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두킨트 (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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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두킨트는 8세기 작센 족의 지도자로, 프랑크 왕국과의 작센 전쟁에서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베스트팔렌 출신으로 추정되며, 고대 작센어로 '나무의 자녀' 또는 '늑대'를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다. 카를 대제에 저항했으나, 785년 항복 후 개종하여 프랑크족에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전설 속 인물로 숭배받았으며, 9세기부터 신화적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의 후손으로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있으며, 오토 왕조의 신성 로마 황제들도 비두킨트의 자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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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두킨트 (작센) | |
---|---|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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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비두킨트 |
작위 | 작센 공작 |
가문 | 오도 가문, 아마도 이메딩가 가문의 선조 |
통치 기간 | ?–785년 |
선임 공작 | 테오데리히 |
후임 공작 | 에크베르트 |
사망 년도 | 807년 또는 808년 |
사망 장소 | 아마도 헤르포르트 근처의 엥거 |
매장 장소 | 엥거의 슈티프트 교회 |
상세 정보 | |
다른 이름 | 비티쿤트 |
종교 | 기독교 (개종 후) |
2. 생애
비두킨트의 출신 가계나 삶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베스트팔렌 출신이며, 작센 족의 유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비두킨트는 고대 작센어로 '나무의 자녀(child of the wood)' 또는 '늑대(wolf)'를 의미한다. 비두킨트가 그의 본명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별명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16] 또한 그와 함께 카를 대제에 저항한 작센 족 지도자 아비(Abbi) 또는 아비오(Abbio)라는 인물과도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정확한 가족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훗날 작센족을 통치하는 오토 왕가의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비두킨트의 후손이라 한다. 비두킨트 폰 코르바이의 마틸다 연대기에는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그의 후손이라 기록되었다.[17] 아내 게브하(Gevha) 혹은 게우아(Gheua)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이어서 브라운슈바이크의 민담과 동요를 통해 구전된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의 원수인 카롤루스 대제 측과 프랑크 족 역사가들의 기록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명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서에서는 그를 줄곧 반란군, 반역자로 묘사하고 있다.
772년부터 785년까지 카를 대제는 작센족 원정을 단행한다. 비두킨트는 덴마크족 지도자 지그프리드 혹은 시구르드 흐링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리기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받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했다.
2. 1. 작센 전쟁
772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가 작센 공국을 침공하면서 작센 전쟁이 시작되었다.[16] 프랑크인 열왕편년사에 따르면, 카를 대제는 작센족을 정벌하고 작센 땅에 있는 이르민술 파괴를 명했다.[16]비두킨트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777년으로, 파데르보른에서 열린 카를 대제의 궁정에 나타나지 않은 유일한 작센 귀족이었다.[3] 그는 덴마크로 가서 덴마크 왕 지그프리드(혹은 시구르드 흐링그)에게 몸을 의탁하여 프랑크에 대항하는 회합을 열었다.[3]
778년, 카롤루스 1세(카롤루스 대제)가 스페인 원정에 나서자, 비두킨트는 작센으로 돌아와 부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의 라인란트를 공격, 약탈했다.[16] 그러나 카를 대제가 귀환하자 상황은 반전되어 비두킨트의 부족은 공격받았고, 많은 작센인이 처형되었다. 특히 베르덩 대학살에서 베저 강의 지류 알러 강 유역에서 포로 4,500명이 살해되었다.[16]
782년 비두킨트는 덴마크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작센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782년부터 784년까지 비두킨트의 작센 군은 프랑크 군대와 매년 교전했다.[16] 비두킨트는 프리기아인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784년 혹은 785년 카를 대제의 겨울철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프리기아인 부족공작과 그의 동맹들은 다시 고국으로 퇴각했다.[16]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비두킨트는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받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하기로 했다.[16] 그와 작센족 귀족들은 아팅기에서 카를 대제를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4] 이로써 비두킨트는 카를 대제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프랑크 군주들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았다.[16] 그럼에도 작센 족의 분리독립, 저항은 804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2. 2. 개종 이후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비두킨트는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받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하기로 정했다.[18] 그와 작센족 귀족들은 아마도 아팅기에서 카를 대제를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4] 이로써 비두킨트는 카를 대제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프랑크족 군주들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작센족의 분리독립, 저항은 804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비두킨트의 세례 이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 게르트 아르토프(Gerd Althoff)는 비두킨트가 만년에 수도원에 투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라이헤나우 수도원에서 만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나[5],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6][20][21][22] 12세기의 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카를 대제의 왕비 힐데가르트 폰 히스파니아의 남동생 혹은 오라비이자 바이에른의 태수로 파견된 바르의 게롤트에게 살해됐다고도 한다.
19세기 이후 독일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프랑스인 침략자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
3. 전설
비두킨트의 삶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설이 생겨났으며, 그는 결국 성스러운 인물(축복받은 비두킨트)로 여겨졌고 많은 교회를 세운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이후 807년 또는 80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축일은 1월 7일에 기념된다.[7]
전설에 따르면, 비두킨트는 그의 개종으로 이어진 환상을 경험했다. 그는 거지로 변장하여 부활절 동안 카롤루스 대제의 군대 진영을 염탐했다. 그는 사제가 성찬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사제는 축성하는 동안 아름다운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사람들이 성찬례를 받았고, 사제는 같은 아이를 각 사람에게 주었다. 비두킨트는 이 광경에 멍해져서 미사 후에 밖에서 구걸을 했다. 황제의 시종 중 한 명이 그의 기이한 손가락 모양 때문에 변장한 비두킨트를 알아보고 비두킨트는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을 받고 카롤루스 대제의 진영을 염탐한 목적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본 신성한 환상을 고백했다. 황제는 신이 비두킨트에게 미사 성체 안에 있는 신성한 아이, 예수를 목격할 은총을 주셨다고 결론 내렸다. 비두킨트는 그 후 이교 우상 숭배를 포기했다.[7]
비두킨트의 개종은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교회의 회화나 조각 등에 그의 모습이 활발하게 묘사되었다. 비두킨트는 808년에 헤르포르트 부근의 엥거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엥거에서는 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묘비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땅에 매장되었다는 전승은 의심스럽다.
또한 전승에 따르면 비두킨트는 세례 전에는 검은 말을 탔고, 그 후에는 흰 말을 탔다고 한다. 헤르포르트 군의 문장은 비두킨트의 검은 말에서 유래되었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니더작센 주의 주장은 비두킨트의 흰 말에서 유래되었다.
4. 후대의 평가
9세기부터 비두킨트는 신화 속 영웅으로 숭배받았다. 1100년경 엥거에 그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최근 발굴 결과 무덤의 내용물은 초기 중세 시대의 것이었지만, 젊은 여성의 유해로 밝혀졌다. 1971년 고고학자들은 제단 앞에서 세 개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2002년 DNA 분석 결과 9세기 초에 사망한 세 남자(두 명은 약 60세 전사, 세 번째는 젊은 남자로 이복형제 또는 외사촌과 조카 관계)의 유해로 밝혀졌다. 제단 앞에 묻힌 남자가 비두킨트로 추정된다.[8]
10세기 오토 왕조가 동프랑크 왕국(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 프랑크 왕을 대체했을 때, 이들은 비두킨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독일의 하인리히 1세의 아내 마틸데 폰 링겔하임은 비두킨트의 증손녀였다. 여러 작센 공작이 속한 빌룽 가문은 마틸데의 자매를 조상으로 하여 비두킨트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이탈리아 가문 델 카레토(드 샤레트 가문) 역시 비두킨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이후 독일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비두킨트를 프랑스 침략자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보았다. 20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비두킨트를 독일 전통 신념과 신을 옹호하고 중동 종교인 기독교에 저항한 영웅으로 여겼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라인란트 점령과 같은 프랑스 지배의 굴욕과 샤를마뉴를 연결, 샤를마뉴를 "프랑스" 침략자로 묘사하며 비두킨트를 칭송했다.[9]
나치당 집권 후, 비두킨트를 소재로 한 연극과 작품이 너무 많이 제작되어 진부하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비두킨트를 독일 자유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샤를마뉴와 연결시켰다. 1934년 프리드리히 포르스터의 ''승리자(Der Sieger)''와 에드문트 키스의 ''비테킨트(Wittekind)''가 제작되었다. 전자는 비두킨드의 개종을 기념했지만, 후자는 반기독교적 메시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페르덴 학살 이후 작센 지도자들의 대사("그것이 기독교인들이 한 짓이다. 그들은 사랑을 가장하지만, 살인을 가져온다!")는 관객들의 항의를 받았다.[1] 이 연극은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 인종 혼합을 강요하여 독일의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그들을 유순한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묘사한다. 수천 명의 독일 처녀들이 포획되어 비두킨트가 개종하지 않으면 "유대인과 무어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될 것이며, 그는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개종한다. 그는 독일 민족의 생존이 자신의 주요 관심사이며, 독일 민족의 진정한 정신이 다시 일어날 때 미래 세대가 이것을 칭찬할 것이라는 연설을 한다.[1]
엔거 지역의 비두킨트 김나지움 엔거를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1. 중세
비두킨트의 출신 가계나 삶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베스트팔렌 출신이며, 작센 족의 유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 비두킨트는 고대 작센어로 나무의 자녀(child of the wood) 또는 늑대(wolf)를 의미한다. 비두킨트가 그의 본명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별명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16] 또한 그와 함께 카를 대제에 저항한 작센 족 지도자 아비(Abbi) 또는 아비오(Abbio)라는 인물과도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그의 정확한 가족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후일 작센족을 통치하는 오토 왕가의 인물 중 하인리히 1세의 부인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비두킨트의 후손이라 한다. 비두킨트 폰 코르바이의 마틸다 연대기에는 마틸다 폰 링겔하임이 그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17] 일설에는 하인리히 1세 역시 그의 증손자뻘 혹은 4대손 정도 되는 친척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하인리히 1세나 오토 광휘공, 리우돌핑가의 시조 리우돌프와 비두킨트의 관계는 정확하지 않다. 그의 아내 게브하(Gevha) 혹은 게우아(Gheua)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이어서 브라운슈바이크의 민담과 동요를 통해 구전된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의 원수인 카롤루스 대제 측과 프랑크 족 역사가들의 기록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에 명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서에서는 그를 줄곧 반란군, 반역자로 묘사하고 있다.
772년부터 785년 카를 대제는 작센족 원정을 단행한다. 프랑크인 열왕편년사 아날 연대기(Royal Frankish Annals)에 의하면 772년 카를 대제는 작센족을 정벌하고, 작센 땅에 있는 이르민술(Irminsul, 작센의 부족 토속신앙)의 파괴를 명하였다. 773년에 그는 작센족을 이끌고 이르민술 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 대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틈을 타, 프랑크 왕국의 데벤테르를 습격하였다. 초기에 작센족은 카를 대제의 요구대로, 부족 토속신앙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가 군사를 이끌고 회군한 뒤 작센족은 다시 자신들의 전래 토속신앙을 유지했고, 분개한 카를 대제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작센족 원정을 단행하고, 작센 전쟁 기간 중 베스트팔렌 일대는 황폐화되었다. 카를 대제는 변경백령을 신설하고 법을 제정, 작센 부족 정벌을 전담하게 했다. 비두킨트는 작센 출신 장수 아비 또는 아비오와 함께 카를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족 군대와 맞서 저항하였다.
비두킨트는 아날 연대기의 777년 기사에 처음 언급되는데, 그는 작센족 귀족이 카를 대제에 의해 파데보른(Paderborn)의 종교법정에 연행될 때 끌려가지 않은 유일한 작센 부족 귀족으로 나타난다. 그는 덴마크족 지도자 지그프리드 혹은 시구르드 흐링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듬해 베스트팔렌의 작센족을 이끌고 프랑크 왕국의 라인란트를 공격, 이베리아반도를 원정하러 간 카를 대제는 비두킨트를 상대할 수 없었다. 비두킨트는 다시 덴마크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했고, 782년 비두킨트는 덴마크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작센족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카를 대제는 곧바로 원정을 단행했고, 782년부터 784년 비두킨트의 작센 군은 프랑크족 군대와 교전했다. 이때 베르덩 대학살에서 카를 대제는 4,500여 명의 작센족을 처형하였다.
비두킨트는 다시 프리기아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카를 대제의 784년 혹은 785년의 겨울철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프리기아인 부족공작과 그의 동맹들은 다시 고국으로 퇴각했다. 785년 바르덴가우에서 최종 패배한 뒤, 비두킨트는 자신과 작센족에 대한 더 이상의 신체적 상해가 없음을 보장하는 대가로, 프랑크 왕국에 항복하기로 정했다. 그와 작센족 귀족들은 아마도 아팅기에(Attigny)에서 카를 대제를 그의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18] 이로써 비두킨트는 카를 대제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프랑크족 군주들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작센 족의 분리독립, 저항은 804년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785년경까지 그는 작센족의 지도자였고, 785년 이후로는 에크베르트(Egbert), 아보(Abo) 등이 작센족의 부족 지도자로 활동했다.
비두킨트의 세례 이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 게르트 아르토프(Gerd Althoff)는 비두킨트가 만년에 수도원에서 투옥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는 라이네하우 수도원(Reichenau Abbey)에서 만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나[19],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20][21][22] 12세기의 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카를 대제의 왕비 힐데가르트 폰 히스파니아의 남동생 혹은 오라비이자 바이에른의 태수로 파견된 바아아르의 게르홀트(Gerold of Baar)에게 살해됐다고도 한다.
9세기부터 비두킨트는 신화 속 영웅으로 숭배받았다. 1100년경, 그의 무덤이 엥거에 만들어졌다. 최근 발굴을 통해 무덤의 내용물이 실제로 초기 중세 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지만, 젊은 여성의 유해로 밝혀졌다. 1971년, 고고학자들은 제단 앞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 세 개의 무덤을 발견했다. 2002년 DNA 분석 결과, 9세기 초에 사망한 세 남자의 유해, 그 중 두 명은 약 60세의 전사였고, 세 번째는 젊은 남자로, 이들은 이복형제 또는 외사촌과 조카로 밝혀졌다. 제단 앞에 묻힌 남자는 비두킨트로 추정된다.[8] 10세기 작센 왕(오토 왕조)이 동프랑크 왕국(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 프랑크 왕을 대체했을 때, 이 왕들은 비두킨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마틸데 폰 링겔하임은 왕 하인리히 1세의 아내였으며, 비두킨트의 증손녀였다. 여러 작센 공작이 속한 빌룽 가문은 마틸데의 자매를 조상으로 두었고, 따라서 비두킨트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이탈리아 가문 델 카레토(Del Carretto) (및 그 프랑스 분파인 드 샤레트(de Charette) 가문) 역시 영웅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4. 2. 독일 민족주의
19세기 이후 독일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비두킨트를 프랑스인 침략자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보았다. 20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비두킨트를 독일의 전통 신념과 신을 옹호하고 중동 종교인 기독교에 저항한 영웅으로 여겼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라인란트 점령과 같은 프랑스 지배의 굴욕과 샤를마뉴를 연결하여, 샤를마뉴를 "프랑스" 침략자로 묘사하며 비두킨트를 칭송했다.[9]나치당 집권 후, 비두킨트를 소재로 한 연극과 기타 작품이 너무 많이 제작되어 진부하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비두킨트를 독일 자유의 영웅으로 칭송했으며, 그는 독일 제국(샤를마뉴)의 창시자와 합류했다. 1934년 작센 지도자에 대한 두 편의 중요한 연극, 프리드리히 포르스터의 ''승리자(Der Sieger)''와 에드문트 키스의 ''비테킨트(Wittekind)''가 제작되었다. 첫 번째 연극은 비두킨드의 개종을 기념했지만, 두 번째 연극은 명시적인 반기독교적 메시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페르덴 학살 이후 작센 지도자들이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한 짓이다. 그들은 사랑을 가장하지만, 살인을 가져온다!"라고 말하는 대사는 관객들의 항의를 받았다.[1] 이 연극은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이 인종 혼합을 강요하여 독일의 자유를 파괴하고, 결국 그들을 유순한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묘사한다. 수천 명의 독일 처녀들이 포획되어 비두킨트가 개종하지 않으면 "유대인과 무어인"과 강제로 결혼하게 될 것이며, 그는 이 끔찍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개종한다. 그는 독일 민족의 생존이 자신의 주요 관심사이며, 독일 민족의 진정한 정신이 다시 일어날 때 미래 세대가 이것을 칭찬할 것이라는 연설을 한다.[1]
4. 3. 현대
엔거 지역에 있는 비두킨트 김나지움 엔거를 포함한 많은 건물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비두킨트의 후손
이메딩 가문의 린겔하임의 마틸데는 리우돌핑 가문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와 결혼했다.[17] 프랑크 왕국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리우돌핑 가문의 하인리히 1세는 후에 왕이 되어 작센 왕조를 열었고, 그의 아들 오토 1세는 962년 초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따라서 오토 1세 이후의 작센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비두킨트의 자손으로 여겨진다. 『작센인의 업적』을 저술한 코르베이의 비두킨트 또한 비두킨트의 후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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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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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Widukind I,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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