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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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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노스다코타 대학교와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그는 1900년대 초반부터 북극 탐험을 시작하여 여러 섬들을 발견하고 대륙붕 가장자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캐나다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휘했으며, 랭겔 섬 탐험을 계획했으나 실패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육류 중심의 식단을 옹호하며 관련 연구를 진행했고, 말년에는 미국 육군 한랭지역 연구 및 공학 연구소 설립에 기여했다. 스테파운손은 탐험가 클럽 회장을 역임하고, 미국 극지협회와 과학사 학회에서 활동했으며,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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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장을 입은 남자의 흑백 사진
스테판손, 1915년경
출생일1879년 11월 3일
출생지매니토바주 아네스, 캐나다
사망일1962년 8월 26일
사망지뉴햄프셔주 하노버, 미국
국적캐나다, 미국
직업하버드 대학교 교수, 북극 탐험가
알려진 업적북극 탐험
모교하버드 대학교
아이오와 대학교
노스다코타 대학교
학술 활동
소속하버드 대학교
재직 기간교수
주요 연구 분야북극 탐험, 인류학
학회 활동과학사학회 회장 (1945-1946)
주요 활동
탐험 지역북극
탐험 시기1906년 ~ 1918년
탐험 목적북극 지역 탐사 및 연구
기타 정보
영향북극 생존 기술 전파
저서『The Fat of the Land』

2. 초기 생애와 교육

빌햐울뮈르 스테판손은 1879년 캐나다 매니토바주 아네스(Arnes)에서 아이슬란드계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윌리엄 스테판손(William Stephenson영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1]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 노스다코타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1] 그는 노스다코타 대학교아이오와 대학교(1903년 문학사)를 거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2년간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2] 대학 재학 중이던 1899년에 자신의 이름을 빌햐울뮈르 스테판손(Vilhjalmur Stefanssonis)으로 개명했다.[1][2]

2. 1. 출생과 이민

1879년 캐나다 매니토바주 아네스(Arnes)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윌리엄 스테판손(William Stephenson)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77년 아이슬란드에서 매니토바로 이주했다. 그러나 큰 홍수로 두 아이를 잃은 후, 1880년 가족은 미국 노스다코타주로 이주하여 펨비나 카운티(Pembina County) 싱그발라 타운십(Thingvalla Township)의 마운틴(Mountain) 마을 근처에 농장을 개척했다.

그는 노스다코타 대학교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1903년 문학사 학위 취득), 대학 시절인 1899년에 자신의 이름을 '윌리엄'에서 '빌햐울뮈르'(Vilhjalmur)로 바꾸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2년간 강사로 활동했다.

2. 2. 교육 과정

노스다코타 대학교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03년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899년에 자신의 원래 이름 '윌리엄'(William영어)을 '빌햐울뮈르'(Vilhjálmuris)로 개명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2년 동안 강사로 활동했다.

3. 초기 탐험 활동

스테파운손은 20세기 초반, 아이슬란드에서의 고고학 연구(1904-1905)를 시작으로 탐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영국-미국 극지 탐험대(1906-1907)에 참여하여 매켄지강 삼각주의 이누이트와 생활했으며,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루돌프 마틴 앤더슨과 함께 북아메리카 북극 해안 지역에 대한 민족학 조사(1908-1912)를 수행하며 초기 탐험 경력을 쌓았다.

3. 1. 아이슬란드 고고학 연구 (1904-1905)

1904년과 1905년, 스테판손은 아이슬란드에서 고고학 연구를 수행했다.

3. 2. 영국-미국 극지 탐험대 (1906-1907)

1904년과 1905년, 스테파운손은 아이슬란드에서 고고학 연구를 수행했다. 이후 에이나르 미켈센과 어니스트 드 코번 레핑웰이 이끄는 영국-미국 극지 탐험대에 고용되어 참여하였다. 1906년부터 1907년 겨울 동안 매켄지강 삼각주에 사는 이누이트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탐험을 마친 뒤에는 포커파인 강과 유콘 강을 거쳐 혼자 육로로 귀환했다.

왼쪽부터, 로버트 피어리,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 아돌퍼스 그릴리

3. 3. 스테판손-앤더슨 탐험대 (1908-1912)

뉴욕시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후원 아래, 스테파운손은 동물학자 루돌프 마틴 앤더슨 박사와 함께 1908년부터 1912년까지 북아메리카 대륙 연안, 중앙 북극 해안선에서 민족학적 조사를 실시했다.

1908년, 스테파운손은 알래스카에서의 남은 탐험 기간 동안 그의 주요 안내인이 될 이누이트(Inuk) 나투쿠시아크(Natkusiak)를 고용했다.[1][28] 나투쿠시아크는 스테파운손이 만났을 당시, 스테파운손의 친구이자 미국 자연사 박물관으로부터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도 했던 매사추세츠 출신의 포경선 선장 조지 B. 레비트(George B. Leavitt)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2][29]

1910년 스테파운손이 캐나다 빅토리아 섬 남서부에 거주하는 이누이트를 방문하기 직전, 덴마크 출신 포경업자 크리스티안 클렌겐베르그(Christian Klengenberg)가 "금발 에스키모(Blonde Eskimos)"라는 용어를 스테파운손에게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테판손 자신은 이미 알려진 집단이 있었음에도 "코퍼 이누이트(Copper Inuit)"라는 용어를 선호했다.[3][30] 1912년, 군인이자 탐험가였던 아돌퍼스 그릴리(Adolphus Greely)는 이전 문헌에 기록된 금발 북극 원주민 목격 사례들을 처음으로 정리하여 "스테판손의 금발 에스키모의 기원(The Origin of Stefansson's Blonde Eskimo)"이라는 제목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발표했다. 이후 신문 기사를 통해 "금발 에스키모"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었는데, 이는 스테파운손이 선호했던 "코퍼 이누이트"보다 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스테파운손은 나중에 자신의 저술에서 그릴리의 연구를 언급하며, "금발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17세기부터 금발 이누이트 목격 사례 및 조우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밝혔다.[4][31]

4. 캐나다 북극 탐험대 (1913-1918)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캐나다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캐나다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이 탐험은 패리 제도 서쪽 지역 탐사를 목표로 했으며, ''카를룩(Karluk)'', ''메리 삭스(Mary Sachs)'', ''알래스카(Alaska)'' 세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탐험 과정에서 주요 사건으로, 1913년 모선인 ''카를룩''호가 얼음에 갇히자 스테파운손이 배를 떠났고, 이는 이후 논란을 낳았다.[6] 남겨진 ''카를룩''호는 얼음에 떠밀려 표류하다가 1914년 1월 침몰했다. 뉴펀들랜드 출신 선장 로버트 바틀렛의 지휘 아래 생존자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사투를 벌였고, 바틀렛과 이누이트 사냥꾼 카타크토빅(Kataktovik)이 시베리아로 건너가 구조 요청에 성공하면서 일부 대원들이 1914년 9월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6][5][32]

한편, 스테파운손은 ''카를룩''호를 떠난 후 1914년 4월부터 썰매를 이용한 북극해 탐험을 재개했으며, 1918년까지 탐험 활동을 이어갔다.

4. 1. 탐험대 조직 및 지휘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캐나다 정부를 위해 1913-1916년 캐나다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패리 제도 서쪽 지역을 탐험했다. 이 탐험에는 ''카를룩'', ''메리 삭스(Mary Sachs)'', ''알래스카(Alaska)'' 세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


1913년 8월에서 9월 사이, 모선인 카를룩호가 얼음에 갇히게 되자 스테파운손은 배를 떠났다. 스테파운손은 자신을 포함한 5명의 탐험대원이 선원들을 위한 신선한 고기를 구하기 위해 사냥을 떠났다고 설명했다.[6] 하지만 윌리엄 레어드 맥킨리(William Laird McKinley)를 비롯해 배에 남았던 다른 대원들은 스테파운손이 얼음의 움직임으로 배가 표류할 것을 예상하고 의도적으로 배를 버렸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카를룩호는 얼음에 떠밀려 서쪽으로 표류했고, 결국 1914년 1월 11일에 침몰했다.

배에는 뉴펀들랜드 출신의 선장 로버트 바틀렛과 24명의 탐험대원이 타고 있었다. 침몰 후, 4명의 생존자는 헤럴드 섬으로 이동했으나 구조되기 전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얼니스트 섀클턴 경이 이끈 님로드 원정대에 참여했던 앨리스터 매케이를 포함한 다른 4명은 랭겔 섬으로 가려 했으나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바틀렛 선장의 지휘 아래 나머지 대원들은 랭겔 섬으로 이동했고[6], 그곳에서 3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바틀렛 선장과 이누이트 사냥꾼 카타크토빅(Kataktovik)은 해빙을 건너 시베리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1914년 9월, 미국 어선인 ''킹 앤 윙지''와 미국 세입 절단기 서비스 소속의 USRC ''베어''에 의해 구조되었다.[5][32]

한편, 스테파운손은 1914년 4월 알래스카주 콜린슨 포인트(Collinson Point)에서 출발하여 썰매를 이용해 북극해(현지에서는 보퍼트 해로 알려짐) 탐험을 재개했다. 그를 지원하던 썰매 한 대는 해안에서 약 120.70km 떨어진 지점에서 돌아갔지만, 스테파운손과 두 명의 대원은 한 대의 썰매로 계속 나아갔다. 이들은 96일 동안 주로 소총으로 북극 동물을 사냥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가을에 ''메리 삭스'' 호에 도착했다. 스테파운손은 1918년까지 탐험을 계속했다.

4. 2. 카를룩호 침몰 사건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캐나다 정부의 의뢰를 받아 1913-1916년 캐나다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제도(당시 패리 제도) 서쪽 지역을 탐험했다. 이 탐험에는 ''카를룩'''', ''메리 삭스(Mary Sachs)'', ''알래스카(Alaska)'' 세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1913년 8월에서 9월 사이, 탐험대의 모선인 ''카를룩''호가 북극해의 얼음에 갇히자 스테파운손은 배를 떠났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5명의 탐험대원이 배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신선한 고기를 구하러 사냥을 나섰다고 설명했다.[6] 그러나 윌리엄 레어드 맥킨리(William Laird McKinley)를 비롯한 배에 남겨진 대원들은 스테파운손이 얼음의 움직임으로 배가 표류할 것을 예측하고 의도적으로 배를 버렸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카를룩''호는 곧 얼음에 갇힌 채 서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뉴펀들랜드 섬 출신의 로버트 바틀렛 선장이 지휘하는 ''카를룩''호와 배에 타고 있던 24명의 탐험대원들은 표류 끝에 1914년 1월 11일, 배가 얼음에 으스러져 침몰하는 비극을 맞았다. 배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 생존자 중 4명은 인근 헤럴드 섬으로 이동했지만, 구조를 기다리던 중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모두 사망했다.
  •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이끈 님로드 원정대(1907-09년 영국 남극 탐험대)에 참여했던 앨리스터 매케이를 포함한 다른 4명은 랭겔 섬을 향해 독자적으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바틀렛 선장의 지휘 아래 나머지 대원들은 랭겔 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곳에서도 3명이 추가로 사망했다.[6]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바틀렛 선장은 이누이트 사냥꾼 카타크토빅(Kataktovik)과 함께 해빙을 건너 시베리아 본토까지 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위험한 여정에 나섰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랭겔 섬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은 1914년 9월, 미국의 스쿠너 ''킹 앤 윙지''호와 미국 세입 절단기 서비스 소속의 USRC ''베어''호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5][32]

한편, ''카를룩''호를 떠났던 스테파운손은 1914년 4월 알래스카주의 콜린슨 포인트(Collinson Point)에서 썰매를 이용한 탐험을 재개했다. 그는 북극해(현지에서는 보퍼트 해로 알려짐)를 탐험했으며, 지원 썰매가 해안에서 약 120.70km 떨어진 지점에서 돌아간 후에도 두 명의 대원과 함께 썰매 한 대로 96일간의 여정을 계속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주로 소총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가을에 ''메리 삭스''호에 도착했다. 스테파운손은 이후 1918년까지 탐험 활동을 이어갔다.

4. 3. 북극해 탐험 재개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캐나다 정부를 위해 1913-1916년 캐나다 북극 탐험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패리 제도 서쪽 지역을 탐험했다. 이 탐험에는 ''카를룩(Karluk)'', ''메리 삭스(Mary Sachs)'', ''알래스카(Alaska)'' 세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1913년 8월에서 9월 사이, 모선인 카를룩호가 얼음에 갇히자 스테파운손은 배를 떠났다. 스테파운손은 자신과 다른 탐험대원 5명이 선원들에게 신선한 고기를 구해 주기 위해 사냥을 떠났다고 주장했다.[6] 하지만 배에 남은 윌리엄 레어드 맥킨리(William Laird McKinley) 등 다른 대원들은 스테파운손이 얼음이 움직여 배가 표류할 것을 예상하고 고의로 배를 떠났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배는 얼음에 갇힌 채 서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뉴펀들랜드 출신의 선장 로버트 바틀렛과 24명의 탐험대원이 타고 있던 카를룩호는 계속 표류하다가 1914년 1월 11일 결국 얼음에 부서져 침몰했다. 생존자 중 4명은 헤럴드 섬으로 피신했으나 구조되기 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얼니스트 섀클턴 경이 이끈 님로드 원정대(1907-09년 영국 남극 탐험대)에 참여했던 앨리스터 매케이를 포함한 다른 4명은 랭겔 섬으로 가려다 목숨을 잃었다. 바틀렛 선장의 지휘 아래 나머지 대원들은 랭겔 섬으로 이동했고,[6] 그곳에서 3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바틀렛 선장과 이누이트 사냥꾼 카타크토빅(Kataktovik)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해빙을 건너 시베리아로 향했다. 랭겔 섬에 남겨진 생존자들은 1914년 9월, 미국 어선 ''킹 앤 윙지''호와 미국 세입 절단기 서비스 소속의 USRC ''베어''호에 의해 구조되었다.[5][32]

한편, 스테파운손은 1914년 4월 알래스카주 콜린슨 포인트(Collinson Point)에서 썰매를 이용해 북극해(현지에서는 보퍼트 해로 알려짐) 탐험을 재개했다. 그를 지원하던 썰매는 해안에서 약 120.70km 떨어진 지점에서 돌아갔지만, 스테파운손과 두 명의 대원은 썰매 한 대로 계속 나아갔다. 이들은 96일 동안 라이플로 북극 동물을 사냥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가을에 ''메리 삭스''호에 무사히 도착했다. 스테판손은 이후 1918년까지 탐험을 계속했다.

5. 랭겔 섬 탐험 실패와 논란

1921년, 스테판손이 주도한 랭겔 섬 탐험은 준비 부족과 여러 문제 속에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6] 그는 캐나다영국 정부를 설득하여 섬의 영유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지원을 거부당했고, 러시아 영토인 섬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면서 국제적 문제만 일으켰다.[6] 결국 경험과 장비가 부족했던 탐험대는 이누이트 여성 아다 블랙잭과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 전원 사망하는 참사를 맞았다.[6] 이 무모한 탐험으로 인해 스테판손은 거센 비판에 직면했고, 이전의 ''카를룩''호 사건과 더불어 그의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다.[6]

5. 1. 탐험 계획과 비극

1921년, 스테파운손은 4명의 젊은이들이 시베리아 북쪽의 러시아 연방령인 랭겔 섬에 정착하도록 하는 탐험을 장려하고 계획했다.[6] 이 섬은 1914년 3월부터 9월까지 '카를룩'호(HMCS Karluk) 생존자 22명 중 11명이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스테판손은 북극 섬 관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탐험 회사를 설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스테판손은 처음에 캐나다 정부를 위해 랭겔 섬을 영토로 선포하려 했으나, 이전 탐험의 위험한 결과를 고려한 캐나다 정부는 지원을 거부했다.[6] 이후 그는 영국을 위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지만, 영국 정부 역시 탐험대가 실제로 섬에 영국 국기를 게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 영토로 인정된 랭겔 섬에 영국 국기를 게양한 행위는 국제적 사건을 일으켰다.[6]

스테판손이 모집한 탐험대는 미국인 프레드릭 마우러, E. 로른 나이트, 밀턴 갤과 캐나다인 앨런 크로포드 4명의 젊은이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극지 탐험 경험이 부족했고 장비도 부적절했다.[6] 결국 이들 4명은 모두 섬에서 또는 얼어붙은 추크치 해를 건너 시베리아에서 도움을 구하려다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탐험대가 알래스카주 노옴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이누이트 여성 아다 블랙잭을 요리사로 고용한 사람과 탐험대의 고양이 빅 뿐이었다. 아다 블랙잭은 스스로 생존 기술을 익혔고, 섬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E. 로른 나이트가 괴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를 돌보았다. 블랙잭은 랭겔 섬에서 총 2년을 보낸 후 1923년에 구조되었다.[6]

이 사건으로 스테판손은 경험과 장비가 부족한 젊은이들을 위험한 탐험에 보낸 것에 대해 대중과 사망자 가족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카를룩'호 사건과 더불어 이 비극적인 탐험은 그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6]

5. 2. 비판과 명성 실추

1921년, 스테판손은 4명의 젊은이들이 시베리아 북쪽의 러시아 연방령인 랭겔 섬에 정착하는 탐험을 장려하고 계획했다.[6] 이 섬은 1914년 3월부터 9월까지 ''카를룩''호(Karluk) 생존자 11명이 머물렀던 곳이다. 스테판손은 북극 섬 관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탐험 회사를 설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6]

스테판손은 처음에는 캐나다 정부를 위해 랭겔 섬을 영토로 선포하려 했으나, 이전 탐험의 위험한 결과를 고려한 캐나다 정부는 지원을 거부했다.[6] 이후 영국을 위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지만, 영국 정부 역시 탐험대가 실제로 섬에 상륙하여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제적으로 러시아 영토로 인정된 랭겔 섬에 영국 국기를 게양한 행위는 국제적 사건을 일으켰다.[6]

스테판손이 모집한 4명의 젊은이, 미국인 프레드릭 마우러(Fred Maurer), E. 로른 나이트(E. Lorne Knight), 밀턴 갤(Milton Galle)과 캐나다인 앨런 크로포드(Allan Crawford)는 극지 탐험 경험과 장비가 매우 부족했다.[6] 결국 이들은 모두 섬에서 사망하거나, 얼어붙은 추크치 해를 건너 시베리아에서 도움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알래스카주 놈(Nome)에서 재봉사로 일하다 탐험대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누피아트 여성 아다 블랙잭(Ada Blackjack)과 탐험대의 고양이 빅(Vic)뿐이었다.[6] 아다 블랙잭은 스스로 생존 기술을 익혔고, 섬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E. 로른 나이트가 괴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를 돌보았다. 그녀는 랭겔 섬에서 총 2년을 보낸 뒤 1923년에야 구조될 수 있었다.[6]

스테판손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젊은 탐험가들을 위험한 랭겔 섬으로 보낸 것에 대해 대중과 사망자 가족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과 이전의 ''카를룩''호 사건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크게 실추되었다.[6]

6. 주요 발견과 업적

스테파운손은 북극 탐험을 통해 여러 중요한 발견과 업적을 남겼다. 그는 브록 섬, 맥켄지 킹 섬, 보든 섬, 메이헨 섬, 루기드 섬 등 여러 섬과 대륙붕 가장자리를 처음으로 기록했으며[7][33], 프랜시스 레오폴드 맥클린톡의 연구를 확장하고 발전시켰다. 1920년에는 멜빌 섬에서 맥클린톡 탐험대가 1853년에 남긴 비축품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북극 탐험의 공로를 인정받아 1921년 왕립 지리학회로부터 창립자 메달(Founder's Medal)을 수여받았고[8][34], 미국철학회[9]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10]의 회원으로도 선출되었다.

6. 1. 지리학적 발견

스테판손은 북극 탐험을 통해 여러 지리적 발견을 이루었다. 그는 브록 섬, 맥켄지 킹 섬, 보든 섬, 메이헨 섬, 루기드 섬 등 여러 섬과 대륙붕 가장자리를 처음으로 기록했다.[7][33] 또한 프랜시스 레오폴드 맥클린톡의 연구를 확장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1914년 4월부터 1915년 6월까지 빙원 위에서 생활했으며, 1915년 8월 23일 허셜 섬을 떠나 탐험을 계속했다.

1920년 1월 30일, The Pioche Record|더 피오체 레코드eng는 스테판손이 멜빌 섬에서 레오폴드 맥클린톡의 1853년 탐험대가 남긴 잃어버린 비축품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북극의 혹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비축품 안의 의류와 식량은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이러한 북극 탐험의 공로를 인정받아 1921년 왕립 지리학회로부터 창립자 메달(Founder's Medal)을 수여받았다.[8][34] 그는 또한 미국철학회[9]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10]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6. 2. 맥클린톡 탐험대 유실물 발견

스테파운손은 프랜시스 레오폴드 맥클린톡의 연구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발견을 했다. 1920년 1월 30일, 미국의 신문 ''더 피오체 레코드''(The Pioche Recordeng)는 스테파운손이 멜빌 섬(노스웨스트 준주누나부트 준주)에서 프랜시스 레오폴드 맥클린톡이 1853년 탐험 당시 남겨두고 간 비축품(저장품, Cache)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혹독한 북극 환경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의류와 식량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6. 3. 왕립 지리학회 메달 수상

1921년, 스테파운손은 북극 탐험의 공로를 인정받아 왕립 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로부터 창립자 메달(Founder's Medal)을 수여받았다.[8][34] 그는 또한 미국철학회와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9][10]

7. 이후 경력과 활동

1961년 스테판손


스테판손은 남은 생애 동안 유명한 탐험가로 활동했다. 뉴욕시에 거주하며 로마니 마리(Romany Marie)가 운영하던 그리니치 빌리지 카페의 단골 손님이었다.[12][36] 그는 소설가 패니 허스트(Fannie Hurst)와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관계를 맺었으며,[13][37] 뉴욕에 있을 때 이 카페에서 만나곤 했다. 1940년, 62세의 스테판손은 같은 카페에서 28세의 에블린 슈워츠 베어드(Evelyn Schwartz Baird)를 만났고,[12][13][36][37] 그녀는 그의 비서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14][38]

스테판손이 남긴 논문과 북극 탐험 중 수집한 고고학 유물은 다트머스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그는 "모험심은 무능의 표현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자주 인용된다.[41]

1986년 5월 28일, 미국 우정청은 스테판손을 기념하여 0.22USD짜리 우표를 발행했다.[42]

7. 1. 탐험가 클럽 회장 역임

1908년, 클럽 설립 4년 후 탐험가 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이후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리고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두 차례 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남성 회원만 받던 클럽에서 스테판손의 두 번째 임기 중인 1938년, 이사회는 여성 명예 회원 제도 도입을 제안하며 주목받았다. 이 제안은 "탐험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과 저술을 이룬 미국과 캐나다 여성을 이사회가 명예 회원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여성 명예의 전당을 설립한다"는 내용이었다.[11][35] 다만, "이 여성 명예의 전당은 클럽 조직과는 별개이지만, (남성) 명예 회원과 같은 위엄을 지닌다"는 단서가 붙었다.[11][35]

인류학 분야 여성 연구자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지원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가트루드 스티드(Gitel Steed)를 지도하며 나타났다. 스테판손은 스티드가 그의 저서 ''사냥꾼들의 삶'' (Lives of the Hunters)을 위해 식단과 생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도왔고, 스티드는 이를 바탕으로 수렵 채집 사회에 대한 논문을 시작했다.

7. 2. 한랭지역 연구 및 공학 연구소 설립 기여

스테판손은 말년에 다트머스 대학교와의 관계를 통해 미국 육군 한랭지역 연구 및 공학 연구소(CRREL) 설립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 연구소는 뉴햄프셔주 해노버에 자리 잡았으며, CRREL이 지원하는 연구는 주로 겨울철 워싱턴 산 정상의 혹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는 고산 지대 작전에 필요한 물자와 교리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7. 3. 미국 극지협회 및 과학사 학회 활동

1941년, 그는 미국 극지협회(American Polar Society)의 세 번째 명예 회원이 되었다.[15][39] 그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과학사 학회(History of Science Society) 회장을 역임했다.[16][40]

8. 육식 기반 식단 옹호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북극 탐험 중 이누이트(그의 시대에는 에스키모로 불림)와 생활하며 경험한 육식 중심의 식단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21][44][45] 그는 이누이트들이 고기생선 위주(그의 관찰로는 약 90%)의 저탄수화물 식단으로도 완벽한 건강을 유지한다고 주장했으며,[44][45] 유럽인 탐험가들이 괴혈병 등에 걸리는 것은 현지 식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24] 그는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지방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육류만으로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믿었다.[52][53][55]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회의론에 부딪혔으나,[46] 스테판손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동료 카르스텐 앤더슨과 함께 뉴욕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1년간 육식만 하는 임상 연구에 참여했다(1928).[26][50] 이 연구는 미국육류협회(American Meat Institute)의 자금 지원을 받기도 했다.[27][50] 연구 과정에서 지방 섭취 비율 조절의 중요성이 드러났으며,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건강을 유지했다고 보고되었다.[28][53][54] 이후 연구들에서는 이누이트 식단이 케토제닉 다이어트의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 밝혀지기도 했다.[47][48][49]

스테판손은 자신의 경험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 기고[23] 및 『Not by Bread Alone』(1946), 『The Fat of the Land』(1956)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육식 기반 식단의 이점을 알리고자 노력했다.[56]

8. 1. 북극 탐험 중 식단 경험

빌햐울뮈르 스테판손은 북극 탐험 중 고기만 먹는 식단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21] 이 탐험에서 그는 간, 바다표범 간, 그리고 날생선을 먹었다.[22][23] 스테판손은 날생선과 발효된 고래 기름을 즐겨 먹게 되었다고 언급했으며,[23] 날 바다표범 간에는 최대 35mg의 비타민 C가 들어있다고 알려져 있다.[24]

스테판손은 유럽계 사람들도 오랫동안 에스키모 식단으로 생활할 수 있으며, 탐험가들이 괴혈병에 걸린 것은 이누이트의 식습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4] 그러나 북극 생리학자 카레 로다(Kåre Rodahl)는 스테판손의 식단이 실제 이누이트 식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누이트들은 고기와 지방 외에도 내장, 육지 식물, 해조류 등 식물성 음식을 상당량 섭취하며, 특히 여름에는 해조류가 비타민 C 공급량의 50%를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5]

1926년 스테판손을 검진한 클라렌스 W. 리브(Clarence W. Lieb)는 그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 경향이 있으며, 문명으로 돌아온 후 변비 경향과 가끔 감기에 걸리지만 그 외에는 아프지 않다"고 기록했다.[21]

스테판손은 저탄수화물 식단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누이트 식단이 "전체의 90%가 고기와 생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식단을 탄수화물이 거의 없는 "제로 카브(Zero Carb)" 또는 "노 카브(No Carb)"로 간주했다 (섭취한 생선에 소량의 글리코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전체 탄수화물 섭취량은 매우 적었다).[44][45] 스테판손은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요청으로 동료 카르스텐 안데르손(Karsten Anderson)과 함께 다시 북극을 방문하여, '문명화된' 식량 공급을 거절하고 4년 동안 사냥한 동물의 고기와 생선만 먹고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 모두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고 보고했다.[44][45]

육류만 섭취하는 식단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스테판손의 보고는 많은 회의론에 부딪혔지만, 이후 연구를 통해 그 가능성이 입증되기도 했다.[46] 여러 연구는 이누이트 식단이 케토제닉 다이어트임을 밝혔으며, 그들은 주로 생선과 고기를 삶거나 날것으로 먹었다.[47][48][49]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테판손과 안데르손은 1년 동안 고기만 먹는 식단으로 생활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1928년 뉴욕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공식적인 연구에 참여했다.[26][50] 이 연구는 코넬 대학교의 유진 플로이드 듀보아(Eugene Floyd DuBois)가 지휘했으며,[50] 홍보 전문가로 알려진 펜들턴 더들리(Pendleton Dudley)가 미국육류협회(American Meat Institute)를 설득하여 연구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7][50]

연구 기간 동안 안데르손은 포도당 100g 내성 검사와 폐렴 발병이 겹치면서 일시적으로 당뇨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으나, 수분과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을 제거하자 증상이 사라졌다.[51] 스테판손은 연구진의 요청으로 지방이 적은 붉은 살코기만 섭취했을 때 메스꺼움과 설사, 변비를 경험했다.[28] 그는 이것이 과거 자신이 먹었던 카리부(순록) 고기에 비해 지방 함량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52] 지방 섭취 비율을 칼로리 기준 약 80%로 늘리자 이틀 만에 정상 상태로 회복되었다.[53] 이후 스테판손은 단백질 섭취를 칼로리 기준 25% 이하로 유지했다.[53]

실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건강을 유지했으며, 장 기능도 정상이었다. 대변은 양이 적고 냄새가 없었다. 스테판손의 치은염치석 축적은 실험이 끝날 무렵 사라졌다.[28] 그들의 1일 섭취량은 단백질 100g~140g, 지방 200g~300g, 탄수화물은 7g~12g이었으며, 총 섭취 칼로리는 2000~3100kcal였다.[28] 연구 결과는 1929년에 발표되었다.[26][54] 스테판손은 이누이트들이 붉은 살코기(단백질) 섭취를 제한하고 지방을 우선적으로 확보해 먹는다고 주장했다.[55]

스테판손은 자신의 식단 경험을 바탕으로 1935년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식단 모험(Adventures in Diet)"이라는 기사를 기고했으며, 이는 미국육류포장업협회(Institute of American Meat Packers)에 의해 소책자로 재발행되었다.[23] 또한 그는 1946년 『Not by Bread Alone』(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1956년 확장판 격인 『The Fat of the Land』(땅의 기름)를 출판했다.[56]

8. 2. 벨뷰 병원 연구 (1928)

빌햐울뮈르 스테판손(Vilhjalmur Stefansson)과 그의 동료 탐험가 카르스텐 앤더슨(Karsten Anderson)은 1년 동안 고기만 먹는 식단으로 생활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공식적인 연구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26] 이 연구는 1928년 뉴욕의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시작되어 1년간 진행되었으며, 코넬 대학교의 유진 플로이드 듀보아(Eugene Floyd DuBois)가 실험을 지휘했다.[50] 두 사람은 실험 초기 몇 주 동안 주의 깊게 관찰되는 실험실 환경에서 육류만 섭취하며, 식단 규칙 준수를 위해 관찰자의 감독을 받았다.[26][50] 홍보 전문가로 알려진 펜들턴 더들리(Pendleton Dudley)가 미국육류협회(American Meat Institute)를 설득하여 연구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27][50]

연구 기간 동안 앤더슨은 포도당 내성 검사(포도당 100g 투여)와 폐렴 발병이 겹치면서 일시적으로 당뇨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으나, 이는 4일간 지속되었고 수분과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음식을 중단하자 증상이 사라졌다.[51]

스테판손은 연구진으로부터 지방이 적은 붉은 살코기만 섭취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전에 지방이 거의 없는 카리부(순록) 고기를 먹었을 때 건강이 나빠졌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식단이 2~3주 안에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소화 불량"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28][52] 실제로 지방이 적은 고기를 먹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날, 스테판손은 메스꺼움과 설사를 겪었고, 이후 10일간 변비가 이어졌다.[28] 그는 초기 건강 악화가 과거 이누이트들과 함께 먹었던 카리부 고기에 비해 지방 함량이 현저히 낮은 고기를 섭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52]

이에 스테판손은 지방 섭취 비율을 높여, 전체 섭취 칼로리의 약 20%를 단백질로, 나머지 80%를 지방으로 구성하는 식단으로 변경했다. 고지방 식단을 시작한 지 2일 만에 그의 신체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장 상태도 약물 없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단백질 섭취 칼로리가 하루 총 섭취량의 25%를 넘지 않도록 조절했다.[53]

실험 결과, 스테판손과 앤더슨 두 사람 모두 건강을 유지했으며 장 기능도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들의 대변은 양이 적고 냄새가 거의 없었다. 스테판손에게 있던 치은염치석 축적 문제는 실험이 끝날 무렵 사라졌다.[28] 실험 기간 동안 스테판손의 1일 섭취 칼로리는 2000~3100kcal였으며, 영양소 섭취량은 단백질 100g~140g, 지방 200g~300g, 탄수화물 7g~12g 수준이었다.[28] 이 연구 결과는 1929년 논문으로 발표되었다.[26][54] 스테판손은 이누이트들이 붉은 살코기(단백질) 섭취를 제한하고 지방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섭취하며, 남는 붉은 살코기는 개에게 주었다고 언급했다.[55]

8. 3. 저술 활동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자신의 탐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다수의 저술 활동을 했다. 특히 이누이트의 식단과 육식의 영향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러 출판물을 통해 발표되었다.

1935년, 스테파운손은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북극에서의 고기 중심 식단을 설명하는 "식단 모험(Adventures in Diet)"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다. 이 기사는 이후 미국육류포장업협회(Institute of American Meat Packers)에 의해 소책자로 재발행되기도 했다.[23]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이누이트의 식생활 연구를 바탕으로 1946년 ''Not by Bread Alone''을 출판했으며, 1956년에는 이 책의 확장판 격인 ''The Fat of the Land''를 출판했다.[56]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 친필 서명


주요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저서명출판사
1912에스키모와 함께한 나의 삶매클밀란 컴퍼니, 뉴욕
1914스테판손-앤더슨 탐험대, 1909-12인류학 논문, 미국 자연사 박물관(AMNH), 뉴욕
1921친절한 북극매클밀란 컴퍼니, 뉴욕
1927오류의 표준화W. W. 노튼 & 컴퍼니, 뉴욕
1938북극의 미해결 미스터리매클밀란 컴퍼니, 뉴욕
1946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Not by Bread Alone)매클밀란 컴퍼니, 뉴욕
1947위대한 모험과 탐험 (편저)다이얼 프레스
1956땅의 기름 (The Fat of the Land)매클밀란 컴퍼니, 뉴욕
1960암: 문명의 질병? 인류학적 및 역사적 연구힐 앤 왕, 뉴욕
1964발견 – 빌히얄무르 스테판손 자서전맥그로-힐 북 컴퍼니, 뉴욕



이 외에도 스테파운손은 ''하퍼스 매거진'' 기고문인 [https://archive.org/stream/harpersmagazine179junalde/harpersmagazine179junalde_djvu.txt "석기 시대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과 같은 글을 남겼다.

9. 정치 활동과 논란

스테판손은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비로비잔 유대인 정착 계획을 지지하는 '미국 유대인 비로비잔 정착위원회'(Ambijan)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사 및 부회장을 역임했다.[20][43]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 반소련주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그의 과거 활동이 논란이 되었다.[20][43] 특히 1951년에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공산주의자로 지목받기도 했다.[20][43] 정작 스테판손 자신은 말년에 이러한 활동에 대해 거리를 두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사후 출판된 자서전이나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에는 관련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20][43]

9. 1. 친소련 운동 참여

1930년대 미국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극동 지역인 비로비잔에 유대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지지하는 친소련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요 단체 중 하나는 1934년에 설립된 '미국 유대인 비로비잔 정착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the Settlement of Jews in Birobidjan, Ambijan)였다. 스테판손은 비로비잔 정착을 꾸준히 지지하며 Ambijan의 여러 회의, 만찬, 집회에 참석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20][43]

1936년 말, Ambijan은 지지 서한과 증언을 담은 50페이지 분량의 연감(Year Book)을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Ambijan 이사회 이사였던 스테판손의 글도 실렸다. 그는 "비로비잔 계획은 동유럽 및 중유럽 유대인의 재활 문제에 대한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다"고 썼다.[20][43]

1944년 1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Ambijan 전국 회의에서는 스탈린그라드와 비로비잔의 난민 지원을 위해 100만달러를 모금하기로 결의했다. 이 회의에는 뉴욕주 하원의원 에마누엘 셀러, 유타주 상원의원 엘버트 D. 토머스, 소련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했으며, 대표단과 손님들을 위한 만찬은 스테판손과 그의 아내 에블린 스테판손이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스테판손은 Ambijan의 부회장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20][43]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내 반소련주의 정서가 강해지면서 언론에서는 스테판손의 과거 활동을 문제 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51년 8월, 과거 공산주의자였다가 가톨릭으로 전향한 루이스 F. 부덴츠는 미국 상원 내부 안보 소위원회(United States Senate Subcommittee on Internal Security) 청문회에서 스테판손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20][43]

스테판손 자신도 말년에는 Ambijan 활동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사후 출판된 자서전이나 1962년 8월 27일 자 뉴욕 타임스의 상세한 부고 기사에는 Ambijan 관련 활동이 언급되지 않았다.[20][43]

9. 2. 공산주의자 비난

1930년대 미국에서는 소비에트 연방 극동 지역의 비로비잔에 유대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지지하는 친소련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는 1934년에 설립된 '미국 유대인 비로비잔 정착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the Settlement of Jews in Birobidjan, Ambijan)였다. 스테판손은 비로비잔 정착을 꾸준히 지지하며 Ambijan의 여러 회의, 만찬, 집회에 참석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 Ambijan은 1936년 말, 지지 서한과 증언으로 구성된 50페이지 분량의 연감을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Ambijan 이사회 이사였던 스테판손의 글도 실렸다. 그는 "비로비잔 계획은 동유럽 및 중유럽 유대인의 재활 문제에 대한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다"고 썼다.

1944년 1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Ambijan 전국 회의에서는 스탈린그라드와 비로비잔의 난민 지원을 위해 100만달러를 모금하기로 결의했다. 이 회의에는 뉴욕주 대표 에마누엘 셀러, 유타주 상원의원 엘버트 D. 토마스, 소련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다. 대표단과 손님들을 위한 공개 만찬은 빌햐울뮈르와 그의 아내 에블린 스테판손이 주최했으며, 빌햐울뮈르는 이 단체의 부회장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내 반소련 정서가 강해지면서 언론에서는 스테판손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51년 8월, 과거 공산주의자였다가 가톨릭교로 전향한 루이스 F. 부덴츠는 미국 상원 내부 안보 소위원회(Senate Internal Security subcommittee) 증언에서 스테판손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정작 스테판손 자신도 이 시기에는 Ambijan 활동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사후 출판된 자서전에는 Ambijan 관련 활동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며, 1962년 8월 27일 자 뉴욕 타임스의 상세한 부고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20][43]

10. 유산과 평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10. 1. 북극 연구 기여

스테판손의 개인 서류와 북극 유물 컬렉션은 다트머스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스테판손은 종종 “모험은 무능의 징후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17]

로알 아문센은 랭겔 섬 사건의 부실 관리를 언급하며 그를 “살아 있는 가장 큰 사기꾼”이라고 말했다.[6][18]

1986년 5월 28일, 미국 우정청은 스테판손을 기념하는 22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19]

10. 2. 엇갈린 평가

스테파운손은 종종 “모험은 무능의 징후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17]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랭겔 섬 사건의 부실 관리를 언급하며 스테파운손을 “살아 있는 가장 큰 사기꾼”이라고 비판했다.[6][18] 한편, 1986년 5월 28일 미국 우정청은 그를 기념하여 22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19]

스테파운손의 개인 서류와 북극 유물 컬렉션은 다트머스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10. 3. 식단 연구 재조명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은 북극 탐험 중 고기만 먹는 식단을 경험했다고 주장했다.[21] 이 탐험에서 그는 곰 간, 바다표범 간, 날생선 등을 섭취했으며,[22][23] 특히 날생선과 발효된 고래 기름을 즐겨 먹게 되었다고 언급했다.[23] 날 바다표범 간에는 상당량의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다.[24] 스테파운손은 유럽인도 이누이트 식단(당시에는 '에스키모 식단'으로 불림)으로 장기간 생활할 수 있으며, 탐험가들이 괴혈병에 걸린 것은 이들의 식습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4]

그러나 북극 생리학자 카레 로다(Kåre Rodahl)는 스테파운손의 식단과 전통적인 이누이트 식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로다에 따르면 이누이트들은 고기와 지방 외에도 내장, 육지 식물, 해조류 등 다양한 식물성 음식을 섭취했으며, 특히 여름철에는 해조류가 비타민 C 공급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25]

1926년 스테파운손을 진찰한 클라렌스 W. 리브(Clarence W. Lieb)는 그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먹는 경향이 있으며, 문명으로 돌아온 후 변비 경향과 가끔 감기에 걸리는 것 외에는 건강하다"고 기록했다.[21]

스테파운손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 탐험가 카르스텐 앤더슨(Karsten Anderson)과 함께 1년간 고기만 섭취하는 공식적인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 연구는 벨뷰 병원(Bellevue Hospital)에서 실험실 환경 하에 진행되었으며,[26] 미국육류협회(American Meat Institute)가 연구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이는 홍보 전문가 펜들턴 더들리(Pendleton Dudley)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27][50] 연구 결과는 1929년에 발표되었다.[26][54]

연구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면밀한 관찰 하에 육류만 섭취했다.[50] 앤더슨은 일시적으로 당뇨병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으나, 이는 포도당 부하 검사와 폐렴 발병 시기와 겹쳤으며 수분과 탄수화물 섭취를 조절하자 증상이 사라졌다.[51] 스테파운손은 연구진의 요청으로 지방이 적은 살코기 위주로 섭취했을 때 메스꺼움, 설사, 변비 등 소화 문제를 겪었다.[28] 그는 이것이 북극에서 먹었던 지방 함량이 높은 카리부(순록) 고기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52] 이후 지방 섭취 비율을 높이자(총 칼로리의 약 80%) 2일 만에 건강을 회복하고 장 기능도 정상으로 돌아왔다.[53][28]

벨뷰 병원 육식 식단 연구 요약 (스테파운손 기준)[28][53]
항목내용
1년 (1928년 시작)
2000~3100 kcal
단백질 약 20%, 지방 약 80%
단백질 100~140g, 지방 200~300g, 탄수화물 7~12g
전반적으로 건강 유지, 장 기능 정상, 치은염 개선
저지방 육류 섭취 시 소화 문제 발생, 고지방 식단으로 해결



스테파운손은 실험 중 자신의 대변이 작고 냄새가 없었으며, 실험 전 있던 치은염과 치석 축적이 실험 종료 시점에는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28] 그는 이누이트들이 실제로 붉은 살코기(단백질) 섭취를 제한하고 지방 부위를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섭취한다고 주장했다.[55] 스테파운손은 이누이트 식단이 "전체의 90%가 고기와 생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탄수화물 섭취가 극히 적은 '제로 카브(Zero Carb)' 또는 '노 카브(No Carb)' 식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44]

이후 스테파운손은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바탕으로 여러 글과 책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식단 모험(Adventures in Diet)"이라는 글을 기고했고, 이는 미국육류포장업협회(Institute of American Meat Packers)에 의해 소책자로 재발행되었다.[23] 또한, 에스키모 식생활에 관한 저서 『Not by Bread Alone』(1946)과 그 확장판 격인 『The Fat of the Land』(1956)를 출판했다.[56]

육류만으로 생존이 가능하다는 스테파운손의 주장은 많은 회의론에 부딪혔지만,[46] 이후 연구들을 통해 이누이트 식단이 케토제닉 다이어트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 등이 밝혀지면서 그의 경험과 연구는 저탄수화물 식단 논의에서 계속 참조되고 있다.[47][48][49]

10. 4. 우표 발행

1986년 5월 28일, 미국 우정청은 그를 기념하여 22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19]

11. 저서


  • ''에스키모와 함께한 나의 삶''; 매클밀런 컴퍼니, 뉴욕, 1912.
  • ''스테판손-앤더슨 탐험대, 1909–12''; 인류학 논문, 미국 자연사 박물관, 14권, 뉴욕, 1914.
  • ''친절한 북극''; 매클밀런 컴퍼니, 뉴욕, 1921.
  • ''오류의 표준화''; W. W. 노턴 & 컴퍼니, 뉴욕, 1927.
  • ''북극의 미해결 미스터리''; 매클밀런 컴퍼니, 뉴욕, 1938.
  •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매클밀런 컴퍼니, 뉴욕, 1946.
  • ''위대한 모험과 탐험'' (편집); 다이얼 프레스, 1947.
  • ''땅의 지방''; 매클밀런 컴퍼니, 뉴욕, 1956.
  • ''북서쪽으로 행운을 향하여: 극동으로 가는 상업적으로 실용적인 루트를 찾는 서구인의 탐색''; 듀얼, 슬론 앤 피어스, 뉴욕, 1958. ([https://archive.org/details/northwesttofortu0000stef/ url])
  • ''암: 문명의 질병? 인류학적 및 역사적 연구''; 힐 앤 왕, 뉴욕, 1960.
  • ''발견 –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의 자서전''; 맥그로-힐 북 컴퍼니, 뉴욕, 1964.
  • [https://archive.org/stream/harpersmagazine179junalde/harpersmagazine179junalde_djvu.txt 석기시대에서 배우는 삶의 교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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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Further Discussion of the "Blond" Eskimo
[4] 서적 My Life with the Eskimo Kessinger Publishing
[5] 서적 H.W. McCurdy Maritime History of the Pacific Northwest Superior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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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논문 Alaskan Arctic Eskimo: responses to a customary high fat diet
[50] 서적 The Unseen Power: Public Relations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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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웹사이트 Adventures in Diet Part 2 (Harper's Monthly Magazine) http://www.biblelife[...] 1935-12
[53] 논문 Clinical Calorimetry: XLV. Prolonged Meat Diets With A Study Of Kidney Function And Ketosis http://www.jbc.org/c[...] 1930-02-13
[54] 논문 THE EFFECTS ON HUMAN BEINGS OF A TWELVE MONTHS' EXCLUSIVE MEAT DIET BASED ON INTENSIVE CLINICAL AND LABORATORY STUDIES ON TWO ARCTIC EXPLORERS LIVING UNDER AVERAGE CONDITIONS IN A NEW YORK CLIMATE https://jamanetwork.[...]
[55] 서적 The friendly arctic The MacMillan Co
[56] 웹사이트 Vilhjálmur Stefánsson and the Fat of the Land https://price-potten[...]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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