 이회창 측근들을 중심으로 그의 대선 출마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후보의 여러 의혹과 정치 성향에 대한 불만, 그리고 박근혜의 합류에 대한 기대감 등이 출마설의 배경으로 거론되었다. 이회창 지지자들은 이른바 '스페어 후보론'을 내세우며 출마 분위기를 조성했다. 과거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일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번복 및 복귀 사례를 들며 반론하기도 했다.

결국 2007년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기호 12번)를 공식 선언했다.[9][10] 이는 그의 세 번째 대선 도전이었다. 그는 보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북한에 대한 대북 지원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상황에서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고[9][10], 이명박 후보의 경제 중심 정책을 "좌파적"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출마 선언 직전까지 이명박 후보 측은 선거대책위원회 참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회창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한나라당 측에서는 강하게 반발했으며, 특히 강재섭 당시 대표는 '대통령병'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보수 진영 내부에서는 이회창의 출마가 보수 표를 분산시켜 10년 만의 정권 교체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11]

이회창의 출마로 50%를 넘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한때 30%대 중반까지 하락하기도 했으나, 선거 결과 이회창은 약 15.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11][12][13] 이명박 후보는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1] 선거 이후 이회창은 자유선진당 창당을 주도했다.

2. 3. 8. 자유선진당 창당

2007년 대선에서 낙선한 후, 이회창은 "정통 보수 정당"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2008년 2월 1일,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108] 같은 해 2월 12일에는 비슷한 정치 성향을 가진 국민중심당과의 합당을 선언하였다.[108] 이 과정에서 1997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 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이인제와 11년 만에 다시 협력하게 되어 주목받기도 했다.

2008년 4월에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은 충청도 지역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며 총 18석(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을 확보했다. 이는 과거 자유민주연합이나 국민중심당보다 더 나은 성과였지만, 국회 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석에는 2석이 부족한 결과였다. 이회창 본인은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자유선진당은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무소속 의원이나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당선된 의원들과 접촉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창조한국당과 연대하여 공동 교섭단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했다.

이회창은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부터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하여, 수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협상 과정이 전문가 논의 없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고 지적하며 재협상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TV토론회에 나와야 한다", "선진당 차원에서 쇠고기 궐기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나 촛불집회나 대통령 탄핵 서명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109]

2009년 8월에는 당내 갈등이 불거졌다. 심대평 대표의 국무총리 기용설이 나오자 이회창은 "정치 연대의 틀 없이 선진당 소속 의원이 내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기존 원칙을 강조하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110] 그는 심 대표가 총리로 입각할 경우, 자유선진당이 그동안 비판해 온 '4대강 살리기 사업' 등에 대해 제대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112] 이러한 갈등 속에서 심대평 대표는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인 당 운영 방식에 불만을 제기하며 2009년 8월 30일 자유선진당을 탈당했다.[111] 심 대표의 탈당으로 창조한국당과 함께 구성했던 교섭단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은 결국 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했다.[30][31] 이회창은 심 대표의 탈당에 대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며 유감을 표하고 복당을 희망한다고 밝혔지만,[111] 당 운영 방식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철저하게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고 반박했다.[112]

2. 3. 9. 세종시 논란

2009년 12월 7일,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자, 당시 자유선진당 총재였던 이회창은 불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움직임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을 뒤집으려는 시도로 규정하며, 세종시 수정론의 배경에 "세종시는 다 노무현 말뚝이다, 그러기 때문에 노무현 말뚝을 뽑아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가 세종시 추진 대신 4대강 정비 사업에 집중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지적했다.[113]

이회창은 이명박 대통령이 과거 수도 이전 반대 입장에서 상황 변화를 이유로 찬성으로 돌아섰다고 자신을 비판한 데 대해, "헌법재판소가 부처 일부를 이동하는 것은 수도 분할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 대통령은 헌재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수도 분할이란 말을 쓰고 있다"며, 이는 내용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비충청권 민심을 자극하여 충청권을 압박하려 한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방식을 "야바위꾼 동원하듯이 왜 그런 여론몰이를 하느냐"고 비난했다. 더불어 언론에 대해서도 "지금 방송은 물론이고 주요 신문 한 번 펴보라"며, 수정론자들의 인터뷰를 대서특필하는 등 공정성을 잃고 편향된 보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13] 이회창은 세종시 원안 추진 입장을 고수하며 정부의 수정 시도에 반대했다.

2. 3. 10.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논란

2009년 1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처벌 수위가 과하다는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실정법 위반 여부만 따져 처벌하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의 유물이며, 사회적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고려하여 처벌을 정하는 실질적 법치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두 가지 허위 사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처벌하는 것은 실질적 법치주의에 어긋난다며, 미네르바 처벌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114]

이에 대해 1월 13일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이회창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미네르바 사건은 형식적 또는 실질적 법치주의와는 무관한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홍준표는 국민의 기본권에는 내재적 한계가 있으며, 정부 비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짓 정보를 퍼뜨려 불필요하게 환율 안정을 위해 20억달러를 쓰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네르바가 이러한 내재적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114]

2. 4. 2010년대 이후

2010년 6월 재보궐선거에서 자유선진당이 패배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115][116][117]

2011년 1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한국 선박 구출 작전(아덴만 여명 작전)과 관련하여 일부 언론과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정보 공개를 비판하며 신중한 보도를 촉구했다.[118][119][120] 이후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12년 5월 자유선진당을 탈당했으며,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다.[121] 이는 과거 대선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보수 진영에 다시 합류한 행보로 평가받았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혼란에 빠진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잠시 이름이 오르내렸으나,[122] 최종적으로는 인명진이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7년 1월 26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정당 창당에 합류하며 입당했다. 동시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바른정당 소속 유승민 의원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123] 이는 탄핵 사태 이후 보수 진영의 분열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3년여간 집필한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이회창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책임이 박 전 대통령 자신과 옛 새누리당에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대한민국 보수주의 전체의 실패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좌파가 선호해온 정책이라도 그것이 정의에 반하지 않고 보수의 이념과 정체성에 저촉되지 않으며 국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과감히 끌어 안아야 한다"고 말하며 '개혁적 보수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24][125]

2018년 7월,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다시 거론되었다. 안상수 당시 비대위 준비위원장은 여러 추천을 받아 이회창 전 총재를 후보군 중 한 명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이 전 총재 측은 이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사실상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다. 측근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유한국당에서 군불을 때는 모양인데 이 전 총재가 굉장히 언짢아 했다"며 "한국당으로부터 연락도 없었지만, 그런 요청이 오더라도 비대위원장을 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126]

현재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이다.

3.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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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학교명전공/학위 등
광주서석국민학교졸업
청주중학교졸업
경기중학교졸업
1950년 ~ 1953년경기고등학교졸업
1953년 ~ 1957년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 학사
1962년 ~ 1963년국방대학교행정학사 (8기)
1997년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 블라디미르대학법학 명예박사


4. 경력

연도내용
1957년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1960년~1965년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1962년인천지원 판사
1965년서울형사지법 판사
1965년~1970년서울고등법원 판사
1970년~1973년사법연수원 교수 (겸임)
1971년~1975년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년~1981년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81년~1986년대법원 판사
1988년~1993년대법원 대법관
1988년~1989년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93년제15대 감사원장
1993년~1994년제26대 국무총리
1995년 11월가톨릭대학교 발전후원회 회장
1996년 4월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초선)
1997년신한국당 대표
1997년한나라당 제15대 대통령 후보 (낙선)
1998년~2002년한나라당 제1ㆍ2ㆍ3대 총재
1999년~2000년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2000년~2002년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전국구 1번, 재선)
2002년한나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 (낙선)
2003년 2월~2004년 3월미국 후버 연구소 명예교환교수
2007년무소속 제17대 대통령 후보 (낙선)
2008년 2월~2011년 5월자유선진당 대표
2008년~2012년제18대 자유선진당 국회의원 (충청남도 홍성군·예산군, 3선)
2017년바른정당 상임고문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판사, 대법관 등을 역임했다.[15]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장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94년 4월, 총리의 권한 범위를 둘러싸고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사임하며 강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6년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대표 및 총재를 지냈다. 1997년, 2002년, 2007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2017년에는 바른정당 상임고문을 맡았다.[38]

5. 상훈

6. 평가와 비판

이회창에 대한 평가는 법조인 시절 보여준 강직함과 원칙주의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정치 활동 과정에서 드러난 강경 보수적 입장 및 여러 논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6. 1. 긍정적 평가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 전두환 정부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린 점이 높이 평가된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은 그를 해임하려 했으나, 비리나 뇌물수수와 거리가 멀어 쉽게 해임할 수 없었다. 40년간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뇌물수수나 성추문 등에 연루되지 않은 청렴성과 강직함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김영삼 정부에서 발탁된 이후에도 공정한 직무 수행을 위해 노력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인 최형우 등에게도 거침없이 책임을 물은 점 등이 높이 평가된다.

6. 2. 비판 및 부정적 평가

대한민국 정치의 맥락에서 강경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다.[14] 그의 정치적 입장은 반공주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 지지, 그리고 북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포함한다.[14] 이회창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했으며,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때까지 대북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불법 파업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정부 기관의 여성 임용 확대를 촉구하기도 했다.[5]

6. 2. 1. 기타 비판

"창자를 뽑아버리겠다"는 발언을 비롯하여 기자들에게 "똑바로 안쓰면 다 죽을줄 알아", "고대를 나와서 어떻게 기자를 하느냐" 등의 막말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127][128] 불교 조계종의 원로 승려 정대는 이러한 이회창의 모습을 보고 "그가 집권하면 희대의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2008년 2월 자유선진당 창당 당시 합류했던 국민중심당심대평 대표와의 갈등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심대평을 국무총리로 영입하려 한다는 설이 돌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고, 이회창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2009년 8월 30일, 심대평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설득이 통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적 당 운영으로 당 지지율을 2%대에 머무르게 하는 이회창 총재와 당을 같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며 탈당을 선언하면서 이회창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갈등이 공식화되었다.[129]

6. 3. 논란과 의혹

(내용 없음)

6. 3. 1.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과의 전두환 사면에 대한 거래 논란

신한국당 경선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64] 국민회의가 폭로한 병역 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하자[65] 보수 세력의 지지를 결집하고 경쟁자인 김대중 후보의 전두환노태우 사면론을 무력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 이회창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추석 전에 사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66][67][68][134]

김영삼 대통령은 처음에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회창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69] 1997년 9월 12일에는 입장을 바꿔 대선 전에 사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71] 당시 정치권에서 경쟁적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분위기에 대해 사회 각계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70]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수감 중이던 전두환은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하며 크게 기뻐한 것으로 전해졌다.[72][73] 이에 이회창 역시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 화답했다.[74][135] 한겨레는 이회창 대표가 "추석 전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말했다고 보도했다.[136]

이회창은 1997년 9월 24일 CBS 및 경실련과의 간담회에서도 "전직 대통령이 구금 상태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대통합 차원에서 석방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대한 적극적인 찬성 입장을 다시 한번 밝혔다.[76] 이는 경쟁자인 김대중의 사면론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으며,[100][101] 전두환노태우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날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를 통해 사면 복권되었다.[137]

6. 3. 2. 1998년 '이런놈의 나라' 발언 논란

1998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 빼가고 정치 사정해서 국회의원 잡아갈 생각이나 하고, '''이런 놈의 나라'''가 이런 놈의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라고 발언하여 김대중 정권과 국가를 강하게 비난했다.[138][139] 이에 대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정동영 대변인은 "이회창 총재가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을 이런놈의 나라라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정치지도자로써 해서는 안될 망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140][141][142][143]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며 다시 한번 "'''이런놈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논란이 되었다.[144][145]

6. 3. 3. 불법 대선자금 모집 의혹

일명 '차떼기 의혹'으로도 불린다. 1997년 대선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이 세무 권력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불법적인 정치헌금을 모금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2002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모았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측근이었던 서정우 변호사는 엘지그룹에 대선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엘지그룹은 경부고속도로만남의 광장 휴게소에 1500억이 넘는 현금을 실은 2ton 트럭을 세워두었고, 서정우 변호사는 이 트럭을 직접 운전하여 한나라당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105] 이 사건은 현금이 실린 트럭을 통째로 넘겨받았다는 점에서 '차떼기'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외에도 현대자동차는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1090억을 전달했고, SK 그룹은 1000억, 한화그룹은 400억, 그리고 삼성그룹은 채권 3250억과 현금 400억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 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의 비밀 선거자금 모집 실체가 드러났으며, 한나라당이 총 8479억의 불법 선거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정치인 30여 명과 기업인 20여 명이 기소되었으며, '차떼기'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자, 한나라당 측에서는 2002년 '차떼기'를 하고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1540억의 행방에 대한 처리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146]

6. 3. 4. 친일파 옹호 발언 관련

2002년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은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 근대사의 족적을 남긴 분들이 포함됐다. 이런 분들을 이제 와서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발언했다.[147] 그러나 이 발언이 친일파를 직접적으로 옹호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친 이홍규의 친일 의혹 제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6. 3. 5. 병역 의혹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두 아들 이정연과 이수연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장남 이정연은 최초 병무청 징병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정밀신체검사에서 키 178cm, 몸무게 45kg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이 증폭되었다.[148] 이 병역 관련 논란은 2002년 대선에서도 다시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업은 이정연의 병역 면제 과정에 비리가 있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한 대책 회의가 1997년에 열렸고 전태준 전 군의관이 신체검사 관련 서류 파기를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설훈 등도 관련 의혹을 제기하며 이회창 후보를 압박했다. 한나라당은 김대업의 주장이 허위 사실이라며 김대업과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일요시사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김대업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고,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의심된다며 오마이뉴스 등에 총 1억의 배상 판결을 내렸고, 김대업에게는 별도로 5000만 배상 판결을 내렸다.[148][149] 김대업은 이와 관련된 형사 재판에서도 명예훼손, 무고, 공무원 자격 사칭 등의 혐의가 인정되어 2004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 10개월의 실형이 확정되었다.[148]

이 사건은 소위 '''김대업 병풍 사건'''으로 불리며,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새천년민주당의 추미애 의원은 김대업을 "용감한 시민"으로, 박양수 의원은 "의인"으로 칭찬했으며, KBS 등 주요 언론은 김대업의 주장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24][25][26] 이로 인해 당시 지지율 1위였던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하는 등 선거 판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27] 대선 2개월 전 검찰은 중간 수사 결과를 통해 김대업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으나, 김대업은 잠적했고 검찰은 "(범죄) 신고자인 김대업을 사법 처리할 수 없다"며 수사를 종결했다.[28]

한나라당은 병풍 사건을 새천년민주당 측이 기획한 조직적인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148] 김대업 본인도 2008년, 노무현 정부의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자 "노무현 대통령 측근에게 배신당했다"며 병풍 사건이 민주당의 기획된 네거티브 캠페인이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29] 그러나 정치 공작 여부와 별개로, 병역 문제에 민감한 한국 사회의 정서상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은 유권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이회창이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148][149] 일각에서는 의혹의 당사자인 이정연과 이회창의 부인 한인옥 등에 대해 검찰의 직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병역 비리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48][149]

6. 3. 6. 총풍과 세풍 의혹

19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 상승을 목적으로 북한 측 인사와 접촉하여 판문점에서의 총격 시위를 요청했다는 이른바 '총풍(銃風) 사건' 의혹이 제기되었다.[88] 이 사건과 관련하여 2001년 4월, 오정은(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으며, 한성기(진로그룹 회장 고문)와 장석중(대북 사업가) 역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 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친동생인 이회성이 베이징에 있는 한성기와 휴대전화로 통화한 사실과 한성기에게 여비 명목으로 500여만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을 일부 관련자들의 개인적인 일탈 행위로 축소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이른바 '세풍(稅風) 사건'은 이회창 후보의 친동생 이회성과 최측근인 서정우 변호사 등이 주축이 된 비선 조직 '부국팀'이 1997년 대선 당시 부족한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세청을 동원하여 불법적으로 자금을 모금한 사건이다.[88] 병역 문제 등으로 대선 자금 모금에 어려움을 겪자, 부국팀은 국세청을 이용한 모금 계획을 이회창 후보에게 보고한 후 실행에 옮겼다. 1997년 10월 하순부터 대선 직전까지, 부국팀은 차수명 당시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고액 기탁금 미납 기업 명단을 받아 납부를 독촉하는 과정에서 국세청과 조직적으로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모금을 진행하던 임채주 당시 국세청장에게 격려 전화를 한 사실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은 모금된 자금을 차명계좌로 관리하며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도 밝혀졌다. 2003년 4월 8일, 검찰은 이석희를 23개 기업으로부터 총 166.29999999999998억을 불법 모금한 혐의로 기소했다. 미국으로 도피했던 이석희는 2002년 2월 16일 미국 FBI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이회성은 1998년에 구속되었다.

6. 3. 7. 위장전입 의혹

1999년 4월, 당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의 친척 소유인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주소를 옮겨 위장전입을 하였으며, 해당 주소지에서 투표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명백한 주민등록법 위반 및 당시 공직선거법 위반 행위였으나, 이에 대해 처벌받지는 않았다.

또한 1999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에는 송파구 신천동 현대타워아파트로 전입 신고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단 하루도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99년 11월에는 아시아선수촌에 있는 딸의 아파트에서 기자들을 초청하여 마치 그곳에 사는 것처럼 보이려 하였으나, 실제 거주지는 1998년 4월부터 타인 소유의 종로구 가회동 소재 380m2 빌라였다. 이 빌라 거주 사실은 2002년 소위 '빌라게이트' 의혹으로 불거졌으며, 당시 이회창은 해당 빌라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하였다.

6. 3. 8. 20만 달러 수수설 의혹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설훈 의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기한 의혹이다.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이 측근 윤여준을 통해 최규선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고 그를 정책특보로 임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설훈 의원은 이와 관련한 녹취 테이프와 증인이 있다고 주장했다.[150]

이 의혹은 병풍 사건 등 다른 논란들과 함께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가 패배하는 데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선거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설훈 의원은 녹음테이프 등 관련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공직선거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 등을 박탈당했다. 또한 관련된 민사소송에서도 1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한나라당 측은 이 사건을 조직적인 정치공작의 결과라고 주장했다.[150][151]

6. 3. 9. 땅, 빌라 투기 의혹

2002년 3월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당시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일가가 가회동의 115평 초호화 빌라 3개 층에 무료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으며, 이에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이회창은 같은 해 3월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빌라 게이트'로 불리며,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가 이회창 총재에 반대하여 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지지율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6. 3. 10. 지역감정 유발 발언과 1997년 대선 당시 후보자 비방

19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지역감정 문제에 대한 공방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였다. 그는 "영남출신 대의원들이 비영남인 저를 뽑아준 이 정당이 지역주의입니까? 90 몇 %를 차지하고 전혀 다른 지역 출신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정당이 지역주의 정당입니까?"라고 말했는데, 이는 특정 지역의 높은 지지율을 문제 삼으며 지역감정을 자극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52]

또한 선거 막바지에 경쟁 후보들을 강하게 비난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1997년 12월 16일 서울 유세에서는 "여러분이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켜서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생각하신다면은 그러면 이인제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지십시요."라고 말하며 유권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153] 다음 날인 12월 17일 부산 유세에서는 이인제 후보를 겨냥하여 "이분(이인제)에게 던지는 표는 이것은 바로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하는 죽은 표가 될 뿐 아니라 바로 우리가 걱정하는 김대중 총재를 위한 표가 될 것입니다"라고 발언하였다. 이는 이인제 후보 지지표를 사표로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반호남 정서를 자극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154]

6. 4. 민중 천시 논란

사적으로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인 '천민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공적인 자리에서 최초로 발언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155] 이로 인해 민중을 천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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